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인 깨시민들의 반민주성에 대하여

정치 2013. 10. 17. 19:50 Posted by 해양장미

 걸핏하면 민주주의를 외치는 깨시민들이 실제로는 반민주주의자라는 이야기는 지난 포스트, ‘마지막 남은 샛노란 맹신자들의 횡포에 대하여’등의 포스트에서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던 적은 없는 것 같아서, 이번 포스트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려 한다.


 우선 역시나 지난 포스트, ‘흔한 오해 중 하나 - 민주주의는 정의인가?’  에서 이야기했듯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없이 민주주의를 아무 데나 가져다붙이는 게 깨시민들의 첫 번째 문제다.


 이런 오해가 나오는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주권과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대체로 깨시민들은 시민이 좀 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SNS를 통한 소통을 강조하고 모바일 투표와 여론조사를 통해 당내 후보자를 선출하는 등의 행동도 이런 발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가, 이렇게 되면 될수록 1인 1표제를 중심으로 하는 보통선거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데 있다. 즉 행동을 하는 시민들이 정치에 깊이 개입하려 하면 할수록 목소리 큰 일부 사람들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된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대체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정말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그 정도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게 불가능하다. 또한 보다 온건하고 덜 과격한 사람들은 더 과격한 사람들에 밀리기 쉽다. 깨시민들이 전투적이고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비아냥거리는 경향이 강해진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또 문제가 많은 게, 보통 시민들이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시간적/인지적 한계가 분명하다는 데 있다. 즉 시민들이 더 개입하면 개입하려 할수록, 보다 심도 있고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여지는 낮아진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당 내에서 한 번 거르는 시스템이 사라지고, 깨시민이 개입해 깨시민에게 인기를 끄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기 쉽다. 민주주의 자체가 중우정치화될 위험성이 있는데, 소위 깨시민들에 의해 보다 급격한 중우정치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를 일으키는 이런 깨시민들의 의식 또한 사실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않다. 그들의 성향을 보면 유교적 도덕주의 및 철인정치론을 내세울 때가 많다. 실제 예를 들면, 그들은 ‘각자의 이익’의 집합으로 나타나는 민주주의의 성향과, 이익과 인기를 위해 애쓰는 정치인들을 비난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사실 플라톤 등 민주주의에 대한 각종 비판자들의 관점과 거의 일치한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플라톤이 주장했던 철인정치는 당시 민주정의 단점을 극복해보고자 나온 것이었다.[각주:1] 민주정의 탄생부터 문제제기까지 플라톤의 주장은 분명 옳다. 다만 그의 문제 해결을 위한 주장은 현실과 크게 어긋난 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이상 현실 속에서 실행되었던 국가는 서구보다는 동아시아에 많았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초기 조선을 본다면, 일정 이상 이상사회에 가깝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실제 역사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대체로 민주정을 고수한 쪽이었다. 한반도만 봐도 플라톤의 방식에 더 가까운 국가는 이쪽보다는 북조선이라 볼 수도 있다.


 깨시민들은 역사적 사실들에 무지하지는 않다. 그렇다보니 그들은 곧잘 모순되는 주장을 한다. 민주주의를 찬양하고, 더 민주주의를 늘려야겠다고 말하면서도 생각하는 방식은 철인정치 및 유교식 도덕주의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신한국-한나라-새누리당이 무언가를 하는 데 대해 반대를 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기엔 그들의 정치철학적 기반이 사상누각이기 때문이다. 친노 정치인에 대해 맹신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또한 다 이유가 있다. 철인정치론에선 본래 통치계급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고, 깨시민들이 인정하는 통치계급이 친노세력인 거다. 물론 더 이성적인 이야기를 하기엔 그들은 너무 어리석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민주주의는 단점도 많고 부작용도 항상 있는 체제다. 결코 절대선이 아니고, 윤리적인 체제도 아니다. 태생부터 민주주의라는 것은 기존 질서를 전복하면서 등장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기존 도덕/윤리/질서를 뒤엎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현실적으로 민주주의는 시민의 선택을 받아야 하기에 정치인들은 시민의 인기를 얻어야 하고, 달콤한 거짓말을 해야 하며 잘 작동하지 않을 경우 매번 근시안적인 정책이 발생하기 쉽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각종 태생적인 문제점들을 충분히 스스로 잘 해결할 수 있는 제도라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철인정치를 주장한다면 민주주의라는 말을 앞세우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옳다. 이미 1987년부터 민주주의 제대로 하고 있는 데 26년째 자꾸 아직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공감을 얻기 어렵기도 하고.


 민주주의에서 ‘도덕’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이익과 이미지가 민주주의의 양대 힘이고 도덕은 이 중 이미지를 구성하는 한 요인일 뿐이다. 실제 시민들은 누군가가 도덕적인지 판단하기가 어렵고, 정치인의 도덕성이 각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너무나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현대 사회의 특징 상 일반도덕은 정치적 일면에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깨시민들의 배타적이고도 광신적인 자세는 도덕주의의 본질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신하는 이들은 지극히 위험하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무시하고 집단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치닫기 쉬우며, 대단히 폭력적인 모습을 취하곤 한다.


 한국에 윤리와 신뢰가 부족한 것은 도덕주의가 없어서가 아니다. 도덕주의의 과잉은 대체로 역설적인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배려, 열린 마음, 온정, 관용, 내가 틀렸을지 모른다는 여유가 실제로 사회를 더 윤리적이고 믿을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도덕주의자들에게는 저런 게 심히 부족하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깨시민들은 나이 어린 꼰대이자 타자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배타적 괴물이 되어 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도덕은 스스로에 대한 것이고, 도덕주의는 남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나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게 좋은 것이다. 도덕적인 깨시민들이 반민주적인 것은 당연하며, 선거에서 매번 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은 매번 공분을 일으키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깨시민보다 훨씬 성격이 좋기 때문에 그런 공분에 동감하지 않는다. 나와 같이 화내! 화내지 않으면 너는 악이야! 라고 말하는 그들을 보통 사람들은 ‘뭐 그렇게까지 화를 내야하냐?’, ‘미쳤구먼.’ 정도로 생각한다. 원래 사람들은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에 화를 잘 내고, 남 일에는 화를 잘 안 내는 게 정상이다. 물론 실제 동정심과 공분 심리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히려 동정심이 부족한 건 깨시민 쪽이다.


  1. 플라톤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 또한 민주주의와 관련이 깊다. 소크라테스 또한 플라톤처럼 반민주주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 선고된 것은 그가 민주주의를 비판했기 때문이었고, 사실 사형판결 또한 그에게 겁을 주고 쫓아내기 위함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거기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는 식으로 (이걸 직접 말하진 않았다) 죽음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본문으로]

대한민국 VS 브라질 A매치 (2013.10.12 상암)

운동 2013. 10. 13. 07:35 Posted by 해양장미

 웬만하면 프로 스포츠 이야기는 본 블로그에서 잘 안하려 하지만, 워낙 파격적인 졸전을 본 후라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스타팅 멤버 보자마자 든 생각이 ‘지려고 작정했나?’ ‘구자철 심장 터지겠다.’정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스타팅이었는데, 나는 홍명보 감독의 역량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방식대로 하는 게 준비기간이 짧은 토너먼트에서는 꼭 나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동원

   김보경   구자철   이청용

           한국영 기성용

김진수  김영권 홍정호  이용

               정성룡


 이 구성의 가장 두드러지는 문제는 한국영과 기성용이 둘 다 다이나미즘이 떨어진다는 데 있다. 커버 범위가 넓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경향이 낮다. 이렇게 되면 구자철이 더 많이 내려왔다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본래의 공격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어려워진다.


 홍명보는 수비 출신이어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라인을 내리고 선수비 후공격을 하는 방식의 축구를 선호한다. 저 구성으로 브라질을 어떻게 상대할까 싶었는데, 역시나 라인 자체가 매우 낮았다.


 라인을 낮춘 상태에서 피지컬로 부비면 브라질은 꽤 난감해지긴 한다. 신체조건에서는 기성용을 앞세운 한국이 아무래도 유리하다. 브라질 또한 조가 브라질 대표팀 원톱이라기엔 실력이 모자란 편이고, 네이마르와 헐크 양 윙어는 보기보단 낮은 수비라인을 상대로 곧잘 어려움을 겪는 타입이다. 알베스 또한 공간이 없을 때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되면 한국도 공격하기가 어렵다. 구자철은 생각이 많아지면 전혀 제 실력을 못 내는 타입인데, 이번 경기에서는 수비를 너무 신경 써서인지 혼자 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인지 본래 실력의 반도 못 냈다. 지동원에게도 짐은 너무 무거웠고, 공격을 할 때의 한국 선수들은 거의 항상 상대보다 소수였다.


 이런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최대한 실점하지 않는 것이다. 선제골을 넣으면 더 좋지만, 일단 실점하고 나면 워낙 무게중심을 후방에 잡아놓은 상태라 방법이 별로 없다. 나는 브라질이 우리가 웅크려야 할 정도로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브라질은 조건에 따라 자신들보다 더 강한 상대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 팀이지만, (예 :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에서의 승리) 백 포를 제외한다면 아직 과거의 강하던 브라질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네이마르는 고평가를 받고 있지만, 나는 네이마르가 아구에로나 디마리아보다 못한 선수라 생각한다.


 김보경과 이청용이 하드워커로 제 역할을 잘 해준 덕에 전반은 어느 정도 원하는 대로 되어갔다. 단 실점 전까지만, 전반 막판에 득점이 된 네이마르의 프리킥은 잘 차기도 했는데, 수비벽이 제대로 뜨질 않았다. 벽 쪽으로 왔기에 정성룡은 막기 힘들었고, 이로 인해 거의 승부가 기울어버렸다.


 내가 홍명보의 축구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저렇게 할 경우 선실점을 했을 때 대안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실점을 한 팀은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데, 저 구성은 제대로 앞으로 나가려면 2명은 교체를 해야 한다. 그나마도 빨리 핵심적인 변화를 주었다면 조금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오히려 후반 시작과 동시에 교체를 먼저 한 쪽은 브라질이었다. 스콜라리는 전반에 활약이 미미했던 헐크를 빼고, 중앙에서 상당한 다이나미즘을 가져갈 수 있는 하미레스를 투입함으로 유명감독의 자세를 보여줬다.


 미드필드의 역동성이 부족한 한국은 포워드쪽만 죽어라 뛰어다녔고, 반격을 위해 수비라인을 올리자마자 오프사이드 트랩이 깨지면서 오스카에게 추가 실점을 했다. 이는 매우 무능한 실점 장면이었는데, 수비라인을 올릴 때 절대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다. 그러고 한국 선수들은 두 점차에 한동안 멘붕을 해버렸다. 실제로 이 시점에서 거의 승부 끝.


 홍명보는 여전히 승부를 거는 게 늦었고, 그나마 교체도 지동원을 이근호로 바꾸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지동원은 고립되어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그나마 키가 큰 브라질 센터백 둘을 상대로 어느 정도 제공권이라도 확보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포기. 이근호는 전혀 센터포워드 기질이 없기에 홍명보는 아예 톱을 뺀 것이었고, 이는 좋은 선택이 되기 어려웠다. 브라질의 두 볼란테는 그 둘만으로도 역동성 없는 한국의 미들을 충분히 장악할 수 있었고, 하미레스는 중앙을 지원할 필요 없이 헐크가 뛰던 위치에서 뛰어다녔다. 하미레스의 기동성으로 인해 네이마르는 보다 더 쉽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반격이 필요한 한국은 브라질이 공격할 때마다 위험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그 다음 홍명보의 선택은 구자철을 빼고 손흥민을 투입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더더욱 최악의 선택이었다. 구자철이 이 경기에서 못한 이유는 커버범위가 너무 넓고, 머릿속이 복잡한데다 제 때 그를 도와줄 사람이 달려오지 않았던 탓이 크다. 그는 충분히 자유로울 때, 스스로의 판단과 감으로 마음껏 공격을 펼쳐나갈 수 있을 때 제 실력을 발휘하는 선수다. 그런데 그를 빼고 개인 공격 외엔 거의 할 줄 아는 게 없는 손흥민을 넣자 한국의 미들은 그대로 더 얇아졌고, 이근호는 구자철의 롤을 어느 정도 대신해야 하게 되었으며 그나마 손흥민의 공격은 브라질에 통할만한 속성의 것이 아니었다. 그처럼 개인기를 앞세운 공격은 브라질 선수들에겐 너무 익숙하다. 손흥민이 개인 능력으로 상대하기에 아직 단테와 루이스, 그리고 알베스는 좀 버겁기도 하다.


 구자철이 빠지고 이청용과 김보경의 체력이 바닥나면서 한국은 점점 더 심하게 밀렸다. 네이마르와 하미레스는 한국 수비 요원들이 충분한 커버 없이 잡을 수 있는 스피드가 아니고, 포워드가 수비를 도와주기 어렵게 되면서 처참하게 밀렸다. 골 자체는 나오지 않았지만 홍명보는 대응책을 전혀 마련하지 못했고, 흐름을 전혀 바꾸지도 못했다. 차라리 흐름을 바꾸려 노력하다가 한두 골 더 먹히는 게 낫지,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지는 건 가장 처참한 패배다.


 이후 뒤늦게 고요한과 윤일록을 투입한 것도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저 둘은 스피드가 좋은 플레이어지만, 알베스와 마르셀로가 원래 스피드가 좋은 풀백인데다 브라질은 전혀 수비라인을 올릴 필요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또 둘을 도와줄 만한 성격을 가진 선수도, 세밀한 공격 전술도 없었다. 손흥민은 아직 그다지 동료를 이용할 줄 모르고, 이근호는 구성과 위치로 인해 본래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하드워커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추가골을 먹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아무것도 못해보고 졌다는 점에서 이 패배는 최악이다. 대중들은 두 골 차밖에 안 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클럽 감독이 이런 식으로 몇 경기 하면 아마 서포터들이 프론트로 쳐들어 갈 거다. 게다가 이번 경기는 상암인데... 상암에서 이리 심한 대표팀 졸전을 본 게 얼마만인지.


 이 경기보다는 2010년 월드컵 본선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1:4로 졌던 경기가 더 잘했다. 그땐 그래도 승부를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만회골도 넣었고, 허정무가 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몇 경기 하면 한 경기는 이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번같이 하면 10경기해도 10경기 다 진다. 거의 슈팅 한번 제대로 못 한 것 같은데, 멤버가 비슷했던 작년 올림픽 때보다도 못했다.


 또한 기성용이 굳이 나와야했는지도 의문. 기성용이 대체 불가능한 자원도 아니고, 그의 죄가 대표팀을 생각한다면 그리 가볍지도 않은데 그는 너무 쉽게 복귀했다. 최강희가 너무 대인배지. 네이마르 첫골도 기성용이 점프 제대로 안한 데로 날아가서 먹혔고.


 이제 월드컵 본선까지는 1년도 안 남았다. 그 때까지 이 난감한 팀이 조직력을 좀 갖추는 게 가능할지, 나는 그다지 기대를 걸기 어렵다. K리그는 강하지만 대표팀은 약하다. 그 이유는 한국에 좋은 선수가 없어서가 아니다. 내년 여름이 되면 또 한 번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축구에 관심을 갖고, 거리에 모여서 붉은 옷을 입고 열광적인 응원을 펼치긴 할 거다. 그런데 우리가 내년에 한국 경기를 3경기 이상 볼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좀 회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