청년층의 고립된 정치지지, 아마도 그 한 원인

정치 2019. 10. 13. 12:49 Posted by 해양장미

 추천 브금

 

https://youtu.be/WaPOQacn2qw

 


 

 현재의 30대와 그 아래 연령대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30대 이상의 연령대는 맞고 자랐다는 겁니다. 부모가 체벌을 하지 않았더라도 학교 교사들의 무분별하고 비인도적인 폭행 속에 자라났고, 대다수의 남성들의 경우 역시나 폭력이 사라지지 않았던 군대에 다녀오기도 했지요.


 

 그래서 30대 이상은 대체로 폭력교사들에 대한 아주 깊은 부정적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랬던 잘못된 세상이 어떻게 고쳐졌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교사들에 의한 폭력을 처음으로 완화시킨 건 김대중 정권이었습니다. 민주진보개혁세력이 교사들에 의해 만연하던 학교폭력을 없앴습니다. 교사들에 의한 폭행이 사라진 현재의 학교가 과거의 학교보다 꼭 좋은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의 1020대는 과거의 교사들이 얼마나 정신이 나간 자들이었는지 잘 모를 것입니다. 30대 이상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인권이 없었습니다. 인권이 침해당한 기억은 30대 이상에게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딱히 부정적인 인식조차 없이, 그냥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학생이 대다수이긴 했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부당하게 일상적으로 얻어맞은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많은 교사들은 1990년대에만 해도 명백하게 감정적인 이유로 학생들을 때리고 학대했었습니다. 본질적으로 폭력을 즐기기 위해 학생을 마구 때리는 교사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런 교사들은 자차가 아니면 거리를 다니지 않더라고요.


 

 그랬던 현실에서 당시 보수우파는 이유 없이 두들겨 맞던 청소년들 편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한국놈들은 맞으면서 커야 정신 차린다는 무개념한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던 자들도 있었는데, 대체로 자칭타칭 보수우파였습니다. 그런 청소년들 편을 들어주던 게 민주개혁세력이었습니다.


 

 마침 21세기에 접어들던 시대는 엄청나게 빠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90년대에서 00년대는 사회변화가 빠르던 시기입니다. 2010년대는 대조적이라 할 만큼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변화가 더딘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그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던 청년들은, 교사들의 폭행과 학대를 옹호하고 각종 변화에 뒤쳐진 보수우파를 자격 없다고 판단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 때와는 또 다르지요. 지금은 민주당 간판을 단 자들이 파시스틱할 뿐만 아니라 청년, 특히 청년남성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청년들이 이 정권에 강한 반발을 하고 있는데요. 지금 1020 남성들이 문재인 정권에 대해 느끼는 악감정을 현재의 3040대는 한나라당 세력에 가졌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좀 든다고 그 나쁜 인식이 쉽게 변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정치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니고, 변한 현실과 상황을 실시간으로 명징하게 인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편하고 빠르게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20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20대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리지만, 배운 것에 어떤 현실이 어긋나는지는 금방 파악합니다. 즉 학생들에게 우리 사회가 올바른 기준을 가르쳤다면, 그 기준에 무엇이 어긋나는지를 판단하는 데는 청년들이 뛰어납니다.


 

 도덕이 붕괴한 사회입니다. 집권여당은 명백하게 부도덕하며, 위선으로 바름을 모독합니다. 그 추종자들은 물론 가장 적극적인 도덕 파괴자들입니다. 현실에 적응하고 익숙해진 어른들보다는 도덕적 지식을 학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들이 보다 더 현실적 부정에 민감하기 마련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존중받는 어른이 되고 싶은 자들은 청년들의 목소리를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귀를 열고 들어는 봐야 합니다. 듣는 귀가 없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면 문재인처럼 늙게 됩니다.

 추천 브금

 

https://youtu.be/oTLmXyjOobw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민주/개혁/진보 계열이 문화권력을 계속 쥐고 있었습니다. 김영삼의 3당 합당은 실리적이었으나 명분이 없었고, 너무 많은 (당시의) 청년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했으며, 집권한 김영삼 정권은 외환위기로 무너진 데다 이회창하고까지 대립하면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줬고, 집권한 김대중은 전향적인 문화정책을 펼쳤으니까요.


 

 노무현 시절이 지나 이명박과 한나라당은 집권할 수는 있었지만, 문화적인 열세를 만회하지는 못했습니다. 국정원 동원해서 인터넷 공작하고, 공중파 장악하고 그런 식으로는 했습니다만, 문화권력을 전혀 못 가져오고 역효과만 잔뜩 났지요.


 

 그 때부터 이야기는 많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나라당은 노년층이 주로 지지하는 정당이고,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청년층이 성장하면 한나라당의 미래는 없을 거라고요. 이후 박근혜가 집권을 이었음에도 이름 바꾼 새누리당은 아무 것도 제대로 안 했습니다. 뭘 똑바로 하기는커녕 문화계 블랙리스트 만들고 세월호 대응도 엉망으로 하고 진박공천하면서 미래를 없애 버렸지요.


 

 현재의 20대는 30대와 40대가 일반적으로 가지는 정치적 포지션을 이해하기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겪어온 세월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꽤 많은 30/40대가 느끼기에, 문재인 당선 이전의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은 청년이었던 그들이 느끼던 구시대적 권위주의와 억압의 상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외환위기의 주범이었고, 그럼에도 남탓과 책임회피만을 반복한 군사정권의 잔재였습니다.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들의 디테일이나 정확성의 문제를 지적할 수는 있겠지만, 한나라당이건 새누리당이건 청년들이 그렇게 느끼는 문제요소들을 제공하였고 미래를 버렸습니다. 이미 이명박 정권 말기부터 이명박 지지층 중 다수가 한나라당에 대한 청년층의 부정적 정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근혜의 당선으로 새누리당은 정권을 이어나갈 수는 있었지만, 이미지는 더 망가져버리고 말았고요.


 

 현재의 3040은 어릴 때 각인된 기억들이 있는 것입니다. 정치 고관심층이거나 그럴 만한 계기가 있지 않고서는 한 번 가진 정치적 성향이 잘 변하지 않습니다. 특히 맘카페의 정치적 편향성이 심각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들이 대체로 사실 정치에 대해 알아보거나 관심가질 시간이 애초에 별로 없고 정치 고관심층도 거의 없다는 데 있습니다. 평균적인 20대 남성과 평균적인 아이엄마를 놓고 대조해보면, 정치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건 에너지건 관심이건 엄청나게 차이 납니다. 애엄마들끼리 모여서 정치 이야기를 별로 하지도 않고, 하게 되더라도 반론이 오고가고 다투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체로 최소한의 관심만 두는 맘들이 맘카페를 통해 편향된 정치적 시각을 가지고 유지하게 되는 건 그리 어려운 원리에 의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씩 상황이 변하고 있습니다.


 

 관련하여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이겁니다. 민주당 PC좌파들이 장악한 세상, 빡빡하고 재미없잖아요. 문화적으로 발전하고 있나요? 자유가 늘어나고 있나요? 나오는 픽션, 예능은 예전보다 재미있나요? 세상에 자애가 가득하기라도 한가요? 이게 제대로 된 나라인가요?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나라라도 도래하였나요? 오직 주식시장만 파랗지요.


 

 지금 정치에 처음 관심을 가지고 중립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한테는요. 민주당은 도덕과 정의와 올바름을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능욕하는 권력자들입니다. 위선이야말로 선에 대한 가장 기만적이고도 모독적인 행위지요. 정유라는 문제 터지니까 사과라도 제대로 했었는데, 조민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조국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합니다. 멀끔한 얼굴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니까 속는 사람도 많지요. 이걸 지켜보는 청년들은 속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재인이 집권해서 좋아진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문화, 경제, 재정, 금융, 행정, 치안, 외교 등등 모든 분야에서 단언컨대 역대 최악의 정권입니다. 대깨문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광신집단이고요.


 

 커다란 정치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문재인이 집권하기까지, 정치에 대해 관심을 처음 가지는 청년들은 대체로 자연스럽게 민주당 지지층이 되었었습니다. 한나라-새누리당 지지층이 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의 10~20, 특히 남성들은 민주당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부류는 상대적으로 소수입니다.



 민주당은 그들이 붙잡고 있던 문화 전반 및 각종 사회적 구성요소들과 함께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 붕괴는 너무 광범위하고 끔찍하기 때문에 보는 입장에서는 영 정서적으로 좋지 않긴 합니다만, 이젠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문재인이, 친문이, 민주당이 나쁘다는 것은 차츰 상식이 되어갈 것입니다. 물론 정치에 대해 관심이 있고, 정상적인 지능과 감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갖춰야 할 상식을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

이희호 전 영부인의 타계

정치 2019. 6. 11. 20:22 Posted by 해양장미

 브금은 헌화용입니다.

 

https://youtu.be/umWYO8U7_k4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타계한지 10년이 지난 후 이희호 여사가 타계하였습니다.

 

 나는 김대중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합니다만 이희호에게 크게 좋은 감정이 없습니다. 김홍걸만 문제가 아니고 이희호도 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희호의 친족들이 문제가 많기도 했지요.



 페미니스트로의 이희호에게도 불만은 있습니다. 나는 김대중 정권 당시에는 여성부를 만들 만 했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그러므로 그것을 김대중과 이희호의 과오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김대중 사후 민주당계 페미니스트들이 그 난리를 치는 걸 이희호는 방조하였고, 페미니스트들은 이희호의 후광을 등에 업고 날뛴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령인 이희호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었겠지만, 현재 민주당계 페미들의 해악은 나라를 망하게 하기 충분할 지경이라 이희호도 싫은 소리를 안 들을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네요.


 

 한 여성으로 이희호는 인생의 승리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이희호는 김대중이 잘생겨서 결혼했다고 하지요. 김대중도 좀 젊을 때 집권했으면 문재인처럼 인기 있었을 텐데. 3김이 젊을 땐 다 잘생긴 편이었습니다. 여하튼 잘생긴 남편 두고 영부인도 했고 장수도 했지요. 인생의 굴곡은 좀 있었습니다만, 잘난 사람은 평온하게 살기 힘든 법입니다.


 

 김대중의 업적 중 일정 정도는 이희호의 공으로 꼽아야 합니다. 김대중의 민주화 운동은 그의 가족 전부를 건 일이었고, 이희호도 고생을 많이 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김대중은 건강에 비해 장수하였지요. 그것에도 이희호의 공이 있을 겁니다. 그녀에게는 적어도 권양숙과 같은 과오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희호는 영면하였으며 그녀의 남은 명예에 대한 많은 부분이 후계자들의 손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이미 현 시점에서 후계자들은 그녀에게 상당한 불명예를 안겨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계를 잘 두는 건 선대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불명예를 떠안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

스스로를 민주적이라 생각하는 꼰대의 시대

정치 2019. 2. 10. 14:02 Posted by 해양장미

 추천 브금

 

https://youtu.be/2ncK3sQV1OQ

 



 최근 들어 20대 남성들의 문재인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비토가 이어지면서, 문빠 남초 사이트들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투들은 웃프게도 세대 전쟁 양상을 띠고 있는데, 대체로 30대에서 50대 정도의 문재인/민주당 지지층이 20대에 훈계를 늘어놓거나, 아니면 20대 남성을 응원하는 글이 올라오면서 댓글이 수 백 개씩 달리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할 게 있다면 21세기에 통용되는 꼰대라는 어휘가 지칭하는 특성은 나이와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꼰대들은 어릴수록 꼰대질을 더 하는 경향이 있지요. 꼰대는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서 타인의 고통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오지랖까지 넓어서 이런저런 설교를 하는 경우입니다. 나이가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을 향해 꼰대질을 하기 쉽기 때문에 고연령층일수록 꼰대가 많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어릴 때 더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기 쉽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요새 20대를 향해 꼰대질을 일삼는 대깨문/민주당 광신도들은, 아마 그럴 기회가 있었다면 중학교 때도 후배들을 향해 꼰대질을 했을 겁니다. 성격의 많은 부분은 타고나고, 또 많은 부분은 어릴 때 결정됩니다.

 

 한편 대체로 30대부터 86세대까지는 꼰대일수록 강경한 민주당 지지층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한 사회 조건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90년대나 그 이후에 태어난 분들은 90년대부터 00년대 초중반까지 우리나라가 겪은 변화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체감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 시기에 소위 보수 세력이 보여준 꼰대성은 좀 많이 심각했었습니다.


 

 예를 들어 90년대까지는 국한문혼용체가 일반적이었고, 호주제가 있었고, 동성동본끼리는 결혼할 수가 없었고, 신문들은 세로쓰기를 했습니다. 아이돌의 머리 염색도 비난받기 일쑤였고, 배꼽티나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고, 좀 심한 경우에는 여성들이 바지를 입는 것도 못마땅하게 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잔재는 아직 여학생들의 교복에 반영되어 있지요. 여담입니다만 요새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노출 심한 여자들을 공격하고, 그걸 소위 진보정권이라는 이 정권이 서포트해주는 걸 보면 파시즘이 어떻게 극우화되는지를 보고 있다는 기분일 따름입니다.


 

 한문 빼고 한글만 가로쓰기로 사용하고, 동성동본이 결혼할 수 있게 되고, 호주제를 가족관계등록제로 바꾸는, 현재 생각해보면 상식 수준에서 일반화된 개혁조차 보수 세력들은 하나하나 전부 반대했었습니다. 게다가 IMF까지 일으켰지요. IMF이후 집권한 DJIMF를 극복했고, 개혁에 앞장섰고, 실제 많은 걸 개혁했었습니다. 일본 문화가 개방된 것도 DJ때 DJ가 이룬 일이지요. 노무현 시절까지는 자유주의자들이 노무현의 옆에 있었는데, 괜히 그랬던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수많은 문화지체를 뚫고 개혁을 하나하나 이룬 건 오래 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면서 상황이 변해버렸지요. 정말 많이.


 

 노무현이 죽고, 김대중이 그 뒤를 따르듯 죽고, 이명박이 인기를 잃고, 박근혜와 최순실의 시대를 지나면서 청년이었던 자들의 개혁과 정의에 대한 열망 중 너무 많은 부분이, 이젠 문재인 파벌에 대한 맹목적 추종과 변호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미 민주화가 완성되고 낡은 제도들이 타파된 건 노무현 때인데, 그 이후 획득한 데모크라시가 어떤 데모크라시여야 하냐는 데 있어 소위 운동권 민주당 세력은 방해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운동권의 집단주의적인 성향이 데모크라시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운동권은 노무현의 자살로 부활했고, 박근혜와 적대적으로 공존하면서 정치의 종교화를 가속하게 되지요.


 

 현 30대 후반부터 86세대는 군사정권의 군사주의적인 문화와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에 꼰대 성향을 가진 사람일수록, 본인은 잘 모르지만 사실은 권위주의적인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고 그런 성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강경한 민주당 지지층이 군사정권 이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이상하게 변질된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데도 연유는 있습니다.

 

 민주와 반민주가 충돌하고 개혁과 낡은 수구가 충돌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선악이 비교적 선명하게 나누어지던 시대도 있었지만, 이젠 흘러가버린 것입니다. 꼰대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적응 못하는 자신들의 나태함을 돌아보지 못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꼰대질을 일삼곤 합니다. 민주당 지지층은 사무직 비율이 높은데, 아무래도 안정적이고 여유가 있다 보니 강남좌파화 된 면도 있고요. 그들은 재산과 계층 우위에 더해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민주화가 진행된 민주 사회는 다원성을 가지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입장을 가진 이들끼리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유로운 민주 사회의 정의는 현재의 강성 민주당 지지층이 생각하는 정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전에 자유주의라는 대안이라는 포스트를 쓴 적이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그것을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편으로 현재의 10, 20대 남성들을 보면 앞으로의 사회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억울함과 분노를 느낄 만한 상황이고,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담론은 멀고 극우적인 유혹들은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현 추세대로 20대 남성들이 극우화된 세대가 된다면, 앞으로 끊임없이 질타 받게 될 것입니다. 추악한 세대로 여겨지겠지요.


 

 권력자와 권력자를 무조건 옹호하는 광신도들이 분노와 증오, 망상과 아집에 가득 차 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꼴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서로간의 갈등을 줄이고 실리적인 방향으로 사회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정치 지도자가 갑자기 등장할 수 있을지는 대단히 의문입니다. 이 정권의 폭주는 너무 많이 와버렸고, 사회적인 갈등과 증오와 혐오도 원만히 수습되기엔 좀 심해졌습니다. 한번 이렇게 꼬인 흐름은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칙이 원래 무언가 꼬인 걸 풀기는 어려운 반면, 무언가를 엉키고 꼬이게 하는 건 쉽기 마련입니다.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최소화하려면 빠른 정권교체가 필요합니다. 자유한국당이 어느 정도 온건한 보수세력으로 자리 잡고, 사회적 갈등과 증오를 조금씩이라도 줄여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의 민주당에는 사회적인 갈등을 줄여나갈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문재인부터 노무현을 잃은 분노로 정치를 시작한 인물이고, 한없이 교만한 인물들과 분노를 부추기는 쪽의 전문가들이 당의 너무 많은 부분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종필을 생각하며

정치 2018. 6. 23. 13:14 Posted by 해양장미

 추천 브금

 

https://youtu.be/Wxw2fnQn8YI

 



 3김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김종필이 타계하였습니다.

 

 그는 뛰어난 정치인이었고,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래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청년들은 그에 대해 성급하고 단편적이며 부정적인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지만, 그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인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의 공이라 생각하는 건 사실은 많은 부분 김종필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박정희가 그토록 권력욕을 부리지 않았다면, 김종필은 박정희보다 나은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김종필의 부정적인 면은 근래의 민주당도 거의 유사하게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차라리 김종필이 훨씬 신사답고 사려 깊고 도덕적이었지요. 김종필보다 민주당 운동권들이 덜 독재를 사랑한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3김 중 김종필만이 여자관계가 깔끔한 애처가였고 가족들 비리가 터지지 않았습니다. YS, DJ와도 꽤 가까웠고, DJ와 가깝지 않았다면 DJP 연합은 없었을 것입니다.

 

 김종필은 5.16의 주역이었습니다. 박정희보다 김종필이 5.16을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 그런 1인 장기 독재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박정희와 친인척 관계였고 가까웠으며 박정희 정부의 핵심 요인이었지만, 3선 개헌과 유신은 김종필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신 정권 아래에서 김종필은 강한 권한이 있는 책임총리를 맡았으나, 원하지 않는 자리였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75년에 박정희에게 큰 소리로 따지면서 징징까지 시전하면서 그만뒀습니다. 이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자 YS, DJ와 직선제 개헌에 합의했고, 제대로 된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임시 대통령직엔 출마를 안 해 최규하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 바람에 1212가 터지고 신군부한테 당했습니다.

 

 만일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유신을 강행하지 않았다면. 또는 김종필에게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면 최소한 신군부는 없었을 것입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던 시점까지 김종필이 총리였다면,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킬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몇 년 지속되지 않았지만 그 시기는 우리 시대에 끔찍한 문제를 안겼습니다. 현 민주당계-진보계 수뇌인 NL/PD 학생운동권이 탄생한 게 그 시기거든요. 신군부 쿠데타가 아니었다면 그런 끔찍한 게 나올 일도 없었습니다.

 

 이후 김종필은 DJP연합에 성공하여 내각제 개헌 후 집권에 가까워집니다만, 결국 김대중과 뜻이 어긋나고 2000년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야심과 멀어집니다. 그리고 그의 정치는 2004년에 끝나는데, 노무현 탄핵 정국에서 그는 자민련 비례 1번으로 나섰지만 - 여성이 아닌 남성인 그가 1번이었습니다. - 자민련이 전국비례 3%를 못 얻어서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끝나고 맙니다.

 

 그는 박정희 시대의 실무적인 업적의 주역이며, 한 개인으로는 깔끔하고 멋지며 지적인 예인이었습니다. 5.16을 그의 과오라 할 수는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5.16에 대한 주책임은 장면과 윤보선에 있다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렇게 무능하게 당하는 정권이 나라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김종필과 박정희가 권력욕은 있어도 사회와 국가에 대한 악의는 없었기에 다행입니다. 바꿔 생각하면, 당시 상황은 박정희보다 훨씬 나쁜 놈이 국가권력을 탈취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김종필은 다른 정치인들보다 도덕적이었고 유능했습니다. 김영삼도, 김대중도, 노무현도 가족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대통령과 대통령이 아니었던 자의 권력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김종필만이 그런 게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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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의 추천 브금

 

https://www.youtube.com/watch?v=z28lwyQjuTY

 

 한국의 87년 민주화 과정에서 학생운동권이 일정 이상의 역할을 했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학생운동권 입장에서 87년의 민주화는 충분한 민주화가 아니었습니다. 현재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파악해야합니다.

 

 80년대 학생운동권은 거의 예외 없이 반미, 민족주의, 민중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회주의적이었던 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친북 계열도 있었고, 보다 보편적인 공산주의에 호의적인 세력도 있었지만 적어도 서방 자유민주주의를 복원시키자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젠 옛 학생운동권도 완전히 기성세대가 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청년들은 이런 사실들을 잘 모릅니다만 이게 진실입니다. 80년대 학생운동권은 서방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산권의 민중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민주화가 공산화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에 학생운동권은 연령 상 행동대장 같은 역할이었지, 정권을 쥘 만한 입장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87년 대선은 뜻밖에도 노태우가 승리했고, 이후 노태우 임기동안 공산권이 붕괴하는 대사건이 벌어졌고, 김영삼이 3당합당까지 한 후 92년에 집권, 이후 김영삼 시기에 학생운동권은 흑역사를 쓰다 쇠퇴하고 IMF 이후엔 실질적으로 소멸하고 맙니다.

 

 민주화 이후 학생운동권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공산권 몰락 후 자유민주정을 받아들이고 소위 전향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김영삼을 따라 신한국당에 들어갔지요. 물론 고집스레 사회주의를 유지하는 세력도 물론 있었습니다. 이들은 훗날 민주노동당 계열이 됩니다. 이들은 차라리 명료하고 구분이 쉬운 면이 있지요.

 

 민주당은 사정이 좀 복잡합니다. 92년에 김대중은 대선에서 지고 정계은퇴를 합니다. 그러다 나중에 정계에 복귀하는데, 이 과정에서 김대중 탈당 이후 남아있던 민주당 세력과 갈등을 빚습니다. 이 때 갈등을 빚었던 게 경북 영일 출신 이기택 계열인데, 이 이기택 계열 중 일원이 노무현이었습니다. 이후 김대중이 동교동계를 끌고 나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97년 대선에서 극적으로 승리해 정권을 잡습니다. 그리고 97 대선과정에서 노무현은 이기택 계열에서 갈라져 국민회의에 입당, 그로부터 5년 후엔 대통령이 되지요. 그렇지만 이기택 계열 다수는 노무현과는 달리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을 창당하게 되는데 김대중 시기 유시민은 이기택 계열을 지지했기에 김대중과 적대하고 한나라당 편을 들었던 과거도 있습니다. 노무현이 집권 시 한나라당엔 꽤 친하게 굴어봤던 것도 다 이유가 있긴 합니다.

 

 이렇게 민주당계는 민주화 이후 이합집산을 거듭하였고, 김대중은 세력이 약한 상태에서 대통령이 됩니다. 이후 당연하리만큼 운동권, 소위 386 계열이 민주당계에 많이 들어옵니다. 김대중과 여당이 동교동계만 데리고 정치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민주당에 들어간 운동권들은 사상적으로 좀 애매한 경향이 많았습니다. 민주노동당 계열 동지들처럼 신념을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나라당 옛 동지들처럼 자유민주정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전향한 것도 아니었지요.

 

 이들은 사회주의적 마인드를 많이 남겨놨지만, 실제 공산주의 구현은 포기했다는 점에선. 그리고 그렇다보니 필연적으로 사상이 불분명하고 애매해다는 점에선 옛 유럽 사민주의자들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민주의자도 아니었지요. 이들에겐 본질적으로 일관된 사상체계가 사라진 상태였지만, 운동권의 관성은 남아있었고 신좌파들 영향도 꽤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혼종 사상... 아니, 사상이 없는 언행을 부르기 적합한 말은 두 가지 정도 있습니다. 하난 파시즘. 다른 하나는 좌파 포퓰리즘입니다. 악의적인 표현이라 느끼실 분들도 많겠지만, 실제 파시즘이나 포퓰리즘도 딱히 악의에서 기인하지는 않습니다. 악의 평범성이, 선의로 포장된 지옥으로 가는 길이 표면화된 형태 중 하나일 따름입니다. 실제 민주당계 정치인들에서 파시스트같거나 포퓰리스트 같은 모습은 정말 자주 발견됩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유민주주의를 공감하고 이해해본 적 없는 인물들입니다. 이들이 젊었을 때 품었던 이상은 민중민주주의, 민주집중제, 사회주의였고 그 위에 신좌파적이거나 각종 실험적인, 사회주의 냄새 섞인 각종 사회학적 가설들이 덧입혀진 상태에 가깝지요. 물론 이에 더해 경험적으로 얻은 정치적 지식, 노하우 같은 것들도 있고요.

 

 중요한 건 민중민주주의는 말이 민주주의일 뿐, 실제 정치학계에선 절대로 민주정으로 인정하지 않는 공산독재 체제라는 겁니다. 민주집중제도 독재의 방식이고요. 그런데 민주당 운동권 출신 및 그에 영향 받은 다수는 이런 방식들을 진짜로 민주적이라 생각하고, 포퓰리즘 독재자의 전형적인 방식들을 선택하는 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습니다.



 민주집중제는 실제 2004년에 신기남이, 2015년에 이목희가 당의 기본 운영 원칙으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본성은 종종 숨김없이 드러납니다.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의 여론조작원들과 광적인 추종자들은 문재인과 민주당을 보수라는 식으로 언론 플레이합니다만, 사상/정책/색깔/해외의 평가 어딜 봐도 보수 계열과는 거리가 멀고, 통상적 인식보다 실제 민주당과 현 정부는 훨씬 많이 왼쪽입니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자유주의, 시장경제, 다원주의, 정당 위주의 민주주의, 의회주의를 부정합니다. 보다 잘 설명하자면, 이들은 현재의 의회주의-다원주의-시장경제 체제를 모두 미완성인, 중간 단계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찍고 공산주의같은 마인드를 아직 가지고 있는 겁니다. 실제 이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1당 독재를 추구하며, 의회주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를, 시장경제보다는 통제되고 계획된 경제를 추구합니다. 이걸 요약하면? 대략 중국식 정치가 됩니다. 좀 더 소통하는 척, 착한 척을 하지만 본질과 내용은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이들에겐 체계화되고 구체화된 사상체계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돌아가는 방식이 철저히 지도자 위주, 이심전심, 개인적 친분 위주, 파벌 위주가 됩니다. 그리고 이 방식은 친박도 쓰던 것이지요. 괜히 친박하고 하는 짓이 비슷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민주당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지만 언제나 본인들이 민주주의의 유일한 대표자인 양 언론 플레이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민주정에 대해 사실은 거의 이해가 없기 때문에, 그런 언론 플레이를 오래 접하다보면 세뇌되기 쉽습니다. 실제 이명박근혜 세력이 워낙 민주적이질 않았더래서 설득력을 일부 제공한 면도 있고요. 그러나 현재 문재인정부는 그야말로 정치학적으로 대단히 반민주적, 포퓰리즘 독재 정부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본 블로그에서 여러 번 다뤘고, 앞으로도 쭉 다룰 것이므로 일단 생략. 일단 본문에선 그들의 사상적 기반을 조금 설명하였습니다.

 온라인상에는 평균 연령대 탓인지 상징조작 탓인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노무현은 김대중 정권 당시 결코 수면 밑 후보가 아니었습니다.

 

 노무현은 199711, 국민회의에 입당하고 바로 부총재직에 오릅니다. 사실 그 이전 노무현은 통합민주당에 남아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부산시장과 종로구 의원에 도전하였지만 낙선하였습니다. 그리고 1996년에는 국민통합추진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97년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까지 했었으나, 내부의 반발로 무산된 후 결국 국민회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시기에 노무현은 이미 명망 있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실제 199910월 차기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은 이인제, 이회창의 뒤를 이어 3위의 지지도를 가진 후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노무현은 대략 현 시점 기준 적어도 김무성, 김문수 정도 비중은 있는 후보였다는 것이지요. 그가 대통령이 된 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고, 굳이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권교체를 한 것도 아니고, 이미 대선 3년 전에 지지율 3위를 달리던 여당 내 네임드 후보이자 부총재직을 맡은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는 이름 없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이 될 만한 후보 중 한 명이었고, 결국 대통령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게 딱히 기적적이거나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본문을 작성하는 이유는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기적적이거나 이례적인 일로 포장하고, 그 상징조작을 통해 노무현을 신격화하는 언행들에 대응하기 위함입니다. 신화란 대체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노무현은 기적을 보여준 적이 없지요.

 

 

 사람들이 경제에 관한 논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참 안타까울 때가 많다.


 역시나 일반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뭐가 신자유주의고 뭐가 케인즈주의고 뭐가 사회주의인지 잘 모른다는 데 있는데, 케인즈주의는 거의 언급도 안 되니 일단 뒤로 접어둔다 쳐도 자칭 진보라는, 달님을 외치는 깨시민들이 걸핏하면 신자유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걸 보면 참 기가 막히곤 한다.


 예를 들어서 현 한국 경제 상황에서.


 대체로 케인즈주의자라면 기준금리가 9개월째 유지인데 경기가 살아나는 양상이 지지부진하고 원화가 너무 강세니 금리 좀 내리고 하우스푸어를 위한 지원 프로그램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할 건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밖에까지 잘 안 퍼지는 안습한 현실 앞에 있고,


 대체로 신자유주의자라면 새로운 일자리 등을 위해 의료 영리법인 세울 수 있게 규제 풀고, 경제민주화를 위해 기존 순환출자구조도 해소하고 주주의 권한을 늘려야 한다고 지금까지 해왔듯 착한 척을 앞세워 주장할 것이고,


 대체로 사회주의자라면 보편적 복지를 얼른 하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뭘 몰라서 경제민주화 움직임에 동참할 것이고,


 대체로 제도주의자라면 바이오, 항공, 에너지 등의 신산업 육성을 위해 국가적 지원과 정책이 더 강하게 있어야 할 것이라 주장할 것이고 + 추가로 실제 보면 사회주의자와 함께 복지론 주장 중


 대체로 깨시민이라면 다 됐고 부정선거! 박근혜 아웃! 안철수 양보해라! 등을 외칠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좌우파로 저 사람들을 구분하자면 좀 복잡해지는데...


 우선 사회주의자는 좌파로 확실하게 구분되긴 하는데 나머지는 아니다.


 케인즈주의자나 제도주의자는 어이없게도 수꼴 취급을 받기 일쑤고, 신자유주의자가 자칭타칭 진보로 불리는 것은 일상다반사고 소위 우파정당으로 분류되는 새누리당 내에서도 저런 온갖 소리들이 짬뽕 및 잡탕 되어서 내부갈등을 일으키는 게 현실.


 어쩌다 상황이 이리 되어가지고 사람들이 좌우파 구분도 하기 힘든 나라가 되었는지를 보자면 역시나 당연히 복잡한데, 시작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주 먼 과거로 올라가야 한다.


 일단 일제가 끝난 시점에서 한반도 남쪽, 그러니까 대한민국이 될 지역에서 공산주의자가 모두 제거되었다는 건 모두들 알 것이다.


 이승만 시절 한국의 정당은 이승만의 자유당과 아직까지 생존 중인 민주당이 있었다. 그런데 자유당이 민주당보다 좀 더 진보적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이 물러난 이후 자유당은 부서져 버렸고, 민주당이 실질적으로 유일한 정당이 되었었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민주당은 딱히 진보주의적인 색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다만 민주당의 역사를 보면 워낙에 많은 이합집산을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운동권 세력이 참여하곤 하여 군사정권 시절 어감으로 ‘좌파’ 소리를 들어왔던 것이다.


 박정희가 쿠테타 이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민주당의 보수주의적 색채는 선거에서 지는 요인이 되었다. 흔한 오해와는 달리 당시에 시민들은 박정희를 선택했고, 박정희가 서민의 편이었다.


 비록 박정희가 권위주의적이긴 했으나 서민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고 삶을 안정되게 했다. 또한 유신 이전의 박정희는 선거로 당선된, 민주 체제 아래에서의 대통령이었다. 쉽게 말해 당시 구도는 박정희와 민주공화당의 제도주의적 진보 대 윤보선이나 김영삼, 김대중 등 민주당 계열의 자유주의 우파 구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박정희의 통치방식은 엄청난 경제적 성공을 가져왔다. 심지어 결국 정치적으로 실패한 유신체제조차 경제적으로는 기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대조적으로 당시 김대중 등이 박정희의 방식에 반대하며 주장하던 소위 ‘대중경제론’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내용을 보면 박정희가 오래 집권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점이 많았다.


 박정희의 방식은 정부가 산업 육성을 돕고 금융을 제한하며 무역을 장려하는 방식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산업을 육성하고 강력한 보호무역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키는 방식을 흔히 제도주의라 한다. 이 방식으로 박정희는 집권 내내 엄청난 투자를 하고, 무역 국가로 발돋움시켜 한국을 20세기에 가장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로 만들었다.


 그런데 윤보선이나 박현채, 김대중이 주장하던 방식 - 대중경제론 - 은 이것과 반대의 방식으로, 수많은 국가들이 채택했다 실패한 방식이었다. 이 방식대로 하면 중앙은행은 강력하지 않아 금융통제가 안 되고, 산업이 제도주의처럼 발달하지도 못하며 무역 국가로 발돋움할 수도 없다.


 지금은 각종 방안들을 여러 국가들이 실험해본 끝에 뭐가 좋은지 증명이 되어있지만, 그 때는 그렇지 않았다. 박정희는 정말 가기 힘든 노선을 택했고, 엄청난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러고 나서 그 열매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죽었지만.


 박정희 사후 박정희의 투자가 이루어낸 결과물들과 공산권의 몰락 등을 보면서 기존에 박정희의 정책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 김대중마저 90년대 들어선 기존의 대중경제론을 버리고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김대중의 경제에 대한 이해는 다소 부족했던 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좀 더 경제를 잘 이해했다면 IMF로 인한 타격을 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IMF를 유발한 건 전적으로 김영삼 책임이다. 다만 김대중은 IMF와 좀 더 치열하게 싸워 피해를 줄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멍청한 김영삼한텐 아무 기대도 안 한다. 그런데 김대중은 그래도 똑똑하니까. 똑똑한 사람은 똑똑한 사람의 몫이 있는 건데, 그 몫을 다하지 못했다는 거다.


 비극적인 문제는 민주정권의 태도 및 이해에 있었다. 박정희식 제도주의는 엄청난 발전을 만드는 동시에 필연적인 부작용을 낳는다. 정부의 혜택을 받는 쪽이 집중적으로 성장하다보니 덜 공평하고, 게다가 박정희는 권위주의적인 독재 통치를 했기에 자유에 대한 사회의 갈망도 컸기 때문이다.


 사실 자유에 대한 문제는 문화적인 면에서 두드러졌고, 지금도 충분히 해소되지 않았다. 유교식ㆍ군대식 권위주의 및 압축 근대화 과정 속에서 해소되지 못한 고간섭 문화는 아직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위의 문제들은 충분히 해결되지 못한 반면, 경제 체제는 제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급속도로 흘렀다. 특히 민주화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김영삼부터 세계화니 선진화니 뭐니 하면서 대책 없는 신자유주의 판을 벌이다 나라를 말아먹었다.


 분배나 기타 등등의 이야기는 사실 김대중 때까지만 해도 잘 나오지 않았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지역주의를 앞세웠고, 이념에 있어 그리 큰 차이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김대중은 IT산업을 육성하는 등 제도주의적인 방안을 선택했지만 김영삼과 이후의 노무현은 아니었다.


 소위 좌우파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하던 시점은 노무현 때부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두들 알다시피 노무현이 ‘좌측 깜빡이를 키고 우회전’을 해버리면서 모든 게 심각하게 꼬여버렸다. 대략 이때부터 노빠들은 제도주의와 케인즈주의 등을 ‘보수, 수꼴’등으로 낙인찍고 노무현의 신자유주의정책을 무한 실드치는 반지성주의적 궤변을 일삼게 된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욕먹기 시작한 이후에 깨시민들은 ‘노무현의 신자유주의는 시대적 흐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무한반복하고 있고. 그런 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고 혹세무민이다.


 이야기가 꼬여버린 데는 이명박도 일조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말로는 신자유주의의 화신처럼 등장을 해서는, 막상 정치는 딱히 신자유주의적으로 안 했다. 이러니 사람들의 경제적 좌우에 대한 착각이 더 심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근래의 경제민주화 논의는 아주 이런 혼동에 화룡정점을 찍어버렸다. 신자유주의자들이 경제민주화 타이틀을 걸고, 우린 착한 진보 ^^ 놀이를 해서 적잖은 사람들을 아스트랄하게 만들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혹세무민해 버렸다. 도무지 이게 언제쯤 어떻게 교통정리가 될지는 미지수다. 전문정보와 대중정보 사이를 이어줘야 할 기자라거나 시민 사회 등은 소양이 지극히 부족하고, 정치적 의도를 가진 뻘소리들만 해대면서 혼란을 가중시켜버렸다. 여기에 보편적 복지론이니, 선별적 복지론이니 하는 복지론이 앞서는 상황이 되다 보니 혼란은 더 심해졌다. 현실적으로 민중들은 뭐가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될지를 감으로 대략 맞춰야 하는 입장이다.


 양당제에서 시민들이 명료하게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으려면, 신자유주의 & 작은 정부 정당과 케인즈주의 & 제도주의 정당이 대립하는 게 편하다. 그런데 한국에선 제도주의를 박정희가 선점해버렸고, 그것이 극단적인 보수주의적 이미지로 자리 잡혀 있기에 이러한 이념적 균열이 일어나는 게 지극히 어렵다. 현재 박근혜정부는 적당한 제도주의와 적당한 케인즈주의, 그리고 적당한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잡고 있다는 느낌인데 참 그것도 능력이라는 감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확 좀 땡겨 줬으면 좋겠다. (새누리)당내 신자유주의자들은 좀 치우고.


 여담인데 근래의 신자유주의는 ... 실제 경제학에선 그리 투철하고 극단적인 관념 속 신자유주의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게 이미지 그대로의 신자유주의는 이미지로나 존재할 뿐, 그게 학술적으로 맞는 말이 아니라는 건 이미 어느 정도 검증된 거고 이게 신자유주의만 이런 것도 아니고, 실제론 학자마다 서로 좀 다른 입장이긴 하지만 절충하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면서 이론을 만들고 현상을 살펴보고 그러는 게 현실인데, 굳이 보자면 학계에선 더 완성도 높은 수학적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다 보니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꽤 있었고 그걸 막상 현실에 적용했을 때 패망한 사례도 많고 ... 오히려 리얼 ‘신자유주의’는 경제학계 외부에서 더 많은 것 같다. ‘학술적으로 맞는 말’이 아니고 ‘지들 돈 벌려고 하는 말’ 또는 ‘지들 권력 잡으려고 하는 말’을 하게 되면 사람은 완전히 이야기를 다르게 하는 법이다. 물론 저런 말들 중에는 도무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이 하는 말들도 제법 많이 섞여 있으니 사람들이 더 혼동하기 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이념적 균열이 명료하지 못하고, 서민들이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을 하기 어렵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서민들은 삶의 개선을 위해 보다 케인즈주의적이거나 보다 제도주의적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당이나 근래의 안철수 신당 모두 케인즈주의나 제도주의적인 대안을 보여준다고 하기 어렵다. 실제 케인즈주의적인 것은 학계와 관료이며, 제도주의적인 방안을 구상하는 쪽도 새누리당 내에 있다. 새누리당은 꽤나 광범위한 이념을 포괄하고 있는 정당인데, 소위 깨시민이나 진보좌파들은 이에 대한 이해가 없기에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


 서민들, 특히 나이가 좀 있는 서민들은 어떤 정책과 제도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지 어렴풋이나마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들을 향해 무식하다고 비난하고 국개론을 설파하는 깨시민들이야말로 실제로는 경제에 대한 이해가 없고 무식한 경우가 많다. 실제 깨시민들 많은 곳에서 자료와 근거를 제시하며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는 경우, 돌아오는 건 비아냥과 매도 또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거짓말인 경우가 99%이상이다.


 다만 새누리당이 서민들의 입장을 잘 대변해줄 수 있는 정당이 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너무 많은 이념을 포괄하는 정당이 되어 있고, 당 내부에서 파워게임이 이루어지는 경우 누가 이길지는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한국 정치 현실에선 대통령의 정치 감각과 결단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대통령 주변의 이너서클이 제 역할을 못할 경우 정치 실패가 일어나기도 쉽지 않나 생각한다.



87년 체제 각 정부 평가

정치 2014. 1. 22. 17:48 Posted by 해양장미

87년 체제 각 정부 평가



 본문에서는 2014년 1월 현재, 87년 체제 이후 각각의 대통령과 그들의 정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견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87년 체제의 역사는 결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수많은 이해관계와 포장에 의해 왜곡이 발생해있다. 여기에 더해 각자 가진 사고방식 및 철학에 의한 평가의 차이도 크다.


 내가 생각하는 관점은 다음과 같다. 정치는 결과로 말해야 하며,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과 현실적 이익을 줘야 한다. 아집과 불통으로 국민들의 삶을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잘 한 정부부터 서술해볼까 한다.




1위) 노태우 정부


: 노태우 정부는 많은 이들이 군사정권의 연장선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노태우 정부가 87체제 최고의 정부였다고 본다. 또한 그는 실질적인 한국 민주정치사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의 피상적인 인식보다 노태우 정부는 훨씬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NLL논란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고, 한반도에서 핵을 없애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끌었으며 (당시 주한미군은 핵을 가지고 있었다.),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가운데 온갖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다. 공산권이었던 중국 및 러시아와의 수교도 이 때 이루어진 것이다. 대북정책은 북조선을 고립시키는 동시에 관계개선에도 성공하였다. 평시 작전 통제권의 환수도 추진하여 김영삼 때 완료되었다.


 민주주의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의 일차적인 책무는 외교와 국방에 있다. 원칙적으로 볼 때,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사회를 개선시켜나가는 것은 의회의 몫이 더 크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노태우는 좋은 대통령이었다. 엄청나게 정세가 급변하던 시대에 그는 최고의 선택을 했다. 또한 이 시기에 한국의 민주주의와 경제수준 또한 크게 발전하였다. 노태우의 시대에 한국은 최초로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발돋움한다. 장준하의 명예회복과 지방자치제의 부활도 그 때 이루어졌다. 여성 권익도 신장되었다.


 여러 시대적 불행 위에 있었지만, 노태우는 인품이 훌륭한 편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유순하고 어른스러워 화도 잘 내지 않고, 친구들의 싸움도 중재했다고 한다. 이런 성격은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유지되었던 것 같은데, 그의 그런 성품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87년의 민주화를 결단한 것 또한 그의 공이 크다.

 

 이른 80년대 초에도 그는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긴 했지만, 김종필 등 구 군부 세력 등에게 예의를 갖춤으로 추가적인 갈등을 무마하였다. 또한 안하무인인 전두환의 하대와 핍박에도 불구, 인내와 웃음으로 위기를 이기고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장관시절엔 상사 눈치를 보느라 퇴근을 못 하는 관례를 없애도록 한 개혁적 인물이기도 했다.


 비록 불법정치자금 수수 문제로 불명예스레 무기징역까지 선고받고 지금은 병상에 누워있지만, 사실 금융실명상태가 아니었던 그 시대에 불법정치자금은 당연시되었던 관례였고, 실제 후임인 김영삼에 의해 정치적으로 제거된 면 또한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불법정치자금에서는 김대중도 노무현도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또한 노태우는 전두환과는 달리 추징금을 꾸준히 납부해오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완납상태다.

 

 개인적으로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역사적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는 인물이라 본다. 보안사 사찰 사건 등은 분명한 과오이지만, 그로부터 한참 지난 시대에도 그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 시대를 감안하면 꼭 이해 못할 것도 없다. 한편으로 인천공항과 1기 신도시 또한 그의 계획이다.


 여담인데 두 명의 노씨 대통령 중 실제 많은 업적을 세운 노태우는 인기가 가장 낮고, 온갖 과오를 저지른 끝에 자살한 노무현은 최고의 인기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정치는 결과로 말하는 것이다. 노태우가 아니었다면 민주화에 얼마나 더 많은 피가 필요했을지 모르고, 어쩌면 신군부와 기존 군부의 투쟁으로 나라꼴이 엉망이 되었을 수도 있었으며,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히기 전에 붕괴할 수도 있었고, 기존 공산권 국가 및 북조선과의 관계도 훨씬 나쁘게 자리 잡을 수도 있었다. 이룬 업적과 행동으로 보면 노태우야 말로 민주화 이후 가장 현실 속에서 진보적이고 상식적인 대통령이었다.




2위) 김대중 정부


: 굉장히 좋지 못한 상황에서 출발하였지만, 나는 김대중 정부가 노태우 정부에 비하면 여러 번 오판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대중은 분명 대정치인이고 국민에 대한 애정을 가졌으며 여러 방향으로 최선은 아닐지언정 차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쉬운 말로 김대중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는 달리 진정성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와 전통적 제도주의에 양다리를 걸쳤다고 평하고 싶다. 내가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제도주의의 면, 즉 IT인프라를 깔고 벤쳐를 육성하며 나름대로 유동성을 강하게 공급한 면 등을 들고프다. 그는 IMF에 대해 충분히 패기 있는 선택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호박씨 정도는 깠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신자유주의적인 사상과는 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망조와 오판 속에서 그나마 국민들의 고통을 줄이는 데 일조하였다. 스스로 강경한 신자유주의의 길을 걸었던 김영삼이나 노무현과는 달랐다.


 김대중의 시대 때, 소기업들은 마지막 꿈을 꿔볼 수 있었다. 현재 큰 기업이 된 신생 기업들이 그 때 탄생하였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와는 분명히 대조되는 점이다. 나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세트로 묶는 게 그릇된 인식이라 본다. 둘은 공통점이 별로 없다.


 그의 한계는 그의 사고방식에 있다.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기에 적합한 인물일 것이다. 여성 권리도 크게 신장시켰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그는 다소 통찰력과 과감성이 떨어졌다. 그는 IMF의 요구를 묵살하고, 모라토리엄이나 디폴트 같은 카드라도 활용하여 좀 더 배짱 있게 재협상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IMF의 강경한 요구들을 수용하면서 신자유주의적인 흐름으로 나라를 이끌고 만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노력은 충분한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내가 보기엔 신자유주의에 대한 오판이 많이 섞인 탓이 크다. 또한 햇볕정책도 결과적으로는 실패였다.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이 충분한 인물도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잘 못 받아들인다는 지적을 받곤 했다.


 한편으로 그의 정권을 미화하는 부류들도 많지만, 그 또한 왜곡이 많다. 일례로 그의 정권 때 국정원 불법도청 사태가 터진다거나, 아들인 김홍업이 ‘최규선 게이트’라는 사건에 걸려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는다거나 하는 문제들이 있었다. 진영논리에 빠져있는 이들의 말을 귀담아들어서는 안 된다.





3위) 이명박 정부


: 개인적으로 이명박 정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손해를 안겨준 면도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나 김영삼 정부보다는 낫다. 나름대로의 현명한 선택으로 국난을 넘기기도 했고, 어려운 시대에 최선은 아닐지언정 차선을 다한 면도 있다. 비록 좀 어설픈 면이 있었지만, 잘 해보려고 한 것에 비해 과도하게 욕먹는 측면도 분명 있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의 딜레마 중 가장 큰 것부터 이야기해야겠다. 비록 이명박은 뉴라이트에게 지지를 받아 신자유주의를 말로 앞세우기는 했지만, 그는 사실 신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고 본다. 또한 극우파의 지지를 받았지만 이명박은 나름대로 꽤 평화주의적이고 겁이 많았던 것 같다. 다만 그의 그런 성정은 대북관계에 좋게 작용하지는 않았다.


 집권 내내 이명박은 자신의 사고방식과 주변 인물들의 사고방식 사이에서 갈등을 빚었던 것 같고, 인사문제에 시달렸다고 본다. 그는 평균적인 정치인보다 꽤 험한 인생을 살아왔고, 현장에서 단련된 감각이 있었다. 그런데 말을 잘 못하고 덕이 부족한 데가 있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과도한 충성경쟁과 미숙함도 더더욱 문제를 야기했다고 본다.


 사실 그나마 그의 현실 감각 덕에 리먼 위기는 최소화되었다. 그는 관치금융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까지 중소기업을 지원했고, 그 나름대로 진짜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위해 노력했다. 비록 다 잘 된 건 아니고, 일부 오판으로 영생토록 욕먹을 짓도 하긴 했지만 그나마 이명박이 좋은 결단을 내린 탓에 한국은 금융위기를 어느 정도 잘 넘길 수 있었다. 깨시민들은 노무현 정권이 돈을 많이 쌓아놔서 잘 넘겼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명박이 좋은 선택을 해서 잘 넘긴 거다.


 물론 이명박 정부는 4대강 같은 뻘짓에 더해, 친형인 이상득계를 전혀 컨트롤하지 못하게 되면서 (여기엔 이재오의 낙선이 큰 영향을 줬다. 괜히 중간에 이재오가 돌아온 후 잡음이 줄어든 게 아니다. 이상득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이재오였기 때문이다.) 측근비리가 심해졌고,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서 정국이 꼬인 상태로 5년을 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래도 한국은 이명박 집권 시기에 한 단계 더 성장했으며, 비교적 금융위기를 잘 넘겼다는 면에서 차선이나마 다한 정부라 평할 수 있겠다.


 


4위) 노무현 정부


: 깨시민들에 의해 태평성대였던 것처럼 포장되는 면이 있지만, 노무현 정부는 최악의 정부였다. 그나마 내가 김영삼 정부보다 나은 평을 하고 있는 건 IMF는 안 불러와서다. 그거 빼면 노무현 정부가 87체제 최악의 정부다.


 노무현 정부는 총체적인 좌충우돌을 저질렀다. 기존 민주당에 대한 공격을 강행하고,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의 정적들도 너무 처절하게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여당을 파괴하고 삼권분립을 침해하여 탄핵소추를 의도한다거나, 심지어 그렇게 새로 만든 여당도 임기 중 파당으로 치닫게 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그를 지지했던 세력을 배신하고 소위 ‘좌측 깜빡이를 키고 우회전하는’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고통과 절망을 주었다. 87체제 아래 아마도 유일하게 군부대까지 투입한 과격한 시위진압이 있었고, 폭력진압으로 사망자까지 나왔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시민 노빠들은 노무현 정부의 과오를 덮고, 그를 국민을 위했던 성군으로 역사왜곡을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과정부터 뒷돈 부정을 저질렀던 정부로, 이미지와 실제 사이의 간극이 극단적으로 큰 정부이기도 하다.


 그의 집권 시기 동안 서민들의 삶은 크게 붕괴하였고, 국제적인 활황과 부동산 폭등에 맞물려 GDP는 크게 올랐지만 경기가 가라앉고 잠재성장률이 크게 저하되었으며 기조적인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또한 그는 의도적으로 정적이 속해있던 현대그룹을 제거하고 노골적으로 삼성의 편을 들었으며, 온갖 민영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친재벌, 신자유주의 정책을 폈으며, 통찰력과 소통이 부족했고 오만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의 일화들을 보면 어릴 때부터 성품이 바르거나 개념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어릴 때 잘 사는 친구의 가방을 몰래 칼로 찢어발긴다거나, 20대엔 지나가는 아낙네에게 성희롱을 한다거나, 노출을 한다거나 하는 문제행동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의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성품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고쳐지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나 공격적으로 행동해서 온갖 적들을 만들 걸 보면. 적어도 정치인은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


 결국 그는 마지막까지 고건의 발목을 잡으면서 자신의 편을 거의 모두 잃고 만다. 결과적으로 그는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후 친노-깨시민-노빠 세력은 근본주의적 종교집단의 행태를 보이며 역사왜곡을 강행하고 있다. 영화 ‘변호인’이 너무 흥행하는 걸 보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5위) 김영삼 정부


 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이어지는 세 대통령에 대한 별명은 각기 ‘돌, 물, 깡’ 이라고 한다. 셋 다 그들의 언행과 품성을 잘 나타내는 단어다. 깡03은 집안의 재력과 패기와 깡으로 민주화를 이룩하고 그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는 머리가 나쁘기로 소문나 있기도 하다.


 3당 합당 이후 땡깡으로 민자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평생의 라이벌인 김대중을 꺾은 그는 이후 노태우에게 처절한 칼날을 휘두른다. 이런 뒤통수치기는 이후 한 때 그의 적자 격이었던 노무현이 그대로 반복하기도 하는데, 손을 잡을 때는 미리 상대의 성품을 봐야 하는 법이다.


 흔히들 김영삼의 업적 중 하나회 척결을 높이 평가하는데, 그 속사정은 나름 복잡하다고 알고 있다. 굳이 보자면 경북 기반의 하나회를 제거한 대신 경남 기반의 모 조직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는 식으로 들었다. 물론 그 조직의 문제 정도가 하나회 수준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한국 군대도 문제 많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김영삼이 기존 군부를 제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좋은 군대를 만든 것도 결코 아니다.


 그는 박정희가 한 건 다 문제가 있다는 듯 행동했다. 그래서 매우 강력한 신자유주의 노선을 걸었다. 개방, 개방, 개방... 그의 신자유주의 행보에 견줄 수 있는 정부는 노무현 정부뿐이다.


 그의 무리한 금융경제개방과 치적을 쌓으려는 태도는 결국 IMF 외환위기라는 엄청난 비극을 가져온다. 전후 45년간 한국인들이 피땀으로 일군 자본과 기득권의 정말 많은 부분이 그에 의해 무너졌다.


 IMF는 한국 경제에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에 왔던 비극이 아니다. 그저 정부가 관리를 잘못하고, 섣부른 금융개방을 추진하면서 위기에 안일할 때 어느 정도의 비극이 찾아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세계적인 사례일 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IMF를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던 한국 경제에 대한 필연적인 심판’ 정도로 포장하려 들고, 이런 경향은 역시나 신자유주의적인 친노 깨시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IMF가 오기 불과 1년 전만 해도 한국 경제는 성공신화 속에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시절의 호황기를 한국은 아직도 되찾지 못했다. 한국 브랜드나 기업은 엄청나게 성장했지만, 김영삼 이후 한국이 이룬 성과는 한국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덤) 박근혜정부


 항상 ‘박근혜정부’라고 붙여 쓰려니 힘들다.


 현재까지 박근혜정부에 대한 개인 평가는 김대중 정부와 유사한 수준이다. 이명박 정부보다는 확실히 낫다고 느끼고 있고, 그렇다고 노태우 정부 수준은 아니다.


 나는 박근혜정부가 다소 과감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에 안전주의적인 선택을 하는 것으로 보이곤 한다. 그러나 정치력이 모자라지는 않고, 납득 가능한 수준에서 행동하는 편이다. 이런 면에서도 김대중 정부와 유사하다. 선거 후 1년이 지나도록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역시 유사성이 있다.


 다만 나는 박근혜정부가 힘을 많이 쓸 수 있는 초반에 이룬 게 좀 적지 않나 우려하는 면이 있다. 정부는 대선 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힘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아직까지는 별 가시적인 문제가 없지만, 5년 단임제의 한국에서 성공적인 통치를 하려면 빠른 각종 조처들이 불가피하다.


 아직 박근혜정부는 만 4년 1개월 정도에 해당하는 임기가 남았다. 이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지, 성공한 정부로 평가받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올해에 많은 것들을 해내야 한다. 선거의 여왕이 통치의 여왕이 될 수 있을지는 거의 올해 결정될 것이다.





- 마무리하며


 사실 안타깝게도 민주화 이후 87년 체제에서, 각각의 정부들은 대체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냉정하게 이야기해 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 출신 인사들의 정치가 훨씬 성공적이었다. 물론 군바리 정치가 수많은 문제점과 단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막상 성적표를 놓고 보면 군인들이 더 잘한 면이 너무 많다. 박정희 이전의 이승만과 윤보선은 최악의 대통령들이었고.


 정말 좋아할 수는 없지만, 일베충들이 ‘민주화’를 부정어로 사용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하위 중 하위문화에서 말하는 것들은 대체로 현실을 반영하는 면이 있다. 그것이 바람직하다거나 옳다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다. 사회적인 기본 현상 중 하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익보다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유교 선비스타일 수꼴들이 너무 많은 것을 망쳐 놨다. 민주주의는 그런 게 아니다. 민주주의의 민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자기 맘대로 전용하면서 생겨난 문제가 정말 크다. 민주주의는 밥을 먹여주고 돈을 벌게 해줘야, 그리고 재미있게 해줘야만 하는 제도다.


 각 정부들의 실패엔 미국 유학파들이 앞뒤 분간을 못한 탓도 크다. 뭐가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미국에서 배운 대로 하다 보니 너무 많은 것을 망쳐 놨다. 그들은 미국에서 배운 걸 한국에서 또 그대로 가르치고 발언하면서 문제를 엄청나게 키워 놨다. 어디에나 공부만 잘 하는 돌대가리 멍청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민주주의는 좋은 제도이지만, 반드시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역사상 수많은 민주주의가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허울뿐인 민주주의가 유지되는 곳도 있다. 나는 모든 정치체계는 근본적으로 각자의 권익과 안전을 위한 것이라 여긴다. 그것이 잘 지켜지는 체계가 좋은 체계다. 각각의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를 냉정하고 바르게 평가할수록, 정치는 더 성공적으로 나아갈 확률이 높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영논리와 아집과 각종 관념의 울타리들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87체제의 각종 실패들은 시민들의 삶, 특히 젊은 사람들의 희망을 너무 많이 빼앗아갔다. 그 결과 한국은 눈부신 성장을 하는 동시에 큰 잠재성장률 하락을 겪고 낮은 출산율을 가진 국가가 되었으며, 너무 많은 사회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더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크게 위협받기 마련이다. 깨시민과 일베충이라는, 서로 적대적이지만 너무나 많은 부분이 닮은 파시스트들이 온라인 세계를 온통 잠식한 것도 정치의 실패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정치의 성공이란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인터넷에서 야권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절대 다수는 친노다. 좀 더 제대로 표현하자면 ‘친노주의’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 그들은 친노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친노가 그 어떤 다른 세력보다도 낫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친노가 잘못을 좀 저질렀기로서니 그들의 적인 새누리-친일파보다는 훨씬 낫지 않느냐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런 의문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참고 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친노가 그 동안 해 온 업적과 잘못을 좀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애초에 친노가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와 헌법은 1987년의 민주화로 탄생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체제를 87체제 및 제 6공화국이라 한다. 그러나 이 87체제는 시작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민주화의 두 영웅, 김대중과 김영삼이 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함에 의해 전두환의 친구였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당시에 민주화 항쟁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극심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고, 그 때 정신줄이 나가버린 사람은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노태우의 득표율은 36.6%에 불과했다. 그리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각기 28%, 27%을 나눠 먹었다. 단일화를 했다면 절대로 질 수 없는 선거였다.


 그러나 이 87년의 오점은 이후 흑역사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는 김영삼의 3당 합당으로 한 단계 진화하고야 만다. 김영삼은 민주화 세력의 반을 이끌고 박정희 잔여 세력 및 전두환 잔여 세력과 합치고 만다. 그리고는 92년에 평생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을 꺾고 대통령이 되면서 미래로 이어질 단단한 흑역사의 구도를 완성 짓는다.


 이 때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것은 단순한 좌절 탓은 아니었다. 87년의 패배엔 김영삼보다는 그의 책임이 더 컸다. 3당 합당을 저지른 것은 김영삼이었지만, 김대중도 그럴 만한 배경은 제공한 상태였다. 그리고 김대중의 적들은 김대중을 두려워했다. 그는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너무 큰 인물이었다. 이때의 비극은 5년 후에 반전 드라마가 되긴 하지만, 그가 정치에서 떠나있던 동안 민주화 세력은 참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또한 3당 합당이 일어나던 시기에 세계사도 큰 변화가 있었다. 도이칠란트가 통일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중국 또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의 길로 가면서 한중수교가 대선을 약 4개월 앞둔 시기에 이루어졌다.


 김문수와 이재오는 다들 높이 평가하던 민주화 투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공산주의의 붕괴를 보면서, 자신들이 믿던 가치가 붕괴하는 것을 보았다. 뉴라이트는 믿음의 붕괴로 탄생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180도 선회했다. 그들은 여전히 치열하지만, 과거의 동지들과 함께 하지는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손학규가 김영삼의 밑으로 들어간 것은 저 김영삼 정권 때의 일이었다. 그는 민주화 투사였으며 김근태의 친구였고, 김대중을 더 존경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 때 정계에 없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김영삼 쪽이었다. 친노들은 아직도 그가 한나라당 출신이었다고 낙인을 찍는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 했다.


 김대중이 없는 5년간 민주당을 일으켜보고자 고생한 사람들은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나름대로의 야심이 있었다. 그러나 5년 후 복귀한 김대중의 거대한 존재는 그들의 지난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김대중은 그들과 충분히 타협하질 못했다. 민주당의 잠재력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충분히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한 것은 김종필과의 연합 및 이인제의 이회창 표 나누기, 그리고 외환위기라는 특수한 상황과 이회창이 영남 출신 후보가 아니었던 배경 등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집권한 김대중은 자신에게 충성했던 측근들을 제대로 챙겨주거나 키워주지 못했다. 그는 위대한 정치인이었지만 현실적인 통치자로 충분히 단련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한 그는 이상주의적인 면이 있는 인물이었고, 그가 처한 현실은 현실주의적인 복수를 어렵게 했다. 그는 악을 철혈로 심판하려고 하기보다는 용인하였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계파와 정당의 발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소위 동교동계는 김대중의 5년이 흐르면서 구태의 상징이 되었다. 김대중조차 막지 못한 측근비리가 터지면서는 더더욱. 그는 한국의 눈부신 민주화와 새로운 번영의 길을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신질서를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이다.


 노무현은 이러한 조건에서 대선 후보로 등장했었다. 그의 개인적 정치사도 꽤 복잡한 편인데, 그는 처음에는 김영삼 쪽의 인물이었으나 3당 합당 때 그 유명한 ‘이의 있습니다!’를 외치면서 떠났다. (그 결과 김영삼은 노무현의 장례식에서조차 그를 제대로 추모하지 않았다.) 이후 노무현은 민주당계로 들어갔고, 부산과 종로 등지에 여러 번 출마했으나 두 번을 제외하고는 낙선을 거듭했었다. 2000년엔 종로 공천을 거절하고 부산에 출마했었는데, 여기서도 낙선했지만 결국 이 과정에서 노사모를 얻었었다. 그 후 그는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해수부가 없어진 것과, 이번 대선 과정에서 해수부 이야기가 많이 나온 것은 실질적으로 노무현의 발자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0년 전, 민주당 경선 시작 당시 가장 유력하던 후보는 이인제였다. 지금이야 이인제가 좀 개그 이미지로까지 전락했지만, 그 때만 해도 이인제는 작년의 문재인이나 안철수 이상의 인지도를 지닌 유력 대선 후보였다. 대조적으로 당시 경선에 나선 노무현은 사실 충분히 준비된 후보는 아니었고, 안티 이인제에 가까웠다.


 이인제의 최종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뜻밖의 변수는 여론조사에서 나왔다.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이 이회창과의 1:1 구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고, 이후 민주당 경선에서 엄청난 세몰이를 하며 최종 승리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당시 김해 출신이던 노무현은 영호남으로 갈라진 한국의 지역 구도를 타파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안고 호남의 지지를 받는 영남 후보로 올라서게 되었다. 여론조사가 정당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 이 때였다.


 그러나 경선을 승리한 노무현이 대선을 맞이하기엔 아직 긴 시간이 남아있었다. 당시 민주당의 경선은 4월 말에 끝났고, 대선까지는 무려 8개월이 남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 중간의 여름엔 지방 선거와 한일 월드컵이 끼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노무현은 쉽게 말해 갑자기 툭 튀어나온 후보에 가까웠다. 노무현은 호남 출신도 아니었고, 명성도 다소 부족했고, 기반도 충분하지 않았다.


 당시에 노무현을 견제했던 민주당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정치는 현실이고, 현실적인 조직에서 갑자기 위로 확 올라와 튀는 사람이 있으면 견제하는 게 사람 심리다. 특히 한국은 그런 문화가 강하다. 그리고 노무현은 기반이 충분하지도 않았고, 그런 현실에 적응하기보다는 그런 현실과 맞서는 사람이었다.


 노무현 같은 유형의 사람이 실질적으로 최고 지도자에 오르는 것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발달한 문명과 기술, 그리고 노무현이 가진 정치인으로의 매력은 그런 낮은 가능성을 실현시켰다. 노무현은 21세기식 통신 테크놀러지를 활용해 시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했고, 이후 벌어진 각종 갈등들을 정면으로 맞상대했다.


 당시 야권의 갈등은 심각했다. 반대쪽의 상수로는 이회창이 있었고, 야권은 시끄러웠다. 심지어 민주당 경선 당시엔 박근혜조차 이인제와 연대할 가능성이 있었다. 2002년 4월에 박근혜는 이회창에 반대하여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후 신당 창당 작업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때 DJ 정부 출신인 김종필도 연합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대선 레이스의 중대 변수였다. 이후 박근혜는 정몽준과 연대하여 제3의 세력을 만들려다 실패하고 10월에 한나라당으로 돌아가게 된다. 박근혜는 이로 인해 많은 것을 배웠고, 이후 2007~2008년에는 모든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근혜가 만약 또 한 번 한나라당에서 탈당했었다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인제는 경선 패배 후 결국 민주당을 탈당했다. 노무현이 이끄는 민주당은 6월의 지방선거에서 참패했고, 노무현은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재신임 투표를 이야기했지만, 민주당의 반노 세력은 노무현의 퇴진을 요구했다.


 친노와 반노라는 갈등의 싹은 이미 이 때 틔어졌다. 노무현이 민주당에서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당 기반의 대의민주제라는 체제를 파괴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민주당이 가진 여러 문제점을 봉합하는 대신, 기존의 정당 체제에 구체제라는 도장을 찍었다. 그 대신 온라인을 이용한 준-직접 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는 노무현 집권 내내 일어난 현상이었다. 아직도 온라인에 가득한 친노주의자-깨시민들의 의식은 저 노무현식 프레임의 연장선상이나 다름없다. 노무현은 저게 옳은 길이라 믿었던 것 같지만, 저것은 현실적으로 무모한 시도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본인에게는 이익이 되는 사고방식이기도 하였다.


 애초에 당시의 민주당에는 갈등의 씨앗이 심어져 있었다. 정당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 김대중을 보좌했던 사람들이 민주당에서 충분한 대접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사람들은 계파와 정당, 인물 중심이라는 현실 정치의 여러 요소들을 무시하기에 바빴다. 그들은 군사정권을 부수는 데는 전문가였지만, 어떤 것이 현실적으로 훌륭한 정치 구조인지를 성찰하는 데는 모자람이 있었던 것 같다.


 헌신과 노력이 정당한 보답을 주지 않을 때 사람은 좌절하고 분노한다. 이는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오직 사회와 정의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폭력적인 발상인 동시에 비현실적이고도 도덕주의적인 관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김대중은 험한 시대를 헤쳐 나갔고, 워낙 많은 짐을 지고 있었기에 모든 행동에 있어 충분히 가벼울 수가 없었다. 그 무거움은 주변 사람들을 버겁게 했고, 분열의 씨앗을 낳았다.


 노무현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러기 힘든 위치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는 본인이 믿는 바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그의 관념 속에 소위 ‘구태정치인’들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는 국민을 소환하여 구태정치인과 싸우는 소환술사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전쟁은 시작되었고, 그는 정몽준을 꺾고 이회창을 꺾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기본적으로 엄청난 갈등의 싹을 안고 있었다.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잘나고 윤리적인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려면, 우선 보편적인 인간의 모자람과 어리석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최소한의 관용이 생긴다. 그러나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이걸 잘 하지 못하기에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곧잘 관념의 척도로 사람을 상상하고 재단한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보기엔 노무현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보통 사람의 욕망과 질투, 추악함, 어리석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면해버렸다. 그는 사람을 믿어주면 보답한다는 식의, 손을 내밀면 잡아줄 거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불행하게도 대통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