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케어와 그 뒷일

사회 2017. 12. 10. 22:16 Posted by 해양장미

 추천 브금

 

https://youtu.be/7ZjBPXZOAj8



 문재인케어로 오늘 의사들이 시위했네요런 말도 안되는 좌파 포퓰리즘 정책에 의사들 고생많습니다.

 

 

 그런데 문재인케어, 막상 하면 어떻게 될지, 의료현실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있는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요.

 

 문재인케어하면 건보재정은 물론 현행 의료체계가 박살납니다. 그거 메울 만큼 문재인이 건보료 더 걷을 수 있냐 하면 이 포퓰리즘 정부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문재인 임기동안은 버티겠지요.

 

 문재인 정책 펼치는 게 전부 내 임기는 무사한가?’를 전제로 펼쳐집니다. 신고리 중단도 마찬가집니다. 그거 안 짓고 탈원전 정책 강행해도 5년동안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파벌이 5년 후에도 정권을 이어나갈 가능성은 낮겠지요. 정권교체 가능성도 높고, 민주당이 재집권하더라도 문재인 파벌은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항상 그래왔으니까요.

 

 다음 대통령은 문재인의 포퓰리즘 정책 설거지하는 걸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끔찍한 재정 상황을 마주하게 되겠지요. 문재인케어 같은 경우 건보료를 더 걷거나 아니면 문재인케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겁니다. 그럼 문재인 파벌은? 그걸 비난하면서 온갖 선동, 언플을 하고 또 장기시위에 나서겠지요. 뻔합니다. 그들은 항상 그래왔으니까요. 그게 포퓰리스트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열심히 이야기해야합니다. 정부가 문재인케어를 강행해서 통과시킬지언정, 그건 해악이라고요. 절대 유지될 수 없는 무리한 사치, 망상 또는 악의에 기원한 부도덕, 위선과 반지성주의와 중우정의 결합입니다.

 

 우리나라의 의료현실은 이미 위태롭습니다. 젊은 의사들이 돈 되는 과에만 몰린지도 오래고, 그에 특정과를 찾기 어려운 지역도 늘었고, 신약을 쓰고 싶은 사람도 쓰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문재인 집권 후 신약을 더 못쓰게 되고 있습니다. 관련 기사를 보시면 왜 그런지 조금 이해가 갈 겁니다.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519574

 

 문재인케어는 병의원을 줄이고 신약에 대한 접근성을 낮춤으로 적잖은 사람을 죽이게 될 겁니다. 물론 파시스트 및 광신도들이 인명을 경시하고 망집을 부리기 마련인 건 나도 잘 압니다. 아마 문재인케어의 강행도 막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에 죽는 사람들은 불운한 것이겠지요. 오늘 브금은 앞으로 이 권력에 의해 돌아가실 분들을 위해 골랐습니다. 그러나 그리 되더라도 문재인 시대가 지나고 나면 반드시 설거지가 필요합니다. 그 때를 위해서라도 올바른 말은 계속해야합니다.

현장의 기록

사회 2017. 11. 21. 13:07 Posted by 해양장미

https://www.youtube.com/watch?v=TU-XP8z0az4&feature=youtu.be&t=1h4m56s


 이 장면이 역사의 한 장면이 될지, 그저 해프닝에 불과할 지는 지켜봐야겠지요.


 여하튼 별 일도 다 있습니다.



 설명 : 오스트레일리아의 워마드 유저가 방송하다 경찰한테 잡혀간 겁니다.

 추천 브금

 

https://www.youtube.com/watch?v=LQYlSv1uh_8


 많은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서울 인구감소세가 뚜렷하고 강하다는 것입니다.

 

 서울 인구는 고건 시장 때까진 감소세다가, 이명박이 취임하면서 증가세로 반전하였습니다. 그 후 오세훈 시장 때 최고였다가 박원순 취임 후 가파르게 감소중입니다.

 

 시장의 정치적 성향이 서울시 인구수에 주는 영향은, 일단 귀납적으로는 명백합니다. 물론 서울시 인구감소는 서울시 자체 문제만이 아니고, 외부요인이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박원순에 어느 정도의 책임을 돌릴 수 있을지는 여러 모로 생각해볼 문제입니다만, 실제 이명박-오세훈 때는 인구가 늘다가 박원순이 취임하니 가파르게 감소하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프를 보면 아시겠지만 2010년에 서울 인구는 1057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던 게 올해 6월엔 991만 명까지 줄었지요. 서울 사람들은 높은 인구밀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보니 인구유출을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실제 인구유출이 도시에 주는 악영향은 꽤 큽니다. 실제 도시보다 훨씬 단순화한 시티 빌드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도 인구유출추세는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기 쉽지요. 실제 도시엔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보이는 문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한 각종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런 서울 엑소더스가 근래 가속화되었습니다. 문재인정권의 8.2 부동산대책이 원인입니다. 다음 그래프는 올해 서울 인구유출 추세를 보여줍니다.




 좌파들은 항상 서민 서민 하지만, 좌파들의 정책은 매우 쉽게 서민의 삶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실제 8.2 부동산대책 이후에도 서울 아파트 가격은 오히려 상승했지만, 서울의 다세대, 연립주택들의 가격은 하락하였고 부자동네와 가난한 동네 집값은 차이가 벌어졌으며, 서울뿐만 아니라 인근 도시에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부동산투자를 제한한다 해도 투자자금이 0이 되는 건 결코 아니기 때문에, 제한된 투자가 더 안전해 보이는 부동산으로 몰리기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주담대 갈아타기도 막아놨으니 주담대 거치 다 된 사람들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더 주택이 저렴한 동네로 이사 갈 수밖에 없는 거지요.

 

 향후 박원순 시장이 연임되고 문재인 정부가 비현실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인 정책을 계속 강행하는 한, 서울 엑소더스도 계속될 것이고 그 악영향은 연쇄적으로 길게 이어질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앞으로 서울에서 계속 살기 힘들어질 것이고, 부자들은 더 돈을 벌 것입니다. 좌파들의 사회주의적인 정책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시장의 원리를 무시하고, 망상으로 고집 부려가며 온갖 정책을 펼치니 혼란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은 살아남고, 약자들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좌파들은 이 문제를 단편적으로 서울 집값이 너무 비싸서 사람이 떠난다.’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좌파적인 집값억제, 공공임대주택 공급 같은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판단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엔 충분히 전문적이거나 학술적인 고려가 없으며, 실제 그런 판단으론 결코 상황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물론 박원순이 3선된다면 서울시민들의 자업자득이긴 합니다만.

한의 정서의 끝과 나쁜 방향으로의 변화

사회 2017. 11. 13. 10:17 Posted by 해양장미

 추천 브금

 

https://www.youtube.com/watch?v=MMzUKB8khxo

 

 근래 저연령층은 어떻게 체감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노무현 집권 시기 때만 해도 한의 정서라는 표현이나 감성은 다분히 일반적이었습니다. 일례로 2000년에 걸그룹 샤크라는 이라는 노래로 인기를 얻었었고, 현직 감 과수원 농부 이영도의 1999년 저 FW에서도 hjan이라는 표현이 활용되었는데 큰 위화감은 없었지요.

 

 한을 설명하자면 원한중 한이며, ‘분노, 아쉬움, 안타까움, 혹은 이들 모두가 한데 뒤섞인 묵은 감정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이런 정서는 잘 해소되지 않는 특성이 있었기에 문제시되기도 했습니다만, 누그러들고 통제된 형태의 분노라는 점에서는 장점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이런 민족정서(?)가 어느 날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오래 생각해왔는데, 역시나 나의 판단은 한국인 특유의 의 정서가 보다 보편적인 의 정서로 변하였고, 증오와 분노가 쉽게 표출되며 강화되는 게 근래 한국인의 정서 변화 방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계기를 노무현의 자살(+ 그 뒤를 잇는 듯한 김대중의 타계)로 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회의 시간적 단면을 구성하는 요소는 매우 복합적인 것이며, 그 중 어떤 하나가 급격하게 변할 경우 사회에 드러나는 이지러짐은 예측할 수 없이 클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기존 한국 사회의 안정성을 구성하던 주 요소 중 한의 정서가 있었고, 그것이 부정적인 면이 많더라도 어쨌든 그것이 급속도로 사라진 것이 한국 사회의 안정성을 크게 저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의 정서가 있던 한국 사회엔 인내심, 최소한의 연대감, 운명에 대한 체념,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 같은 게 지금보단 훨씬 많았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 정서로 전환되면서 부당함에 대한 인내는 악으로, 연대감은 첨예한 적대로, 운명에 대한 체념은 무기력으로, 과거의 잘못은 조작을 해서라도 덮어야 할 것으로 인식전환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실제 과거의 한국사회에서 한의 정서는 덜 진취적이고, 부정부패와 부당함을 용인하는 방향의 문제를 낳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전환은 혼란을 일으키기 마련이며, 적대와 증오와 조작의 일상화는 꽤나 큰 문제를 빚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문재인정권의 행보와 그에 대한 지지는 이러한 국민정서의 전환과 극단화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여깁니다. 분명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또한 정치학적으로 볼 때 이런 방향으로의 변동은 좀처럼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빈도가 대단히 잦다는 것입니다.

 

 한의 정서가 되살아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그 나름대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한국인들은 한의 정서를 극복한 게 아니라, 일종의 열화판 정서를 대신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원의 정서를 가지게 된 한국인들은 도덕과 윤리를 배우며 습득했던 많은 미덕들을 잊었고, 매우 편향적인 것들만을 실행하며 본인들을 도덕적이라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젠 위선과 부덕과 혐오가 문제인 시대입니다.

 

 첨언하자면 현 정권의 적폐청산은 법무부와 사법부의 일을 청와대가 주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면에서 정치적이며, 민주정의 분권원칙 및 협치의 정신에 위배됩니다. 각종 의혹에 대한 조사와 심판은 필요하나, 현 정권이 그다지 민주적이지 못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추천 브금.

 

https://www.youtube.com/watch?v=uSfHQZ8FEMw

 

 

전편 : 1) 인조의 패전에서 예송논쟁까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은 건국부터 정도전이 추구한 신권중심 정치질서가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시대를 고려하면 정말 진보적인 발상이었지요. 붕당정치는 단점도 꽤 있었지만, 만약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어갔다면 조선은 점차 입헌군주정과 비슷한 형태로 나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조선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절대군주 숙종이 등장하면서, 이후의 조선사는 건국부터 이어져왔던 신권중심정치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전편에 이야기했듯 현종 대까지 붕당정치는 평화로운 편이었습니다. 어쨌든 선비의 싸움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숙종은 그걸 죽고 죽이는 혈전으로 바꿔놓습니다. 그리고 이쪽저쪽 숙청을 반복하며 신하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고, 완전히 굴복시키게 됩니다.

 

 숙종의 왕권강화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으로는 꼭 나쁘진 않습니다. 붕당정치에 폐단이 많았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현대 의회주의 민주정도 보고 있으면 정말 막장인데, 조선 붕당정치는 그보다 아무래도 심하거든요. 당장 의회를 불신하고 현명하고 강력하며 독단적인군주가 모든 걸 다 해주길 바라는 모습은 현재 한국에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숙종 이전에 왕권을 강화했던 왕인 태종 이방원에 대한 평가도 그다지 나쁘지 않지요.


 그러나 장기 집권한 숙종의 왕권강화는 여러 부정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위에 이야기했듯 조선 초부터 이어져오던 신권중심의 정치가 끝나고, 강력한 왕에 신하들이 잘 보이려 노력하면서 반대파를 기회만 되면 몰락시키려 하는 혈투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선 신하들은 점점 바른 말을 잘 하지 않게 되고, 뜻 있는 자는 관직에 오르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영민한 왕이었기에 장기집권을 하는 동안 왕권강화로 인한 문제가 딱히 커지진 않았습니다. 숙종 다음에 즉위한, 숙종과 희빈 장옥정 사이의 세자였던 경종은 재위기간이 불과 42개월이었지만, 경종 다음 왕은 그 유명한 영조로 52년이나 재위. 영조 다음 대인 정조가 그 다음대로 243개월을 재위했습니다. 영조와 정조는 모두가 알다시피 능력 있는 왕이었지요.

 

 숙종이 즉위한 해는 1674년입니다. 그리고 숙종의 아들인 영조는 1776년까지 재위합니다. 중간에 경종이 4년 하긴 했지만, 어쨌든 붕당정치 붕괴 후 부자가 102년을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이후 영조의 손자 정조가 또 1800년까지 좋은 통치를 함으로 탕평시대는 조선의 본격 중흥기가 되어버립니다. 시스템의 문제를 무려 126년간 3+1군주의 능력으로 커버한 셈입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이 운이 좋았던 건데, 어떤 면에서 보면 나쁜 것이었습니다. 숙종-정조 대에 조선은 왕이 능력 있고 잘해야만 잘 돌아가는 시스템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숙종의 책임을 모두에게 납득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숙종이 붕당정치를 실질적으로 끝내고 절대군주화 되었다고는 해도, 그가 집권한 이래 126년간 조선은 꽤 잘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보다 좋은 시대였습니다. 전후복구도 끝나고 어쨌든 경제도 기술도 성장했던 시기거든요.

 

 그러나 나는 조선의 국운을 쇠하게 한 것은 결국 숙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정치시스템을 망친 건 분명 숙종이었으니까요. 정치는 왕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유능해도 혼자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명백해요. 숙종은 여러 번의 환국 과정에서 피가 흐르는 숙청을 반복했고, 이 과정에서 신하들에 대한 통제권은 확보했으되 신하들끼리의 혈투는 그 대가가 되었습니다. 서로 증오하는 신하들끼리 일처리가 제대로 되긴 어려웠고, 숙청의 정도가 심하다보니 국가 인재풀이 박살나버렸습니다. 인력이 없어지니 역설적으로 왕의 인사권은 제한되게 되었고, 경쟁할만한 붕당이 아예 사라져버리다시피 하니 또 역설적으로 왕의 권력이 줄었습니다.

 

 왕의 권력은 근본적으로는 백성에서 나오고, 가까이는 왕을 받드는 신하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숙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신하들을 너무나 많이 충돌시키고 제거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간이 갈수록 왕권이 약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숙종 말에는 남인들은 몰락하고, 남인들에 대한 온건/강경 처리를 시작으로 나뉜 소론/노론으로 나뉜 서인들이 각기 훗날의 경종과 영조를 지지하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줄 잘못 서면 죽는다는 (진짜로 사약 받습니다.) 절박함이 있다 보니 아주 막장이 된 겁니다. 사실은 이미 이 시점에서 조선의 국가 시스템은 기운 것입니다. 법도를 논하는 게 아니고, 신하들끼리 정파가 갈려 서로 다른 후계자를 지지하는 건 이 때가 조선사에서 처음입니다.

 

 서로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밀리더라도 제거당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중요한 겁니다. 사상의 자유라는 거지요. 인조 이후 숙종 이전엔 잘못하면 내 쫓기는 일은 있어도 죽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는 열려있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정치세력끼리 서로 증오하고 끝을 보려고 굴면, 그 사회는 쉽게 파멸합니다. 역사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한국도 대통령 일당에게 반기를 들기 어렵지요? 내부에서 이견을 제시하기도 어렵고.

 

 정리하자면 붕당갈등이 극대화된 건 숙종 책임입니다. 그 갈등은 나라를 말아먹기에 충분했기에 탕평이 필요해졌습니다. 숙종도 탕평에 대한 생각은 있었으나, 숙종은 죽을 때까지 그 면에선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탕평을 시작한 건 실질적으로 숙종 다음 대인 경종입니다.

 

 숙종 말년은 노론 세상이었고, 숙종이 병으로 쓰러진 후 경종은 노론들에게 상당한 견제와 압력을 받으면서 집무를 시작합니다. 위기를 겪다 왕이 되었으나 노론은 경종을 계속 심하게 공격합니다. 경종 집권 초에 노론은 아예 경종을 왕 대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폭주가 너무 심해져, 훗날 영조가 되는 연양군을 세제로 만들고는 대리청정을 시키라는 말까지 나왔지요.

 

 경종은 그런 실언을 빌미로 진짜 대리청정을 시킬 것처럼 이야기하다, 방심한 노론이 실수를 거듭하자 상황을 한 번에 역전시켜 노론의 세는 한 풀 꺾이게 됩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노론 쪽에서 경종을 죽이려 한 게 밝혀집니다. 나라가 갈 데까지 간 거지요.

 

 이 때 경종은 훗날 영조가 되는 세제 연양군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왕을 시해하려는 사건에 얽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경종은 그러지 않았고, 그러기도 어려웠습니다. 연양군이 아니면 경종에겐 후사가 없었습니다. 손이 귀한 것은 조선 왕실의 큰 문제였습니다.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경종은 즉위 48개월 만에 쓰러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연양군이 올린 인삼을 먹고 죽습니다. 당시 어의는 경종이 인삼을 먹는 걸 반대했고요. 결국 경종이 죽은 후 연양군은 왕이 됩니다만, 이후 임기 내내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게 됩니다.

 

 환국을 통한 숙종의 절대왕권에서부터 혈투가 되는 붕당정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영, 정조대의 탕평, 이후 이어지는 세도정치는 연역적인 인과관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무자비함과 절대권력이 혈투를 부르고, 혈투 속에서 잘 해보려는 권력조차 어쩔 수 없이 이너서클을 구성하고, 그 이너서클이 부패하면서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영정조대의 치세, 조선의 중흥기가 있었던 건 많은 것이 경종의 공입니다. 경종은 짧은 재위로 인해 별다른 평이 없습니다만, 만일 경종이 붕당간의 투쟁을 부추겼고 영조가 되는 연양군을 제거했다면 조선은 중흥 없이 훨씬 빨리 끝났을 것입니다. 경종은 분노를 참고 명분과 대의를 따랐기에 오랜 세월동안 조선 백성들이 중흥 속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종과 같은 모습을 근래 정치권에선 찾아보기 힘들어 참 우려스럽습니다.

 

 숙종이 굳은 정통성으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이었다면, 영조는 매우 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단히 투쟁적인 왕이었습니다. 경종도 장희빈의 아들이라 정통성이 모자라긴 했지만, 영조는 아예 궁녀도 아닌 무수리 출신의 아들이란 말이 돌았고 심지어 기혼녀였으며,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라 정통성이 태생부터 아주 낮았고, 이에 더해 경종 독살론에 시달리다보니 정말 흔들리기 쉬운 왕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영조는 평생 싸워야했고 그 싸움에 질린 것이 세도정치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영조 시절의 군신 다툼은 영조 집권 4년 만에 벌어진 이인좌의 난부터 언급해야겠습니다. 이건 쉽게 설명하자면 경종 독살론이 반란까지 이어진 건데, 실제 금방 진압되긴 했지만 충청-경상-전라의 삼남지방 일대에서 벌어진 거병이었습니다. 그나마 빨리 진압된 건 영조가 미리 전 해에 탕평을 시작해 이인좌의 난 주축이었던 소론 탕평파, 완론들을 대거 기용했던 덕이었고, 미리 그런 걸 안 해뒀으면 대규모 내전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때 영남지방, 그러니까 경상도가 가장 진압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반역의 지역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영남지방은 남인들의 거점이기도 해서 더더욱 견제 받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견제는 정조 때 풀릴 기미도 있었지만, 결국 흥선대원군 집권기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이런 지역차별은 조선의 몰락에 또 나름 기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소론과 남인은 다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소론 강경파 준론들은 난이 진압된 후에도 계속 영조에게 덤비면서 제거당합니다. 세력이 남은 건 숙종 때부터 영조를 받들려 하던 노론밖에 없게 되지요.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노론만 남게 되니 탕평은 영조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일이 되어갔습니다.

 

 이 시점에서 슬슬 등장하는 게 척신, 그러니까 외척입니다. 노론만 남게 된 시점에서 영조는 그 강경파를 견제하기 위해 아군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외척을 끌어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탕평은 증오 속에 실패하고 세도정치의 막이 올라갑니다.

 

 본래 왕이 외척을 정치에 쓰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부패하기 쉽지요. 그래서 유학에선 외척 기용을 금기시합니다. 그런데 영조는 노론을 견제하려다 보니 외척을 쓰게 되었고, 당대엔 이게 큰 문제까진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쁘게 작용하여 결국 조선이 망조로 흐르게 됩니다.

 

 이 문제에서 영조를 마냥 탓하기도 어렵습니다. 영조는 실제 평생 암살을 걱정할 정도였거든요. 취임하자마자 내전 겪고 아무리 탕평하려 해도 말을 듣긴 커녕 잦은 반역, 남은 세력도 못 믿으니 영조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삶이 원인일까요. 영조는 나이가 들수록 나쁜 성격을 드러냅니다. 편견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그의 단점이 정말 극단적으로 나쁜 방향으로 표출되는 유명한 사건이 생기니,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게 그것입니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임금이 세자를 그런 식으로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 건, 영조가 좋은 임금이고 아니고를 떠나 더 이상 조선이 유학의 나라로 남긴 어렵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때 이미 나라는 다 기운 것이지요.

 

 그러나 영조의 뒤를 이었던 정조가 워낙 밸런스 브레이커 또는 치터라 조선의 중흥기는 좀 더 이어집니다. 영조의 비정한 사도세자 살해가 결과적으로 조선 백성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결과가 되긴 했는데, 문제는 그게 끝물이었다는 거지요.

 

 정조는 임금으로 갖춰야 할 거의 모든 자질을 다 갖춘 왕이었습니다. 다만 정조가 조선에서 마지막 좋은 임금이었던 건... 굳이 보면 정조가 넘칠 정도로 천재였던 게 문제입니다. 이미 붕당정치는 깨지고 유학도 기운 상황에서 밸런스 브레이커 정조가 이끌던 게 당시의 조선인데, 그러다보니 그 국가 시스템은 정조만이 돌릴 수 있는 쪽으로 변화했습니다. 게다가 정조의 업무량은 너무 가혹해서 건강을 빨리 잃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한 스포츠 팀에 초월적인 실력을 가진 슈퍼스타가 있어 좋은 성적을 한동안 거두지만, 혹사로 인해 선수생명이 짧아지고 그가 은퇴한 후에 팀이 몰락하는 사례랄까요. 실제 드문 경우가 아니지요.




 정조의 장점은 정말 많지만 특별했던 건 관대함입니다. 정조는 신하가 자신에게 막말을 해도 더 심한 막말로 응수했지 기분 나쁘다고 큰 벌을 내리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신하를 구박은 해도, 말을 들으면 그만큼 보상을 해줬습니다. 전반적인 형벌도 완화시켰고, 격쟁도 잦았습니다. 격쟁은 임금에게 백성이 직접 민원을 넣는 건데, 정조가 한 번 행차하면 백성들이 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다가와 이런저런 하소연을 했고, 그게 대략 한번 행차시마다 50회 정도 되었다 합니다.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있었으나, 조선 시대엔 평민 또는 천민은 글을 잘 몰랐으니까요. 천민도 왕에게 직접 다가가서 억울함을 고할 수 있었던 나라였던 게 조선입니다. 격쟁이 들어가면 보통 사흘이면 답이 돌아왔다고 하니, 소통하는 척/민주적인 척/온갖 착한 척 하다가 청와대에 13만 명이나 의견을 모아 넣었더니 코웃음치고 놀리듯 20만 명 모아 오라는 현 대통령 및 정부와는 달라도 정말 다르지요.

 

 세도정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정조는 남인까지 다시 활용하는 등 이 세력 저 세력을 마음껏 주무르면서 아예 정치 구도 자체를 재편집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정조가 아무리 잘났어도 각 붕당들끼리 증오를 내려놓고 평화로운 경쟁을 하게 만들 수는 없었지만요. 그런데 갑자기 정조의 건강이 악화됩니다.

 

 결국 정조는 50살도 되기 전에 사망. 정조의 뒤를 이은 세자 순조는 즉위할 때 나이가 겨우 11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그 유명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조격이 되긴 하는데... 사실 김조순을 그 위치에 올려준 건 세자를 보호하려는 정조였고, 막상 김조순은 인품도 능력도 괜찮은 편이라 김조순이 살아있을 땐 세도정치 문제가 별로 없었습니다.

 

 순조대의 문제는 좀 다른 것이었는데, 순조는 일단 즉위 시 너무 어려서 1804년까진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81112, 순조의 의욕을 꺾는 사건이 일어나니... 다름 아닌 홍경래의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은 굳이 보자면 조선 시대 내내 계속된 평안도 차별로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평안도는 현재 북쪽 조선로동당 강점지 중 평양을 포함한 평안북도, 평안남도, 자강도를 합친 넓은 지역입니다. 평안도는 조선 입장에선 변경이고, 늦게 영토에 편입된 지역도 많은데, 신세 비슷한 함경도는 태조 이성계의 본거지였던 반면 평안도는 기댈 데도 없다보니 중앙 사대부 사회에 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홍경래의 난이 있을 무렵에 이미 평안도는 남쪽 지역과는 달리 상업과 광업이 발달하고, 흉년에 삼남지방에서 몰려온 유민들이 많은 혼란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연줄이 없어 중앙 정부의 부패한 면엔 가장 쉽게 피해를 보다보니, 반란이 일어나기 쉬운 상태였습니다.

 

 난은 규모가 꽤 있었음에도 반년 만에 제압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순조가 마음고생이 많았던 건지, 원래 몸이 약했던 건지. 여하튼 이후 순조는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국정에 신경을 많이 안 씁니다.

 

 그럼에도 순조 때 당장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순조는 업무를 적게 한 거지 딱히 나쁜 왕은 아니었고, 김조순도 살아있을 땐 딱히 세도정치 문제가 두드러지진 않았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었지요. 선대인 정조가 이미 왕이 영웅적 활약을 해야 돌아가는 나라를 만들어 놨었는데, 순조는 방목 스타일이었고 세도가들이 이 순조 대에 힘을 잔뜩 키웁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세계 전반은 아주 바쁘고 혼란스럽게 돌아가지요. 빨리 개혁해도 모자랄 나라가 안일하게 세월을 보낸 셈입니다.

 

 그나마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매우 총명해서 순조가 많은 기대를 했다고 하는데, 문젠 순조가 건강이 악화되어 효명세자가 집무본 지 4년 만에 효명세자가 겨우 22살 나이로 요절합니다. 사인은 분명하지 않으며 과로사 추정. 그리고 순조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효명세자 사망 전 해엔 차녀 영온옹주가 사망. 그리고 2년 후 명온과 복온, 두 공주가 사망.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순조 본인도 건강악화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순조 사망 시점에 살아있던 유일한 자녀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였는데 (임금의 적녀만 공주고, 적녀가 아닌 딸은 옹주입니다. 덕온공주 이후 왕의 적녀는 태어나더라도 공주에 봉해지기 전에 죽었습니다.) 이 덕온공주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23세에 급체로 사망(...) 합니다. 현대 기준에서 보면 급체는 소화불량일 뿐이지만, 당시 기준에선 온갖 질병들이 급체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위천공이나 급성 췌장염, 심근경색 같은 것들 말이지요.

 

 이렇게 순조-효명세자 및 공주, 옹주 일가가 줄초상이 났고, 이에 조선의 미래도 한없이 어두워집니다. 순조가 명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하들에 대해 위엄은 있었고, 여러 문제는 있었으나 당시만 해도 세도정치가 아예 막장은 아니었습니다. 김조순도 정조의 명은 지켰다 볼 수 있지요. 그러나 효명세자의 아들이었던 헌종이 1834, 8살 나이로 즉위하면서 조선의 앞날에도 종이 칩니다.

 

 왕 일가는 씨가 말라. 붕당 균형은 깨진지 오래. 세도정치는 김조순 및 명온과 복온, 두 공주가 죽은 후 (셋 모두 1832년 사망.)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한 상태였고, 이미 이 때 조선엔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의료봉사 등을 하며 개항을 요구하던 시기였으나, 조선 조정은 하필 효명세자가 죽은 시점이라 전혀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세도정치가 커지게 된 덴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위에서부터 쭉 이야기했듯 숙종의 환국 이후 붕당끼리의 어느 정도 건전한 경쟁은 끝났고, 그 혈투는 왕이 찍어 누르고 다스려야 하는 상황이 이어져 왔습니다. 유능했던 영조, 밸런스 브레이커 정조 대까진 괜찮았지요. 그런데 몸이 약한 순조의 치세가 어찌 골골대면서도 35년간 이어지면서, 정조가 순조를 돌보려 세웠던 김조순이 살아있는 동안엔 극단화되진 않았습니다만 그 동안 안동 김씨는 온갖 요직을 장악하긴 했고, 또 한편으로 숙종 때부터 남인이 몰락하면서 사림이 중앙-지방으로 나뉘어져 수도권 명문사족만 관직을 얻을 수 있는 부정부패가 심해진 상황이었고, 지방 사족은 필사적으로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상황이 되어, 이미 조선 조정은 인재를 충분히 수급하고 각 지역의 균형을 맞추기 힘든 입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숙청으로 인재를 워낙 많이 잃기도 했고요.

 

 전편에서부터 이야기했지만, 조선은 그 건국 철학부터 민주정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할 수가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권과 왕권의 다툼에서 계속 왕권이 승리했고, 이는 지도자가 유능할 땐 별 문제가 없으나, 그렇지 않으면 무너지기 쉬운’, 민주적이지 않고 닫힌 정치체제의 전형적 단점으로 표면화되어 버립니다.

 

 세도정치가 정말 답이 없었던 걸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위에 이야기했듯 이미 조선은 정당하게 교육과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막힌 사회였는데,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등의 세도가가 장악하면서, 세도가에 줄을 대야 관직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첫 번째 문제였습니다. 사실 현대 한국도 모 정치세력이 교육에 손댈 때마다 벌어지는 사다리 걷어차기문제가 있는데, 시민들이 위선에 속지 말고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세도가에 줄을 대고 관직을 얻은 사람들은 줄 대느라 소모한 재산을 만회하기 위해 백성을 쥐어짰고, 이에 부정부패가 일상화됩니다. 너무 심한 수탈에 백성들은 떠돌거나 도적이 되기 시작했고, 출세길이 막힌 양반들까지 점차 견딜 수 없어져 결국 민란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세도가문들은 조선을 잘 다스리고 개혁하는 것엔 정말 참담할 만큼 관심이 없었는데, 권력은 가졌으되 책임의식은 없었던 겁니다.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정치인은 책임지는 자리라는 건데, 책임을 회피하는 정치인이나 책임의식을 도외시하는 맹목적 지지자들을 항상 주의하고 견제, 낙선시켜야 합니다.

 

 헌종 이야기로 돌아가 마무리하자면, 헌종은 8살에 즉위했기에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는데, 순원왕후는 김조순의 딸로 안동김씨입니다. 순원왕후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치적 능력은 좋지 않았고 친정에 의지했는데, 그 바람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심각한 지경이 됩니다. 왕실 기강 살린다고 나라살림도 어려운데 지출도 많이 해 민심까지 잃었고, 이후 시간이 지나 헌종이 친정을 하면서 세도정치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는데 그 바람에 할머니인 순원왕후와 갈등이 심해집니다. 그러다가 헌종은 23세로 젊은 나이에 급사해 버리지요. 헌종에겐 자식이 없었습니다. 옹주가 하나 있었지만 태어난 날 죽었지요. 헌종의 죽음에도 여러 설은 있습니다만, 확실한 건 없습니다.

 

 이에 효종 때부터 이어진 조선 왕가의 직계 혈통은 단절됩니다. 실질적으로 이 때 조선왕가는 기운 것입니다. 무슨 유전병이라도 발현된 건지, 순조의 자녀들과 손자들 모두 25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으니까요.

 

 왕이 제어해야만 하는 나라가 왕의 혈맥이 끊겼고, 관직은 탐욕스러울 뿐 책임감도 현명함도 비전도 없는 세도가들이 장악했으며, 시대는 급변하는 난세였으니 조선의 국운은 끝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이 망해가는 와중에 정말 주목할 만한 것이 하나 있으니, 딱히 나쁜 왕은 없었다는 겁니다. 거의 다들 그 나름대로 열심이었고 덕치하려 애썼고 딱히 부귀영화를 탐하거나 폭군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기우는 걸 막지 못했지요. 이는 조선 왕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단 입헌군주화가 되지 않음으로 왕정이 가진 태생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파벌들끼리 서로 싸우고 증오하는 걸 왕조차 어쩌지 못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걸 명심해야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역사를 중시한다는 사람들이 실제 역사를 모르고, 역사를 경시하며,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걸 항상 봅니다. 역사적 사건들을 외우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미 드러났던 문제가 반복되지 않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본문의 추천 브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iK27wBt-zo

 


 조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왜 망했는지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이것부터 정리합니다. 광복 후의 혼란과 분열상을 정리하려다 보니 많이 앞쪽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합니다. 역사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역사의 중요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 역사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합니다.

 

 본문은 미흡할 수 있으니 읽는 분들이 내용을 보태주시거나, 잘못된 점이 있으면 수정에 도움을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수의 대중들은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후기를 망했어야 했을 나라라거나, ‘숨만 붙어있던 나라같이 생각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건 과히 폭력적이고 무식한 이야기입니다. 시기만 봐도 병자호란은 1637년의 일로, 아직 유럽인이 뉴질랜드를 발견하기도 전이고 르네상스가 막 끝나고 근대의 여명이 시작되던 먼 옛날입니다. 병자호란에서부터 대한제국이 문을 내리기까지는 무려 273년이나 걸렸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패전과 대기근 등으로 어려움을 겪긴 하지만 다시 일어납니다. 전근대 국가임을 감안할 때 조선의 행정력과 사상은 결코 세계적으로 뒤떨어지는 편이 아니었고, 민중들의 삶도 최악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일단 병자호란 이후 시점에서 인조의 정통성 문제부터 이야기해볼까요? 이쯤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인조는 광해군에 반정을 일으키면서 왕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신권이 강해졌고 이에 더해 병자호란에서 패전하면서 권위를 잃었습니다. 청은 인조의 아들이었던 소현세자를 이용해 인조를 압박했고, 인조는 소현세자를 멀리하였으며, 청에 갔다 돌아온 소현세자가 급사하면서 인조는 입지가 더 나빠졌습니다. 그 이후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둘째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고, 소현세자의 아내였던 강씨에게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사약을 내립니다. 이 사건은 인조에 대한 평가를 더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왕실의 정통성 문제를 심화시킵니다. 본래 종법대로라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세손이 되어야 했거든요.

 

 그나마 인조는 대중적인 평이 최악인 것 치고는 그만큼 무능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가 완전히 무능한 인간이었다면 신하들이 떠받들어 왕으로 모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온갖 난을 겪으면서 왕좌를 지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왕좌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닙니다. 기울어버린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도 꽤 했습니다. 흔한 이미지와는 달리 광해군은 쫓겨날 만큼은 암군이었고, 인조가 광해의 잘못을 많이 복구하였습니다.

 

 이후 봉림대군은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되었는데, 정통성은 약했지만 효종은 유능하고 현명한 왕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림들은 병자호란의 패전, -청 교체, 효종의 정통성 문제 등으로 관직을 거부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효종은 북벌론을 뻥카로 주장하면서 사림들을 끌어들입니다. 효종의 북벌론은 명분을 쌓기 위한 것이었을 뿐, 결코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조선이 무슨 수를 써도 청을 이길 수는 없었고, 효종은 어릴 때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왕자여서, 청이 얼마나 강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효종은 즉위 10년 만에 종기를 침으로 치료하다가 과다출혈로 사망하는데, 조선 왕 27명중 종기로 5명이 죽었을 정도로 전근대 의학은 형편없었습니다. 전근대의 삶이란 그 누구라도 죽기 쉽고 운이 아주 좋아야 오래 살 수 있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효종이 죽으면서 그 유명한 예송논쟁이 벌어집니다. 예송논쟁은 통상적인 인식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리학은 조선 세계에선 종교이자 철학이자 세계관이었습니다. 이는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에서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온전히 벗어난 철학과 과학이 있기 힘들었던 것과 같습니다.

 

 예송논쟁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조의 정비는 인열왕후 한씨였는데, 42세에 산욕열로 사망합니다. 그 후 15세의 장렬왕후가 인조의 계비가 됩니다. 인조와는 29살 차이였고, 효종보다도 5살이 어렸지요. 소현세자와 효종은 모두 인열왕후의 자식이었고, 장렬왕후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장렬왕후는 자의대비가 되었는데, 명목상 연하이나 효종의 의붓어머니인 자의대비가 몇 년 상복을 입느냐가 1차 예송논쟁의 주제였습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하면, 장자가 아닌 효종이 정통이냐 아니냐 논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효종의 아들이자 효종 다음 왕이었던 현종의 정통성까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정통성은 현대에도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도 어처구니없이 논란거리가 되지요? 예송논쟁은 그보다 훨씬, 비교할 수도 없이 중요한 논란거리였어요. 왕이 정통이냐 아니냐는 보통 논란거리가 아니지요.

 

 어쨌든 당시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1년론이 받아들여집니다. 서인은 1년론을 주장하면서도 장자도 1년 상을 치른다는 경국대전을 빌어 현종의 정통성을 애매하게 인정했지요. 여기까진 시끄럽긴 하지만 어쨌든 수습이 될 수 있었습니다만...

 

 그로부터 15년 후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친모인 인선왕후가 사망합니다. 그런데 자의대비는 이 때도 생존상태였습니다. 인선왕후보다 자의대비가 어렸으니까요. 이 때 자의대비가 상복 얼마짜리 입느냐로 또 싸우게 됩니다.

 

 일단 문제가 15년 전에 경국대전의 룰을 따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 룰에선 장자와 차남의 상복이 1년으로 같았는데, 며느리는 맏며느리는 1년이고 맏며느리가 아닌 경우 9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강씨는 사약을 받았으므로 인선왕후는 맏며느리라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인들은 1년 상복으로 처음에 결제를 받았는데, 그 다음엔 효종은 장자가 아니므로 9개월짜리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결국 현종이 분노했고, 자의대비는 남인들 주장대로 1년복을 입게 되었지요.




 여기서 또 예송논쟁의 중요한 점을 이야기하자면 서인과 남인은 다른 학파였다는 것입니다. 서인은 오천원 모델 율곡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남인은 동인의 분파여서 천원 모델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게 왜 중하냐 하면, 이 철학이 단순한 형이상학을 넘어 정치철학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대소신료들은 어쨌든 현실을 보고, 현실을 다루는 사람들이다보니 세계관대로 현실을 이해하고,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잠시 애초에 성리학이 무엇인지, 왜 조선이 성리학에 빠졌는지부터 이야기해보지요. 공자와 맹자가 유학을 정립할 때만 해도 유학은 그냥 지극히 실용적이고 현세적인 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후한 말 유학은 강한 도전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샤카족의 성자(샤카무니-이 산크리스트어 음차가 석가모니입니다), 고타마 싯타르타의 종교가 그것이었습니다. 그 때 중국에 유입된 거지요.

 

 후한이 온갖 군벌의 득세 끝에 멸망하고 삼국-서진-동진/오호십육국-남북조라는 400년간의 난세를 거치는 동안 불교는 중국 전역에 널리 퍼집니다. 도교도 부흥했고요. 난세는 유학이 힘쓸 수 없는 시기였지요. 이후 통일왕조로 자리 잡은 당나라에서도 불교와 도교가 활성화되었었습니다. 당은 다양한 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국가여서 크리스트교 네스토리우스파의 현지화 버전인 경교, 배화교 또는 현교로 불리던 조로아스터교, 현대엔 사라진 마니교 등도 퍼졌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듯 종교라는 건 문제를 곧잘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당나라 시절 불교도 꽤 문제가 많았다지요. 그리고 당의 뒤를 이은 송대에 나오게 된 성리학은, 쉽게 이야기하면 불교를 비판하는 관점의 유학입니다. 불교철학까지 포함하여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면서, 불교의 내세나 도교의 선계 같은 걸 반박한 것이랄까요. 다시 말하지만 유학은 출발부터 현세적인 학문입니다. 그런데 불교나 도교 같은 걸 나름 논리적으로 반박하려다 보니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된 것이지요. 그렇더라도 성리학의 목표는 현세적이었습니다. 일례로 성리학의 시초 주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귀신이 내세에서 돌아온다는 식의 발상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조선 건국 당시 성리학이 중시되었던 건 필연적이었습니다. 고려또한 국교나 다름없던 불교의 타락이 심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고려 말엔 사찰들이 부패한 기득권이자 적폐였습니다. 개혁적인 사대부들이 불교를 논박할 수 있는 성리학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불교는 금지까지는 아니라도 억압됩니다.

 

 다만 성리학을 연구하다보니 내부적인 모순 및 설명 부족 같은 것이라거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라거나 하는 게 발견되게 됩니다. 이는 당연하리만큼 세계의 법칙을 철학적으로 보다 잘설명하려는 시도로 이어졌고, 이런 시도 자체는 학술이 발달하면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만 조선은 현상을 관측하는 기술과 실험으로 검증하는 과학적 절차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고, 그에 관념적인 것이 중시되는 경향이 한동안 이어집니다. 사실 이런 경향은 현대의 인문학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이기론으로 돌아가서, 이기론을 쉽게 설명하면 이는 자연법칙 같은 거고 기는 현상이며 만물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어감이 다소 변하긴 했으나, 참된 이를 뜻하는 말이 진리라는 것에서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는 를 어느 정도 직관할 수 있고, ‘는 현대에 이해되는 에너지 같은 개념이라기 보단 우주 만물의 생성소멸이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한다고 옛 사람들은 생각했었습니다. 한편으로 성리학의 성이란 사람 마음의 성정중 성, 즉 본성을 뜻하는 것으로 사람의 본성은 곧 ()리라고 생각한 것이라 이해하면 쉽습니다. 그리고 성정 중 정, 즉 감정을 기라 이해한 것입니다. 성리학은 철저히 인본주의적이며, 성선설에 해당합니다. 이기론은 세계보다도 인간을 해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기의 관계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황과 이이는 견해가 달랐습니다. 이황은 좀 더 전통적인 시각이었습니다. 이가 먼저고, 더 중요하고, 더 존귀하다는 관점입니다. 이런 사상의 양상은 서양에도 있고, 어느 정도 인류 보편적인 옛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이것을 주리론이라 표현합니다. 이데아가 더 중요하다거나 육체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다거나, 그런 식 말입니다.

 

 그런데 이황과 정반대로 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주기론자가 있었으니, 송도삼절 중 하나로 꼽힌 화담 서경덕입니다. 이황과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그는 중국 성리학과는 다른, 독창적인 기 중심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다른 송도삼절 둘은 황진이와 박연폭포라 했지요. 그러나 서경덕의 후계 학파는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한 세대쯤 후의 인물인 율곡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을 어느 정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황의 주리론과 조화시킵니다. 이이가 주장한 것은 서경덕의 주기론과는 좀 다른 이기일원론인데, 이와 기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황 학파쪽에서는 이이를 주기론자라 공격하기도 했고요.

 

 조선의 붕당정치는 이이 시대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이는 붕당의 갈등 문제를 처음엔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군자들끼리 그렇게 치졸하고 집요하게 수백 년 간 싸울 거라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그지만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는 붕당의 한 일파인 서인의 시조가 됩니다.

 

 이이 본인은 붕당에 초연했지만 관직 할 때 적이 많았습니다. 뭐든 다 따지고, 선배 학자들 끝까지 비판하는 스타일이라 온갖 악감정을 만든 것입니다. 또 원체 잘난 천재에다 실무능력까지 있다 보니 질투도 많이 샀지요. 결국 이이의 제자들과 이이 시대에 밀려났던 훈구파의 후예들이 하나의 붕당 파벌이 되니, 그것이 서인입니다.

 

 이후의 붕당정치는 결국 본질적으로 집안 인맥 파벌 싸움이긴 합니다만, 다른 면에서 보면 퇴계학과 율곡학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예송논쟁으로 돌아가서, 주리론(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이 어떤 해석을 가능하게 했느냐하면, 이기론에서 이는 왕으로, 기는 사대부로 비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해석은 예송논쟁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로까지 이어집니다. 왕실의 법도와 사대부의 법도가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요.

 

 여기서 이기이원론은 왕실과 사대부의 법도는 다를 수 있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그렇지만 이기일원론에선 이와 기는 다르지 않다는 사상이니, 왕실의 법도와 사대부의 법도는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연장선상에서 율곡-서인의 이기일원론은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만민평등사상 비슷한 것까지 발달합니다. 누구나 사대부이며, 왕이고 노비고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는 철학적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실제 서인들은 신분제를 폐지하고 조선을 자영농의 국가로 만들어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상황이 좋았다면 그보다 좀 더 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후의 역사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지요.

 

 대조적으로 이기이원론은 이와 기의 위계를 인정합니다. 퇴계학파였던 남인들은 이라는 절대적 도덕 및 권위가 있고, 그에 대한 관념을 강화하고 질서를 회복해야한다는 입장이었지요. 그런데 현종 당시 붕당 파벌로는 서인이 남인보다 강했습니다. 그리고 현종은 남인에 약간 힘을 실어주고 균형을 맞춥니다. 사실 현종 입장에선 남인이 좋을 만도 했습니다. 서인의 권력을 현종이 바로 어쩌기 어려웠습니다만.

 

 그리고 현종은 원래 몸이 약했는데, 하필 2차 예송논쟁이 마무리되자마자 죽습니다. 이후 숙종이 즉위하지요. 예송논쟁은 그 사안의 중요함과 역사적 의미에 비해선 아무도 죽은 - 자연사 및 스트레스사 제외 - 사람이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논쟁이었습니다만, 숙종 대에 후폭풍이 발생합니다. 사실 유럽 같은 데선 예송논쟁 같은 거 있으면 그냥 전쟁이었지요. 어쨌든 조선 사대부는 나름 평화로웠던 겁니다.

 

 이런 와중에 즉위한 숙종은 조선 왕 중 가장 강한 왕권을 지닌 군주였고, 타고난 정치인이었으며 다혈질에 냉혈한이었습니다. 숙종은 조부 효종과는 대조적으로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효종의 장자인 현종의 장자였고, 3대 독자였습니다. 만약 숙종을 폐위시킬 경우 대신 앞세울 대군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신권이 극단적으로 강했던 인조 시대에서 4대만에 왕권이 극단적으로 강한 시대로 변한 것입니다.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의 책임을 물어 서인들을 내 쫓고,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귀양 보냅니다. 그리고 이후 숙종은 47년간 재위하면서 전기 20년 동안 3번의 환국을 일으키며 붕당정치를 뒤흔들어버립니다.

 

 붕당-탕평-세도-몰락으로 이어지는 조선후기사에서 숙종은 강한 왕권에 의한 탕평으로의 전환을 시작한 왕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으로 인해 왕도 사대부 중 하나라는, 정도전에서부터 이기일원론의 율곡을 거쳐 서인까지 이어지는 조선성리학의 한 흐름과 발달 양상은 멈춥니다. 즉위하자마자 서인을 쫓아내는 시점에서 숙종은 왕과 사대부의 격차와 위계를 선언한 것이었으니까요.


(다음 편에 계속)

경인고속도로 일반도로화 문제

사회 2017. 9. 15. 18:58 Posted by 해양장미


 경인고속도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고속도로로, 현재 인천항 근처의 용현동에서 시작되어 서울 양천구 신월동까지 이어집니다. 다만 이는 공식적인 것뿐이고, 실제론 신월교차로에서 그대로 쭉 자동차전용도로인 국회대로(구 제물포길)로 이어져 안양천을 건넌 후에야 서부간선도로와 교차하며 경인고속도로입구 교차로가 나오므로, 실질적으론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까지 이어지는 도로입니다. 실제 1985년 이전엔 공식적으로도 현재의 경인고속도로입구까지가 경인고속도로였였습니다.

 

 여하튼 경인고속도로는 대도시를 통과하는 도로임에도 경인선 철도처럼 도시한가운데를 지상에 지나가기 때문에, 여러 모로 말이 많은 상태이긴 했습니다. 인천은 에그 커터를 통과한 삶은 달걀처럼 남북으로 긴 도시를 여러 장애물이 잘라놓은 지형이어서 여러 문제가 생기고 있는데, 북쪽부터 경인아라뱃길, 경인고속도로, 경인선, 한남정맥, 문학산이 도시를 나누는 장벽들입니다. 실제 하나의 구였으며, 오랜 역사 속에서 한 생활권이었던 인천 옛 북구는 경인고속도로를 경계로 부평구와 계양구로 나뉜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랄까요. 예전부터 경인고속도로 지하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실제 서인천~신월IC구간은 지하화를 추진한다고 합니다. 이건 돈이 많이 들고 공사 중 통행문제가 생겨서 그렇지, 아무 문제가 아니지요.


 

 그런데 문제는 서인천 IC부터 인천 기점까지의 구간을 일반도로화시키려고 추진 중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 공사는 곧 첫 삽을 뜰 예정인가 봅니다. 관련 기사를 링크합니다. 이 문제는 경인고속도로 요금징수 논란과도 얽혀있습니다.

 

http://media.daum.net/v/20170905150230677?rcmd=rn

http://www.incheonilbo.com/?mod=news&act=articleView&idxno=779009

 

 안타깝게도 이 사안은 중요하며 큰데도, 의외로 인천시민들은 아직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보면 다들, 미친 거 아니냐는 식의 반응입니다. 사실 인천 시내 도로교통은 꽤나 갑갑한 면이 있고, 경인고속도로는 어느 정도 이상 시내 교통에 기여하고 있긴 하거든요. 출퇴근시간이 아닐 때에도 인천 기점부터 서울 방향은 정체될 정도로 차량이 많은 편이기도 합니다. 인천항 및 공업지대에서 출발하는 물류가 꽤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천 동쪽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고속도로 및 고속화도로는 서울외곽순환도로가 유일한데, 곤혹스럽게도 서울외곽순환도로의 부천 구간은 전국에서 가장 정체가 심한 유료도로로 악명 높습니다. 이건 독립 포스트로 다룰 예정이기도 한데, 이 탓에 인천 계양쪽에서 송도로 가는 자동차 최단시간 주행코스는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기점으로 나간 다음에 해안도로(아암대로)를 타고 가는 어이없는 우회 코스인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아암대로도 상습정체구간인데, 그래도 그 쪽이 그나마 빠른 겁니다.

 

 인천광역시와 유정복 시장, 이학재 의원 등은 인천 서구 시민들에게 경인고속도로의 일반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경인고속도로로 생활권이 나누어진 현지인들에겐 고속도로의 일반화가 이익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인천 IC에서 인천 기점까지의 고속도로까지 지하화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한동안 어려울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관련 기사를 링크합니다.

 

http://www.kyeonggi.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394324

 

 그러나 이 구간을 일반도로화시키면 제가 보기엔 해당 구간 도로교통이 너무 악화됩니다. 유정복 시장은 이 쪽을 일반도로화시키고, 대신 트램을 깔자고 주장하고도 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이 쪽에 다니는 차량은 산업용이나 비즈니스를 위한 차량, 원거리 쇼핑 등을 위한 차량이 많습니다. 트램으로 전혀 대체가 안 됩니다. 가뜩이나 비슷한 구간에 인천지하철 2호선이 깔린 상황이라, 이 구간에서 문제가 생기는 건 다른 용도의 차량들입니다.

 

 도시를 대중교통 위주로 바꾼다는 건 근본적으로 망상입니다. 경제가 성장하는 한 차량은 계속 늘어나고,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차량은 다녀야 합니다. 앞으로 전기차의 보급 등으로 큰 패러다임 변화가 있을지는 모릅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차량이 계속 늘어날 거라 가정하고 도시설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천은 서울보다는 그래도 부지에 여유가 있고, 반대로 대중교통은 취약해 아직은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게 편리할 때가 많은 도시입니다.

 

 인천시는 경인고속도로를 단순히 일반도로화시키는 걸 넘어, 차로수를 줄이고 녹지까지 확보한다는 식의 어이없는 발상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유정복 시장은 11월에 착공을 시작하고, 이걸 치적 또는 안건으로 내년 지방선거의 주제 중 하나로 삼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여튼 이 당이고 저 당이고 지나치게 낭만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현재 유정복 인천시장은 자유한국당 소속입니다. 친박근혜 인사였고, 중앙정부의 서포트를 받아 시장이 되었지요. 그러나 중앙정부의 서포트는 지선 이후엔 이어지지 않았고, 지금은 전국에서 가장 평가가 낮은 광역단체장입니다. 민주당에서 이 경인고속도로 문제에 대해 내년 지선에서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이 문제만 봐도 인천광역시의 여러 복잡한 골칫거리의 정치적 해결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핵 서울폭발시 예상 피해

사회 2017. 9. 10. 18:14 Posted by 해양장미

 6차 핵실험으로 인해 많은 분들이 불안과 관심을 보이고 있을 거라, Nukemap이라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대략적인 피해정도를 예측해보도록 하겠습니다.

 

 6차 핵실험에서 북조선이 실험한 수소폭탄의 예측 위력은 대략 100kt정도로 추정합니다. 여기서 +-가 어느 정도 될 것입니다만. 일단은 이 정도로 하고.



 서울의 지형과 각종 시설 배치 등을 볼 때 대량살상을 위해 전략핵폭탄을 투발하기 가장 적합한 지역은 남대문시장 쪽이라 생각합니다.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선 공중폭발을 시키는 게 좋습니다. 그 시나리오에서 피해 지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중앙의 노란 원은 광구입니다. 온도가 1억도 이상까지 올라가니까, 인체 같은 건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극심한 피해를 입는 지역으로 반지름 380m입니다.

 

 그 다음 녹색 원은 500rem 방사능 노출지역입니다. 이 정도의 방사능을 받으면 적절한 치료가 없을 경우 50~90%가 사망합니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몇 주에 걸쳐 죽게 됩니다.

 

 그 다음 회색 원은 5psi 폭풍지대입니다. 핵폭발에 의한 광구의 발생은 강력한 폭풍을 일으키는데, 아주 많이 부서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망 또는 부상 확률이 매우 높은 지대고요. 반지름은 3.26km입니다.

 

 맨 바깥 원은 3도 화상을 입는 지대를 표시한 겁니다. 그 안에 있으면 너무 뜨거운 빛이 쏟아지고 열폭풍이 불어서 3도 화상을 입는다는 겁니다. 전신 3도 화상을 겪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겠지요. 다만 폭풍과 열기는 산악지대나 건물 등에 막히면 위력이 줄어들긴 합니다. 지도를 볼 땐 그것까지 감안해 봐야 하고요.

 

 프로그램에서 예상하는 사망자 수는 315980, 부상자 수는 1425500명입니다. 깃발은 낙진이 퍼질 걸로 예상되는 방향이고, 여기 표시된 것 이상으로 낙진 등에 의한 피해는 늘어납니다. 다만 수폭에 의한 방사능 피해는 비교적 일시적이라 며칠이 지나면 큰 피해를 입게 되진 않습니다. 초기에 피폭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일단 북조선이 민간지역에 전략핵무기를 쓸 확률은 결코 높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북측이 최대한 위력을 높인 핵무기를 사용하게 되면, 반경 5km지대엔 산악 등으로 막히지 않는 한 궤멸적인 피해가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론 이는 100kt급 핵무기를 사용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수폭을 개발했으니 북조선이 mt급 핵무기까지 머지않은 미래에 개발한다 가정하면, 1발의 투발만으로도 180만에 육박하는 사망자와 400만 이상의 부상자를 낼 수 있게 됩니다. 수소폭탄의 무서운 점은 위력을 높이기 쉽다는 데 있습니다.

 

 만일 북측이 민간지역에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중국과 러시아도 북측을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3차 세계대전을 핵전쟁으로 벌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지요. 그리고 북조선은 핵보복으로 섬멸당할 것이고, 김정은은 어떠한 나라에도 망명할 수 없기에 살아남을 수 없게 됩니다.

 

 만일 김정은이 민간지역에 핵을 쏜다면 그것은 미국 등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총기난사와 같은 심리일 때 가능할 것인데,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김정은 일가의 생존과 안전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항복을 강력 권고해야 할 것입니다.

가까운데 지명이 같은 곳들의 이야기

사회 2017. 9. 6. 23:42 Posted by 해양장미

 그다지 멀지 않은, 다른 두 동네 이름 등이 한글 표기 기준으로 똑같은 경우가 꽤 있습니다. 본문에선 서울, 인천, 고양, 김포 등지에서 같은 동 이름 등을 몇 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이런 경우는 꽤 있습니다만 제가 아는 정도만 다룰 것이기에, 댓글로 내용을 보태주셔도 좋겠습니다.

 


김포 장기동


인천 장기동


*) 인천광역시 계양구 장기동 - 경기도 김포시 장기동

 

 워낙 가까워서 제법 골치 아픈 케이스입니다. 서로 직선거리가 7km도 안 되거든요. 인천 장기동은 법정동으로 존재감이 별로 없긴 합니다만, 그래도 계양역 바로 북쪽이 장기동입니다. 행정동으로는 계양 1동 쪽이고 계양대교 북쪽 사거리 이름이 장기사거리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김포로 들어가도 또 장기동이 나오지요.

 

 생활권도 유사성이 있어 김포 장기동과 인천 장기동을 한 번에 지나가는 버스도 좀 있습니다. 현지인은 딱히 혼동하지 않으나 외지인은 얼마든지 혼동할 수 있습니다. 아까 장기동 한참 전에 지나온 것 같은데 아직도 빙빙 돌아 장기동이야? 같은 생각도 할 수 있지요. 이 쪽만큼은 김포 장기동, 인천 장기동이라는 표기를 일부러 쓰기도 합니다. 인접지역이 행정구역이 다름으로 인해 나타나는 문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김포 장기동은 실제 인천광역시와 인접지입니다.

 


광주광역시 송정동


경기도 광주시 송정동


서울 강서구 송정역 일대


서울 송정동


*) 서울특별시 성동구 송정동 - 서울특별시 강서구 송정역 일대 - 경기도 광주시 송정동 -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송정이라는 지명은 흔해도 너무 흔합니다. 전국에 송정이란 지명 꽤 많아요. 그러다보니 가까운 곳에 송정이라는 지명이 겹치고, 같은 도시 이름에 송정동이 중복되는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서울 성동구에 송정동이 있습니다. 작은 동이고 대부분의 면적을 중랑천과 차량사업소가 차지하다보니 존재감은 없는 편입니다만... 엄연히 주거지는 있습니다. 그래도 워낙 주거지역이 좁아서 주민등록상 인구는 12000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문제는 서울에서 송정이라는 이름으로 여기보다 유명한 곳이 있으니, 강서구 송정역 일대입니다. 김포공항 바로 앞이지요. 이 곳은 현재 강서구 공항동입니다만, 원랜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였고 쭉 송정으로 불렸습니다. 김포공항 바로 앞이니 잘 알려진 지명이고, 실제 가까운 인천이나 김포, 부천, 고양 사람들이 아는 송정은 이 쪽입니다. 그래서 그냥 서울 송정동이라고 하면 송정역 일대겠거니.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곡 개발 이전에는 꽤 유동인구가 많던 동네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송정동에서 직선거리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경기도 광주시에도 송정동이 있습니다. 거긴 또 광주시청이 있는 곳이지요. 서울 송정동에서 송정역까지의 거리도 21km라서, 대략 그 거리마다 송정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경기 광주에만 송정동이 있는 게 아닙니다. 같은 이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에도 송정동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이름 교통정리가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인천 연희동


서울 연희동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 인천광역시 서구 연희동

 

 서울 연희동은 연세대 신촌캠퍼스 서북쪽, 서대문구청이 있는 쪽으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어쩌다보니 전두환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불명예도 있지만, 번화가에서 살짝 떨어진 오래 된 부촌이지요.

 

 그런데 멀지 않은 인천에도 연희동이 있습니다. 공촌사거리, 아시아드경기장과 행정동 청라1동이 속한, 인천 서구청이 속하지는 않지만 그 인근으로 오래 전부터 알려진 지명입니다. 두 지역의 직선거리는 20km가 살짝 넘는데, 가까워서 혼동될 정도는 아니라도 나름대로 읭 하는 생각이 들기 충분할 정도는 됩니다. 게다가 인천공항철도로 거의 근처까지 쉽게 오고갈 수 있다 보니, 양쪽 인근을 자주 오다니는 사람도 많습니다.

 



 

*)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모래내시장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모래내시장

 

 인천 구월동 모래내시장은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재래시장입니다. 근래 인천지하철 2호선에 모래내시장역이 생기기도 했지요. 이 시장에선 결코 재래시장의 위기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인천의 실질적 도심지대에 위치한데다, 재래시장 한복판에서 인파와 함께 서행하는 BMW, 벤츠를 쉽게 볼 수 있는 이상한 곳이거든요.

 

 그런데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도 모래내시장이 있습니다. 위에 이야기한 서울 연희동 바로 옆으로, 경의중앙선 가좌역이 있는 곳입니다. 여담이고 밑에 또 이야기할 거지만 인천 서구에도 가좌동이 있어서, 그 가좌동에 최근 생긴 인천 2호선 역은 인천가좌역으로 이름을 구분해 놓기도 했습니다. 두 시장의 직선거리는 약 21km정도. 애매한 데서 내비게이션으로 모래내시장을 찾으면 두 시장이 같이 나오기도 합니다.

 

 서울 모래내시장은 인천 모래내와는 달리 수명이 다해가는 곳입니다. 한 때는 일대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는데, 이젠 없애고 1,2층만 시장으로 하는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거라 합니다. 그런 게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곳이 되겠지요. 아직은 아주 오래 된 동네의 흔적이 남아있고, 꽤 유명한 듯한 신흥떡볶이라는게 이 곳에 있다 합니다. 나는 떡볶이를 별로 안 좋아해서 이름만 들어본 정도입니다만...

 

 모래내라는 이름은 대체로 하천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하천이 있고, 모래사장이 근처에 있었다는 말이지요. 요즘은 대도시에선 자연하천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만, 30년 전엔 대도시에서도 자연하천과 징검다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천 주변에 모여 살며 시장을 이루었던 것이겠지요.

 



인천 논현동


*)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서울 강남 논현동은 유명한 동네라 설명이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사각형 모양 동네입니다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지요.

 

 그런데 인천에도 논현동이 있습니다. 유명한 소래포구 쪽이 논현동인데, 남동공단(남동인더스파크) 일부를 포함하는 제법 넓은 지역이면서 주거지 쪽은 인천에선 꽤 부자동네입니다. 서울 논현동과의 거리는 가장 가까운 곳이 26km가 좀 안됩니다. 이 두 곳 사이에도 제법 왕래는 있습니다.

 

 문제는 인천 사람들한테도 인천 논현동보단 서울 논현동이 더 유명하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천 급행간선 905번 버스는 계양역에서 논현동 쪽으로 운행하는데... 계양 일대 거주자들 중 다수는 인천 논현동에 대해 잘 몰랐고, 지금도 다수가 잘 모릅니다. 소래포구 쪽이라고 하면 알지만요. 근래는 905번 종점표기가 한화지구로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만, 옛날엔 그냥 논현동으로 되어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 보고 서울 논현동으로 가는 버스인건가? 라고 생각한 계양 사람들이 좀 있었습니다. 실제 계양에서 서울 논현 근처 강남역 일대까지는 한 번에 가는 버스들이 있다 보니, 충분히 혼동될 수 있었지요.



경기도 고양시 가좌동


인천 가좌동

*)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동 -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동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남가좌동

 

 가좌라는 말은 옛 말로 가재를 뜻한다 합니다. 예전엔 개울이 많았고 가재도 흔했고, 개인적으로 어릴 때만 해도 대도시 내에서 가재를 잡을 수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천 서구 가좌동은 일대에서 꽤 알려진 동 이름입니다. 1980년대에는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던 동네였다고도 합니다. 거주지보다는 산업단지가 차지하는 면적이 훨씬 큰 법정동이지만요.

 

 그런데 멀지 않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에도 가좌동이 있습니다. 가까운 곳은 직선거리로 19.5km 정도입니다. 이 곳은 3호선의 끝인 대화역 서쪽으로 농경지대 안쪽이며, 다수의 아파트단지가 있습니다. 실제 길을 따라가면 대화 서쪽 경기장을 지나 한적한 길을 좀 달린 후 도시 끄트머리 지역이 나오는 기분입니다. 그리 큰 지역은 아닙니다만, 인근에 같은 지명이 있지요.

 

 한편으로 위에 모래내시장 이야기에서도 나왔지만, 서울 서대문구에 남가좌동과 북가좌동이 있는데 여긴 원래 가좌동이었던 한 동을 둘로 나눈 것입니다. 대략 DMC, 명지대 일대라 하면 설명이 쉽겠지요. 그래서 가좌역이 있고, 가좌 또는 가재울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또한 이 지역은 일제시대엔 고양군이었는데, 위의 일산서구 가좌동과는 당시에도 같은 지명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인천 원당동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 인천광역시 서구 원당동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인천 검단 쪽은 법정동과 행정동 이름이 유리된 지역입니다. 원당동은 법정동이며, 행정구역으로는 검단3동에 속합니다. 실제 지명에는 법정동명이 많이 쓰이는데, 검단은 앞으로 인천시 쪽에서 손을 많이 대고 정비도 많이 해야 할 지역이며 동명도 신경을 좀 더 쓸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직선거리로 13km 조금 넘게 떨어진 고양시 덕양구에도 원당동이 있습니다. 3호선 원당역 근처인데요. 실제 원당역은 원당동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원당동은 고양시 소속이지만 도시지역은 아니고, 허브마을이나 화훼단지 등이 있는 교외지역입니다. 두 지역이 가깝지만 둘 다 잘 알려진 지명은 아니라서, 아직 혼동까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서울 도림동


인천 도림동


*)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림동

 

 인천광역시는 지형 등의 문제로 인근 현지인도 잘 모르는 숨겨진 동네가 많은 편인데, 남동구 행정동 남촌도림동 일대는 거의 도시 한복판의 오지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조선시대엔 존재감이 있는 곳이었다는데, 개항과 그린벨트 지정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이리되었지요. 도림동은 행정동 남촌도림동에 속하는 법정동인데, 대부분의 지역이 오지이지만 그래도 면적이 큰 편이고 아파트단지도 있고 해서 주민등록인구가 24000명 정도는 됩니다.

 

 서울 도림동은 동 이름은 몰라도 인근의 신도림역은 많이들 알 겁니다. 전국에서 가장 북적거리는, 하루 50만 인구가 다녀서 헬도림 소리까지 듣는 환승역이지요. 서울 도림동 옆엔 도림천이 흐르고, 도림천을 경계로 신도림동과 인접해 있습니다. 행정동과 법정동이 일치하는 곳으로, 주로 주거지역인데 오래 된 동네인데다 중국인 거리인 대림쪽과 가까워서 중국인들도 요즘은 많이 산다고 합니다.

 

 인천 도림동과 서울 도림동 사이의 직선거리는 16.5km가 조금 안 됩니다. 가까운 편이지요. 인천 도림동이 워낙 오지여서 그렇지, 조금 유명한 동네였으면 혼동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잘 안하는 개인적 이야기입니다만, 내가 다녔던 어린이 시절 학교는 축구 인기가 매우 좋던 곳이었습니다. 유명한 프로축구선수도 나올 정도였어요.

 

 그러다보니 남학생들 뿐만 아니라 여학생들도 축구를 좀 하긴 했습니다. 자주는 안 했고, 가끔입니다만...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한국에서 여학생들이 축구하는 건 아직도 드물겠지요. 한국에서 운동장 전체를 쓰는 운동 중 대중적인 건 축구뿐이지요?

 

 일반화시킬 수는 없습니다만, 나의 경험으로 여학생들한테 축구를 시켜 놓으면, 축구사적으로 대략 19세기 식 축구가 재현됩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포지션의 개념이 사라집니다.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키퍼 제외 전원이 공을 향해 달립니다. 경험도 코치도 지식도 없으니 일어나는 일이겠습니다만, 나는 남아들은 이런 문제에선 본능적으로 역할을 나누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여아들은 잘 그러지 않는다고 추정합니다. 이는 사냥 유전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넌 좀 수비보라고 해도 바로 수행이 안 된단 말이지요.

 

 그리고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진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한 번은 여학생 대 남학생으로 교사가 심판을 보는 가운데 성대결 축구를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2차 성징 전이니 신체능력이 큰 차이까지는 아니었습니다만... 40분간 경기한 스코어는 대략 2:21 정도였던 것 같고 두 골은 처음에 남학생들이 일부러 봐주느라 실점한 것이었으며 10골 정도 넣은 후에 남학생들은 전혀 축구를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축구는 성대결을 벌이기 적합한 종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원래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건 고무줄놀이와 공기였지 축구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선 축구가 여자 운동이라지만 한국에선 그렇게는 잘 안되나 봅니다. 고무줄은 여학생 전용 놀이였지만 공기는 아니었는데 여학생들이 잘했었습니다. 고무줄은 운동량이 있고 고난이도가 되면 살짝 아크로바틱에 가까워집니다만 공간을 많이 안 쓰기 때문에, 운동장은 남학생들이 주로 썼지만 거기에 불만 가진 사람은 없었고, 그보단 고무줄하기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걸 중요하게 여겼었습니다. 반그늘에 공이 날아들지 않는 곳이 좋은 자리입니다. 소녀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고무줄을 넘었었지요.



 한편으로 위례별초 페미 교사를 옹호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의 권미혁, 금태섭 두 의원. 전교조. 그리고 성폭력 무고죄를 폐지하려 나서는 대표적인 단체 한국여성의전화. 또한 게구리 게이머를 괴롭히다 결국 공개 사과했으며 동춘동여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활동했다고 알려진 전디협 등이 나섰습니다. 정말 잘 어울립니다. 위례별초 교사는 아들을 임신했다는 것에 혐오감을 드러내며 한탄을 했었다고도 알려졌지요. 그것이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교사였다면, 남들을 불쾌하게 만들 시간에 소녀들에게 뛰어 노는 법을 알려주려 노력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옛날엔 뛰어노는 여아를 보는 게 어렵지 않았거든요.


 소녀들의 운동을 위해 필요한 건 페미니즘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