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이야기

사회 2017. 8. 12. 01:55 Posted by 해양장미



 이번 글은 독자 개개인의 관점에 따라 거부감이 꽤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인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분이라면, 굳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이 글을 읽지 않길 미리 권장합니다.

 

 우리 선진국민 대다수는 사람의 생명은 존엄하며, 어지간해서는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받으며 자랐습니다. 대다수의 국가에선 인명에 대한 개개인의 의견, 견해보다도 생명 그 자체를 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고, 그러다보니 합의에 의한 살인이나 자살, 안락사 등이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안락사, 자살, 합의에 의한 살인은 국가가 침해할 수 없는 자연인의 권리라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공화국과 시민은 사회계약에 의해 결합된 것으로, 자유 국가는 시민의 생명을 소유할 수 없으며 자연권을 침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서 어떠한 종교나 믿음이 개입하여 타인의 생명에 대해 간섭하려는 건 자연권 침해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현행법은 나의 견해와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국가권력의 강제성에 저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나는 일단은 현행법에 따릅니다만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런 규칙은 시민들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 민주국가니까요.

 

 1980년대에서 90년대쯤엔, 21세기가 되면 사회가 안락사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태도로 바뀔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현재 21세기의 1/5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이 문제에 전향적인 국가는 아직 많지 않습니다. 나는 한국에서도 안락사와 존엄사에 대한 논의가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안락사 반대자들을 결코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잖은 사람은 죽을 때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 과정을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지요. 그러나 또한 적잖은 사람들은 각자의 믿음을 기준으로, 타인에게 끔찍한 고통을 강요합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잘 하지 않습니다만 나도 가족의 죽음은 겪어본 적이 있고,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은 심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만 나의 심적 고통을 당사자의 고통보다 우선하는 만행은 결코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합법적인 한도 내에서 최대한 고통이 적은 방향을 선택했습니다만, 그것이 결코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안락사가 가능했다면 몇 시간의 고통이라도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현재 헬베티아(스위스)에서는 외국인도 적극적이고 자의적인 안락사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기 위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먼 길을 떠나 타향인 헬베티아에 가서 죽습니다. 정말 멍청한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계 어디서나 타인의 큰 고통보다 자신의 의미없는 고집이 우선인 사람이 많기 때문에 당장은 방법이 없나 봅니다.

 

 현실적이고 냉정한 쪽으로 좀 이야기해보자면, 고령사회와 트랜스휴머니즘 시대를 생각해볼 때 가능한 빨리 안락사를 인정하는 쪽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연명치료를 기본으로 하고, 죽고 싶어도 살려두는 현 사회 룰 그대로는 고령사회 감당이 어렵습니다. 동조선(일본)은 고령사회가 심각해도 너무 심각하다보니 연금수령 연령을 무려 75세로 올리고, 죽으면 사망소비세를 물리겠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그야말로 백골징포가 따로 없습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죽도록 하는 게 당사자에게도 다른 모두에게도 좋습니다. 안락사가 끔찍합니까, 75세 이상 연금수령에 사망소비세가 더 끔찍합니까? 한국의 고령화 속도도 매우 빠릅니다. 이건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계속 살고 싶은 사람이 아니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게 하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술발달로 인한 트랜스휴머니즘 시대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유전공학과 나노기술, 초인공지능, 사이보그 기술 등이 발달하면 살려는 사람은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려나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현재의 모든 복지, 의료, 연금, 보험 등 각종 사회 시스템은 대단히 혼란스러워집니다. 농담이 아니고 앞으로는 신기술의 위험을 감수하고도 계속 살아보려는 사람들과 어느 정도 살다 죽으려는 사람들이 나누어질 확률이 높고, 아마도 모든 사람을 연명시키려는 시도는 비현실적 또는 쓸데없어질 확률이 높을 겁니다. 더 나아가 의식과 자아를 전자적인 장치로 옮기고 생물학적인 인체는 폐기하려 한다거나, 신체 거의 전반을 기계적인 부품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는 인체가 죽는 경우도 이젠 생각을 해 둬야 합니다. 아주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만, 거의 그 누구도 불과 2016년에 컴퓨터가 이세돌급 기사를 바둑으로 이길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지요? 기술 발달은 선형적으로 되기도 합니다만, 혁명적이고 기하급수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이상 불편하고 불쾌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 따라가는 데 적잖은 피로를 느끼고 있겠지요. 그러나 생각해보는 게 좋을 문제들이 많습니다.

간단한 입추와 복날 이야기

사회 2017. 8. 8. 17:27 Posted by 해양장미

 매년 입추가 지나면 덜 덥겠거니... 하고 생각하지만 덥지요.

 

 입추는 하지와 추분의 중간 날짜입니다. 당연히 원리상 태양의 복사열이 가장 심한 날은 하지입니다. 그렇지만 지구가 달궈지고 식는 데는 약 1년의 1/8정도인 46+@일 정도(실제 평균적인 하지~입추는 47~48일입니다.)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입추는 사실 1년 중 통계적으로 거의 가장 더운 날이고, 중복과 말복 사이입니다. 그리고 입추를 기점으로 더위는 꺾이기 시작합니다.

 

 보통 입추에서 1주일 정도가 지나야 체감 상 더위가 꺾이기 시작합니다. 광복절 즈음 말이지요. 말복이 늦을 땐 광복절이 지나고 말복이 돌아오기도 하는데, 조금 설명하자면 이는 복날을 정하는 기준이 초복은 하지 이후의 세 번째 경일, 중복은 네 번째 경일, 말복은 입추 이후의 첫 번째 경일이기 때문입니다.

 

 경일이라는 건 60갑자 중 천간의 경을 의미합니다. 설명이 더 어려울 테니 예시부터 이야기하자면 천간은 10간으로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고 지지는 12지로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입니다. 천간과 지지, 줄여서 간지 중 하나씩 따서 갑자, 을축, 병인, 정묘... 같은 식으로 붙여 나가면 총 60개가 됩니다. (120개가 아닙니다.) 60을 갑자라 부르며 매 해와 날에 붙입니다. 그래서 60살의 생일을 회갑, 환갑이라 부르고 무협지 같은 데선 60년의 내공을 1갑자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날짜에도 갑자 을축 병인 정묘 같은 이름이 붙습니다. 그래서 천간 중 의 날로 복날을 정하는 겁니다. 만일 하지 당일이 경일이면, 현대엔 하지 후 20일이 초복입니다. 그리고 같은 기준으로 만약 입추가 경일이면, 입추가 말복입니다. 조선 시대엔 입추 당일이 경일일 경우 기준이 되는 황도가 오전이냐 오후이냐에 따라 달랐다고 합니다만, 현대엔 그렇게까지 하진 않습니다. 기준이 좀 이상합니다만 복날은 잡절이라 24절기처럼 중요한 절기가 아니고, 근래의 우리에겐 닭 또는 개를 먹는 게 중요하니 별 일은 아닙니다. 이렇다보니 중복과 말복 사이가 10일일 때도 있고, 20일일 때도 있는데 대략 3:7 비율로 20일일 때가 많습니다. 올해도 20일이지요. 보통 초복 땐 그리 많이는 덥지 않기 때문에, 벌써 복날인가 생각하다가 중복이 지나고 나면 진짜 더워지는 게 일반적입니다.

 

 탄소 때문이건 무슨 이유에서건 여튼 지구는 따스해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여름이 더 더워질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보는 분들이 장수하여 만일 22세기까지 살아있을 수 있다면 참 신박한 더위를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 때는 냉방 장치가 더 발전해 있겠지요?

 

 인류의 구원자 중 하나인 윌리스 캐리어에 다시 한 번 감사하며, 절기상 초가을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