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의 <다시 민주주의다> 소개

정치 2017. 10. 22. 01:15 Posted by 해양장미

 이런저런 포스트 작성계획은 있는데 살짝 바쁘기도 하고, 작성이 잘 되고 있지 않습니다.

 

 자작 포스트 대신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 정치발전소 학교장이 동아일보에 기고중인 <다시 민주주의다>를 소개 및 추천해보겠습니다.

 

 기고문들이 볼만한 게 많은 데 반해 현재 접근성이 낮은 상태로 보입니다. 그렇다보니 본 포스트에 정리해 소개합니다.

 

 기고일을 참조해서 볼 수 있도록 날짜와 함께 소개합니다. 제목 클릭시 링크됩니다. 

 

1/3 정치 무관심은 민주주의의 장애물


1/17 정부가 그 목적을 상실했다면


1/31 투표율보다 중요한 건 후보


2/14 사설 캠프가 주도하는 대선정치 공공성 회복해야


2/28 악마는 선의에 있다


3/14 탄핵 이후,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3/28 당내 국민경선이 최선일 수 없는 이유


4/11 대통령과 정당, 누가 통치해야 하나


4/25 민주주의는 반대를 관용하는 것


5/9 침착하고 다정하고 자신있게


5/23 국가와 정부, 국민과 시민의 차이


6/6 5당제, 일단 희망적이다


6/20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여전히 낯선 이유


7/4 민주주의 정치는 결과로 말해야


7/18 의원 수는 어떻게 정해야 할까


8/1 국민보다 정당과 의회가 더 중요하다


8/22 청와대 정부인가


9/5 ‘적폐 청산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9/19 대통령이 하지 말아야 할 일


10/10 문 대통령 민주주의 노선의 함정


 

 추천 브금. 우클릭 반복재생기능 사용 가능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7VMEW2MByo

 




 이번 정부의 정책은 전 분야에 걸쳐 기존 엘리트를 배격하는 반지성주의 포퓰리즘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정책에서 기존 주류 학문을 배척하고, 비주류야말로 진짜 국민을 위하는 것처럼 언론 플레이하고, 검증되지 않은 걸 함부로 적용하는 것이지요.

 

 이런 방식은 사이비 의사들의 것과 같습니다. 안아키 같은 게 유명한 예지요. 함부로 독단적인 처방을 내리고, 잘 되면 내 덕. 잘못되면 나몰라 무책임인 겁니다.

 

 현 정부의 잘못된 정책은 이미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하나의 글에서 모두 다루거나 언급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본문에선 8.2 부동산대책이 어떤 부작용을 만들고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정책을 권력자가 함부로 추진하면 서민들은 실험실의 모르모트처럼 고통 속에 죽어가게 됩니다.

 

 부동산은 글로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쉬운 분야가 아니므로, 8.2 부동산대책에 대한 설명 자체는 생략합니다. 부동산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이미 그 정책이 어떤 것이었으며, 얼마나 총체적인 폐급이었는지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 상태에서 그런 이해가 없는 사람이라면, 당장 이 글에서 설명해서 이해시키는 건 무리겠지요. 바로 그 결과로 넘어갑니다.

 

 일단 당연하리만큼 거래절벽이 등장했고, 부자들이 주도하는 청약광풍이 벌어졌습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19/2017091901998.html

 

 거래절벽은 일단 시장의 신용-통화 흐름을 엉망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정부의 세수를 폭락시킵니다. 그리고 그 풍선효과는 이번에도 청약쪽으로 흘렀고, 재개발과 재건축도 호황을 맞았습니다.

 

http://kpenews.com/Board.aspx?BoardNo=1951

 

 이런 현상은 일단 부동산으로 인한 양극화를 심화시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투자를 통해 부자 대열에 합류하려는 중산층, 직업으로 부동산을 다루는 서민들은 모두 탈락하고 손해를 보게 됩니다.

 

http://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24058



 가격도 양극화가 바로 나타났습니다. 아파트는 가격 상승인 반면 단독, 연립, 다세대 주택은 가격이 하락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비싼 지역 비싼 주택은 가격이 더 오르고, 값싼 주택은 가격이 하락했습니다. 부동산 시장에 제약을 거니 침체가 일어나고, 그 침체는 우량매물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 것입니다. 좌파는 시장이 어려워질 때 부자와 빈자의 차이는 더 극명해진다는 기본 원리를 무시하니까, 좌파가 권력을 쥐면 이런 재앙이 일어나는 겁니다.

 

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0419

http://www.cc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091055

 

 또한 자금줄을 망가뜨리니 당연하리만큼 가계부채의 질은 더 악성으로 변했습니다. 담보대출을 못 받으니까 그보다 이율이 높은 사업자대출, 신용대출이 증가한 겁니다. 이리 되면 일단 대환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정책적 대환엔 어쩔 수 없이 공적 자금이 들어가는 만큼 경제를 아는 사람들의 혹독한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당장 가시화되지 않는 악성(불법)부채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한 대가도 발생합니다.

  

 이런 게 8.2 부동산대책 후 두 달 만에 터진 일들입니다.

 

 부동산정책 문제는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수많은 경제정책 문제 중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문제들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망조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권력을 쥐면 전능한 존재라도 된 것 마냥 시장을 무시하고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과감한 시술이 환자를 죽이기 알맞듯, 좌파들의 오만과 권력 앞에 서민들은 모르모트처럼 고통 받다 죽어가기 마련입니다. 

추천 브금.

 

https://www.youtube.com/watch?v=uSfHQZ8FEMw

 

 

전편 : 1) 인조의 패전에서 예송논쟁까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은 건국부터 정도전이 추구한 신권중심 정치질서가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시대를 고려하면 정말 진보적인 발상이었지요. 붕당정치는 단점도 꽤 있었지만, 만약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어갔다면 조선은 점차 입헌군주정과 비슷한 형태로 나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조선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절대군주 숙종이 등장하면서, 이후의 조선사는 건국부터 이어져왔던 신권중심정치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전편에 이야기했듯 현종 대까지 붕당정치는 평화로운 편이었습니다. 어쨌든 선비의 싸움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숙종은 그걸 죽고 죽이는 혈전으로 바꿔놓습니다. 그리고 이쪽저쪽 숙청을 반복하며 신하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고, 완전히 굴복시키게 됩니다.

 

 숙종의 왕권강화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으로는 꼭 나쁘진 않습니다. 붕당정치에 폐단이 많았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현대 의회주의 민주정도 보고 있으면 정말 막장인데, 조선 붕당정치는 그보다 아무래도 심하거든요. 당장 의회를 불신하고 현명하고 강력하며 독단적인군주가 모든 걸 다 해주길 바라는 모습은 현재 한국에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숙종 이전에 왕권을 강화했던 왕인 태종 이방원에 대한 평가도 그다지 나쁘지 않지요.


 그러나 장기 집권한 숙종의 왕권강화는 여러 부정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위에 이야기했듯 조선 초부터 이어져오던 신권중심의 정치가 끝나고, 강력한 왕에 신하들이 잘 보이려 노력하면서 반대파를 기회만 되면 몰락시키려 하는 혈투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선 신하들은 점점 바른 말을 잘 하지 않게 되고, 뜻 있는 자는 관직에 오르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영민한 왕이었기에 장기집권을 하는 동안 왕권강화로 인한 문제가 딱히 커지진 않았습니다. 숙종 다음에 즉위한, 숙종과 희빈 장옥정 사이의 세자였던 경종은 재위기간이 불과 42개월이었지만, 경종 다음 왕은 그 유명한 영조로 52년이나 재위. 영조 다음 대인 정조가 그 다음대로 243개월을 재위했습니다. 영조와 정조는 모두가 알다시피 능력 있는 왕이었지요.

 

 숙종이 즉위한 해는 1674년입니다. 그리고 숙종의 아들인 영조는 1776년까지 재위합니다. 중간에 경종이 4년 하긴 했지만, 어쨌든 붕당정치 붕괴 후 부자가 102년을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이후 영조의 손자 정조가 또 1800년까지 좋은 통치를 함으로 탕평시대는 조선의 본격 중흥기가 되어버립니다. 시스템의 문제를 무려 126년간 3+1군주의 능력으로 커버한 셈입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이 운이 좋았던 건데, 어떤 면에서 보면 나쁜 것이었습니다. 숙종-정조 대에 조선은 왕이 능력 있고 잘해야만 잘 돌아가는 시스템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숙종의 책임을 모두에게 납득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숙종이 붕당정치를 실질적으로 끝내고 절대군주화 되었다고는 해도, 그가 집권한 이래 126년간 조선은 꽤 잘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보다 좋은 시대였습니다. 전후복구도 끝나고 어쨌든 경제도 기술도 성장했던 시기거든요.

 

 그러나 나는 조선의 국운을 쇠하게 한 것은 결국 숙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정치시스템을 망친 건 분명 숙종이었으니까요. 정치는 왕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유능해도 혼자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명백해요. 숙종은 여러 번의 환국 과정에서 피가 흐르는 숙청을 반복했고, 이 과정에서 신하들에 대한 통제권은 확보했으되 신하들끼리의 혈투는 그 대가가 되었습니다. 서로 증오하는 신하들끼리 일처리가 제대로 되긴 어려웠고, 숙청의 정도가 심하다보니 국가 인재풀이 박살나버렸습니다. 인력이 없어지니 역설적으로 왕의 인사권은 제한되게 되었고, 경쟁할만한 붕당이 아예 사라져버리다시피 하니 또 역설적으로 왕의 권력이 줄었습니다.

 

 왕의 권력은 근본적으로는 백성에서 나오고, 가까이는 왕을 받드는 신하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숙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신하들을 너무나 많이 충돌시키고 제거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간이 갈수록 왕권이 약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숙종 말에는 남인들은 몰락하고, 남인들에 대한 온건/강경 처리를 시작으로 나뉜 소론/노론으로 나뉜 서인들이 각기 훗날의 경종과 영조를 지지하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줄 잘못 서면 죽는다는 (진짜로 사약 받습니다.) 절박함이 있다 보니 아주 막장이 된 겁니다. 사실은 이미 이 시점에서 조선의 국가 시스템은 기운 것입니다. 법도를 논하는 게 아니고, 신하들끼리 정파가 갈려 서로 다른 후계자를 지지하는 건 이 때가 조선사에서 처음입니다.

 

 서로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밀리더라도 제거당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중요한 겁니다. 사상의 자유라는 거지요. 인조 이후 숙종 이전엔 잘못하면 내 쫓기는 일은 있어도 죽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는 열려있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정치세력끼리 서로 증오하고 끝을 보려고 굴면, 그 사회는 쉽게 파멸합니다. 역사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한국도 대통령 일당에게 반기를 들기 어렵지요? 내부에서 이견을 제시하기도 어렵고.

 

 정리하자면 붕당갈등이 극대화된 건 숙종 책임입니다. 그 갈등은 나라를 말아먹기에 충분했기에 탕평이 필요해졌습니다. 숙종도 탕평에 대한 생각은 있었으나, 숙종은 죽을 때까지 그 면에선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탕평을 시작한 건 실질적으로 숙종 다음 대인 경종입니다.

 

 숙종 말년은 노론 세상이었고, 숙종이 병으로 쓰러진 후 경종은 노론들에게 상당한 견제와 압력을 받으면서 집무를 시작합니다. 위기를 겪다 왕이 되었으나 노론은 경종을 계속 심하게 공격합니다. 경종 집권 초에 노론은 아예 경종을 왕 대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폭주가 너무 심해져, 훗날 영조가 되는 연양군을 세제로 만들고는 대리청정을 시키라는 말까지 나왔지요.

 

 경종은 그런 실언을 빌미로 진짜 대리청정을 시킬 것처럼 이야기하다, 방심한 노론이 실수를 거듭하자 상황을 한 번에 역전시켜 노론의 세는 한 풀 꺾이게 됩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노론 쪽에서 경종을 죽이려 한 게 밝혀집니다. 나라가 갈 데까지 간 거지요.

 

 이 때 경종은 훗날 영조가 되는 세제 연양군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왕을 시해하려는 사건에 얽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경종은 그러지 않았고, 그러기도 어려웠습니다. 연양군이 아니면 경종에겐 후사가 없었습니다. 손이 귀한 것은 조선 왕실의 큰 문제였습니다.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경종은 즉위 48개월 만에 쓰러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연양군이 올린 인삼을 먹고 죽습니다. 당시 어의는 경종이 인삼을 먹는 걸 반대했고요. 결국 경종이 죽은 후 연양군은 왕이 됩니다만, 이후 임기 내내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게 됩니다.

 

 환국을 통한 숙종의 절대왕권에서부터 혈투가 되는 붕당정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영, 정조대의 탕평, 이후 이어지는 세도정치는 연역적인 인과관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무자비함과 절대권력이 혈투를 부르고, 혈투 속에서 잘 해보려는 권력조차 어쩔 수 없이 이너서클을 구성하고, 그 이너서클이 부패하면서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영정조대의 치세, 조선의 중흥기가 있었던 건 많은 것이 경종의 공입니다. 경종은 짧은 재위로 인해 별다른 평이 없습니다만, 만일 경종이 붕당간의 투쟁을 부추겼고 영조가 되는 연양군을 제거했다면 조선은 중흥 없이 훨씬 빨리 끝났을 것입니다. 경종은 분노를 참고 명분과 대의를 따랐기에 오랜 세월동안 조선 백성들이 중흥 속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종과 같은 모습을 근래 정치권에선 찾아보기 힘들어 참 우려스럽습니다.

 

 숙종이 굳은 정통성으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이었다면, 영조는 매우 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단히 투쟁적인 왕이었습니다. 경종도 장희빈의 아들이라 정통성이 모자라긴 했지만, 영조는 아예 궁녀도 아닌 무수리 출신의 아들이란 말이 돌았고 심지어 기혼녀였으며,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라 정통성이 태생부터 아주 낮았고, 이에 더해 경종 독살론에 시달리다보니 정말 흔들리기 쉬운 왕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영조는 평생 싸워야했고 그 싸움에 질린 것이 세도정치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영조 시절의 군신 다툼은 영조 집권 4년 만에 벌어진 이인좌의 난부터 언급해야겠습니다. 이건 쉽게 설명하자면 경종 독살론이 반란까지 이어진 건데, 실제 금방 진압되긴 했지만 충청-경상-전라의 삼남지방 일대에서 벌어진 거병이었습니다. 그나마 빨리 진압된 건 영조가 미리 전 해에 탕평을 시작해 이인좌의 난 주축이었던 소론 탕평파, 완론들을 대거 기용했던 덕이었고, 미리 그런 걸 안 해뒀으면 대규모 내전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때 영남지방, 그러니까 경상도가 가장 진압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반역의 지역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영남지방은 남인들의 거점이기도 해서 더더욱 견제 받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견제는 정조 때 풀릴 기미도 있었지만, 결국 흥선대원군 집권기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이런 지역차별은 조선의 몰락에 또 나름 기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소론과 남인은 다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소론 강경파 준론들은 난이 진압된 후에도 계속 영조에게 덤비면서 제거당합니다. 세력이 남은 건 숙종 때부터 영조를 받들려 하던 노론밖에 없게 되지요.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노론만 남게 되니 탕평은 영조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일이 되어갔습니다.

 

 이 시점에서 슬슬 등장하는 게 척신, 그러니까 외척입니다. 노론만 남게 된 시점에서 영조는 그 강경파를 견제하기 위해 아군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외척을 끌어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탕평은 증오 속에 실패하고 세도정치의 막이 올라갑니다.

 

 본래 왕이 외척을 정치에 쓰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부패하기 쉽지요. 그래서 유학에선 외척 기용을 금기시합니다. 그런데 영조는 노론을 견제하려다 보니 외척을 쓰게 되었고, 당대엔 이게 큰 문제까진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쁘게 작용하여 결국 조선이 망조로 흐르게 됩니다.

 

 이 문제에서 영조를 마냥 탓하기도 어렵습니다. 영조는 실제 평생 암살을 걱정할 정도였거든요. 취임하자마자 내전 겪고 아무리 탕평하려 해도 말을 듣긴 커녕 잦은 반역, 남은 세력도 못 믿으니 영조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삶이 원인일까요. 영조는 나이가 들수록 나쁜 성격을 드러냅니다. 편견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그의 단점이 정말 극단적으로 나쁜 방향으로 표출되는 유명한 사건이 생기니,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게 그것입니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임금이 세자를 그런 식으로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 건, 영조가 좋은 임금이고 아니고를 떠나 더 이상 조선이 유학의 나라로 남긴 어렵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때 이미 나라는 다 기운 것이지요.

 

 그러나 영조의 뒤를 이었던 정조가 워낙 밸런스 브레이커 또는 치터라 조선의 중흥기는 좀 더 이어집니다. 영조의 비정한 사도세자 살해가 결과적으로 조선 백성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결과가 되긴 했는데, 문제는 그게 끝물이었다는 거지요.

 

 정조는 임금으로 갖춰야 할 거의 모든 자질을 다 갖춘 왕이었습니다. 다만 정조가 조선에서 마지막 좋은 임금이었던 건... 굳이 보면 정조가 넘칠 정도로 천재였던 게 문제입니다. 이미 붕당정치는 깨지고 유학도 기운 상황에서 밸런스 브레이커 정조가 이끌던 게 당시의 조선인데, 그러다보니 그 국가 시스템은 정조만이 돌릴 수 있는 쪽으로 변화했습니다. 게다가 정조의 업무량은 너무 가혹해서 건강을 빨리 잃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한 스포츠 팀에 초월적인 실력을 가진 슈퍼스타가 있어 좋은 성적을 한동안 거두지만, 혹사로 인해 선수생명이 짧아지고 그가 은퇴한 후에 팀이 몰락하는 사례랄까요. 실제 드문 경우가 아니지요.




 정조의 장점은 정말 많지만 특별했던 건 관대함입니다. 정조는 신하가 자신에게 막말을 해도 더 심한 막말로 응수했지 기분 나쁘다고 큰 벌을 내리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신하를 구박은 해도, 말을 들으면 그만큼 보상을 해줬습니다. 전반적인 형벌도 완화시켰고, 격쟁도 잦았습니다. 격쟁은 임금에게 백성이 직접 민원을 넣는 건데, 정조가 한 번 행차하면 백성들이 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다가와 이런저런 하소연을 했고, 그게 대략 한번 행차시마다 50회 정도 되었다 합니다.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있었으나, 조선 시대엔 평민 또는 천민은 글을 잘 몰랐으니까요. 천민도 왕에게 직접 다가가서 억울함을 고할 수 있었던 나라였던 게 조선입니다. 격쟁이 들어가면 보통 사흘이면 답이 돌아왔다고 하니, 소통하는 척/민주적인 척/온갖 착한 척 하다가 청와대에 13만 명이나 의견을 모아 넣었더니 코웃음치고 놀리듯 20만 명 모아 오라는 현 대통령 및 정부와는 달라도 정말 다르지요.

 

 세도정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정조는 남인까지 다시 활용하는 등 이 세력 저 세력을 마음껏 주무르면서 아예 정치 구도 자체를 재편집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정조가 아무리 잘났어도 각 붕당들끼리 증오를 내려놓고 평화로운 경쟁을 하게 만들 수는 없었지만요. 그런데 갑자기 정조의 건강이 악화됩니다.

 

 결국 정조는 50살도 되기 전에 사망. 정조의 뒤를 이은 세자 순조는 즉위할 때 나이가 겨우 11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그 유명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조격이 되긴 하는데... 사실 김조순을 그 위치에 올려준 건 세자를 보호하려는 정조였고, 막상 김조순은 인품도 능력도 괜찮은 편이라 김조순이 살아있을 땐 세도정치 문제가 별로 없었습니다.

 

 순조대의 문제는 좀 다른 것이었는데, 순조는 일단 즉위 시 너무 어려서 1804년까진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81112, 순조의 의욕을 꺾는 사건이 일어나니... 다름 아닌 홍경래의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은 굳이 보자면 조선 시대 내내 계속된 평안도 차별로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평안도는 현재 북쪽 조선로동당 강점지 중 평양을 포함한 평안북도, 평안남도, 자강도를 합친 넓은 지역입니다. 평안도는 조선 입장에선 변경이고, 늦게 영토에 편입된 지역도 많은데, 신세 비슷한 함경도는 태조 이성계의 본거지였던 반면 평안도는 기댈 데도 없다보니 중앙 사대부 사회에 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홍경래의 난이 있을 무렵에 이미 평안도는 남쪽 지역과는 달리 상업과 광업이 발달하고, 흉년에 삼남지방에서 몰려온 유민들이 많은 혼란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연줄이 없어 중앙 정부의 부패한 면엔 가장 쉽게 피해를 보다보니, 반란이 일어나기 쉬운 상태였습니다.

 

 난은 규모가 꽤 있었음에도 반년 만에 제압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순조가 마음고생이 많았던 건지, 원래 몸이 약했던 건지. 여하튼 이후 순조는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국정에 신경을 많이 안 씁니다.

 

 그럼에도 순조 때 당장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순조는 업무를 적게 한 거지 딱히 나쁜 왕은 아니었고, 김조순도 살아있을 땐 딱히 세도정치 문제가 두드러지진 않았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었지요. 선대인 정조가 이미 왕이 영웅적 활약을 해야 돌아가는 나라를 만들어 놨었는데, 순조는 방목 스타일이었고 세도가들이 이 순조 대에 힘을 잔뜩 키웁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세계 전반은 아주 바쁘고 혼란스럽게 돌아가지요. 빨리 개혁해도 모자랄 나라가 안일하게 세월을 보낸 셈입니다.

 

 그나마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매우 총명해서 순조가 많은 기대를 했다고 하는데, 문젠 순조가 건강이 악화되어 효명세자가 집무본 지 4년 만에 효명세자가 겨우 22살 나이로 요절합니다. 사인은 분명하지 않으며 과로사 추정. 그리고 순조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효명세자 사망 전 해엔 차녀 영온옹주가 사망. 그리고 2년 후 명온과 복온, 두 공주가 사망.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순조 본인도 건강악화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순조 사망 시점에 살아있던 유일한 자녀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였는데 (임금의 적녀만 공주고, 적녀가 아닌 딸은 옹주입니다. 덕온공주 이후 왕의 적녀는 태어나더라도 공주에 봉해지기 전에 죽었습니다.) 이 덕온공주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23세에 급체로 사망(...) 합니다. 현대 기준에서 보면 급체는 소화불량일 뿐이지만, 당시 기준에선 온갖 질병들이 급체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위천공이나 급성 췌장염, 심근경색 같은 것들 말이지요.

 

 이렇게 순조-효명세자 및 공주, 옹주 일가가 줄초상이 났고, 이에 조선의 미래도 한없이 어두워집니다. 순조가 명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하들에 대해 위엄은 있었고, 여러 문제는 있었으나 당시만 해도 세도정치가 아예 막장은 아니었습니다. 김조순도 정조의 명은 지켰다 볼 수 있지요. 그러나 효명세자의 아들이었던 헌종이 1834, 8살 나이로 즉위하면서 조선의 앞날에도 종이 칩니다.

 

 왕 일가는 씨가 말라. 붕당 균형은 깨진지 오래. 세도정치는 김조순 및 명온과 복온, 두 공주가 죽은 후 (셋 모두 1832년 사망.)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한 상태였고, 이미 이 때 조선엔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의료봉사 등을 하며 개항을 요구하던 시기였으나, 조선 조정은 하필 효명세자가 죽은 시점이라 전혀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세도정치가 커지게 된 덴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위에서부터 쭉 이야기했듯 숙종의 환국 이후 붕당끼리의 어느 정도 건전한 경쟁은 끝났고, 그 혈투는 왕이 찍어 누르고 다스려야 하는 상황이 이어져 왔습니다. 유능했던 영조, 밸런스 브레이커 정조 대까진 괜찮았지요. 그런데 몸이 약한 순조의 치세가 어찌 골골대면서도 35년간 이어지면서, 정조가 순조를 돌보려 세웠던 김조순이 살아있는 동안엔 극단화되진 않았습니다만 그 동안 안동 김씨는 온갖 요직을 장악하긴 했고, 또 한편으로 숙종 때부터 남인이 몰락하면서 사림이 중앙-지방으로 나뉘어져 수도권 명문사족만 관직을 얻을 수 있는 부정부패가 심해진 상황이었고, 지방 사족은 필사적으로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상황이 되어, 이미 조선 조정은 인재를 충분히 수급하고 각 지역의 균형을 맞추기 힘든 입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숙청으로 인재를 워낙 많이 잃기도 했고요.

 

 전편에서부터 이야기했지만, 조선은 그 건국 철학부터 민주정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할 수가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권과 왕권의 다툼에서 계속 왕권이 승리했고, 이는 지도자가 유능할 땐 별 문제가 없으나, 그렇지 않으면 무너지기 쉬운’, 민주적이지 않고 닫힌 정치체제의 전형적 단점으로 표면화되어 버립니다.

 

 세도정치가 정말 답이 없었던 걸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위에 이야기했듯 이미 조선은 정당하게 교육과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막힌 사회였는데,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등의 세도가가 장악하면서, 세도가에 줄을 대야 관직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첫 번째 문제였습니다. 사실 현대 한국도 모 정치세력이 교육에 손댈 때마다 벌어지는 사다리 걷어차기문제가 있는데, 시민들이 위선에 속지 말고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세도가에 줄을 대고 관직을 얻은 사람들은 줄 대느라 소모한 재산을 만회하기 위해 백성을 쥐어짰고, 이에 부정부패가 일상화됩니다. 너무 심한 수탈에 백성들은 떠돌거나 도적이 되기 시작했고, 출세길이 막힌 양반들까지 점차 견딜 수 없어져 결국 민란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세도가문들은 조선을 잘 다스리고 개혁하는 것엔 정말 참담할 만큼 관심이 없었는데, 권력은 가졌으되 책임의식은 없었던 겁니다.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정치인은 책임지는 자리라는 건데, 책임을 회피하는 정치인이나 책임의식을 도외시하는 맹목적 지지자들을 항상 주의하고 견제, 낙선시켜야 합니다.

 

 헌종 이야기로 돌아가 마무리하자면, 헌종은 8살에 즉위했기에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는데, 순원왕후는 김조순의 딸로 안동김씨입니다. 순원왕후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치적 능력은 좋지 않았고 친정에 의지했는데, 그 바람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심각한 지경이 됩니다. 왕실 기강 살린다고 나라살림도 어려운데 지출도 많이 해 민심까지 잃었고, 이후 시간이 지나 헌종이 친정을 하면서 세도정치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는데 그 바람에 할머니인 순원왕후와 갈등이 심해집니다. 그러다가 헌종은 23세로 젊은 나이에 급사해 버리지요. 헌종에겐 자식이 없었습니다. 옹주가 하나 있었지만 태어난 날 죽었지요. 헌종의 죽음에도 여러 설은 있습니다만, 확실한 건 없습니다.

 

 이에 효종 때부터 이어진 조선 왕가의 직계 혈통은 단절됩니다. 실질적으로 이 때 조선왕가는 기운 것입니다. 무슨 유전병이라도 발현된 건지, 순조의 자녀들과 손자들 모두 25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으니까요.

 

 왕이 제어해야만 하는 나라가 왕의 혈맥이 끊겼고, 관직은 탐욕스러울 뿐 책임감도 현명함도 비전도 없는 세도가들이 장악했으며, 시대는 급변하는 난세였으니 조선의 국운은 끝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이 망해가는 와중에 정말 주목할 만한 것이 하나 있으니, 딱히 나쁜 왕은 없었다는 겁니다. 거의 다들 그 나름대로 열심이었고 덕치하려 애썼고 딱히 부귀영화를 탐하거나 폭군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기우는 걸 막지 못했지요. 이는 조선 왕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단 입헌군주화가 되지 않음으로 왕정이 가진 태생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파벌들끼리 서로 싸우고 증오하는 걸 왕조차 어쩌지 못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걸 명심해야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역사를 중시한다는 사람들이 실제 역사를 모르고, 역사를 경시하며,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걸 항상 봅니다. 역사적 사건들을 외우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미 드러났던 문제가 반복되지 않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추천 브금. 화면에 우클릭 후 연속재생기능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23Gy6CG70w

 


 추석연휴가 끝나면 본격 지선 구도로 흘러갈 거라 생각하고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서술순서는 의석이 적은 정당부터입니다. 근래 창당된 두 정당이 포함됩니다.

 

 본문엔 사견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알리며, 설득력과 예의를 갖추는 한도 내라면 댓글로 자유로운 의견표현이 가능함도 알리고 시작합니다.

 


 

1) 대한애국당 - 1

 

 대구 달서구병 국회의원 조원진이 유일한 의원으로 있는, 박근혜를 석방하라고 계속 주장중인 친박정당입니다. 조원진 의원 외 주요 구성인물은 정미홍, 변희재, 허평환 등입니다.

 

 ‘대한애국당은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더 훌륭하게 만들며,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체제로 남북평화통일을 이루고, 세계 초일류 선진통일한국을 건설하여 우리와 우리의 후손 들이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아가도록 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고 당헌 총칙 목적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박근혜 석방하라는 게 제일 멘트인 만큼 박근혜를 위한 기획정당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현 시점에서는 진지하게 논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 판단합니다.

 

 


2) 새민중정당 - 2

 

 울산의 김종훈, 윤종오 초선 둘이 의원으로 있는 신생정당입니다. NL계열 정당으로, 구 통합진보당 울산연합의 후속 정당이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석기가 속했던 경기동부연합의 민중연합당은 대조적으로 총선과 대선에서 참패했는데, 추석연휴가 끝난 후 새민중정당과 합쳐져 민중당으로 당명을 바꿀 계획으로 압니다.

 

 한편으로 현 정부와 국회에선 대형마트의 현행 월 2회 휴무를 4회로 늘리고 백화점도 일요일엔 의무휴무를 하도록 추진 중인데, 의무휴무를 백화점과 면세점으로 늘리는 방향으로 개정안을 낸 의원이 이 정당의 김종훈입니다. 4회로 늘리자는 안의 대표발의자는 국민의당 이언주고요.

 



3) 정의당 - 6

 

 현재 정의당의 포지션은 원내교섭단체는 어려우나, 원내정당으로는 계속 갈 수 있는 정도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본인들의 기득권은 장기적으로 확보한 상태 같다는 이야기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당보다 살짝 왼쪽에 붙어가는 전략을 계속 취하리라 생각합니다.

 

 민주당이 잘나가는 시기라 빅텐트론이 안 나와서 좀 팔자가 편 것 같습니다만, 민주당과 색깔이 좀 많이 흡사한데다 메갈당 되어버려서 향후의 확장성은 좋지 않을 걸로 보입니다. 민주당이 몰락할 때 민주당에서 떨어져 나오는 세력을 받아 성장하기보단 같이 몰락할 가능성도 높아 보입니다.

 

 개선은 아마 뭘 해도 무리. 구성원들 평균 성향을 볼 때 아예 답이 없습니다. 그 안에서 진심으로 뭔가 해보려는 분들은 헛수고를 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4) 바른정당 - 20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신세지만 나름대로 응원의 목소리는 많은 바른정당입니다. 원내교섭단체의 정확한 경계라, 1석만 더 이탈해도 원내교섭단체가 못 되는 입장입니다.

 

 바른정당은 그럭저럭 구 새누리당 중 잘 해보려는 사람들이 모인 것에 비해, 구 새누리 시절에 미뤄뒀던 각종 문제들을 해결하기 너무나도 힘들어 보입니다. 우선 유승민이 주장하는 공화주의부터 바른정당의 보편적 사상이라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고, 어쨌든 보수정당을 표방하다보니 스스로 보수적이라 생각하지 않거나, 보수파가 더 이상 지지받기 어렵다 생각하는 사람은 바른정당을 지지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만일 바른정당이 공화주의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이념적 통일성이 있었고, 한국에 태생적으로 부족한 공화의 회복을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단 상황이 훨씬 나았을 겁니다. 어쩌면 이는 유승민이 앞으로 해야 할 과제일 수도 있습니다만, 남경필-원희룡이고 김무성이고 그다지 공화주의적이지는 않아서 문제. 한편 나 자신도 자유주의자라 공화주의를 내세우는 유승민을 지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현실적으로 내년 지선에서 바른정당의 경쟁력이 충분하다 하기 매우 어렵고, 자유한국당과 선거연대가 없을 경우 원희룡 외엔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승산이 거의 없을 걸로 보이기에 가까운 미래부터 매우 불투명하다 하겠습니다.



 

5) 국민의당 - 40

 

 신세 복잡한 국민의당은 안철수와 호남계 사이의 물과 기름 같은 관계와, 안철수 본인의 망가진 이미지 때문에 참으로 운신이 어렵습니다. 나는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에게 투표하긴 했으나, 도무지 이 당에 어떠한 추석맞이 덕담을 해줘야할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국민의당이 바른정당보다는 유리한 게, 일단 의석이 2배 많기도 하지만 지방선거에서의 선전 가능성도 더 높습니다. 근래 문재인과 민주당은 계속 과히 오만한 행보를 보이기에, 그에 대한 견제심리로 인한 이익을 국민의당이 보게 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만일 국민의당 이미지가 조금만 더 좋았다면, 정말 좋은 성적도 기대해볼 수 있는 상황이긴 합니다만 이미지가 너무 좋지 않은 게 큰 문제입니다.

 

 아직까지는 민주당이 국민의당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손을 내밀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국민의당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지선에서 선전해야하는 입장입니다. 어쨌든 선거에서 뭔가 보여줘야 미래가 있습니다. 다만 국민의당이 민주당과 얼마나 정책적 차별화를 할 수 있을지, 당 이름값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사람들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재인과 민주당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지지할 만한 정당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이 당의 방향성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없고, 단순한 권력추구를 위한 정당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6) 자유한국당 - 107

 

 자한당은 아직 107석의 거대정당이지만 박근혜 탈당 같은 논란 빼면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까지 잘나가던 여당이었던 걸 감안할 때, 이미 자유한국당은 영남지역 외 광역단체장을 유지중인 지역이 인천뿐인데, 인천은 무력하게 내줄 가능성이 높고 영남지역에서도 홍준표의 경남지사 파행 사퇴와 서병수의 인기 없음 등으로 전혀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선에서 망할 확률이 너무나도 높습니다.

 

 즉 자한당은 선거를 위해서는 최소한 바른정당과의 선거연대가 불가피한 게 현실이고, 그러기 위해선 해야 할 게 많은데 제대로 뭘 하질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재기하려면 안철수라도 끌어들여야 그래도 뭔가 해볼 수 있는 게 현재 자한당이 처한 입장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죄 많은 자한당이 이대로 망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청와대와 민주당의 폭주가 너무나도 무서워서, 이런 상황에서 자한당의 침몰이 과연 창조적 파괴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만 답은 잘 모르겠습니다. 자한당이건 바른정당이건 구성원들이 실력 이상의 기득권을 관습적으로 누려온 면이 있다 보니, 실제 험난한 상황에서 승부를 잘 걸지 못한다는 생각이 좀 듭니다.

 




7) 더불어민주당 - 121

 

 파문을 일으키며 자진 탈당했던 서영교까지 얼마 전 되받아 121석을 확보중인 권력집단, 더불어민주당은 7대 죄악 중 가장 큰 죄라는 오만의 정말 훌륭한 샘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권력자들이 가진 오만은 이들을 필연적인 파멸로 이끌 겁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으며, 이들의 오만이 국민 전체에 어느 정도의 데미지를 줄지도 예측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쨌든 당장 이들은 비판을 불허하는 권력자이고 견제 받지 않기에, 내년 지선에서의 전망도 가장 밝긴 합니다.

 

 이들의 불안요소라면 너무나도 탐스러운 과실들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 대선 때도 그러하였듯 본선보단 내부경쟁이 중요한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고, 지난 대선경선에서 양념이라는 시대의 명언이 나왔듯 이번에도 그럴 법 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분노에서 출발하여 오만해졌고, 오만한 만큼 나태하며, 곧 탐욕스러워질 것이고, 그 끝에 서로 시기하며 망해갈 것입니다. 이는 저주나 폄하가 아닌 분석과 예측이며, 나는 이들에게 그 어떤 헛된 희망도 걸지 않습니다.


빛깔 이야기

자연 2017. 10. 5. 17:12 Posted by 해양장미

 일단 추천 브금.

 

https://www.youtube.com/watch?v=IMTzp9hJKqo

 


 물질은 그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파장의 전자기파를 반사하거나 방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시광선에 해당하는 빛의 일부 파장을 눈에서 감지하고 뇌에서 시각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류가 감지하는 빛의 파장은 대략 400~700nm 정도입니다. 전자기파를 감지하는 능력은 동물마다 달라서, 자외선이나 적외선 영역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동물도 많고, 자기장을 감지할 수 있는 동물도 있습니다. 사람은 가시광선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가시광선을 사용하는 광학 현미경은 최대 배율이 1000배 정도고, 그보다 작은 건 가시광선 파장보다 작은 것들이라 광학 현미경으로는 관측이 불가합니다.

 

 색각 이상자를 제외하면, 우리 인류는 대체로 Red, Green, Blue로 표현할 수 있는 파장들, RGB를 각각 수용하는 감각이 있어 색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색 구분 능력은 개인차가 있고, 돌연변이 같은 4색각 보유자도 있는 반면 남성들은 색약도 흔하긴 합니다만... 본문에서는 잘못된 색인지와 관련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이 글을 본다고 립스틱 색깔 구분에 딱히 도움이 되는 건 아닙니다만.




 

 사실 우리들은 대체로 색에 대해 잘못된 관념이나 오해를 일정 이상 가지고 있습니다. 무지개 또는 스펙트럼 기준으로 빨강에서 노랑까지는 오해가 없는 편인데, 녹색부터 심각한 오해들이 많습니다. 이는 관습의 문제이기도 하고 교육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이게 전형적으로 잘못된 무지개 색 표현입니다. 뭐가 문젠지 잘 모를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럼 대조해 보지요.



 

 이건 실제의 무지개입니다. 뭐가 다른지 보이나요?

 

 학교에서 모두들 색의 3요소에 대해 배웠을 겁니다. 색상, 명도, 채도지요. 그런데 이것들에 대해 언급은 하지만 제대로 가르치질 않습니다. 사실 디스플레이가 발달하기 전엔 염료나 안료로 가르치기 힘든 면도 많긴 했고요. 명도는 그나마 구분이 쉬운 편인데, 사람들은 색상과 채도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지개, 즉 자연광 스펙트럼은 채도가 가장 높은 것입니다. 원색이지요. 반대로 가장 채도가 낮은 건 무채색입니다. 색상과 채도가 없고, 명도만이 남은 게 무채색인 겁니다.

 

 그럼 볼까요. 모바일 모드로 보시는 분들을 위해 그림파일로 합니다.



 이상한가요? 초록, 파랑, 남색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지요? 그렇지만 저게 실제 무지개 색에 최대한 가까운 디스플레이 표현입니다. 오해가 크다보니 설명할 게 많아요.

 

 일단 실제 순수한 녹색은 우리의 통상적인 언어로는 연두, 색 코드 명칭으로는 라임색입니다. RGB에서 순수하게 G만 있는 색을 라임이라고 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물론 사전적 정의상의 연두는 색 코드 명칭 라임과는 다르긴 합니다. 한국어 연두는 녹색과 노란색의 중간색이지요. 코드명으론 Chartreuse색이라 할 수 있는데요. 바로 놓고 비교해보면 살짝 다르긴 합니다만...



 크게 다르지 않지요? 사실 사람의 시각은 녹색계열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녹색끼리의 구분은 적록색약자가 더 잘한다고도 합니다. 사람이 보는 색 영역을 그래프로 표현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식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초록이라 생각하는 색은, 디스플레이 기준 RGB에서 G값이 최대치의 절반 수준으로 낮은 녹색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꽤 어두운 녹색을 순녹색으로 생각한단 말이지요. 보기 쉽게 비교해 볼까요?

 왜 우리가 어둡고 탁한 녹색을 녹색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기 쉽습니다. 자연에는 그렇게 높은 채도를 가진 녹색이 잘 없기 때문입니다. 형광녹색에 가까운 발색이 나는 건 잘 없지요.

 

 그럼 다음 색, 문제의 파랑으로 가봅시다.

 

 무지개에서 파랑에 해당하는 파랑은 실제 우리가 아는 파랑이 아닙니다. 처음 접하면 좀 곤혹스러운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만, 사실 무지개에서 남색에 해당하는 게 우리가 아는 파랑’이고요.


 RGB상의 B가 아닌, 위 색의 3원색에 해당하는 Cyan(시안)이 무지개에서 빨주노초 다음에 오는 실제 파랑입니다. RGB기준으론 G값과 B값이 최댓값인 빛깔이지요.

 

 시안은 Aqua라고도 표현합니다. 물색이란 거지요. 현대 한국어로 표현하면 청록색인데, 채도가 최댓값인 청록이라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청록하곤 또 다릅니다. 샘플은 위에 있는 실제 '무지개의 파랑을 참조해주세요. 한편으로 어릴 때 우리는 색의 3원색을 빨강, 노랑, 파랑으로 배웁니다만 실제론 그게 아니라 마젠타, 노랑, 시안입니. 위의 색 영역 그래프에서 뚜렷한 경계가 보이는 세 선의 가장 바깥쪽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RGB 기준으로 마젠타는 R,B가 최대값인 색이고 시안은 위에 이야기했듯 G,B가 최대값. 그리고 노랑은 R,G가 최대값인 색입니다. 즉 빛과 색의 원색을 순서대로 정리해 색환을 만들면 빨강-노랑-(형광)녹색-시안-파랑, 그리고 빨강과 파랑 중간이 마젠타가 됩니다.

 

 그럼 왜 시안이 파랑색이 되었느냐... 하면 사실 우리가 쓰는 말에도 암시는 있습니다. 한국말의 파랑또는 푸름녹색과 따로 쓰이지 않지요? 이 색 구분 이야기 문제는 추리소설 트릭으로도 이용될 정도입니다. 신호등의 녹색등을 파랑불이라 부르는 건 아직도 일반적이지요. 게다가 중국어의 청색은 한국어의 청색보다는 시안에 좀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녹색부터 파랑색에서 보라색 계열을 엄밀하게 구분해 언어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정 시대 이후 교육을 받은 세대는 크레파스나 색연필, 그림물감에 붙은 색 이름을 외우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으로 색의 기준점을 잡고 있는 것이고, 그 전에 교육을 받은 세대는 그런 구분이 덜 엄밀하고 더 관습적인 색구분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지개의 남색이 통상적인 파랑인 이유는, 실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남색. 그러니까 인디고나 네이비 같은 색은 실제 무지개에서 발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뉴턴이 정의했던 무지개의 남색은 현대적 기준에선 Azure 정도의 색. 그러니까 시안과 파랑의 중간인 색입니다. 번역하면 하늘색인데 흔히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하늘색보단 청색에 가까운 색이랄까요. 시안을 파랑이라 불렀으니 그런 표현이 된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남색은 어두운 파랑 계열인데, 무지개 원색은 결코 어두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진하고 순수한 파랑은 중국어로는 감색, 일본어로는 곤색입니다. 위에 말했듯 중국어로 청색은 시안에 더 가까운 색입니다.

 

 현대적 한국어로 무지개의 7색을 가능한 정확하면서도 쉽게 표현하면 빨주노초파남보가 아니고 빨주노 다음 연두(또는 형광녹색), 하늘(또는 밝은청록), 파랑, 보라가 됩니다. 중요한 건 이 색들이 원색이고, 명도나 채도가 아닌 '색상'이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문제의 보라색을 이야기해보지요. 일단 정확히 말하는데, ‘보라색은 바이올렛색입니다. 퍼플(자주색)이나 마젠타가 아닙니다. 이거 혼동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샘플로 구분을 해드리자면 이런데요.

 보시다시피 진짜 보라는 청색에서 이어지는 스펙트럼 원색으로, 디스플레이 RGB에서 R값은 B값의 절반입니다. 래서 청색에 더 가깝고,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생각하는 보라보다는 더 청색 쪽입니다. 아마도 이론적으로 보라는 '파랑보다 더 파랑인' 색이어야 할테지만, 사람은 파랑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고, 실제 적색광과 자색광은 파장이 정반대에 있습니다만, 사람은 청색보다 더 파장이 짧은 빛은 약간 적색 비슷하게 인식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의 색 영역 그래프 참조) 그래서 사람은 청색과 적색을 섞은 자주색 계열을 보라와 비슷하게 인지합니다.



 색상환은 인간의 인지를 바탕으로 바이올렛과 마젠타를 연결합니다. (디스플레이 퍼플은 마젠타와 R,B 비율은 같되 값이 절반인 색입니다.) 실제의 빛은 적색 밖에는 적외선이, 보라(자색) 밖에는 자외선이 있어 사람이 볼 수 없습니다만 RGB만 인지하는 사람이 보기엔 적색과 청색을 섞어놓으면 자색과 연결되는 것처럼 보여, 색상환이 연결되는 것처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를 마쳤으니 다시 한 번 무지개를 보이며 본문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무지개는 이런 빛깔입니다.


 본문의 추천 브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iK27wBt-zo

 


 조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왜 망했는지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이것부터 정리합니다. 광복 후의 혼란과 분열상을 정리하려다 보니 많이 앞쪽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합니다. 역사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역사의 중요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 역사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합니다.

 

 본문은 미흡할 수 있으니 읽는 분들이 내용을 보태주시거나, 잘못된 점이 있으면 수정에 도움을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수의 대중들은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후기를 망했어야 했을 나라라거나, ‘숨만 붙어있던 나라같이 생각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건 과히 폭력적이고 무식한 이야기입니다. 시기만 봐도 병자호란은 1637년의 일로, 아직 유럽인이 뉴질랜드를 발견하기도 전이고 르네상스가 막 끝나고 근대의 여명이 시작되던 먼 옛날입니다. 병자호란에서부터 대한제국이 문을 내리기까지는 무려 273년이나 걸렸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패전과 대기근 등으로 어려움을 겪긴 하지만 다시 일어납니다. 전근대 국가임을 감안할 때 조선의 행정력과 사상은 결코 세계적으로 뒤떨어지는 편이 아니었고, 민중들의 삶도 최악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일단 병자호란 이후 시점에서 인조의 정통성 문제부터 이야기해볼까요? 이쯤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인조는 광해군에 반정을 일으키면서 왕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신권이 강해졌고 이에 더해 병자호란에서 패전하면서 권위를 잃었습니다. 청은 인조의 아들이었던 소현세자를 이용해 인조를 압박했고, 인조는 소현세자를 멀리하였으며, 청에 갔다 돌아온 소현세자가 급사하면서 인조는 입지가 더 나빠졌습니다. 그 이후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둘째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고, 소현세자의 아내였던 강씨에게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사약을 내립니다. 이 사건은 인조에 대한 평가를 더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왕실의 정통성 문제를 심화시킵니다. 본래 종법대로라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세손이 되어야 했거든요.

 

 그나마 인조는 대중적인 평이 최악인 것 치고는 그만큼 무능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가 완전히 무능한 인간이었다면 신하들이 떠받들어 왕으로 모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온갖 난을 겪으면서 왕좌를 지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왕좌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닙니다. 기울어버린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도 꽤 했습니다. 흔한 이미지와는 달리 광해군은 쫓겨날 만큼은 암군이었고, 인조가 광해의 잘못을 많이 복구하였습니다.

 

 이후 봉림대군은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되었는데, 정통성은 약했지만 효종은 유능하고 현명한 왕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림들은 병자호란의 패전, -청 교체, 효종의 정통성 문제 등으로 관직을 거부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효종은 북벌론을 뻥카로 주장하면서 사림들을 끌어들입니다. 효종의 북벌론은 명분을 쌓기 위한 것이었을 뿐, 결코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조선이 무슨 수를 써도 청을 이길 수는 없었고, 효종은 어릴 때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왕자여서, 청이 얼마나 강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효종은 즉위 10년 만에 종기를 침으로 치료하다가 과다출혈로 사망하는데, 조선 왕 27명중 종기로 5명이 죽었을 정도로 전근대 의학은 형편없었습니다. 전근대의 삶이란 그 누구라도 죽기 쉽고 운이 아주 좋아야 오래 살 수 있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효종이 죽으면서 그 유명한 예송논쟁이 벌어집니다. 예송논쟁은 통상적인 인식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리학은 조선 세계에선 종교이자 철학이자 세계관이었습니다. 이는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에서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온전히 벗어난 철학과 과학이 있기 힘들었던 것과 같습니다.

 

 예송논쟁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조의 정비는 인열왕후 한씨였는데, 42세에 산욕열로 사망합니다. 그 후 15세의 장렬왕후가 인조의 계비가 됩니다. 인조와는 29살 차이였고, 효종보다도 5살이 어렸지요. 소현세자와 효종은 모두 인열왕후의 자식이었고, 장렬왕후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장렬왕후는 자의대비가 되었는데, 명목상 연하이나 효종의 의붓어머니인 자의대비가 몇 년 상복을 입느냐가 1차 예송논쟁의 주제였습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하면, 장자가 아닌 효종이 정통이냐 아니냐 논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효종의 아들이자 효종 다음 왕이었던 현종의 정통성까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정통성은 현대에도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도 어처구니없이 논란거리가 되지요? 예송논쟁은 그보다 훨씬, 비교할 수도 없이 중요한 논란거리였어요. 왕이 정통이냐 아니냐는 보통 논란거리가 아니지요.

 

 어쨌든 당시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1년론이 받아들여집니다. 서인은 1년론을 주장하면서도 장자도 1년 상을 치른다는 경국대전을 빌어 현종의 정통성을 애매하게 인정했지요. 여기까진 시끄럽긴 하지만 어쨌든 수습이 될 수 있었습니다만...

 

 그로부터 15년 후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친모인 인선왕후가 사망합니다. 그런데 자의대비는 이 때도 생존상태였습니다. 인선왕후보다 자의대비가 어렸으니까요. 이 때 자의대비가 상복 얼마짜리 입느냐로 또 싸우게 됩니다.

 

 일단 문제가 15년 전에 경국대전의 룰을 따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 룰에선 장자와 차남의 상복이 1년으로 같았는데, 며느리는 맏며느리는 1년이고 맏며느리가 아닌 경우 9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강씨는 사약을 받았으므로 인선왕후는 맏며느리라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인들은 1년 상복으로 처음에 결제를 받았는데, 그 다음엔 효종은 장자가 아니므로 9개월짜리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결국 현종이 분노했고, 자의대비는 남인들 주장대로 1년복을 입게 되었지요.




 여기서 또 예송논쟁의 중요한 점을 이야기하자면 서인과 남인은 다른 학파였다는 것입니다. 서인은 오천원 모델 율곡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남인은 동인의 분파여서 천원 모델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게 왜 중하냐 하면, 이 철학이 단순한 형이상학을 넘어 정치철학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대소신료들은 어쨌든 현실을 보고, 현실을 다루는 사람들이다보니 세계관대로 현실을 이해하고,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잠시 애초에 성리학이 무엇인지, 왜 조선이 성리학에 빠졌는지부터 이야기해보지요. 공자와 맹자가 유학을 정립할 때만 해도 유학은 그냥 지극히 실용적이고 현세적인 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후한 말 유학은 강한 도전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샤카족의 성자(샤카무니-이 산크리스트어 음차가 석가모니입니다), 고타마 싯타르타의 종교가 그것이었습니다. 그 때 중국에 유입된 거지요.

 

 후한이 온갖 군벌의 득세 끝에 멸망하고 삼국-서진-동진/오호십육국-남북조라는 400년간의 난세를 거치는 동안 불교는 중국 전역에 널리 퍼집니다. 도교도 부흥했고요. 난세는 유학이 힘쓸 수 없는 시기였지요. 이후 통일왕조로 자리 잡은 당나라에서도 불교와 도교가 활성화되었었습니다. 당은 다양한 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국가여서 크리스트교 네스토리우스파의 현지화 버전인 경교, 배화교 또는 현교로 불리던 조로아스터교, 현대엔 사라진 마니교 등도 퍼졌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듯 종교라는 건 문제를 곧잘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당나라 시절 불교도 꽤 문제가 많았다지요. 그리고 당의 뒤를 이은 송대에 나오게 된 성리학은, 쉽게 이야기하면 불교를 비판하는 관점의 유학입니다. 불교철학까지 포함하여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면서, 불교의 내세나 도교의 선계 같은 걸 반박한 것이랄까요. 다시 말하지만 유학은 출발부터 현세적인 학문입니다. 그런데 불교나 도교 같은 걸 나름 논리적으로 반박하려다 보니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된 것이지요. 그렇더라도 성리학의 목표는 현세적이었습니다. 일례로 성리학의 시초 주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귀신이 내세에서 돌아온다는 식의 발상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조선 건국 당시 성리학이 중시되었던 건 필연적이었습니다. 고려또한 국교나 다름없던 불교의 타락이 심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고려 말엔 사찰들이 부패한 기득권이자 적폐였습니다. 개혁적인 사대부들이 불교를 논박할 수 있는 성리학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불교는 금지까지는 아니라도 억압됩니다.

 

 다만 성리학을 연구하다보니 내부적인 모순 및 설명 부족 같은 것이라거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라거나 하는 게 발견되게 됩니다. 이는 당연하리만큼 세계의 법칙을 철학적으로 보다 잘설명하려는 시도로 이어졌고, 이런 시도 자체는 학술이 발달하면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만 조선은 현상을 관측하는 기술과 실험으로 검증하는 과학적 절차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고, 그에 관념적인 것이 중시되는 경향이 한동안 이어집니다. 사실 이런 경향은 현대의 인문학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이기론으로 돌아가서, 이기론을 쉽게 설명하면 이는 자연법칙 같은 거고 기는 현상이며 만물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어감이 다소 변하긴 했으나, 참된 이를 뜻하는 말이 진리라는 것에서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는 를 어느 정도 직관할 수 있고, ‘는 현대에 이해되는 에너지 같은 개념이라기 보단 우주 만물의 생성소멸이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한다고 옛 사람들은 생각했었습니다. 한편으로 성리학의 성이란 사람 마음의 성정중 성, 즉 본성을 뜻하는 것으로 사람의 본성은 곧 ()리라고 생각한 것이라 이해하면 쉽습니다. 그리고 성정 중 정, 즉 감정을 기라 이해한 것입니다. 성리학은 철저히 인본주의적이며, 성선설에 해당합니다. 이기론은 세계보다도 인간을 해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기의 관계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황과 이이는 견해가 달랐습니다. 이황은 좀 더 전통적인 시각이었습니다. 이가 먼저고, 더 중요하고, 더 존귀하다는 관점입니다. 이런 사상의 양상은 서양에도 있고, 어느 정도 인류 보편적인 옛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이것을 주리론이라 표현합니다. 이데아가 더 중요하다거나 육체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다거나, 그런 식 말입니다.

 

 그런데 이황과 정반대로 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주기론자가 있었으니, 송도삼절 중 하나로 꼽힌 화담 서경덕입니다. 이황과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그는 중국 성리학과는 다른, 독창적인 기 중심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다른 송도삼절 둘은 황진이와 박연폭포라 했지요. 그러나 서경덕의 후계 학파는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한 세대쯤 후의 인물인 율곡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을 어느 정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황의 주리론과 조화시킵니다. 이이가 주장한 것은 서경덕의 주기론과는 좀 다른 이기일원론인데, 이와 기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황 학파쪽에서는 이이를 주기론자라 공격하기도 했고요.

 

 조선의 붕당정치는 이이 시대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이는 붕당의 갈등 문제를 처음엔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군자들끼리 그렇게 치졸하고 집요하게 수백 년 간 싸울 거라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그지만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는 붕당의 한 일파인 서인의 시조가 됩니다.

 

 이이 본인은 붕당에 초연했지만 관직 할 때 적이 많았습니다. 뭐든 다 따지고, 선배 학자들 끝까지 비판하는 스타일이라 온갖 악감정을 만든 것입니다. 또 원체 잘난 천재에다 실무능력까지 있다 보니 질투도 많이 샀지요. 결국 이이의 제자들과 이이 시대에 밀려났던 훈구파의 후예들이 하나의 붕당 파벌이 되니, 그것이 서인입니다.

 

 이후의 붕당정치는 결국 본질적으로 집안 인맥 파벌 싸움이긴 합니다만, 다른 면에서 보면 퇴계학과 율곡학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예송논쟁으로 돌아가서, 주리론(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이 어떤 해석을 가능하게 했느냐하면, 이기론에서 이는 왕으로, 기는 사대부로 비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해석은 예송논쟁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로까지 이어집니다. 왕실의 법도와 사대부의 법도가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요.

 

 여기서 이기이원론은 왕실과 사대부의 법도는 다를 수 있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그렇지만 이기일원론에선 이와 기는 다르지 않다는 사상이니, 왕실의 법도와 사대부의 법도는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연장선상에서 율곡-서인의 이기일원론은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만민평등사상 비슷한 것까지 발달합니다. 누구나 사대부이며, 왕이고 노비고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는 철학적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실제 서인들은 신분제를 폐지하고 조선을 자영농의 국가로 만들어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상황이 좋았다면 그보다 좀 더 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후의 역사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지요.

 

 대조적으로 이기이원론은 이와 기의 위계를 인정합니다. 퇴계학파였던 남인들은 이라는 절대적 도덕 및 권위가 있고, 그에 대한 관념을 강화하고 질서를 회복해야한다는 입장이었지요. 그런데 현종 당시 붕당 파벌로는 서인이 남인보다 강했습니다. 그리고 현종은 남인에 약간 힘을 실어주고 균형을 맞춥니다. 사실 현종 입장에선 남인이 좋을 만도 했습니다. 서인의 권력을 현종이 바로 어쩌기 어려웠습니다만.

 

 그리고 현종은 원래 몸이 약했는데, 하필 2차 예송논쟁이 마무리되자마자 죽습니다. 이후 숙종이 즉위하지요. 예송논쟁은 그 사안의 중요함과 역사적 의미에 비해선 아무도 죽은 - 자연사 및 스트레스사 제외 - 사람이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논쟁이었습니다만, 숙종 대에 후폭풍이 발생합니다. 사실 유럽 같은 데선 예송논쟁 같은 거 있으면 그냥 전쟁이었지요. 어쨌든 조선 사대부는 나름 평화로웠던 겁니다.

 

 이런 와중에 즉위한 숙종은 조선 왕 중 가장 강한 왕권을 지닌 군주였고, 타고난 정치인이었으며 다혈질에 냉혈한이었습니다. 숙종은 조부 효종과는 대조적으로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효종의 장자인 현종의 장자였고, 3대 독자였습니다. 만약 숙종을 폐위시킬 경우 대신 앞세울 대군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신권이 극단적으로 강했던 인조 시대에서 4대만에 왕권이 극단적으로 강한 시대로 변한 것입니다.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의 책임을 물어 서인들을 내 쫓고,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귀양 보냅니다. 그리고 이후 숙종은 47년간 재위하면서 전기 20년 동안 3번의 환국을 일으키며 붕당정치를 뒤흔들어버립니다.

 

 붕당-탕평-세도-몰락으로 이어지는 조선후기사에서 숙종은 강한 왕권에 의한 탕평으로의 전환을 시작한 왕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으로 인해 왕도 사대부 중 하나라는, 정도전에서부터 이기일원론의 율곡을 거쳐 서인까지 이어지는 조선성리학의 한 흐름과 발달 양상은 멈춥니다. 즉위하자마자 서인을 쫓아내는 시점에서 숙종은 왕과 사대부의 격차와 위계를 선언한 것이었으니까요.


(다음 편에 계속)

댓글 보존을 위한 게시물입니다.

정치 2017. 10. 3. 00:16 Posted by 해양장미

http://oceanrose.tistory.com/703


 에 달렸던 댓글과 댓댓글인데, 차단조치로 인해 자동삭제되면서 보존 게시합니다. 친중파 또는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대한 기록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후 둘 정도의 부드러운 항의가 달렸으나 나로서는 추가적인 응대가 무리라 판단하였고,승인없이 차단과정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신민들은 왕을 원하는 것입니까?

정치 2017. 10. 2. 19:25 Posted by 해양장미

 본문의 추천 브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PmruHc4S9Q

 



 오늘 문재인 대통령이 교통방송에 등장했다고 합니다. 혹시 보시고 싶은 분이 있을까 싶어 영상을 링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NdOyUo7NyE

 

 이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이 좋아하네요. 눈물이 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민주 시민이 어쩜 그리 창피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만.

 

 문재인의 연예인 같은 포퓰리즘 행보가 한국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한국 시민들이 사실 민주공화정에 어울리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신민의 마음가짐으로, 누군가가 자신들을 '잘' 지배해주길 원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심플한 행정부의 장으로, 평등한 시민들의 한 대표자로 받아들이질 못하는 것이지요.

 

 박사모와 노-문빠의 싸움은 두 왕조 중 어느 쪽이 정통성이 있느냐의 다툼과 같습니다. 그야말로 민주공화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수준 낮은 싸움이지요.

 

 오늘 문재인 대통령이 방송에 나온 것은 잘한 게 아닙니다. 포퓰리스트로 적합한 행태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보다는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신민들이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신민들은 차라리 솔직하게 문재인을 왕으로 추대하십시오. 문재인은 공화국의 대통령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입헌군주국의 왕처럼 행동합니다. 신민들은 그를 왕처럼 모시고 싶어 합니다.

 

 물론 장기 독재를 하더라도 타이틀은 대통령’, ‘주석’, ‘수령’, ‘장군같은 식으로 낮춰놓고 공화국 행세를 하는 게 세계대전 이후 유행이긴 합니다. 북쪽은 실제론 3대 세습이지만 김정일과 김정은의 공식 직위 명칭은 고작 국방위원장이나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같은 것이지요.

 

 여담입니다만 실제 과거의 황제나 왕들은 현대 독재자들처럼 그렇게 독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근현대적 독재는 어디까지나 기술의 발달에 의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얼핏 대통령이 독재를 해봐야 옛 왕들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습니다. 가진 권한에 명목상의 차이는 있으나, 어느 군주도 각 사회에서 용인되는 것 이상을 독단적으로 무도하게 행하긴 어려웠습니다.

 

 문재인의 언행과 그 인기를 보고 있자면 나는 역시나 조선 왕가가 망한 게 안타깝습니다. 조선 왕가가 망할 만 했다는 데는 나 역시 동의합니다만, 한일합방 후 독립운동가들이 공화정을 추진하고 각기 패권을 노리게 되면서 한국은 분단과 내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하며, 많은 한국인들은 잃어버린 왕을 그리워하듯 북쪽은 김씨일가를, 남쪽은 박씨부녀나 노무현, 문재인을 왕처럼 추종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한국인이지만 한국인들은 세계에 거의 유일할 만큼의 존비어 체계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평등의식이 매우 희박하고 계급사회에 가까운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세계 어떤 나라 사람들도 한국인처럼 존비어 체계를 사용하면서 서열을 중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한국인들이 사라진 왕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일반적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자유주의자로 특정 정치인에 대한 추종을 배척하고, 공화국민으로 올바른 의식을 가지려 합니다만, 우리 국민들이 가진 신민의식을 어쩌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권한과 책임을 지닌 시민의 한 사람이자 대표자일 뿐입니다. 정치인은 본질적으로 신뢰보다는 감시와 비판의 대상입니다. 이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민들이 주류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하라, 그야말로 반민주적이기 짝이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회에서 너무 과한 걸 바라면 안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저런 속보이는 포퓰리즘 쇼를 하기보다는 한 시민으로 기본적인 규칙부터 지키고, 다수 시민들의 청원이라도 존중하길 바랍니다. 그야말로 최소한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에게 무언가 희망을 표현하는 게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잘 압니다만.

 


 한편으로 이런 참사들 때문에 시민들 눈이 한없이 낮아졌는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게 일시적인 착란으로 인한 거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만. 아니겠지요.

 본문의 추천 브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_vlfPdBHkE

  

 한국 사람들의 일본과 중국에 대한 감정을 보면 참 기가 막힌 면이 있습니다. 일본은 한일합방의 굴욕이 있다지만, 적어도 일본이 한국에 대해 일방적인 수탈만 자행했다거나 무자비하게 탄압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 군부는 물론 폭력적이고 착취를 일삼았지만, 그건 한반도에서만 그런 게 아니었고 일본 본토에서도 충분히 무개념했지요. 그리고 일본은 보상과 사과를 여러 차례 했습니다.

 

 대조적으로 중국은, 우리가 분단되어 있는 건 중국 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과 중국은 전쟁을 했던 사이입니다. 중공군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맥아더는 (그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북진통일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는 일본보다는 중국에 원한이 깊습니다. 현재 북쪽이 핵개발을 하고, 살아남아 있는 것도 중국이 뒤를 봐 준 게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들은 막연한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는 반면, 중국에 대한 원한은 잊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권력, 특히 민족주의 좌파 정치권력이 반일감정을 오래 이용한 게 주 원인인 걸로 보고 있습니다만, 김영삼처럼 좌파로 분류되지 않음에도 반일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정치적으로 활용한 정치인도 있었던 것 또한 감안해야합니다.



 일본은 독도 때문에 영토분쟁이 있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실 분들을 위해, 중국과 한국도 이어도와 가거초 일대에서 EEZ(배타적 경제수역) 분쟁 중임을 알려둡니다. EEZ 분쟁에서 중국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고 터무니없는, 중국스러운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이어도가 이름과는 달리 섬이 아니다보니 (수면 밑에 잠긴 암초입니다.) 독도분쟁보단 덜하지만 중국이 워낙 패권주의적이고 불법어업도 심하다보니 갈등은 있습니다.

 

 이런 배경 위에서, 문재인 정권은 노영민을 주중대사로 앉혔습니다. 노영민은 소위 문지기 출신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측근이며, 3선 의원이었음에도 의원실에 카드기 설치하고 시집 강매하는 파문 끝에 지난 총선에서는 공천 받지 못했지만 정권 출범하자마자 주중대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줄을 잘 서서 주중대사가 되더니 어마무시한 망언을 시작했는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2&aid=0003213582

 

 중국은 역사적으로 패권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달라이 라마가 통곡할 소리를 하질 않나. 롯데 중국 철수도 사드 보복 탓만은 아니라는 식의 발언을 하질 않나.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막말을 마구마구 뿜어내듯 시전하여 많은 이들의 어이를 승천시켰습니다. 나의 어처구니도 완전히 소멸하여 입자하나 남지 않았고, 분노와 불안만이 남았습니다. 그래도 위구르인들처럼 통곡할 정도는 아니니 다행입니다.

 

 소스가드들은 노영민의 저런 막말에까지 양념실드를 시전하고 있는데 문꿀오소리라는 자칭답게 라텔처럼 굴고 있습니다. 실제 라텔은 매우 난폭하고 겁이 없는 동물입니다. 권력자의 라텔을 자칭하는 족속들이 제정신일 리가 없지요. 당연히 민주정의, 공동체의, 자유의 적입니다.



 노영민이 혼자 저렇게 생각하는 걸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노영민의 발언이 문재인의 생각입니다. 친북친중, 반미반일이 기본이고 자국기업에 대해 제대로 된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이 정부의 폭주가 어디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대로 계속 갈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가능한 빨리 이 폭주를 막을수록 우리 모두의 피해가 적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