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의 중요함

정치 2021. 4. 20. 23:57 Posted by 해양장미

 브금

 

https://youtu.be/XVsY69rFPbw

 

 

 

 

 위대(僞大)했던 문재인 주석님 정권이 대실패했음을 이제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가 인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정권의 실패는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는데, 정권 출범 전에 그 예견을 이야기하는 자들을 분별없이 비난하던 어리석은 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게나 어리석다가 이 정권이 하는 걸 보고서야 진실을 깨달은 우자(愚者)들은 깊은 반성이 필요합니다. 주석님을 찍지 않았더라도 주석님 지지율 80% 시절에 지지하던 자들 또한 현명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문주석님 정권의 실패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인적 구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정치 관심층이라면 이제는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정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인적 구성에 대해 정권 출범 전부터 알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문주석님 정권의 자금줄은 매우 의심스러운 데가 있었습니다. 본래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재벌대기업에서 정치자금을 공급받아 정치를 해왔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몽준, 안철수처럼 본래 돈이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정치자금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만, 클린하다던 노무현 대선캠프부터 재계발 불법정치자금 없이는 캠프를 못 꾸렸었습니다. 노무현 시절에 안희정이 왜 감옥에 갔었는데요.

 

 또한 문주석님 정권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에 대한 반성을 전혀 하지 않은 정치집단이었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혁통 세력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김병준같은 정권 내 우파의 문제로 치부합니다. 실제로는 그나마 노무현 정권이 성공한 부분 - 한미 FTA, 제주해군기지 등 - 은 정권 내 우파 인물들과 노무현 본인의 결단력 덕분입니다만, 본래 적반하장이 좌파들의 특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문주석님 정권은 지나치게 순혈주의적인 집단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당내 타 계파는 모두 안철수와 함께 떠나다시피 했고, 남은 타 계파는 문주석님 계파에 투항했고. 그런 집단이 성공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일본에서 자민당이 장기집권하는데도 일본 정치가 완전히 망가지지 않는 건 자민당 내부 계파갈등이 치열하기 때문입니다. 계파가 매우 약화되거나 사라지는 현상은 1인 독재자가 나타날 때 관측됩니다. (예를 들면 김일성의 백두혈통 독재체제 구축, 중화인민공화국의 시진핑 독재)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1인 독재국가가 될 위험 앞에 놓여있었지요.

 

 다만 김일성 주석이나 시진핑 주석과는 달리, 문재인 주석님은 유감스럽게도 상왕 리해찬에게 당내 권력다툼에서 연거푸 패배하고 맙니다. 2018년 경기도지사 경선에서의 전해철 VS 리재명, 그리고 2018년 전당대회에서 리재명과 리해찬 듀오가 승리함으로 문주석님은 반쯤 섭정당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후 문주석님은 한 배를 타게 된 리락연 동지를 후계자로 키우고, 열린민주당을 통해 판을 흔들어보기도 합니다만 안풀립니다. 민주당계가 180석을 휩쓰는 와중에도 열린민주당은 망했고, 흑석 김의겸 선생조차 의원이 되는데 실패하거든요. 이번에 앞번호 비례대표가 사퇴해줘서 흑석 김의겸 선생도 결국 배지를 달게는 되었습니다만.

 

 이후 문주석님의 마지막 승부수가 이명박근혜 사면카드였던것 같은데, 그것마저 실패하고는 멘탈이 붕괴하신 상태이신 것 같습니다. 유감스럽습니다. 위대(僞大)한 수령동지(囚囹哃謘), 불굴의 돌격정신으로 살아남아 만수무강 하소서!

 

 내로남불당과 좌파세력이 저렇게까지 답이 없는 근본적 이유는 글로벌금융위기와 노무현의 사망으로 인해 반성 없이 부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융위기 이전 사회주의는 시대의 흐름에 밀려 도태 중인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었습니다. 냉전에서 서방세계가 승리했고, 경제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글로벌금융위기가 터지고, 주류경제학이 그것을 예방하는데 실패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회주의가 재조명받게 됩니다. 물론 사회주의를 올바른 해법이라 할 수는 없으나, 좌파세력에게는 큰 기회였지요.

 

 미국에서 오바마 정권과 버냉키는 주류경제학을 확장하는 정도로 문제를 개선해 나갔습니다. 심한 부작용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사건의 심각성과 당시의 경제학 발전수준에 비하면 미국은 그럭저럭 문제를 해결해나간 편입니다. 물론 현 시점에서 보면 버냉키의 방식에 문제가 없었다 할 수는 없으나, 경제학이라는 건 의학처럼 시행착오를 쌓아나가면서 발전합니다.

 

 대조적으로 프랑스는 찐좌파 올랑드를 뽑았다가 아예 사회당 좌파 전체가 망해버렸고, 프랑스는 유럽의 환자 소리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제적으로 자유주의 성향인 마크롱이 프랑스 대통령이 되어 프랑스를 되살리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글로벌금융위기 시점에 워낙 좌파세력이 망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로 되살아나기 어려웠습니다. 만약 노무현이 죽지 않았다면 부활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망해있었지요. 그런데 여러 모로 수상한 정황을 남긴 채 노무현이 죽고, 김어준의 ‘나는 꼼수다’가 대유행하면서, 그리고 정치에 대해 잘 몰랐던 안철수가 내로남불당 편을 들어주면서 반성 없이 부활하게 되지요. 2010년에 치른 지선은 한나라당을 빈사상태로 만들만큼 민주당이 약진했습니다. 그 때 노회찬의 표분산과 한명숙의 전능함으로 겨우 이긴 오세훈마저 다음 해 역사적인 캐삭빵으로 무저갱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알려주겠다’ 박원순 선생께서 종신시장님이 되십니다. 2012년에 새누리당이 두 번 승리한 건 박근혜가 선거의 여왕이라 그랬고요. 박근혜 아니었으면 2012년에 이미 완전히 탈곡 당했을 겁니다.

 

 내로남불당이 노무현 정권의 시행착오로 얻은 건, 좌파가 단단히 결집하고 내부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가운데 지지자들은 맹목적이고 일관적인 지지를 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노무현은 좌파였지만 사상적으로 완성된 좌파가 아니었고, 현실도 봤고 국가를 위한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현실적인 선택을 여러 번 하면서 좌파들과 척을 지게 되지요.

 

 문재인 주석님은 노무현 정권 당시 좌파 포지션이었고, 노무현과는 달리 사상적으로 선명한 왼쪽이었습니다. 운동권 출신들이 그 때부터 이미 주석님을 좋아했지요. 그래서 위대(僞大)했던 문재인 주석님은 국가를 위해 우클릭했던 노무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반성하지 않은 것이지요. 반성이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상기한 문제는 내로남불당과 좌파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이번 문재인 주석님 정권이 못해도 너무 못하니까, 역시 우리가 옳았고 우리가 잘했던 거라고 생각하는 우파들이 꽤 보인단 말이지요. 특히 태극기-대깨트는 아예 답이 없습니다.

 

 우파의 교만과 아집과 오판이 폭발한 건 황교안 체제에서였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황교안은 나쁘지 않은 교회 사람의 전형입니다. 나쁜 사람 아니고, 머리도 나쁘지 않은데 개념이 없고 눈치가 모자라지요. 그러니까 황교안의 잘못은 대체로 교회사람 특유의 개념없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교회 사람들은 타종교인과는 다른 커먼센스를 가지고 있고, 교회 이너서클에서 그릇된 정보를 취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수교회세력은 오판을 많이 하고요.

 

 태극기-대깨트-교회우파는 대선 및 지선패배의 원인을 박근혜와 유승민-김무성의 갈등으로 촉발된 분열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황교안을 친박세력의 후계자로 낙점하고, (사실 박근혜는 최순실 게이트 이후 황교안을 팽하려다가 실패한 거고, 황교안의 퇴직보다 박근혜의 직무정지가 빨라서 황교안이 권한대행을 한 것이었습니다.) 보수를 다시 통합시키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황교안은 대표가 된 후 태극기, 전광훈과 시위를 다니면서 자유한국당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지요. 그 후 황교안 체제는 어마무시한 공천 이후 K-180석을 내로남불당에 헌납하고 1차로 찌그러지고, 2차로 대깨트 대두 및 바이든 당선을 겪으며 2차로 찌그러집니다.

 

 그런데 이번에 김종인 체제에서 오세훈과 박형준이 당선되면서 야권은 2015년 보궐 이후 6년만의 승리를 거둡니다. 기쁜 승리입니다만, 이 승리를 계기로 태극기-대깨트가 반성하고 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우파 정치인과 지지층은 충분히 반성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근래 이명박이 재평가받고 있는 분위기에 어느 정도 공감은 합니다만, 이명박 정권도 많은 반성을 해야 하는 정권입니다. 예를 들어 광우병시위와 4대강의 경우, 당시 광우병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기도 했고, 노무현 정권 당시 이미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시작되면서 그에 대한 불안감이 많이 조성된 상황이었습니다. 조중동과 보수세력은 노무현 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를 비판했고, 노무현은 30개월 미만 쇠고기만 수입하는 동시에 미국산 쇠고기에서 뼈조각 하나만 나와도 반품을 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었지요.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명박 정권이 당시 OIE 기준보다도 완화된 조건으로, 30개월 이상과 뼈를 포함시킨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한다 하니까 큰 반발이 있었던 거고, 그 반발에 대해 이명박 정권은 안전하다고 하면서 미국산 쇠고기를 홍보하는 것처럼 대응했기 때문에 더 크게 폭발했던 것입니다.

 

 광우병시위를 좌파 운동권이 악용한 것은 물론이나, 이미 밑밥이 깔려있던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은 첫 단추도 잘못 꽸고, 수습도 잘못했습니다. 미국산 쇠고기는 분명 노무현 정권 당시 위험하다고 간주되어 몇 년 동안 수입이 금지되었었는데, 그게 전면 개방되는 과정이 석연찮았던 데다 이명박 정권은 OIE 기준에 맞추지도 않았었고, 충분히 안전하다는 근거를 내밀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좋은 정치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때 시위를 해서 재협상을 한 끝에 쇠고기 수입기준을 30개월 미만 및 OIE 기준에 맞춘 것으로 수정했었는데, 미리 그런 조건으로 수입을 해왔어야 했습니다.

 

 또한 광우병시위의 최대 성과는 따로 있었는데, 한반도대운하를 막았던 겁니다. 4대강은 나도 잘한 공사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디까지나 그건 대운하 프로젝트가 4대강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잘 된 것입니다. 대운하 공사를 했으면 이명박은 애초에 재평가될 일도 없었을 겁니다. 희대의 망상꾼으로 역사에 남았을걸요. 대운하하고는 상대도 안 되는 작은 공사였던, 그러나 그 자체로는 큰 공사였던 경인아라뱃길도 물류기능은 없는 운하입니다.

 

 현재 우파들은 대운하 프로젝트를 잊은 것처럼 이야기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은 진짜로 운하를 파려 들었던 인물입니다. 문경새재에 터널 수로를 뚫고 선박을 거대한 갑문식 엘리베이터로 옮기는,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운하를 진짜로 파겠다고 했던 게 2008년입니다. 한반도 대운하를 밀어붙이는 걸 본 정상인들은 모두 이명박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나는 역대 최악의 토건 프로젝트로 새만금을 꼽는데, 대운하를 했으면 새만금을 훌쩍 넘는 전설이 되었을 겁니다. 아직도 문경 뚫고 있었을걸요. 뚫다가 포기했거나.

 

 물론 4대강은 결과적으로는 잘됐습니다. 그런데 그건 대운하 하려다가 축소공사 했는데 다분히 얻어걸린 겁니다. 처음부터 4대강 정비를 계획한 게 아니고요. 경인아라뱃길 효과도 4대강하고 비슷하고요. 주 효과는 치수와 레저가 되었지요. 요새 보면 대운하를 했어야 했다는 주장을 퍼뜨리는 사람도 보이는데, 교회 사람들이 작업하는 것이거나 대운하 프로젝트 계획을 제대로 보지 않은 청년층이라 추측합니다.

 

 물론 4대강에 대한 폄하에 친이명박 세력이 민감한 것도 이해는 합니다. 박근혜 때 있었던 4대강 감사부터 제대로 된 게 아니었거든요. 그러나 4대강이 잘되었다 하여 대운하를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명박이 칭찬받을 게 있다면 대운하를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은 겁니다.

 

 반성은 중요합니다. 정당도, 정치인도, 유권자도 반성을 해야만 점점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반성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반성하지 않는 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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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inddiver 2021.04.21 00: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치인들 중에서 반성하는 사람을 참 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물론 일반인들 중에서도 그렇습니다만.

    글을 읽고 생각해 보니 언급된 인물들 중에서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장 반성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네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 역사 최대의 비극같습니다.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 저는 그를 싫어했고 사사건건 덮어놓고 비판하곤 했었는데, 객관적이지 못한 편협한 태도였고 잘못했던것 같습니다. 저 스스로도 반성해 봅니다.

  2. 윈브라이트 2021.04.21 02: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대운하 문경리프트는 다시 봐도 어질어질하네요.

    - 차기 대선은 여야 둘중에서 현실 인식을 똑바로 하고 문제를 직시하고, 제대로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는 쪽이 이길 거라고 확신합니다. 민주당이 든든한 점은, 재보궐선거 패배 이후로 뭔가 꼬였다는걸 다들 직감은 하고 있는데, 강경파나 강성 권리당원들의 해법이 더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방향이라는 점입니다.

    - 문재인 정권의 정치자금 문제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게 많지 않은데, 남은 임기 동안이나 정권 바뀌고 나서 제대로 털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모펀드 얘기도 있고, 중국자본 이야기도 들려오고, 모 병원 대출 의혹도 있는데 어디까지 밝혀질지 모르겠네요.

    - 그나저나 모 항공사의 창업주 겸 현직 여권 의원의 비리도 주석의 따님 남방공주 부부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도 들려옵니다.

  3. 성세자생정 2021.04.21 03: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운하를 정말 했다면 말씀대로 공사 장기화는 피할수 없었을것같은데, 어쩌면 이명박 정권은 애초부터 끝나지 않는 토건경기를 의도하고 그걸 경기부양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의도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보니 이명박이 내세운 주요 롤모델 중 하나였던 FDR도 콜로라도강이나 테네시강 유역에서 뉴딜의 일환으로 대규모 수리시설공사를 했었지요.

    물론 신나게 부양책 쓸때와 나중에 재정적 경제적으로 뒷감당할때는 상황이 전혀 다를것같긴 합니다만...

  4. 프마수스 2021.04.21 04: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인생의 정치적 판단 중 지금까지 가장 잘 한 행동은 지난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만은 안 된다고 주변을 뜯어말렸던 일 아닌가 싶습니다. 주변 민주당 골수 지지층들에게 '치유와 화합으로 가려면 안희정이, 확실한 적폐청산을 원한다면 이재명이 있는데 왜 하필 문재인이냐'는 소릴 많이 했었어요. 이재명이 경선1위는 못 할 거란 계산 하에 한 말이긴 하지만...생각해보면 문재인은 그닥 압도적이었던 적이 없음에도 너무 강한 신성을 누려왔습니다. 누릴 거면 끝까지 누려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수령님이 국가에 보탬이 되는 모습은 못 볼 것 같습니다.

    이명박은 참 재미난 인물입니다. 고집불통이라는 이미지에 비해 의외로 87년 이후 하고싶은대로 다 못한 대통령을 꼽아보면 꽤나 상위권이 아닐까 싶네요. 광우병 시위로 초장에 지지율이 나락 간 영향도 있고, 당내에 박근혜라는 야당이 떡하니 존재감을 자랑했던 탓도 있겠지만, 이명박이란 사람 성향 자체가 우회루트를 선호하는 기질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결국 대운하는 포기했지만, 토목공사는 했지요. 당시 저는 정치에 관심만 좀 있었지, 충분히 이해 할 정도의 역량이 없었기에 애초에 목적이 토목공사를 통한 자금의 흐름에 있지, 한반도에다 대운하를 뚫어서 운송왕이 될 거라는 꿈은 없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나보군요.

    대깨트의 일각을 이루는 소위 태극기부대로 대표 되던 노년층의 윤석열 지지는 미약하나마 반성의 시그널 아닐까 싶은데,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이들은 교회나 토호들 같은 다른 대깨트들에 비해 중앙정치에서의 실질적 영향력이 약하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요. '대깨트가 반성했다'라고 하려면 결국 저 두 세력이 반성해야 할텐데요...국힘에서 주호영, 곽상도 의원 등이 지자체장에게 민주화운동 지정권을 주고(현재는 대통령령으로 지정), 관련 사업체들에 경제적지원을 하도록 하는 법안을 낸 것 같던데, 제발 국힘도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민주당 따라가지 말고요.

 브금

 

https://youtu.be/AoB9o49fl7I

 

 

 

 조선이 전쟁 한 번 없이 일본에 망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조선 최후의 전쟁은 있었습니다. 규모가 작은 전쟁이었고, 학계의 주목조차 못 받아서 문제입니다만, 엄연히 1894년에 경복궁에서 국가의 명운을 가른 최후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1885년에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을 맺어둔 상태였는데요. 그 내용은 조선으로부터 양국이 군대를 철수시키고, 조선의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한 교관도 보내지 않으며, 어느 한 쪽이 조선에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학 민란으로 고종이 청에 파병을 요청하면서 청군이 조선에 파병되었고, 일본은 톈진조약을 근거로 출병해 군대를 제물포에 상륙시킵니다. 그에 놀란 조선조정은 동학군을 진정시키고는 청군과 일본군을 물리려 하지만, 애초에 침략의욕이 있던 일본군은 물러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러시아와 청의 압박을 물리치기 위해 고종을 잡아 인질로 삼으려 하지요. 일본군은 먼저 4대문을 포위하고, 그 다음에는 경복궁 앞에서 무단으로 훈련을 합니다.

 

이 그림에서 남동쪽 광화문은 광희문(남소문)의 오기입니다.

 그리고 그레고리력 1894년 7월 23일 새벽 4시 20분, 약 1천명의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합니다. 경복궁 내에는 500명의 조선군이 있었고, 이들은 숫자는 적지만 독일제 총으로 무장한 정예였습니다. 500명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학농민군을 상대하기 위한 파병이 있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조선군은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교전하였으나, 일본군은 조선군을 뚫고 고종과 중전 민씨가 숨어있던 함화당까지 돌파하여 고종을 인질로 잡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협박을 받아도 굴복하지 않았고, 교전이 계속 이어집니다. 조선군은 매우 잘 싸웠기 때문에 교전은 오후 2시까지 이어졌고, 일본도 피해를 크게 보았으나 이미 고종의 신변은 일본군에 넘어간 후였고, 훗날 독립협회를 창설하는 일원인 김가진과 안경수가 고종 명의의 가짜 전투중단 명령서를 만들어 교전을 중단시킵니다. 그에 조선군은 통곡하며 무기를 버리고 해산하였고, 일본군은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모든 근현대식 무기를 압수하여 폐기합니다. 당시 일본군이 압수한 조선의 근현대식 무기는 양이 꽤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500년 국가 조선이 외적을 상대로 맞서 싸운 마지막 전투고, 여기서 왕이 잡히고 정예 군대가 무장해제됨으로 실질적으로 조선은 멸망하고 맙니다. 이후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괴뢰정부를 세웠고, 이 교전을 조선군이 일본군을 갑자기 공격하여 일어났던 우발적 교전으로,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을 지킨 것으로 언론 플레이를 합니다만 오랜 시간이 지나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최후의 전투에 대한 정식 명칭은 불분명합니다. 경복궁의 변이라고도 하고, 갑오사변, 갑오왜란 등으로도 불립니다.

 

 이후 일본은 청일전쟁을 벌이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실질적인 조선 땅의 지배자가 되는 듯하였으나... 동학군은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지 않고 들고일어났고, 고종ㆍ중전 민씨 부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저항합니다. 그에 다음 해인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중전 민씨를 시해합니다. 이 때는 이미 경복궁이 한 번 점령되고 무기를 모두 압수당한 후라서 조선군이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는데, 중전 민씨가 그토록이나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시해당한 것은 이미 조선이 패전해 점령당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그 해 11월,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다음 해인 1896년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에 성공하여(아관파천) 친일 김홍집 내각을 몰아내고 친러내각을 구성한 후, 다음 해 대한제국을 세우고 중전 민씨를 명성황후로 책봉하였습니다. (공식적으로 추존이 아니고 책봉. 대한제국 설립 시점에서 명성황후의 사망은 공인되지 않은 상태로, 행방불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에게 이길 수 있는 국력을 가진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아마 큰 변수가 없었다면 1904년부터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길 수 없었을 것이고, 대한제국은 잘 하면 러시아 제국의 속국으로나마 독립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후 대한제국은 입헌군주국으로 조선과는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진 국가가 되었을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게 변하고 맙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우리나라의 모든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사건입니다. 그 비극적인 사건 이후 러시아는 내부 상황이 막장화되어 전쟁을 지속 수행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패전에 가까운 종전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승전한 일본은 11월 17일,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을 껍데기만 남겨놓습니다.

 

 러일전쟁은 여러 모로 불행한 결과를 잉태했는데, 전혀 이길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러시아전에서의 승전으로 인해 일본 또한 이후 막장국가가 되고 맙니다. 실익이라고는 전혀 없다시피 했던 전쟁에서 이기면서 군대 교리는 엉망이 되었고, 군부는 너무 기고만장해졌으며, 국가적으로 자아도취가 끝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승전도 아니어서 소모와 손해밖에는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조선 병합을 해서 수탈을 시도해봤으나 그 역시 일본 입장에서는 전혀 이익이 아니었고 실질적으로 손해만 보았으며, 결국에는 완전히 막장 군사국가화되어 수많은 일본 민중이 징집되어 소모당하고 학살당하고 결국 패전에 이르게 되는 스노우볼의 단초가 됩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은 피의 일요일 사건을 발단으로 실질적인 패전의 굴욕을 당하고, 공산화의 스노우볼이 굴러 소련이 되고 맙니다. 이후 소련은 광복 이후에도 한반도 분단과 전쟁의 배후가 되었지요.

 

 조선은 싸워보지도 않고 일본에 망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동학 민란으로 인해 원래 부족한 병력마저 더 없는 상황이었고, 청을 개입시켜 민란을 해결하려는 고종의 오판이 있었고, 그에 조약을 빌미로 일본군이 막무가내로 한양에 밀고 들어와 왕궁을 기습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왕이 사로잡히고, 그 와중에도 고종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신하가 굴복하여 패전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전쟁이 규모가 작았다고 하여 조선군이 치열하게 싸우지 않은 것이 아니었고, 왕은 사로잡힌 후에도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점령당해 망한 후에도 고종은 망명까지 하여 그래도 나라를 재건국까지 해가며 2차전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은 무력했지만, 무기력하게 싸우지도 않고 망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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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쿠루도 2021.04.18 15: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오래 관심을 가졌는데 이런 사건이 있는줄 몰랐습니다.

    고종을 매우 무능하고 답이 없는 인간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할 수 있는게 제한적인 편이었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해양장미 2021.04.18 16: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종은 능력이 모자랐고 단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사면초가인 상황에서 여러 번 용기를 내며 열심히는 싸웠습니다.

      갑오년 경복궁의 변은 기존 서술에서는 갑오개혁 이전에 단순하게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으로 묘사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과정에서 있었던 전투가 조선 최후의 전쟁이었습니다. 다음 해의 을미사변은 이미 실질적으로 망하고 점령당한 나라에서 망국의 부활을 꿈꾸던 왕비가 시해당한 사건이었지요. 그 과정에서도 교전이 있긴 하였으나, 그 때 경복궁에 있던 병력은 이미 무장수준도 낮고 살아있는 국가의 왕궁을 지키는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2. 만신전 2021.04.18 2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처절했었군요.

    제멋대로 전쟁 패배시킨 신하가 독립협회장이었군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 좋아하는 사람들 중 이런 사실 아는 사람 한명이라도 될까 싶습니다.

    • 해양장미 2021.04.19 0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안경수가 독립협회 초대 회장이었지요.

      본래 독립협회에는 친일파가 많았고 안경수도 친일파였습니다. (당시에는 친일 아니면 친청, 친러 중 하나였습니다.) 경복궁의 변 이후 김홍집 내각에서 한자리 하다가, 1895년에 친러파로 전향했고 이후 중전 민씨의 측근이 되었고,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미국대사관으로 도주하려다 실패한 춘생문 사건에 개입하여 형을 받습니다. 아관망명 이후 복권되고요.

      그런데 안경수는 1898년에 황제 양위 음모를 꾸미다가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실각시키려는 시도를 아주 많이 했습니다.) 발각되어 일본으로 도주하였고, 이후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귀국하지만 결국 고문 및 사형당하게 됩니다. 줄을 여러 번 갈아타다가 역모죄로 죽게 된 거고요.

      김가진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다가 좌천되고, 이후 3.1운동에 참여하거나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 시도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계속 활동합니다.

      훗날의 안경수는 몰라도 당시의 안경수와 김가진은 고종, 중전 민씨 부부와 사이가 틀어지지는 않았고, 정황상 날조를 용서받은 것으로 보아 결국 고종의 안위를 지키려는 시도였던 걸로 해석됩니다. 다만 그 행위는 훗날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겠지요.

  3. 이란코 2021.04.19 0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네이버에서 경복궁 쿠데타라는 제목으로 봤었는데 이런 내막이 있었군요.

  4. 구밀복검 2021.04.19 09: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조선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이 일본군의 질적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는 경우도 있었죠

    지형상의 한계로 중포를 운용하지는 못하였으나 동일 스펙의 속사포들은 일본도 러일전쟁~1차 세계대전 때에 가서야 쓰게 되는 물건들이었으니까요

    경복궁의 전등 덕분에 농성도 꽤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었다고 들었는데

    다른 곳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텼다고 해도 역사가 큰 틀에서는 바뀌지 않았겠습니다만은

    조선이 다른 시도를 해 볼 잠깐의 여유는 얻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 해양장미 2021.04.19 1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당시 조선은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서 좋은 무기 많이 샀었지요. 제대로 못 써보고 저렇게 져서 다 잃었지만요.

      당시 경복궁을 기습한 일본 병력은 1천 정도, 한양의 일본 총 병력은 4천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것만 어떻게 몰아냈으면 그래도 조선 또는 대한제국의 앞날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가더라도 한일합방보다 딱히 행복하고 평화로운 미래가 있기는 어려웠을 것 같긴 합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합방된 덕(?)에 한반도는 1950년 전쟁 전까지는 꽤 평화로웠지요.

  5. Connie749 2021.04.19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복궁 전투도 그렇고 그 이후에 조선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망조가 든 나라는 뭘 해도 안 되는 모양입니다.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던 세계최강 영국과 미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은 시점에서 대세는 기울었죠.

    한국인들 대다수는 인정하기 싫어하겠지만, 저도 한일합방보다 더 나은 시나리오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무기 이전에 근대국가로 도약할 인프라가 전무했고,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가 소련을 상대로 맞서싸운 것처림 중국(중공)과 러시아(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기 힘든 나라였죠. 그 이후의 미래는 잘해야 우크라이나나 몰도바였을 겁니다.

    • 해양장미 2021.04.19 1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친러반일을 했던 고종의 방향 자체는 옳았다고 봅니다. 러시아 제국이 유지되었다면, 대한제국은 독립을 지킬 수도 있었겠지요. 러시아는 대한제국을 합병할 생각은 별로 없었던 것 같고요.

      그런데 러시아가 소련이 되어버렸으니, 만약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고 쳐도 대한제국은 좋은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웠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잘못하면 진짜로 소련과 전쟁을 불사해야 했을겁니다.

  6. armalitear15 2021.04.19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복궁 쿠데타 이후엔 그냥 뭘 해보려고 해도 안되는 확실히 망국의 길을 확정한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그레이트 게임서 영일동맹이 이뤄진 상황서 말이죠.
    태국이나 에티오피아처럼 제대로 믿을만한 나라에 빌붙아서 성공적으로 외교를 했던것도 아니고
    근대화를 위한 노력도 저 둘에 비해선 빈약했으니요.

    • 해양장미 2021.04.19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조선은 경복궁의 변에서 패전하여 실질적으로 망한 거였고, 이후 청이나 동학군이 이겼으면 모르겠는데 패했고요.

      그 다음은 고종이 아관망명 이후 친러 대한제국 세워서 2차전 해본거였지요. 그건 러일전쟁의 결과로 패한 거고요.

  7. 묵嘿 2021.04.19 1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역사는 디테일을 파도파도 끝이 없고, 총체적인 안목이 없이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네요. 경복궁 앞에서 교전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을 파고드니 그 난세에서 고종이 얼마나 처절하게 국체를 보존하려고 버텼는지 실감이 납니다. 그리고 피의 일요일 사건이 러일전쟁의 판도를 바꾸면서 한반도의 을사조약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세계사와 한국사를 별개로 가르치는 교육 과정 하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겠지요. 기껏해야 부동항을 찾아 발칸반도, 한반도로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했던 영-미가 일본과 협약해서 간접 지원한 내용 정도가 간간이 시험 문제로 활용되긴 합니다만.

    아편전쟁이 있던 헌종 대에 이미 조선 앞바다에도 양선들이 오락가락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 시기에 시류의 변화에 제때 대응하지 못한 게 조선의 불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국은 효명세자의 요절로 헌종이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외척이 득세해 부패에 빠지고, 민간엔 콜레라가 기승하고 기해박해 등으로 어수선한 시점이었으니...

    하여튼 요새 한국사를 수능 필수 과목에까지 넣으면서 강조합니다만, 수업시간은 한정돼 있고 양은 방대한데 내용이 객관적인지도 의문이라 영 기대가 안 됩니다. 각자 직접 지적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도록 유도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 것 같기도 하고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역사는 인과 관계에 대한 의문 없이 암기만 해서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분야니까요.

    • 해양장미 2021.04.19 17: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쁜 이미지에 비해 고종은 망국을 막으려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실제 원교근공에 가까운 외교에 성공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고종/명성황후 부부였고, 러시아에 피의 일요일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는 데 성공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조적으로 미리 친일했던 독립협회나 급진개화파는 열강으로 가는 막차를 타기 위해 발악중인 일본이, 바로 인근에 있는 조선을 가만히 둘 수가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고종과 대립을 많이 했고요. 흥선대원군은 말년에는 완전히 트롤이었고요.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이 잘싸우긴 했는데, 피의 일요일만 아니었어도 결국 뒷심이 강한 러시아가 이겼을 겁니다. 대한제국은 피의 일요일 때문에 망했고, 광복 이후의 한반도는 소련과 김일성 때문에 분단되었고, 참혹한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1800년대에 조선은 급변하는 시대에 대응할 능력을 빠르게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왕조라도 멀쩡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훨씬 상태가 나은 청나라까지 기둥뿌리가 뽑혔는데 조선이 생존하기는 더 어려웠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안망하려고 끝까지 싸우고 노력은 했습니다. 후대의 눈에 차지 않을지는 몰라도 당시 사람들은 열심히 했지요.

      저는 역사를 교양 수준에서 기본적인 걸 알게끔 필수적으로 가르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세한 내용을 과도하게 외우도록 시키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그런 건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싫어하게 만듭니다. 그런 식으로 무언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요.

    • 0ㅇㅇ 2021.04.20 1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미가 일본의 빽이었기 때문에 결국 일본이 이기거나 유리하게 종결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러시아가 종합 국력에서는 앞섰지만 동아시아에 그 국력을 쏟을 시스템이 없었고 일본은 영미 빽 믿고 올인할 수 있었으니 러시아가 이겨서 조선이 속국이 되는 건 생각하기 힘드네요. 특히 영국이 거문도 점령에서 보듯 일본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을 것 같습니다.

    • 해양장미 2021.04.20 2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 러시아는 만주에 욕심이 있었고, 보급을 위한 철도를 부설중이었습니다. 영미야말로 일본을 적극적으로 도울 이유나 여력이 부족했고요.

      괜히 열강이 러시아의 우세를 예측했던 게 아니고, 심지어 싸우던 일본도 패배를 예측하고 싸웠던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겨서 일본이 이후 끝없이 기고만장해지게 되지요.

  8. 2021.04.19 18: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해양장미 2021.04.19 2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은 플라자합의와 버블경제를 거치면서 좀 더 현실적이 된 면도 있지요. 태도를 보면 현대의 일본은 일본제국을 타산지석으로 삼지, 별로 닮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좌익 세력야말로 일본제국의 정신적 후계자입니다. 근래의 중공도 옛 일본제국을 많이 닮아있는 것 같고요.

  9. Lastinches 2021.04.20 21: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러시아의 러일전쟁 패배와 피의 일요일이라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초대형 변수 때문에 고종의 플랜이 완전히 꼬여버린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한반도가 일본에게 병합당한 덕분에 한반도 인민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이후 경제발전의 기반을 얻은 반면, 그렇게 기를 쓰며 주권을 침탈한 일본 입장에선 치안유지와 인프라 투자 때문에 돈은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데 얻는 것은 없는 계륵같은 영토만 얻은 셈이고 결과적으로 한반도 인민은 일본으로부터 단물만 실컷 빤 셈이 되었으니, 참으로 역사는 돌고 도는 아이러니 같습니다.

    - 본문에서 말씀하신 대한제국 주권침탈의 계기를 제공한 것도 그렇고, 625도 그렇고 소련 공산당은 한국 쇼비니스트들의 관점대로라면 그야말로 증오할 수밖에 없는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쇼비니스트들이 그들에게 호의를 보낸다는 점이 참 우스운 일입니다.

    • 해양장미 2021.04.20 22: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 그렇지요. 아이러니 그 자체인데, 그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사람도 극소수고.

      우리나라 사람들 중 다수는 끊임없이 꿀을 공급한 일본은 미워하고, 미국은 경계하며, 우리를 못살게 군 중공과 소련 및 북조선을 무분별하게 좋게 봅니다.

      미국하고 일본 없었으면 현재의 발전한 대한민국은 없었습니다. 반대로 중공하고 소련이 없었다면 훨씬 순탄한 역사였을 겁니다.

  10. 프마수스 2021.04.21 0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의 '매국노 고종'이라는 책과 관련이 있는 포스팅일까요? 그 책을 읽은 적은 없는데, 책 소개에 항상 '전쟁 한 번 못 해보고 망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식의 문구가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조선군에 당시 굉장히 좋은 신식무기가 종류별로 다양하게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뒷 부분은 항상 '너무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모아놔서 실제 군대의 운용에는 호환성 문제가 심각했다'로 끝나곤 하는데, 이 역시 어떤 오류가 있는 통설인 걸까요, 아니면 이를 감안 하더라도 소규모 교전 정도는 가능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독일식 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이라는 표현을 보면 뭐가 됐건 간에 일단 교전에 문제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으로 읽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