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잖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에게도 인간성 괜찮은 친구들이 있다. 그런 관계들은 대체로 인생을 윤택하게 해 준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나에게 돈을 빌리려 한다면, 각각의 그들은 나에게 동등한 대접을 받을 수가 없다. 금전적 신용이란 인간성만으로 형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내가 상환능력이 부족할 때에도 돈을 빌려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어쨌든 상환능력은 돈을 빌려주는 데 있어 중요한 척도다. 금전적 신용이 마음만으로 충분히 형성되는 것일 수는 없다. 나 역시 상환기일을 꽤 어겨본 적이 있는데, 정말 여러 모로 다시는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 중이다.


 그렇다면 다음 중 뭐가 더 신용이 있고 뭐가 덜 신용이 있을까? 화폐, 사법, 공무원, 그리고 사람. 이 답은 사람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객관적인 신용의 차이는 비교적 분명하다. 답을 말하자면 말한 순서대로 믿을만하다.


 화폐, 즉 통화는 가치중립적이며 그나마 가장 공정하게 관리된다. 내가 돈을 1억원 가지고 있다면, 내가 법률적인 문제가 없는 이상 전 세계는 내가 1억원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열심히 도와줄 수밖에 없다. 이 권리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전 세계의 경제 전체가 큰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가끔 하이퍼인플레이션 같은 상황에서 통화 가치가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런 특수상황이 아니라면 화폐는 가장 신용이 높다.


 그 다음은 사법이다. 사법부가 자주 눈 먼 판단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법은 여러 조건에서 공정함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은 한다. 기소권이 있는 한 3번의 판결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사법인은 비록 모자란 사람이 많긴 해도 전문적인 학습을 한 사람이긴 하다. 한국이 충분히 좋은 사법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만하지만, 그래도 다른 방법보다는 현실적으로 나을 때가 많기에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하다.


 그런데 공무원은 믿을 만한 족속이 못 된다. 물론 청렴한 공무원도 있다. 그러나 공무원은 근본적으로 가급적 문제를 안 일으키고, 생긴 문제도 덮으려는 속성을 지닌 집단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닥친 어떤 문제를 공무원이 잘 해결해주리라 기대한다면 그건 적잖게 어리석고 헛된 기대가 될 가능성이 적잖게 높다. 그래도 공무원은 공적인 사람이기에 보통 사람보다는 믿을 만 할 때가 많다. 죽어라 민원을 넣고 협상을 한다면 어쨌든 그들은 그걸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부서가 바뀌거나 사표를 내기 전까지는.


 상대적으로 자연인은 가장 믿어서는 안 된다. 물론 보통 사람보다 좀 더 믿을 만한 사람도 있지만, 그리고 친한 사람이라면 좀 더 믿을 만하지만, 얼핏 생각하기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애인한테 차여 본 경험 한번쯤 있다면 누구라도 이 말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간의 약속이란 얼마나 허망할 때가 많던가. 약속할 때는 비록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람은 본래 변덕스럽고 신뢰를 잘 무너뜨린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하려 한다면 저 순서는 대체로 잘 맞는다. 일단 상대와 협상을 해보고, 그것이 원만하게 잘 해결되지 않는다면 공권력을 동원하고, 그래도 안 되면 소송을 걸고, 재판으로도 승산이 모자란다면 금전의 힘을 사용하는 게 해결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민법이 아닌 형법의 영역이라도 판결에서 금전적인 ‘합의’가 어느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박근혜는 문재인보다 태생적으로 우위에 있는 가치를 들고 나왔다.


 새누리당은 과거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개개인의 재산권 보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각 개인에게 있어, 재산권이란 가장 믿을 만한 권리이다. 본질적으로 자유민주주의는 개개인의 사유 재산에 의해 탄생되는 면이 크다. 민주 공화정은 그 무엇보다도 ‘국가가 시민의 재산(과 자연권)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한 제도에 가깝다. 이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자연 발생하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체감을 잘 못하는 역사의 한 단편이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벼슬아치가 부정하게 백성의 재산을 수탈하는’ 옛날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그렇기에 제도가 자유민주주의를 보장한다 해도, 시민에게 충분한 재산이 없다면 그 자유민주주의는 유지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에 연관하여, 태생적으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대립항일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다. 시민이 재산을 축적할 수 없다는 건 개개인의 권력이 쉽게 성장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고, 분배를 주도하는 권력은 고인 권력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은 사람을 우선적으로 들고 나왔다. 그 다음이 국가였고, 개개인의 재산권이 맨 나중이었다. 이는 분명 사회주의와 자유(시장)주의의 대립에 가까운 요소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과 국가를 믿고 싶다는 바람과, 실제로 믿을 만하냐는 판단은 좀 다른 문제다. 이 면에서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은 문재인을 선택하는 데 별로 큰 용기를 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잃을 게 많은 사람들에겐 문재인을 선택하는 게 좀 도박적으로 느껴질 만 했다.


 문재인이라는 한 개인은 꽤 매력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잘생겼고, 똑똑하고, 남을 위해 오랜 시간을 노력했고, 객관적으로 정의의 편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사람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한 게 못된다. 정치인 문재인은 자연인 문재인에 비해 더욱 믿을 만한 게 못된다. 한 정치인을 믿는 건 그다지 현명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잖은 박근혜 지지자는 통상적이고도 피상적인 척도 하에서 좀 더 믿을 만한 걸 믿었을 뿐이다. 나의 재산, 그리고 그것을 지켜줄 시스템.


 이번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주역은 50대이다. 이 50대는 10년 전에 40대였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었다. 15년 전엔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든 30~40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선택적인 행위에 대한 보답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그들이 구축한 사유 재산은 대체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재산을 잃으면 더 이상 벌 방법도 없고, 믿을 구석도 없다.


 국가의 공공성을 한 번 더 믿어보라고 하는 게 쉬울까? 그들이 많은 출혈 끝에 쥐고 있는 주택 가격이 더 떨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문재인을 찍는 게 쉬울까? 부동산뿐만 아니라 주식 투자자와 주식형 펀드 투자자들에게도 문재인의 순환출자 발언은 좋게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맹목적인 순환출자 반대론자들이, 그리고 문재인 후보 측이 순환출자의 개념과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순환출자가 왜 사라져야 하는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친노주의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것은 마치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운’ 종교 교리와도 같다.


 현재의 50대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유신 체제를 지지하는 세대가 아니다. 신뢰를 얻는 게 먼저다. 이미 겪어 본 사람들이, 친노에게 신뢰가 있을 리가 없잖은가. 중간 단계를 건너뛰려 하면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