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야권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절대 다수는 친노다. 좀 더 제대로 표현하자면 ‘친노주의’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 그들은 친노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친노가 그 어떤 다른 세력보다도 낫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친노가 잘못을 좀 저질렀기로서니 그들의 적인 새누리-친일파보다는 훨씬 낫지 않느냐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런 의문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참고 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친노가 그 동안 해 온 업적과 잘못을 좀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애초에 친노가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와 헌법은 1987년의 민주화로 탄생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체제를 87체제 및 제 6공화국이라 한다. 그러나 이 87체제는 시작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민주화의 두 영웅, 김대중과 김영삼이 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함에 의해 전두환의 친구였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당시에 민주화 항쟁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극심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고, 그 때 정신줄이 나가버린 사람은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노태우의 득표율은 36.6%에 불과했다. 그리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각기 28%, 27%을 나눠 먹었다. 단일화를 했다면 절대로 질 수 없는 선거였다.


 그러나 이 87년의 오점은 이후 흑역사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는 김영삼의 3당 합당으로 한 단계 진화하고야 만다. 김영삼은 민주화 세력의 반을 이끌고 박정희 잔여 세력 및 전두환 잔여 세력과 합치고 만다. 그리고는 92년에 평생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을 꺾고 대통령이 되면서 미래로 이어질 단단한 흑역사의 구도를 완성 짓는다.


 이 때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것은 단순한 좌절 탓은 아니었다. 87년의 패배엔 김영삼보다는 그의 책임이 더 컸다. 3당 합당을 저지른 것은 김영삼이었지만, 김대중도 그럴 만한 배경은 제공한 상태였다. 그리고 김대중의 적들은 김대중을 두려워했다. 그는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너무 큰 인물이었다. 이때의 비극은 5년 후에 반전 드라마가 되긴 하지만, 그가 정치에서 떠나있던 동안 민주화 세력은 참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또한 3당 합당이 일어나던 시기에 세계사도 큰 변화가 있었다. 도이칠란트가 통일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중국 또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의 길로 가면서 한중수교가 대선을 약 4개월 앞둔 시기에 이루어졌다.


 김문수와 이재오는 다들 높이 평가하던 민주화 투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공산주의의 붕괴를 보면서, 자신들이 믿던 가치가 붕괴하는 것을 보았다. 뉴라이트는 믿음의 붕괴로 탄생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180도 선회했다. 그들은 여전히 치열하지만, 과거의 동지들과 함께 하지는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손학규가 김영삼의 밑으로 들어간 것은 저 김영삼 정권 때의 일이었다. 그는 민주화 투사였으며 김근태의 친구였고, 김대중을 더 존경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 때 정계에 없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김영삼 쪽이었다. 친노들은 아직도 그가 한나라당 출신이었다고 낙인을 찍는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 했다.


 김대중이 없는 5년간 민주당을 일으켜보고자 고생한 사람들은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나름대로의 야심이 있었다. 그러나 5년 후 복귀한 김대중의 거대한 존재는 그들의 지난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김대중은 그들과 충분히 타협하질 못했다. 민주당의 잠재력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충분히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한 것은 김종필과의 연합 및 이인제의 이회창 표 나누기, 그리고 외환위기라는 특수한 상황과 이회창이 영남 출신 후보가 아니었던 배경 등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집권한 김대중은 자신에게 충성했던 측근들을 제대로 챙겨주거나 키워주지 못했다. 그는 위대한 정치인이었지만 현실적인 통치자로 충분히 단련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한 그는 이상주의적인 면이 있는 인물이었고, 그가 처한 현실은 현실주의적인 복수를 어렵게 했다. 그는 악을 철혈로 심판하려고 하기보다는 용인하였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계파와 정당의 발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소위 동교동계는 김대중의 5년이 흐르면서 구태의 상징이 되었다. 김대중조차 막지 못한 측근비리가 터지면서는 더더욱. 그는 한국의 눈부신 민주화와 새로운 번영의 길을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신질서를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이다.


 노무현은 이러한 조건에서 대선 후보로 등장했었다. 그의 개인적 정치사도 꽤 복잡한 편인데, 그는 처음에는 김영삼 쪽의 인물이었으나 3당 합당 때 그 유명한 ‘이의 있습니다!’를 외치면서 떠났다. (그 결과 김영삼은 노무현의 장례식에서조차 그를 제대로 추모하지 않았다.) 이후 노무현은 민주당계로 들어갔고, 부산과 종로 등지에 여러 번 출마했으나 두 번을 제외하고는 낙선을 거듭했었다. 2000년엔 종로 공천을 거절하고 부산에 출마했었는데, 여기서도 낙선했지만 결국 이 과정에서 노사모를 얻었었다. 그 후 그는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해수부가 없어진 것과, 이번 대선 과정에서 해수부 이야기가 많이 나온 것은 실질적으로 노무현의 발자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0년 전, 민주당 경선 시작 당시 가장 유력하던 후보는 이인제였다. 지금이야 이인제가 좀 개그 이미지로까지 전락했지만, 그 때만 해도 이인제는 작년의 문재인이나 안철수 이상의 인지도를 지닌 유력 대선 후보였다. 대조적으로 당시 경선에 나선 노무현은 사실 충분히 준비된 후보는 아니었고, 안티 이인제에 가까웠다.


 이인제의 최종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뜻밖의 변수는 여론조사에서 나왔다.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이 이회창과의 1:1 구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고, 이후 민주당 경선에서 엄청난 세몰이를 하며 최종 승리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당시 김해 출신이던 노무현은 영호남으로 갈라진 한국의 지역 구도를 타파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안고 호남의 지지를 받는 영남 후보로 올라서게 되었다. 여론조사가 정당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 이 때였다.


 그러나 경선을 승리한 노무현이 대선을 맞이하기엔 아직 긴 시간이 남아있었다. 당시 민주당의 경선은 4월 말에 끝났고, 대선까지는 무려 8개월이 남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 중간의 여름엔 지방 선거와 한일 월드컵이 끼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노무현은 쉽게 말해 갑자기 툭 튀어나온 후보에 가까웠다. 노무현은 호남 출신도 아니었고, 명성도 다소 부족했고, 기반도 충분하지 않았다.


 당시에 노무현을 견제했던 민주당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정치는 현실이고, 현실적인 조직에서 갑자기 위로 확 올라와 튀는 사람이 있으면 견제하는 게 사람 심리다. 특히 한국은 그런 문화가 강하다. 그리고 노무현은 기반이 충분하지도 않았고, 그런 현실에 적응하기보다는 그런 현실과 맞서는 사람이었다.


 노무현 같은 유형의 사람이 실질적으로 최고 지도자에 오르는 것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발달한 문명과 기술, 그리고 노무현이 가진 정치인으로의 매력은 그런 낮은 가능성을 실현시켰다. 노무현은 21세기식 통신 테크놀러지를 활용해 시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했고, 이후 벌어진 각종 갈등들을 정면으로 맞상대했다.


 당시 야권의 갈등은 심각했다. 반대쪽의 상수로는 이회창이 있었고, 야권은 시끄러웠다. 심지어 민주당 경선 당시엔 박근혜조차 이인제와 연대할 가능성이 있었다. 2002년 4월에 박근혜는 이회창에 반대하여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후 신당 창당 작업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때 DJ 정부 출신인 김종필도 연합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대선 레이스의 중대 변수였다. 이후 박근혜는 정몽준과 연대하여 제3의 세력을 만들려다 실패하고 10월에 한나라당으로 돌아가게 된다. 박근혜는 이로 인해 많은 것을 배웠고, 이후 2007~2008년에는 모든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근혜가 만약 또 한 번 한나라당에서 탈당했었다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인제는 경선 패배 후 결국 민주당을 탈당했다. 노무현이 이끄는 민주당은 6월의 지방선거에서 참패했고, 노무현은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재신임 투표를 이야기했지만, 민주당의 반노 세력은 노무현의 퇴진을 요구했다.


 친노와 반노라는 갈등의 싹은 이미 이 때 틔어졌다. 노무현이 민주당에서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당 기반의 대의민주제라는 체제를 파괴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민주당이 가진 여러 문제점을 봉합하는 대신, 기존의 정당 체제에 구체제라는 도장을 찍었다. 그 대신 온라인을 이용한 준-직접 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는 노무현 집권 내내 일어난 현상이었다. 아직도 온라인에 가득한 친노주의자-깨시민들의 의식은 저 노무현식 프레임의 연장선상이나 다름없다. 노무현은 저게 옳은 길이라 믿었던 것 같지만, 저것은 현실적으로 무모한 시도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본인에게는 이익이 되는 사고방식이기도 하였다.


 애초에 당시의 민주당에는 갈등의 씨앗이 심어져 있었다. 정당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 김대중을 보좌했던 사람들이 민주당에서 충분한 대접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사람들은 계파와 정당, 인물 중심이라는 현실 정치의 여러 요소들을 무시하기에 바빴다. 그들은 군사정권을 부수는 데는 전문가였지만, 어떤 것이 현실적으로 훌륭한 정치 구조인지를 성찰하는 데는 모자람이 있었던 것 같다.


 헌신과 노력이 정당한 보답을 주지 않을 때 사람은 좌절하고 분노한다. 이는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오직 사회와 정의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폭력적인 발상인 동시에 비현실적이고도 도덕주의적인 관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김대중은 험한 시대를 헤쳐 나갔고, 워낙 많은 짐을 지고 있었기에 모든 행동에 있어 충분히 가벼울 수가 없었다. 그 무거움은 주변 사람들을 버겁게 했고, 분열의 씨앗을 낳았다.


 노무현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러기 힘든 위치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는 본인이 믿는 바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그의 관념 속에 소위 ‘구태정치인’들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는 국민을 소환하여 구태정치인과 싸우는 소환술사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전쟁은 시작되었고, 그는 정몽준을 꺾고 이회창을 꺾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기본적으로 엄청난 갈등의 싹을 안고 있었다.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잘나고 윤리적인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려면, 우선 보편적인 인간의 모자람과 어리석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최소한의 관용이 생긴다. 그러나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이걸 잘 하지 못하기에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곧잘 관념의 척도로 사람을 상상하고 재단한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보기엔 노무현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보통 사람의 욕망과 질투, 추악함, 어리석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면해버렸다. 그는 사람을 믿어주면 보답한다는 식의, 손을 내밀면 잡아줄 거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불행하게도 대통령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 정부 이름 붙이기의 문제

정치 2013. 2. 7. 17:15 Posted by 해양장미


 박근혜 인수위가 출범하는 정부의 공식 이름을 ‘박근혜 정부’로 하겠다는 발표를 내 놓았다. 나는 이 이름에 대해 아무 불만이 없지만, 역시나 트위터 깨시민들은 불만이 많은 것 같다. 박근혜라는 이름을 정부에 붙이는 게 마음에 안 드는가 보다.


 그러나 특별한 정부 이름을 붙이는 건 사실 그다지 오래 된 일이 아니다. 김영삼이 ‘문민정부’라는 이름을 건 게 그 시초다. 이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의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초기의 ‘실용정부’까지 정부 이름 붙이기가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곧 그 이름을 폐기하고 ‘이명박 정부’로 돌아갔다.


 공화정 체제가 안정된 이상, 대통령제에서 대표자가 바뀌는 건 일반적인 일이다. 국가의 헌법이나 아이덴티티가 바뀌지 않는 이상 굳이 하나하나의 정부에 차별화된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단지 김영삼은 87체제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군인인 노태우가 가져갔던 정권을, 군인이 아닌 ‘문민’이 되찾았음을 선언하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붙인 거였다. 이후엔 그게 이어져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건 일시적인 현상이 되어야 한다. 일단 저런 식으로 오래 가다보면 금방 쓸 말이 없어진다.


 또한 정부는 단일한 하나의 가치만을 내걸 수 없다. 복잡한 현실에 맞춰 정말 많은 일을 다양하게 해야 한다. 그렇기에 정권을 구분하여 지칭하려면, 대통령의 이름을 앞에 거는 쪽이 합리적이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이명박 정부 초기까지 붙여왔던 이름은 민주화 시기 초기의 구분 짓기라 보는 쪽이 더 옳을 것이다. ‘문민’, ‘국민의’, ‘참여’, ‘실용’. 사실 이런 건 모든 정부가 다 해야 하는 거다.


 박근혜를 비판하려거든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통할만한 방식으로 하는 게 좋겠다. 본인의 이름을 정부에 붙인다고 독재자인 것이 아니다. 결국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초기단계를 넘어 통상적인 네이밍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괜히 매사에 투덜투덜해봐야 절대 깨시민 이미지가 나아질 일이 없다. 항상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해야한다.


 어차피 박근혜 인수위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많다. 이름가지고 뭐라 하는 것보다는 행동가지고 뭐라 하는 게 훨씬 낫다. 그리고 그것보다는 사실 지금 민주당이 뭘 하고 있는지를 보는 게 더 생산적이다. 지금 민주당 돌아가는 꼴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북조선 제제와 미래 전망

정치 2013. 2. 2. 15:02 Posted by 해양장미


 북조선이 곧 망할 거라는 전망은 꽤 오래 전부터 계속 있었던 기대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까지는 김정일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의 최우선적인 목적이 체제 유지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그들은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정세의 변화는 결코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는 않다.


 애초에 북조선은 자생이 불가능한 나라다. 충분한 식량자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디든 땅 힘에는 한계가 있고, 북조선의 지력은 완전히 죽은 지 오래이며 그것을 되살릴 만한 여유가 없다. 더구나 공산주의식 국영농장 제도는 개개인의 위기 탈출 가능성마저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문제점이 있다. 물론 기술적인 수준도 뒤떨어지기도 한다.


 본래대로라면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북조선 또한 체제를 변경했어야 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고립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현재의 북조선을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보면 북조선은 과거 냉전 시대에는 양 진영 대립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었고, 지금은 G2의 완충지대이자 골칫거리이다.


 중국에게 있어 북조선은 더 이상 밀접한 동맹국이라 하긴 어렵다. 그보다는 어쩔 수 없이 관리해야하고, 챙겨줘야 할 대상에 가까운 상황이다. 중국은 북조선의 붕괴를 두려워한다. 엄청난 난민이 중국으로 넘어올 수 있고, 미국과 국경을 맞대는 거나 다름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중국은 여러 변수를 맞이하고 있다. 오랜 숙원인 타이완과의 통일 문제도 점점 더 가시화된다 할 수 있고, 경제성장으로 인해 민주화에 대한 압력은 높아질 수밖에 없으며, 위구르ㆍ내몽고ㆍ티벳 등지의 자치구들의 독립 시도도 없어질 수는 없다. 그리고 근래 일본이 극단적인 우경화가 일어나면서 중국과의 영토분쟁까지 일으키다 보니, 중국은 이 연장선상에서 미ㆍ일 동맹에 생기는 틈을 이용하여 미국과 좀 더 직접적인 딜을 시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러시아의 푸틴은 이미 북조선과의 친교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상황이라 할 수 있으며, 대신 대한민국과 영토를 맞대고 싶어 한다고 파악하고 있다. 푸틴은 동부 시베리아를 개간하는 데 관심이 많은 듯한데, 그에 적합한 국가로 대한민국을 꼽고 있는 듯하다. 일본과는 영토분쟁이 있기도 하고, 중국은 견제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일본은 대북 관련한 6자 중 가장 통일을 원하지 않을 세력이다. 그러나 근래 일본은 극우화되면서 미국과의 친밀함도 줄어들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아베의 엔화에 대한 정책은 일본인 외에는 반기는 사람이 거의 없다. 경제적인 면에서 일본이 죽어줘야 세계가 사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합중국은 오바마가 재선된 상황이며, 전반적인 추세를 볼 때 민주당의 장기집권을 예상하고 있다. 민주당은 공화당에 비해 쓸데없는 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낮고, 각종 카드를 사용하는 데는 좀 더 유연하다. 또한 미국은 군 감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북조선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노력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조선은 작년 12월, 로켓 발사를 강행했다. 이는 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결의에 어긋나는 행위였고, 1월 23일 UN은 대북제제 강화 결의를 체결했다. 이 새로운 제제 결의에는 북조선의 오랜 우방인 중국까지 동참했으며, 내용을 보면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제제라 할 수 있다.


 이에 북조선은 3차 핵실험을 강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이런 파국은 오래 전부터 예상할 수 있었던 흐름이다. 김대중-클린턴 때만 해도 사실 북조선 문제는 잘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 건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고 후세인을 사형시킨 것을 이야기해야한다. 후세인도 한 때는 미국에 협력했었다. 그러나 결국 미합중국은 역사에 남을 오판으로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라크는 10년이 거의 다 지난 아직도 혼란상태다. 미국이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북조선은 제제를 받더라도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해 힘의 균형을 맞추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노무현 정권의 대북송금특검 및 나빴던 초기 대북정책도 한 몫을 한다. 물론 2002년에 연평해전을 일으키는 등 북조선의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의 대북송금특검은 그나마 부시정권 하에서 나빠지고 있던 남북관계를 급속히 냉각시켰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와는 다른 대북정책을 펼쳐나갔다. 이에는 노무현의 정몽준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있다고 확신한다. 다들 알다시피 대북사업 관련하여 가장 적극적이었고 가장 투자를 많이 했던 기업은 현대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현대는 정몽헌 회장이 자살하는 참극을 맞으며 무너져 내렸다. 대신 참여정부는 노골적으로 삼성편을 들었다.


 또한 북조선은 한국을 절대로 군사적인 대등한 협상 상대로 여기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당연하다. 한국은 군사적인 면에서는 독립국가라 할 수 없다. 전시 작전 통제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별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그냥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대한민국은 엄밀히 말해 독립국이 아니다. 그보다는 미합중국이라는 제국 아래 속해있는 자치령에 가깝다. 아마 역사는 이런 식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몫이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상태도 그리 꼭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북조선이 ‘남쪽 정부는 괴뢰정부다.’ 라고 주장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는 건 알아두는 게 좋겠다.


 어쨌든 북핵 이후 남북 또는 북미 관계는 그리 좋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무한정 미뤄둘 수는 없다. 곧 북조선은 어쨌든 ‘대륙간 탄도 미사일’과 ‘핵무기’를 갖춘 나라가 된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미국 본토에 핵을 날릴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합중국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이에 대해 미국은 여러 가지 카드가 있다. 그들이 어떤 방향을 선택할 진 알 수 없지만, 다행히도 박근혜는 이명박에 비해 외교적 감이 좋아 보인다. 북조선 문제는 다자간의 문제고, 한국은 이미 남북관계에서의 주도권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미국은 중국과 딜을 할 수 있다. 중국은 어떻게든 대만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대만이 중국 앞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은 미국에 있다. 대만과 북조선을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이 근래 극우화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미국의 힘을 믿기 때문인데, 그 또한 미국이 선을 그으면서 동아시아 정세를 제어할 수 있다.


 결국 북조선 문제는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북조선이 보다 온전한 국가로 인정을 받고 종전이 되던지, 북조선 체제가 급속도로 무너지던지. 결국 그들이 ‘정상적인’국가가 아닌 이상 결과는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쨌든 현재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을 것이다. 종전이 되고 북조선에 대한 제제가 풀린다면, 자본의 유입으로 인하여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행보를 보이고 있는 박근혜

정치 2013. 2. 1. 14:37 Posted by 해양장미


 현실 정치에서 통치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통치 자체를 와해시키고, 예상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 것이다. 개혁적이냐 보수적이냐는 그 다음 문제다. 대체로 민중들은 언제나 ‘태평성대’를 원하지 ‘난세’를 원하지는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최악의 정부인 것은 통치의 정당성을 잃어버림으로 인해, 통치 자체의 약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근혜도 이명박의 길을 걷고 있다. 그것도 훨씬 빠르게.


 박근혜가 지난 대선에서 질 뻔했던 것은, 박근혜의 기본적인 리더십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정치적 감은 뛰어난 편인 것 같지만, 누가 봐도 머리는 나쁘다. 물론 머리가 나빠도 좋은 지도자는 될 수 있다. 그러나 박근혜는 매번 자신의 머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습관일 수는 있는데, 많은 걸 혼자 고민하고 독단적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통치하기엔 박근혜는 충분히 똑똑하지 못하다.


 박근혜의 통치 권력은 시작부터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상대 후보가 48%나 가져갔기 때문이다. 5년 전 이명박과는 기본 출발이 다르다. 그런데 박근혜는 초기의 인선과 입법부터 심각하게 꼬여가고 있다. 그 상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물>


윤창중 : 인수위 수석대변인. 공개석상에서의 심한 막말로 여러 번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

하지원 : 인수위 청년특위. 뇌물 수수 혐의로 벌금형 전력.

윤상규 : 인수위 청년특위. 게임업체 대표였는데 불공정거래 전력이 있음.

장순흥 : 인수위 교육과학분과위원. 창조과학회 활동. 전공은 핵공학.

이동흡 :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각종 불법 의혹으로 낙마 직전.

김용준 : 국무총리 후보였으나 각종 의혹으로 5일 만에 자진 사퇴.


<사건>


1) 카드 무이자 할부 폐지 사건


: 12월 21일, 거의 몰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날치기성 법이 통과됨. 주된 내용은 카드사가 전액 부담하는 무이자 할부가 없어진다는 것. 시행일은 불과 열흘 후인 1월 1일. 그로 인해 며칠 간 대란이 터졌었음. 결국 여론 악화 및 카드사 측의 대응 등으로 열흘 만에 실질적 폐지. 개인적으론 이 사태엔 박근혜 인수위가 개입되어있다고 추정. 엄청난 무능을 보여주는 헛발질이었음.


2) 영광원전 3호기 용접 운행 재개 방침


: 비리로 인해 불량부품이 들어간 걸로 알려진 영광원전 3호기는 제어봉 안내관 균열이 발견되어 가동 중단 상태. 그러나 용접 후 운행 재개를 추진해오다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방침이 거의 확정적이 되었음. 인수위에 사이비 창조주의자이자 핵공학 교수인 장순흥이 포함되어있다는 데서 많은 걸 짐작할 수 있음. 새누리당이 소위 ‘핵마피아’랑 유착되어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암. 한국 원전은 현재 엄청난 위험을 잠재한 상태. 설계수명을 넘은 상태로 운행되는 원전도 좀 있다.


3) 게임업계 셧다운제 강화 법안 추진


: 박근혜의 당선으로 위상이 올라간 여성가족부와 관련 국회는 신난다는 듯 셧다운제 강화 법안을 추진. 이 법안은 기존 셧다운제의 문제를 넘어서서, 게임회사들에 대한 ‘총매출’의 1~5%를 게임중독치유기금으로 걷을 수 있도록 되어 있음. 당연히 총매출의 5%를 뜯긴다면 삼성전자라 해도 바로 쓰러짐. 발의자인 친박계 손인춘 의원은 국민의 소리를 듣겠다고 열어놨던 게시판 글을 며칠만에 모두 지우고 게시판 폐쇄. 상장 게임회사들 주가는 박근혜 당선 후 연일 폭락하다가 아주 땅으로 떨어짐. 관련업계 사원들, 입사 지망자들, 각종 관계자들, 주주들 모두 대분노. 수많은 군소 게임업체들 법인 해외로 단 며칠만에 도피 완료. (첫 셧다운제 이후 이미 추진중이었다가 셧다운제 강화법안으로 결정한 곳이 많음.) 위메이드부터 시작해서 부산 지스타 보이콧 추진. 지스타는 게임업체 박람회 같은 건데, 수익이 상당함. 그런데 부산 국회의원들이 이 법안에 참여해서 보이콧 추진. 결국 대전쟁 시작이라 할 수 있음. 문제는 심각한 비상식과 게임업계 자체를 죽이려는 데 있음. 물론 박근혜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음. 수많은 관련자들은 한국을 떠나려고 계획 중.



 이것은 박근혜 당선 후 40일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그 결과 현재 박근혜 인수위는 역대 인수위 중 지지율이 최저다. 여기에 부정 선거 의혹까지 발생했기 때문에, 심각한 수위의 지지율 하락을 겪으며 정권이 출범하게 될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일하는 세대라 할 수 있는 20대부터 40대는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았다. 박근혜는 한국에서 장ㆍ노년층의 지지로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인물이다. 이는 실제 한국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세대가 박근혜의 통치를 거부하기 쉽다는 것이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박근혜는 통치를 해나갈 수 있는 힘을 잃고 있다. 물론 그녀는 억압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끌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억압보다는 동조를 얻는 게 힘도 강하고 사회도 무난하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높은 지지를 얻던 이명박도 불과 반 년 만에 지지율을 거의 까먹고 말았다. 그에 비해 박근혜는 훨씬 나쁜 조건이고, 훨씬 나쁜 길로 가고 있다. 한국인들은 또 한 번 통치의 부재 속에 놓여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박근혜 인수위는 무려 조선일보한테까지 욕을 먹고 있다. 명비어천가를 부르던 5년 전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별일이다.



국정원 직원 사건에 대한 이야기, 간단하게

정치 2013. 1. 31. 22:12 Posted by 해양장미

 결론적으로 보자면.


 민주당 측은 어이없는 승부수를 던져서 자충수를 만들고, 가벼운 망신까지 당한 상황이 되었고.


 국정원 측은 한심 그 자체. 뭐라 할 말이 안 떠오를 정도로 한심함.


 경찰은 이쪽이 제일 문제 같다. 작정하고 편파적으로 군 셈. 민주당이 지금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경찰이 편파적으로 불법선거를 자행했다고 강하게 싸우고 나설 수 있었을 거다.


 그렇지만 민주당은 친노패권 때문에 안 될 거야.


 국정원 직원이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쓴 글은 지금까지 알려지기론 사실 그다지 별 내용이 아니다. 그냥 보면 인터넷에서 반북주의 여론을 퍼뜨리는 정도의 행위. 다만 그걸 공무원이 했다는 점에서 불법성이 있는데, 그렇다고 그것 자체가 ‘정부가 선거에 개입함.’ 정도로 이야기할만한 건 아닌 것 같다. 물론 통합진보당 측에 대한 공격이라 볼 수는 있는데, 만약 직원이 썼던 글이 선거 전에 공개되었다면 파장이 더 컸을 거라 생각한다. 민주당에 나쁜 쪽으로.


 아무리 봐도 선거부정을 이야기하기엔 경찰의 발표 정도만이 개연성이 있을 텐데, 이것만으로는 약하다. 십알단까지 합쳐도 부정선거는 맞는데, 객관적으로 재선거를 하자 할 정도로 뒤엎을 정도는 못 된다.


 뒤엎을 거면 차라리 화끈하게 뒤엎는 게 낫다. 이래서야 시작부터 레임덕만 가지고 출발할 것 같다. 박근혜가 잘 하기 힘들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딱 정권을 잡는 데까지만 성공하고 그 이상은 뭘 제대로 하기가 힘들 것 같다는 게 현재의 인상. 인수위 시작부터 꼬일 대로 꼬인다. 만약 야당이 제대로 된 정당이었다면 기둥뿌리 뽑히고 정권 출범하게 될 판인데, 그 정도는 아닐 거 같고.



 ‘이번에도 네거티브만 하다가 졌다.’


 이는 문재인 지지자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볼 때, 이번에도 친노 세력은 네거티브만 하다가 졌다. 물론 새누리당이 더 네거티브하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애초에 입장이 다르다.


 할 만 해서 네거티브를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할 만 해서 하건, 어거지로 하건 네거티브는 네거티브일 뿐이다. 어차피 네거티브를 해서 얻을 것과 잃을 것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아무리 네거티브를 할 만한 상황이라도, 대체로 네거티브는 민주당에겐 득이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민주당계는 네거티브를 해 왔고, 그 결과 민주당은 거의 예외 없이 참담한 실패를 맞이하곤 하였다. 질 만한 선거는 어쩔 수 없지만, 이길 만한 선거도 네거티브만 하다 지는 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민주당계가 네거티브를 좋아하는 건 기본적인 인간적 경향 때문인 것 같다. 기본적으로 민주당 지지자들은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편이다. 아무래도 새누리당 지지자에 비해 개개인의 불행 원인을 사회 구조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민주당 지지자들끼리는 사회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 잘 통한다. 정서 자체가 좀 그런 것이다.


 물론 사회 정의라는 면에서만 본다면 이런 정서도 필요하다.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ㆍ사회적 행위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시민단체가 아니고 정당이다. 그리고 애초에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민주당을 지지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사회적인 관심이 높은 사람의 비율이 처음부터 높다면, 민주당이 매번 번번이 패배할 이유는 딱히 없다. 그러나 기본 지지자 수는 항상 새누리당이 민주당보다 많다. 결국 승리를 위해서는 현실 지형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지난번에 나는 민주주의가 ‘공화’가 꼭 우선시되는 시스템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소위 ‘깨어있는 시민’이라거나 비슷한 말이지만 친노주의자라거나, 아니면 수많은 야권 지지자들은 공화와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짙다. 그리고 남들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것은 그들이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사악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끊임없이 계몽을 시도한다. 물론 전편에 말했듯 그런 시도는 잘 될 리가 없다.


 그런데 민주당계 지지자들이 이런 성향이 유독 강한 건 내 생각엔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라 할 수 있는 유교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유교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왕도정치론은 통치자의 심정윤리가 강조되며, 또한 민주주의에 접목되었을 경우 다분히 공동체주의적이다. 이는 플라톤 식의 철인정치론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조선만큼 현실에서 철인정치를 하기 위해 노력했던 나라가 또 있을까?


 유교적 관념은 정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유교적 윤리성을 관념의 척도로 삼고, 그 어긋난 척도로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재단하려 하게 되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으로의 유교는 매우 더디게 발달했으며, 현 시대에서는 폐기해야 할 과거의 유물이다. 그러나 유교적 관념은 아직도 한국인의 머릿속을 적잖게 지배하고 있다.


 유교 사상은 한국인의 의식에서 윤리성의 일면을 담당하기 때문에, 사실 이 유교적 한계를 극복하려면 덜 윤리적인 편이 유리하다. 스스로의 관념을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윤리적 관념은 주입되거나 주변에서 무의식중에 모은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윤리적 관념을 무너뜨리면서 현실화되어간다. 그렇기에 윤리성을 강조하는 민주당계 지지자의 태도는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때가 많다.


 도덕주의적인 태도에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다. 저 옛날 민주화의 과정은 도덕주의로도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민주주의 체제에서 경쟁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민주주의에서 이기고 싶다면 내가 믿는 정당함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지 않는 것이 좋다. 물론 그런 주장을 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남에게 통하지 않는 주장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현실에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정당함을 현실에 실현하고 싶다면, 그것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존중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상대를 설득하는 게 필요하다. 상대를 바보로, 악당으로 폄하하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보통선거의 원칙 상, 적어도 표를 행사하는 권리 앞에서는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게 상대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왜 네거티브가 효과가 없는지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의 3당 합당 이후 한국 선거는 대략 4:3:3 비율의 경쟁이다. 새누리당계 지지가 4고, 민주당계 지지가 3이다. 그리고 유동적이거나 정치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나머지 3이다. 이 비율은 애초에 지역 인구 비율로 갈라진 것이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변하기가 어렵다.


 이런 조건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려면 새누리당의 4를 가급적 쪼개거나 이들이 위기감을 갖지 않게끔 하고, 중도적인 3을 많이 잡아야 한다. 민주당을 찍을 3은 어차피 민주당계를 찍는다고 봐도 된다. 물론 평소에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도 10번 선거를 하면 1~3번 정도 민주당을 찍기도 한다. 이런 것도 감안을 해야 한다.


 그런데 네거티브는 위의 구도를 놓고 볼 때 별 효과가 없다. 새누리당 지지자들에게 새누리에 대한 네거티브는 애초에 큰 효과가 없고, 오히려 역효과를 부르기 쉽다. 새누리계를 오래 지지해온 사람 중 새누리당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말과 글을 보고 그 지지를 철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오히려 새누리에 대한 강한 공격은 지지층의 강한 결집을 불러일으킨다. 이번 대선은 그런 모습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대선이었다.


 또한 중도층에게도 네거티브는 별 효과가 없다. 중도층은 아무래도 정치에 관심이 덜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네거티브는 양쪽 다 한다. 정치에 별 관심 없는 사람이 그런 네거티브의 상세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그들은 모든 네거티브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네거티브의 근거를 찾는 건 중도층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다. 또한 중도층은 정치에 기본적으로 관심이 덜한 만큼, 굳이 정치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추한 꼴을 보고 싶지 않아하기도 한다. 이런 데 대고 네거티브를 많이 하면 그나마 조금 있던 관심조차도 끊기기 쉽다. 애초에 고정지지층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중도층이 정치에서 멀어질수록 피해를 보는 건 민주당계다.

 

 더구나 강한 네거티브는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와버린다. 쉽게 말해 ‘박근혜는 안 된다!’ 라는 목소리가 커질수록, 사람들의 눈과 귀에 들어오는 후보는 박근혜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CF나 다름없다.


 예를 들어 신상품 과자 광고를 낸다 쳐보자. TV CF로 과자 광고를 내보낼 때, 절대 맛없다고는 하지 않는다. 솔직히 공산품 과자가 맛있어봐야 얼마나 맛있을까? 그러나 CF에서는 무조건 아주 맛있다고 한다. 환상의 맛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하니, 그야말로 작정하고 과대광고를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광고를 볼 때 ‘어디 진짜 그런지 따져보자.’ 같은 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대체로 CF의 효과는 무조건적이다. 사람들은 CF에서 본 과자, 유명한 과자를 많이 산다. 특히 자기 혼자 먹을 과자가 아니고, 남들하고 파티에서 나눠 먹을 과자를 산다면 더욱 그렇다.


 브랜드라는 면에서 문재인은 애초에 박근혜에 많이 밀렸다. 박근혜가 훨씬 더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문재인은 대선 기간 내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문재인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걸 잘 체감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안철수가 문재인보다 훨씬 많이 보였다. 심지어 경선에서 이긴 후에도 문재인보단 안철수가 더 보였고, 안철수가 사퇴한 후엔 새누리와 박근혜는 안 된다는 식의 말이 시끄럽도록 온갖 곳에 가득했다. 이리 해서 이기면 그게 이상하다.


 좀 떨어져서 생각해보자. 만약 펩시가 펩시 많이 팔고 싶다고 코크를 신나게 네거티브한다면 어떻겠는가? 펩시가 많이 팔리겠는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애초에 펩시를 많이 팔고 싶으면 코카콜라 맛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펩시 광고를 하는 게 맞다. 옛날에 펩시맨~!이 얼마나 펩시 판매를 높였는지를 기억하라. 네거티브보단 언제나 그런 게 효과가 있다. 항상 CF효과를 염두에 둬야 한다.


 만일 시장에 이성적이고 합리적 소비자만 있다면 브랜드나 CF의 위력은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낮아야 한다. 그러나 소비자는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나마 시장은 피 같은 ‘내 돈’을 쓰는 곳인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한다. 그리고 투표는 일반 시장에 비하면 공돈시장에 가깝다. 훨씬 더 마케팅 효과가 강한 판이다. 더구나 모든 박빙의 선거는 정치를 잘 모르고, 관심도도 낮은 사람을 잡아야 이긴다.

 

 그나마 이번 대선에서 이 정도 결과가 나온 건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 그리고 박근혜 캠프가 너무 못난데다 약점도 많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가 박근혜이기에 얻은 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박근혜의 모자람 때문에 잃은 표도 꽤 된다.


 상대적으로 문재인과 민주당은 한 것에 비하면 정말 많은 표를 받았다. 만약 박근혜가 진짜 괜찮은 후보였다면, 그리고 다수의 국민들이 정권교체의 열망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표 차이는 훨씬 크게 벌어졌을 것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에게도 인간성 괜찮은 친구들이 있다. 그런 관계들은 대체로 인생을 윤택하게 해 준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나에게 돈을 빌리려 한다면, 각각의 그들은 나에게 동등한 대접을 받을 수가 없다. 금전적 신용이란 인간성만으로 형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내가 상환능력이 부족할 때에도 돈을 빌려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어쨌든 상환능력은 돈을 빌려주는 데 있어 중요한 척도다. 금전적 신용이 마음만으로 충분히 형성되는 것일 수는 없다. 나 역시 상환기일을 꽤 어겨본 적이 있는데, 정말 여러 모로 다시는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 중이다.


 그렇다면 다음 중 뭐가 더 신용이 있고 뭐가 덜 신용이 있을까? 화폐, 사법, 공무원, 그리고 사람. 이 답은 사람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객관적인 신용의 차이는 비교적 분명하다. 답을 말하자면 말한 순서대로 믿을만하다.


 화폐, 즉 통화는 가치중립적이며 그나마 가장 공정하게 관리된다. 내가 돈을 1억원 가지고 있다면, 내가 법률적인 문제가 없는 이상 전 세계는 내가 1억원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열심히 도와줄 수밖에 없다. 이 권리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전 세계의 경제 전체가 큰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가끔 하이퍼인플레이션 같은 상황에서 통화 가치가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런 특수상황이 아니라면 화폐는 가장 신용이 높다.


 그 다음은 사법이다. 사법부가 자주 눈 먼 판단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법은 여러 조건에서 공정함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은 한다. 기소권이 있는 한 3번의 판결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사법인은 비록 모자란 사람이 많긴 해도 전문적인 학습을 한 사람이긴 하다. 한국이 충분히 좋은 사법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만하지만, 그래도 다른 방법보다는 현실적으로 나을 때가 많기에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하다.


 그런데 공무원은 믿을 만한 족속이 못 된다. 물론 청렴한 공무원도 있다. 그러나 공무원은 근본적으로 가급적 문제를 안 일으키고, 생긴 문제도 덮으려는 속성을 지닌 집단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닥친 어떤 문제를 공무원이 잘 해결해주리라 기대한다면 그건 적잖게 어리석고 헛된 기대가 될 가능성이 적잖게 높다. 그래도 공무원은 공적인 사람이기에 보통 사람보다는 믿을 만 할 때가 많다. 죽어라 민원을 넣고 협상을 한다면 어쨌든 그들은 그걸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부서가 바뀌거나 사표를 내기 전까지는.


 상대적으로 자연인은 가장 믿어서는 안 된다. 물론 보통 사람보다 좀 더 믿을 만한 사람도 있지만, 그리고 친한 사람이라면 좀 더 믿을 만하지만, 얼핏 생각하기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애인한테 차여 본 경험 한번쯤 있다면 누구라도 이 말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간의 약속이란 얼마나 허망할 때가 많던가. 약속할 때는 비록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람은 본래 변덕스럽고 신뢰를 잘 무너뜨린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하려 한다면 저 순서는 대체로 잘 맞는다. 일단 상대와 협상을 해보고, 그것이 원만하게 잘 해결되지 않는다면 공권력을 동원하고, 그래도 안 되면 소송을 걸고, 재판으로도 승산이 모자란다면 금전의 힘을 사용하는 게 해결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민법이 아닌 형법의 영역이라도 판결에서 금전적인 ‘합의’가 어느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박근혜는 문재인보다 태생적으로 우위에 있는 가치를 들고 나왔다.


 새누리당은 과거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개개인의 재산권 보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각 개인에게 있어, 재산권이란 가장 믿을 만한 권리이다. 본질적으로 자유민주주의는 개개인의 사유 재산에 의해 탄생되는 면이 크다. 민주 공화정은 그 무엇보다도 ‘국가가 시민의 재산(과 자연권)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한 제도에 가깝다. 이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자연 발생하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체감을 잘 못하는 역사의 한 단편이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벼슬아치가 부정하게 백성의 재산을 수탈하는’ 옛날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그렇기에 제도가 자유민주주의를 보장한다 해도, 시민에게 충분한 재산이 없다면 그 자유민주주의는 유지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에 연관하여, 태생적으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대립항일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다. 시민이 재산을 축적할 수 없다는 건 개개인의 권력이 쉽게 성장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고, 분배를 주도하는 권력은 고인 권력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은 사람을 우선적으로 들고 나왔다. 그 다음이 국가였고, 개개인의 재산권이 맨 나중이었다. 이는 분명 사회주의와 자유(시장)주의의 대립에 가까운 요소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과 국가를 믿고 싶다는 바람과, 실제로 믿을 만하냐는 판단은 좀 다른 문제다. 이 면에서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은 문재인을 선택하는 데 별로 큰 용기를 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잃을 게 많은 사람들에겐 문재인을 선택하는 게 좀 도박적으로 느껴질 만 했다.


 문재인이라는 한 개인은 꽤 매력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잘생겼고, 똑똑하고, 남을 위해 오랜 시간을 노력했고, 객관적으로 정의의 편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사람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한 게 못된다. 정치인 문재인은 자연인 문재인에 비해 더욱 믿을 만한 게 못된다. 한 정치인을 믿는 건 그다지 현명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잖은 박근혜 지지자는 통상적이고도 피상적인 척도 하에서 좀 더 믿을 만한 걸 믿었을 뿐이다. 나의 재산, 그리고 그것을 지켜줄 시스템.


 이번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주역은 50대이다. 이 50대는 10년 전에 40대였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었다. 15년 전엔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든 30~40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선택적인 행위에 대한 보답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그들이 구축한 사유 재산은 대체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재산을 잃으면 더 이상 벌 방법도 없고, 믿을 구석도 없다.


 국가의 공공성을 한 번 더 믿어보라고 하는 게 쉬울까? 그들이 많은 출혈 끝에 쥐고 있는 주택 가격이 더 떨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문재인을 찍는 게 쉬울까? 부동산뿐만 아니라 주식 투자자와 주식형 펀드 투자자들에게도 문재인의 순환출자 발언은 좋게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맹목적인 순환출자 반대론자들이, 그리고 문재인 후보 측이 순환출자의 개념과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순환출자가 왜 사라져야 하는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친노주의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것은 마치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운’ 종교 교리와도 같다.


 현재의 50대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유신 체제를 지지하는 세대가 아니다. 신뢰를 얻는 게 먼저다. 이미 겪어 본 사람들이, 친노에게 신뢰가 있을 리가 없잖은가. 중간 단계를 건너뛰려 하면 곤란하다.


 

 근현대의 민주적인 정치 체계를 구성하는 기반 철학에는 크게 두 가지 축이 있다 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공화주의이며, 그 중 하나는 자유주의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이상적인 민주 국가는 ‘자유로운 민주 공화국’ 이라는 식의 표현이 적합하다 할 수 있다.


 이 중 공화주의를 쉽고 간결하게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실질적으로 이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공화주의는 거의 공동체주의나 다름없다. 이 사고 체계는 근본적으로 사적인 것보다는 공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공적인 것의 부활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것이다. (이는 공화주의의 역사를 볼 때, 과거의 공화주의와는 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제목에 적은 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는, 마이클 샌델이 주장하는 내용과 동일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런 사고방식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점차 늘어나고 있는 자유와 상충되는 면이 있다. 자유주의는 개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한다. 근현대의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공화와 자유라는 두 가지 이질적 요소가 접합된 형태일 수밖에 없고, 현실적으로는 두 가치가 충돌하고 타협하면서 사회를 형성해나간다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역사 자체와도 관련이 있다. 공화 없는 민주주의도, 자유 없는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 근현대의 민주주의는 이 두 가지 이념이 혼재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고, 약간 대조적인 두 사상 사이에서 현실의 민주주의는 줄타기를 하면서 각각의 이익을 취하고 균형을 잡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현실 정치 담론의 주된 문제점 중 하나로 민주당을 비롯한 통칭 범야권 세력이 공동체주의적 공공선 이미지를 선점하고, 그 공공선을 도덕적인 면에서 강요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많은 경우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선이고, 그 반대라 할 수 있는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것은 악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 선을 위한 정의의 사도로 나서 악당을 물리치고자 노력한다.


 물론 이런 시도가 잘 될 리가 없다. 민주당이 선거에서 이기는 빈도는 그리 높지가 않다. 평범한 사람을 악당으로 규정하려 드는 데 상대가 수긍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정의는 중요한 가치다. 그리고 충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국의 기득권이 충분히 정의롭지 못하고, 민주당이 많은 경우 그래도 새누리당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심정적으로라도 정의롭다는 쪽으로 느슨하고도 암묵적인 동의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정의를 규정하는 것은 항상 신중할 필요가 있으며, 정의를 아는 것과 정의를 실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정의에 의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어 왔다. 적잖은 경우 내가 정의라고 믿는 사람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지극히 잔인한 언행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박근혜와 그 주변은 악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박근혜를 지지하는 모두가 악당은 아니다.


 적잖은 한국 사람들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할 줄 모른다. 문화적으로 공동체 사회가 극히 최근까지 강하게 존속되어왔고, 각종 역사적 비극으로 인해 개인성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침해는 많은 경우 윤리적으로 규범화되어있기까지 하다. 오랜 기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자유와 개성은 악이었다.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자들은 규범의 틀을 깨고 더 많은 자유를 향해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한편으로 한국 사회의 진보적인 입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서글픔만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에 애초에 모자랐던 자유주의의 전통과 역사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일단 힘들더라도 문재인을 찍었던 사람들은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패배가 뼈아플지라도, 견딜 수 있다면 승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라. 그것이 민주주의다. 상대를 욕하고 몰아붙이고 비난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그들 또한 하나의 선택을 했을 뿐이고, 그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법률과 철학으로 보호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취득한 정보와 각자의 입장, 그리고 사고방식은 문재인을 찍은 사람들과 다르다. 그리고 자유로운 민주 공화국 시민들은 반드시 공동체를 우선해야 할 의무는 없다. 공익을 위해 사익을 희생하라 강요하는 것은 충분히 민주적인 태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공공선에 있어서는 그다지 로맨틱한 만족감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한편 실제로 대부분의 민주당 지지자들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평균적으로 의식이 더 많이 규범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경우 민주당 지지자들은 문화적으로 적잖게 보수적이다.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보수주의자고, 새누리당은 친일 매국 세력이라는 주장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논지로 국민의 51%를 친일 매국 세력으로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51%은 무지하고 사욕에 가득 찬 세력으로 - 즉 한 단계 낮은 수위의 악당으로 - 규정되곤 한다.


 이런 행태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이기고 싶다면 의식을 바꿔야한다. 저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지나치게 규범적이기에 사실 좀 반민주적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공화 정치는 플라톤식 철인정치도 아니고, 유교식 왕도정치도 아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에 찬성하지 않았다. 유학자들도 찬성할 사람이 없었을 거다. 당신이 민주주의를 존중할 수 없다면, 스스로 민주주의자가 아님을 받아들이라. 민주주의는 유일하게 정의롭고 훌륭한 정치 체계는 아니다. 잘만 실현된다면 철인정치나 왕도정치가 더 나은 방식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적으로 이기고 싶다면 힘들더라도 닫힌 마음을 열고 새누리당 지지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SNS를 언팔로우하는 식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가치를 중시하는지를 알아내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소통이다. 나만 정의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령 그게 진리의 기준에서는 맞다 해도 현실에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정치는 현실이다. 민주주의도 현실이다. 이걸 받아들이지 않는 도덕주의자들에게 승리는 찾아오지 않는다. 상대를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상대를 이길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현실에선 격언처럼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긴다. 그런데 민주당 지지자들은 새누리당 지지자들을 잘 모르지만,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민주당 지지자들을 제법 잘 안다. 그러니까 민주당은 이길 만한 싸움도 맨날 지는 거다.


 한편으로 공화와 공동체, 그리고 도덕 윤리를 강조하는 관점 자체는 항상 힘 있는 철학이긴 했다. 그러나 그런 태도 자체는 문화적으로 보수적이기 쉽다. 진보라는 제목을 달고 보수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는 모순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나는 한국 사람들은 항상 어떤 의미로든 한 발식이라도 전진하려는 진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의 국민들이다. 국민의 마음을 잡고자 한다면, 불안과 공포라는 대중 심리와 그로 인해 끊임없이 강요되는 진보성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대선 복기 첫 번째, 서론

정치 2013. 1. 23. 04:32 Posted by 해양장미

 개인적으로 정말 이런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시대가 끝나면, 정치엔 관심을 반쯤 끊고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집중하고 싶었다. 자꾸 시끄럽게 내 관심을 과도하게 불러일으키는 정치를 난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대선 막판에 들어선 후에야 결정하긴 했지만, 결국 문재인을 강하게 지지했던 한 사람으로 이번 결과에는 정말 큰 실망을 느낀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정치 성향이 문재인과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근래 난 자유주의를 지지하게 되었고, 이번 대선 공약을 볼 때 나는 완전히 중도적인 입장에 가까웠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문화적인 부분은 문재인을, 경제적인 부분은 박근혜를 지지하는 면이 강했다.


 그에 앞서 난 5개월 전만 해도 박근혜 지지에 가까웠다. 박근혜가 마음에 들어서는 아니었고, 원래 내 생각이 민주주의란 정당을 기반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는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제가 낫다고 생각하고, 정당과 의회가 주축이 되어 정치를 하는 게 민주주의 모델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 면에서 나는 안철수는 일단 논외 대상에 가깝다 보았다. 인간 안철수에 대한 감정은 크게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지난 몇 년간 가장 강하게 지지했던 대권 후보는 손학규였다. 내가 판단하기에, 손학규는 대중적 인지도와 상대의 사악함을 파악하는 것 외엔 거의 모든 것을 다 갖춘 정치인이다. 그는 지난 5년간 쓰러져가는 민주당을 지탱해온 한 축이었고, 2011년엔 분당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었다. 임공이 없는 보궐선거에서 직장인들이 서둘러 퇴근해 몰표를 던져줘 이뤄낸 성과였다.


 그러나 손학규의 분당 대승리 이후 민주당은 다소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민주통합당이 되었고, 친노라는 과거의 망령 같은 존재들이 패권을 잡았다. 난 이 친노라는 세력을 기본적으로 곤혹스럽게 생각한다. 이는 과거의 내가 노무현을 좋아했고, 노무현을 찍었고, 노무현을 계속 지지했던 것과 별개인 것 같다. 노무현과 친노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친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고, 친노가 대체 뭐냐는 말도 있지만 분명히 ‘친노’는 존재한다. 친노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99.99% 친노(또는 친노주의자)다.


 한명숙 체제의 총선 패배는 뼈아팠고, 충격이 오래 갔다. 야권 세력은 질 수 없는 총선을 거듭되는 실수로 대패했다. 그러나 친노는 그 후에도 충분한 반성이 없었다. 문재인은 친노들 특유의 수법에 의해 일사천리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민주당 출신 대의원들은 경선이 한참 진행되는 와중에도 문재인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친노세력의 전가의 보도와도 같은 온라인 투표에서 완벽하게 문재인이 승리한 것이다. 친노는 노무현의 집권 때부터 항상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을 끌어들여 승리하는 경향이 있다.


 당시에 나에겐 문재인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의 애매한 경력도 문제였지만, 그는 순전히 친노에 의해 갑작스레 추대된 후보였다. 나조차도 그다지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는 무명이었다. 당연히 대중적 인지도가 높을 리도 없었다. 또한 나는 유시민에게 상당히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유시민이 결국 거듭되는 자충수로 인해 차기대선후보 명단에서 이탈하게 되자 친노가 찾아낸 대안 카드가 문재인이라는 판단이 들었기에 좋게 보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난 ‘절대 친노는 뽑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민주당 경선에서 문재인이 승리한 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였다. 난 애초에 민주당의 경제정책이 마음에 드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손학규가 진 이상 박근혜로 깔끔하게 갈아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 끝까지 박근혜로 갈아타버린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발끈하는 문재인 지지자가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제발 그러지 마시라.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문재인 지지자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타인을 이해할 생각이 없다. 어이없는 재검표 이슈로 한 달을 까먹은 것도 사실 귀를 막아서 생기는 일이다.


 ‘친노주의자’들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을 인간적으로 좀 더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타인을 이해해줄 생각이 없는 진보는, 무늬만 진보다. 괴물이 되기 딱 알맞은 무늬진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짓을 하는 부류는 사이코패스와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괴물이 되지 말라. 박근혜 지지자는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다. 선거는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박근혜를 지지하려 했다가 그 지지를 철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내 정치적 관심이 통상적인 대중보다 높았다는 데 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로 박근혜를 찍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박근혜는 가급적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높은 지지를 유지하고 있었고, 나 역시 어느 정도 유보적인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과거의 박근혜라면 절대로 지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문제는 그가 충분히 성장했느냐는 것이었다. 결론은 아니었고.


 박근혜가 왜 대통령의 자질이 부족한가에 대해서는 차후에 설명하도록 하고, 우선 나는 두 대안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안철수가 처음에는 나에게 더 많은 점수를 얻었다. 안철수의 ‘정치에 대한 무지’는 나에게 그를 선택하기 어렵게 했지만, 친노는 나에게 애초에 큰 페널티를 안고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는 안철수 쪽의 공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특히 경제적인 쪽에서 그랬다.


 일단 난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진보좌파’들은 경제적인 데 대해선 거의 기초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경제면에 있어 적잖은 그대들은 상대를 편향적이라 낙인찍으며 적잖이 편향된 정보를 주워 모으는 중이다. 부디 진보적이고도 위대한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이, 그리고 현재의 미합중국 민주당이 통화에 대해 어찌 이야기하고 행동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화라는 현상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난 통화와 통화량이라는 기초적인 경제학적 개념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진보좌파를 거의 본 적이 없다. 만일 문재인 후보와 문재인 캠프가 통화와 통화량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라도 있었다면 이번 대선에서 패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으로 안철수는 진보이긴 하지만 좌파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비록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안철수가 문제를 이해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다만 나에게 그는 정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인상을 지속적으로 주었고, 정치를 하기엔 너무 우유부단하다는 판단이 들게 행동하기도 했다. 또한 박근혜 후보에 대한 판단이 극단적으로 나빠진 게 대선 전 3개월 동안의 주된 인상 변화였고, 그러다보니 어떻게든 박근혜를 막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이 든 상황에서 안철수의 우유부단함은 그리 마음에 들긴 어려웠다.


 내 지지는 천천히 문재인으로 넘어갔지만, 그럼에도 내가 문재인을 지지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용기가 필요했다. 우선 만일 내가 문재인과 경제면에서 방송 공개토론을 할 수 있었다면, 난 순식간에 문재인 후보를 바보로 만들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정도로 문재인 후보의 경제 공약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박근혜 후보가 충분히 똑똑하지 못했기에 문재인이 48%이 넘는 득표를 할 수 있었다 말해도 거짓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그나마 난 문재인 후보의 다른 면들을 좋게 생각했기에 문재인을 지지하게 되었다.


(부연하자면 문재인은 똑똑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경제 공부에 딱히 게으르지도 않다. 그러나 문재인은 내가 생각하기에 경제라는 면에서 가장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탐욕’과 ‘불안’, 그리고 ‘금융’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심리적 요인들과 유동성은 사실 무엇보다도 경제를 강하게 움직이는 동력이다. 그 외 정치적으로 다소 편협한 관점에서 경제를 공부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건 좌파 세력의 전형적인 문제다. 문재인을 비롯한 친노와 좌파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천천히 이야기할 것이다.)


 어쨌든 박근혜 후보는 너무 심하게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는 비록 내가 알거지가 되더라도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한편으로 민주당이 그런 어이없는 경제 공약들을 제대로 실천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립서비스(?)로 낸 포퓰리즘 공약도 많은 것 같았지만, 애초에 그들은 그런 공약을 이행할 능력이 없기도 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대다수가 나만큼 배짱이 두둑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공약 등을 살펴본 후 경제적인 이유로 문재인을 선택하지 않은 모두에 대해 적잖게 공감한다. 나는 그나마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다면 실질적으로 얻을 경제적 이익 또한 어느 정도는 있는 편이다. 이는 내 입장이 그런 것이고, 사실 한국의 중산층 중에선 나와 다른 특성을 가진 기득권을 지닌 사람이 더 많다. 또한 나는 나이가 그리 많지 않기에 재산을 잃더라도 재기하기가 쉬운 편이다. 그렇지만 나보다 나이가 꽤 많은 분들이라면 용감한 선택을 하기 쉬울 리가 없다.


 적잖은 사람들이 문재인 후보가 좀 더 정의로울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박근혜를 찍었다. 그러나 이를 비겁한 선택이라 단정 짓지 말라. 만일 문재인이 정의의 편이라 할지라도, 민주주의는 정의라는 단일 가치를 위한 제도가 아니고, 정의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라고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목숨 걸고 정의를 쫓지만, 어떤 사람은 아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비난은 좋지 못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정의는 중요한 여러 가지 가치 중 하나일 뿐이다. 적어도 그것만이 유일하고, 가장 앞서서 무엇보다도 숭배 받고 있는 가치는 아니다. 정의를 지키고 싶다면, 정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현실 속에서 정의를 지키는 게 유리하도록 만드는 게 최선이다. 또한 현실 속에서 ‘정의’를 강조하는 사람은 대체로 가족과 동료들을 힘들게 하곤 한다. 사람들은 경험으로 그런 것들을 알고 있다. 정의를 중시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감정적인 일이다.


 냉정하게 말해 문재인은 태생적으로 이기기 힘든 후보였다. 그리고 문재인 지지자들이 프레임을 정의로 맞추면서, 선거는 더 이기기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문재인 후보가 분전한 것은 그의 매력과 온라인 여론의 큰 우세, 야권 전체의 절박함, 그리고 박근혜 측의 실수 연발에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문재인 후보는 꼭 이겨야 할 선거를 졌다. 이기기 위해 했어야 할,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여러 언행 중 문재인 후보가 실행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 결과 충분히 이길 수 있고 이겨야 할 선거를 두 번 연속으로 졌다.


 개인적으로 박근혜 당선인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대통령은 결정되었고, 결국은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문재인을 지지했던 모두는 왜 졌는지에 대해 이성적으로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여러 가지 감정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긴다. 다음 선거는 불과 1년 반도 남지 않았다. 보궐 선거는 빼고.





 노무현 정부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는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대승을 거둔 직후였다. 국회의 탄핵은 헌재에 의해 막혔고, 노무현은 화려하게 부활하여 막대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이 시기 (구) 민주당은 붕괴 직전의 위기였으며, 한나라당도 기존에 겪어보지 못한 약세에 전전긍긍하는 양상이었다. 그런데 현실 정치인 노무현의 화려했던 승리는 여기까지다. 이 이후 그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박정희 이후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은 대통령이 되고 만다.


 그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별명답게 정말 ‘바보같은’ 행위를 많이 했지만, 본문에서는 그 중 가장 난감한 실수였던[각주:1] 당 분열에 대한 언급을 하려고 한다. 노무현은 임기 내내 지속적으로 자당을 분열시키고 유력 정치인을 중심부에서 탈락시키는 언행을 일삼었는데, 여기에는 대단히 묘하고도 냉정하지 못한 그의 정치철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본다.


 그의 정치철학은 취임부터 임기 후 사망 직전까지 계속 변화한 것 같지만, 재임기간을 기준으로 내가 파악한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대통령제를 신봉했으며[각주:2], 전문가 집단에 의한 엘리트 정치[각주:3]를 선호하였다. 그리고 그 지원으로 자신을 지지해주는 대중 동원을 좋아하였으며 의회에 의한 정치가 아닌 행정부에 의한 강력한 주도적 정치를 우선시하였다. 행정부의 힘을 중시한 연장선상에서 공무원의 수는 늘리되 정부에 의한 시장 간섭 및 구체적 사안에 대한 간섭은 적었으며[각주:4] 주관성 하에서는 탈이념적인 에고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대단히 확고한 ‘자신의 인력 풀’에 대한 호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행위 자체는 현 정부보다 비리라는 윤리성 문제에서는 자유로울지언정 인력풀의 다양성에서는 모자란 특성이 있었다고 파악한다. 또한 윤리성에 대한 집착과 나름대로의 이중 잣대를 가져, ‘지역주의 극복’ 이라는 레토릭은 걸고 있었으나 실제 호남인에 대한 차별은 심한 양상을 보였다.


 그런데 왜 노무현은 정동영, 김근태[각주:5] 등의 호남 인사를 지속적으로 탈락시키고 영남 인사를 중용하였을까? 그가 전형적인 영남우월론자였을까?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다. 노무현의 감정적인 성향을 고려할 때, 호남인과 영남인의 평균적인 성격은 차이가 있기에 호남인이 불편하고 다툼을 초래하여 싫어했을 수도 있다. 그가 호남인이 충분히 사근사근하지 못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그가 병적인 수준으로 호남인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면, 그의 지역 편향적인 선택들은 납득하기 어렵다. 최소한 그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며, 폭군 짓을 ‘은근히 제법 했지만[각주:6]’ 정말 폭군은 아니었던 것 같다. 또한 그가 바람직한 국가에 대한 심정적 윤리관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른 가설을 제안하고 있다.


 비판적인 사람들의 흔한 가설 중 하나는 노무현이 열등감이 심한 사람으로, 어떻게든 영남에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 가설에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다. 그가 심정적으로 어떤 심리상태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기 어렵지만, 그의 행동들에는 이런 추론이 가능하게 할 법한 실수 또는 의도적인 행위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행동들이 단순한 심리상태에서 단순하게 발현된 행위들이라 여기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어떤 명분이 있었을 것이고, 나는 그 명분을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노무현은 자신의 윤리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윤리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할 수 있을 테지만, 적어도 노무현은 과거의 보수적인 권력에 대해 저항하는 심리가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이 되고 권력을 잡는 과정을 지나 승리자로의 자세 및 더욱 승리하려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방식은 그때까지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영남의 주류가 되겠다는 그의 발상은 기존 영남세력을 역사적 뒤안길로 돌리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호남은 어쨌든 결국엔 우리 편 또는 동맹.’ 이라는 발상 아래 호남에 대한 관심이나 자원을 줄이고, 영남에서 세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을 수 있다. 그가 영남의 정치적 혁명을 원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실제 그의 주요 정치적 쟁점들은 역사적인 관점 위에 있었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가의 미래를 위하는 자세를 가질 때가 많았다. 결국 그의 행동들은 다분히 국가주의적이었으며, 필연적으로 기존 국가주의 세력과의 갈등과 저항. 그리고 더 나아가 그에 이어지는 대연정 제의 등이 이어지게 되었다.


 이 가설이 맞는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행위는 다분히 어리석다. 기존 세력에 대항하려는 자는 새로운 동지들을 충분히 대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편을 공격했으며, 그 과정 속에서 그가 적대했던 기존 보수세력의 힘을 끊임없이 키웠다. 호남은 버리고 영남 비주류만 모아서 영남 주류를 이기려고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김대중 시절 차별의 늪에서 벗어나는가 싶던 호남인들은 다시금 차별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야권은 분열되어 아직까지도 갈등이 크고 영남패권은 지속되었다. 국가주의는 공고화되어 박정희의 향수가 커졌으며, 그 결과는 이명박 정부로 나타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노무현은 (그럴 의지는 없었던 것 같으나) 기존 권력구조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셈이 되었다. 현실을 개혁하려는 자는 현실의 저항에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된다. 성공적인 변화는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노무현은 정동영이나 김근태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한편으로 그의 곁에서 그의 편만 들면서 영남패권주의를 드러내며 그를 사지로 몰아갔던 자들을 잊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다.




  1. 이것이 가장 난감한 실수라는 것은 주관적인 견해이다. [본문으로]
  2. 그가 주장한 개헌안은 4년 중임제의 대통령제였다. [본문으로]
  3.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반쪽짜리 엘리트 정치'에 가깝다는 인상이지만 본문에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4.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의도적으로 삼성 등 대기업들의 편을 들었다. 대기업의 정책 제안이 정부에 반영된 정도로는 현 정부보다 노무현 정부가 높다고 느끼고 있다. [본문으로]
  5. 김근태의 출생지는 경기도 부천이지만, 호남에 지지기반을 두고 있다는 맥락으로 서술한 것이다. [본문으로]
  6. 이런 게 잘 안알려진 걸 보면 친노도 참 대단하긴 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