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근래의 4대 악제(나쁜 제도)로 도서정가제,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 대형마트 의무휴업, 그리고 도로명주소제를 꼽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중 가장 나쁜 한 가지를 꼽자면, 저는 도서정가제를 꼽겠습니다.

 

 도서정가제가 큰 문제가 되는 건, 이 제도가 결과적으로 독서율과 도서구매율을 떨어뜨리고 영세출판사와 서점을 줄이는 가운데, 도서관 장서수도 줄이고 출판되는 도서 총량의 양과 질까지 줄임으로 결국 국민의 평균적 지적수준 및 정서함양에 적잖은 악영향을 끼칠 확률이 대단히 높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도서정가제에 찬성하는 일부 출판사나 서점을 보면, 그 통찰력 없음과 어리석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됩니다. 단기적으로 이익 보는 사람이 개중 없진 않겠으나, 아닐 쪽이 훨씬 많은데 장사하는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멍청하면 사실 이익 보기 힘든 게 당연합니다. 물론 법안을 만들고 제정한 사람들의 대책 없는 어리석음과 불통, 고집스러움은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개정된 도서정가제가 정말 어처구니없는 제도인 가장 큰 이유는 이게 재고처리를 불가능하게 하는’, 도무지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악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땡처리 없는 장사는 없는 법이고, 현실적으로 장사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재고처리인데 이걸 못하게 하는 악법을 다 보다니 참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 가능한 게 인생사라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진 것임에는 틀림없는 듯합니다.

 

 장사할 때 재고처리는 그냥 중요한 정도가 아닙니다. 상품이라는 게 원래 시장에 내놓기 전에는 잘 팔릴지 안 팔릴지 분명하게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상인은 안 팔리는 제품을 할인해서 처리합니다. 제 때 재고를 정리하지 않으면 새 상품을 생산할 수도, 들여올 수도 없습니다. 책을 좀 사시는 분들은 좀 사기만 해도 그게 얼마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지 잘 아실 겁니다. 진열할 때 구간 도서가 너무 많으면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의류, 신발 등이 괜히 아울렛이 있는 게 아닙니다. 책도 옷이나 신발정도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비슷한 점이 있는 게 은근히 유행이나 시대를 많이 타고, 시일이 지나면 악성재고가 쌓이는 상품입니다. 잘 팔리는 책은 여러 쇄를 찍지만, 안 팔리게 되면 초판도 소화 안 되는 게 책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개정된 도서정가제는 도대체 망상을 해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이런 법을 만들 수 있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갑니다. 이 어이없는 제도 아래에서는 소매상이 실질적으로 모든 재고부담을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떠안아야 합니다. 심지어 새 책은 중고책으로도 못 팔게 해놨던데, 진짜 이런 악법을 만들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면 나랏일을 하면 안 됩니다. (사실 어디서건 중요한 일은 안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그 어떤 국가도 구간 서적에 대해 정가제를 적용하지는 않는데, 그게 괜한 게 아닙니다.

 

 이 제도가 지속될 경우, 소매상은 거의 확실하게 팔 수 있을 정도로만책을 납품받아야 합니다. 소매상은 손님 반응이 어떻건 앞으로도 계속 가격을 결정할 수 없으니까요. 업종을 가리지 않고 생산자나 납품업자 또는 본사가 소매상 및 대리점에 가격통제를 하는 경우 자체는 사실 흔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새 상품에 한하지 재고에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제도가 이모양이어선 소매상이 반품 협의라도 거치고 납품을 받아야 할 텐데, 그럴 힘이 있는 업체는 온오프를 가리지 않고 현실적으로 대형서점 뿐이고 이런 게 관례화될 경우 영세 출판사 및 영세 서점은 필연적으로 손해를 보게 될 겁니다.

 

 규제는 그 규제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흐를 경우, 철저한 약육강식에 의해 규제의 피해를 약자가 덮어쓰게 되어버리는 결과가 나옵니다. 특히 이런 식으로 비상식적이고 권위적인 규제가 있을 경우 사태는 매우 나쁘게 흐르기 쉽습니다. 실제 이미 도서정가제 직후부터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도서 공급가액이 바로 인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기사를 하나 링크합니다.

 

도서정가제, 동네 서점 쥐어짜기신호 되나’ (링크)

 

 기사의 사진과 내용을 보시면 알겠지만 불광문고는 오프라인 서점으로는 작은 규모가 아닙니다. 동네서점이라기엔 제법 큰 규모임에도 저런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개정된 도서정가제는 결코 영세출판사도, 영세서점도 구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아 있는 것마저 모두 몰살시킬 확률이 대단히 높은,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하고 사악한 제도입니다.

 

 물론 가격 자체의 평균적 인상이 주는 문제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사실 출판사 입장에서 중요한 건 책을 조금 더 비싼 가격에 파는 게 아니라, 초판을 다 팔고 재판을 찍어서 많이 파는 겁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점점 출판시장이 작아지는 현실에서, 이런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게 되면 전체 도서시장의 규모 자체가 더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덜 팔리는 책을 주로 사보는 사람들이 이번 도서정가제의 주 피해 소비자가 될 텐데, 재고부담을 늘리고 도서구매율을 떨어뜨릴 이번 정가제는 보다 더 도전적인 책을 내는 데 악재로 작용할 것이므로 장기적으로 도서시장 자체의 퀄리티가 떨어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한편으로 도서 정가를 재책정하는 것으로 도서할인을 대체하겠다는 발상은 터무니없습니다. 유통 구조상 소매상이 아닌 공급자가 가격을 계속 결정하게 하는 건 어리석음을 넘어 비상식적인 일입니다. 일단 시장에 풀려나간 책, 초판도 다 안 팔린 책을 공급자가 뭐 하러 일부러 가격을 내려 다시 책정하겠습니까. 되지도 않을 소리입니다. 현실적으로 재인쇄 할때나 돈 들이고 시간 들여 새 ISBN 받아서 가격 조정할 수 있는데, 이미 2쇄 들어간다는 건 안 실패한 책입니다. 악성재고는 어쩔 도리가 없는 거죠.

 

 실제 각국의 책값 비교를 보면 도서정가제를 시행하는 나라의 책값이 도서정가제를 안하는 나라보다 무조건적으로 높습니다.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경쟁은 어쨌든 가격을 떨어뜨리긴 하거든요.

 

 더구나 이번 도서정가제는 이북에도 적용되며, 도서관에도 적용됩니다. 이것은 정말 영세서점, 영세출판사 구한다는 명분도 전무하고, 그저 도서관의 장서수와 이북 판매량을 줄일 뿐입니다. 아마 제본업, 중고서점 하시는 분들만 요즘 싱글벙글 할 겁니다. 혹시 아직도 웃고 있는 출판업자들이 있다면, 아마 금방 아, 내가 바보였구나 라고 생각하게 될 확률이 높겠고요. 결국 이 악제는 우민화 정책이자 문화말살정책이 될 겁니다. 발의하고 변호하는 사람들이야 꽉막혀가지고는 절대 인정 안 하겠지만요.

 

 중요한 건 이런 악제가 선의와 정의로 포장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통치와 정치, 규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결과입니다.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결과에 대한 통찰력이 없는 바보 멍청이들은 절대 정치나 큰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본인이 선의가 있다고 본인의 행동 또한 선한 결과를 낼 것이라 믿는 바보들이 권력을 쥐면 정말 큰 사고를 치는 법이지요.

 

 마지막으로 이 사태의 주범 인터뷰를 링크합니다. 책이 유효기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 사람의 망상이 사태를 이렇게까지 만든 것 같습니다.

 

‘[단독]도서정가제 만든 최재천 의원 "책은 생선과 다르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