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브금.

 

https://www.youtube.com/watch?v=uSfHQZ8FEMw

 

 

전편 : 1) 인조의 패전에서 예송논쟁까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은 건국부터 정도전이 추구한 신권중심 정치질서가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시대를 고려하면 정말 진보적인 발상이었지요. 붕당정치는 단점도 꽤 있었지만, 만약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어갔다면 조선은 점차 입헌군주정과 비슷한 형태로 나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조선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절대군주 숙종이 등장하면서, 이후의 조선사는 건국부터 이어져왔던 신권중심정치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전편에 이야기했듯 현종 대까지 붕당정치는 평화로운 편이었습니다. 어쨌든 선비의 싸움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숙종은 그걸 죽고 죽이는 혈전으로 바꿔놓습니다. 그리고 이쪽저쪽 숙청을 반복하며 신하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고, 완전히 굴복시키게 됩니다.

 

 숙종의 왕권강화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으로는 꼭 나쁘진 않습니다. 붕당정치에 폐단이 많았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현대 의회주의 민주정도 보고 있으면 정말 막장인데, 조선 붕당정치는 그보다 아무래도 심하거든요. 당장 의회를 불신하고 현명하고 강력하며 독단적인군주가 모든 걸 다 해주길 바라는 모습은 현재 한국에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숙종 이전에 왕권을 강화했던 왕인 태종 이방원에 대한 평가도 그다지 나쁘지 않지요.


 그러나 장기 집권한 숙종의 왕권강화는 여러 부정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위에 이야기했듯 조선 초부터 이어져오던 신권중심의 정치가 끝나고, 강력한 왕에 신하들이 잘 보이려 노력하면서 반대파를 기회만 되면 몰락시키려 하는 혈투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선 신하들은 점점 바른 말을 잘 하지 않게 되고, 뜻 있는 자는 관직에 오르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영민한 왕이었기에 장기집권을 하는 동안 왕권강화로 인한 문제가 딱히 커지진 않았습니다. 숙종 다음에 즉위한, 숙종과 희빈 장옥정 사이의 세자였던 경종은 재위기간이 불과 42개월이었지만, 경종 다음 왕은 그 유명한 영조로 52년이나 재위. 영조 다음 대인 정조가 그 다음대로 243개월을 재위했습니다. 영조와 정조는 모두가 알다시피 능력 있는 왕이었지요.

 

 숙종이 즉위한 해는 1674년입니다. 그리고 숙종의 아들인 영조는 1776년까지 재위합니다. 중간에 경종이 4년 하긴 했지만, 어쨌든 붕당정치 붕괴 후 부자가 102년을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이후 영조의 손자 정조가 또 1800년까지 좋은 통치를 함으로 탕평시대는 조선의 본격 중흥기가 되어버립니다. 시스템의 문제를 무려 126년간 3+1군주의 능력으로 커버한 셈입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이 운이 좋았던 건데, 어떤 면에서 보면 나쁜 것이었습니다. 숙종-정조 대에 조선은 왕이 능력 있고 잘해야만 잘 돌아가는 시스템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숙종의 책임을 모두에게 납득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숙종이 붕당정치를 실질적으로 끝내고 절대군주화 되었다고는 해도, 그가 집권한 이래 126년간 조선은 꽤 잘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보다 좋은 시대였습니다. 전후복구도 끝나고 어쨌든 경제도 기술도 성장했던 시기거든요.

 

 그러나 나는 조선의 국운을 쇠하게 한 것은 결국 숙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정치시스템을 망친 건 분명 숙종이었으니까요. 정치는 왕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유능해도 혼자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명백해요. 숙종은 여러 번의 환국 과정에서 피가 흐르는 숙청을 반복했고, 이 과정에서 신하들에 대한 통제권은 확보했으되 신하들끼리의 혈투는 그 대가가 되었습니다. 서로 증오하는 신하들끼리 일처리가 제대로 되긴 어려웠고, 숙청의 정도가 심하다보니 국가 인재풀이 박살나버렸습니다. 인력이 없어지니 역설적으로 왕의 인사권은 제한되게 되었고, 경쟁할만한 붕당이 아예 사라져버리다시피 하니 또 역설적으로 왕의 권력이 줄었습니다.

 

 왕의 권력은 근본적으로는 백성에서 나오고, 가까이는 왕을 받드는 신하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숙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신하들을 너무나 많이 충돌시키고 제거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간이 갈수록 왕권이 약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숙종 말에는 남인들은 몰락하고, 남인들에 대한 온건/강경 처리를 시작으로 나뉜 소론/노론으로 나뉜 서인들이 각기 훗날의 경종과 영조를 지지하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줄 잘못 서면 죽는다는 (진짜로 사약 받습니다.) 절박함이 있다 보니 아주 막장이 된 겁니다. 사실은 이미 이 시점에서 조선의 국가 시스템은 기운 것입니다. 법도를 논하는 게 아니고, 신하들끼리 정파가 갈려 서로 다른 후계자를 지지하는 건 이 때가 조선사에서 처음입니다.

 

 서로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밀리더라도 제거당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중요한 겁니다. 사상의 자유라는 거지요. 인조 이후 숙종 이전엔 잘못하면 내 쫓기는 일은 있어도 죽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는 열려있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정치세력끼리 서로 증오하고 끝을 보려고 굴면, 그 사회는 쉽게 파멸합니다. 역사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한국도 대통령 일당에게 반기를 들기 어렵지요? 내부에서 이견을 제시하기도 어렵고.

 

 정리하자면 붕당갈등이 극대화된 건 숙종 책임입니다. 그 갈등은 나라를 말아먹기에 충분했기에 탕평이 필요해졌습니다. 숙종도 탕평에 대한 생각은 있었으나, 숙종은 죽을 때까지 그 면에선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탕평을 시작한 건 실질적으로 숙종 다음 대인 경종입니다.

 

 숙종 말년은 노론 세상이었고, 숙종이 병으로 쓰러진 후 경종은 노론들에게 상당한 견제와 압력을 받으면서 집무를 시작합니다. 위기를 겪다 왕이 되었으나 노론은 경종을 계속 심하게 공격합니다. 경종 집권 초에 노론은 아예 경종을 왕 대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폭주가 너무 심해져, 훗날 영조가 되는 연양군을 세제로 만들고는 대리청정을 시키라는 말까지 나왔지요.

 

 경종은 그런 실언을 빌미로 진짜 대리청정을 시킬 것처럼 이야기하다, 방심한 노론이 실수를 거듭하자 상황을 한 번에 역전시켜 노론의 세는 한 풀 꺾이게 됩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노론 쪽에서 경종을 죽이려 한 게 밝혀집니다. 나라가 갈 데까지 간 거지요.

 

 이 때 경종은 훗날 영조가 되는 세제 연양군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왕을 시해하려는 사건에 얽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경종은 그러지 않았고, 그러기도 어려웠습니다. 연양군이 아니면 경종에겐 후사가 없었습니다. 손이 귀한 것은 조선 왕실의 큰 문제였습니다.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경종은 즉위 48개월 만에 쓰러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연양군이 올린 인삼을 먹고 죽습니다. 당시 어의는 경종이 인삼을 먹는 걸 반대했고요. 결국 경종이 죽은 후 연양군은 왕이 됩니다만, 이후 임기 내내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게 됩니다.

 

 환국을 통한 숙종의 절대왕권에서부터 혈투가 되는 붕당정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영, 정조대의 탕평, 이후 이어지는 세도정치는 연역적인 인과관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무자비함과 절대권력이 혈투를 부르고, 혈투 속에서 잘 해보려는 권력조차 어쩔 수 없이 이너서클을 구성하고, 그 이너서클이 부패하면서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영정조대의 치세, 조선의 중흥기가 있었던 건 많은 것이 경종의 공입니다. 경종은 짧은 재위로 인해 별다른 평이 없습니다만, 만일 경종이 붕당간의 투쟁을 부추겼고 영조가 되는 연양군을 제거했다면 조선은 중흥 없이 훨씬 빨리 끝났을 것입니다. 경종은 분노를 참고 명분과 대의를 따랐기에 오랜 세월동안 조선 백성들이 중흥 속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종과 같은 모습을 근래 정치권에선 찾아보기 힘들어 참 우려스럽습니다.

 

 숙종이 굳은 정통성으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이었다면, 영조는 매우 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단히 투쟁적인 왕이었습니다. 경종도 장희빈의 아들이라 정통성이 모자라긴 했지만, 영조는 아예 궁녀도 아닌 무수리 출신의 아들이란 말이 돌았고 심지어 기혼녀였으며,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라 정통성이 태생부터 아주 낮았고, 이에 더해 경종 독살론에 시달리다보니 정말 흔들리기 쉬운 왕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영조는 평생 싸워야했고 그 싸움에 질린 것이 세도정치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영조 시절의 군신 다툼은 영조 집권 4년 만에 벌어진 이인좌의 난부터 언급해야겠습니다. 이건 쉽게 설명하자면 경종 독살론이 반란까지 이어진 건데, 실제 금방 진압되긴 했지만 충청-경상-전라의 삼남지방 일대에서 벌어진 거병이었습니다. 그나마 빨리 진압된 건 영조가 미리 전 해에 탕평을 시작해 이인좌의 난 주축이었던 소론 탕평파, 완론들을 대거 기용했던 덕이었고, 미리 그런 걸 안 해뒀으면 대규모 내전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때 영남지방, 그러니까 경상도가 가장 진압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반역의 지역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영남지방은 남인들의 거점이기도 해서 더더욱 견제 받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견제는 정조 때 풀릴 기미도 있었지만, 결국 흥선대원군 집권기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이런 지역차별은 조선의 몰락에 또 나름 기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소론과 남인은 다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소론 강경파 준론들은 난이 진압된 후에도 계속 영조에게 덤비면서 제거당합니다. 세력이 남은 건 숙종 때부터 영조를 받들려 하던 노론밖에 없게 되지요.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노론만 남게 되니 탕평은 영조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일이 되어갔습니다.

 

 이 시점에서 슬슬 등장하는 게 척신, 그러니까 외척입니다. 노론만 남게 된 시점에서 영조는 그 강경파를 견제하기 위해 아군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외척을 끌어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탕평은 증오 속에 실패하고 세도정치의 막이 올라갑니다.

 

 본래 왕이 외척을 정치에 쓰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부패하기 쉽지요. 그래서 유학에선 외척 기용을 금기시합니다. 그런데 영조는 노론을 견제하려다 보니 외척을 쓰게 되었고, 당대엔 이게 큰 문제까진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쁘게 작용하여 결국 조선이 망조로 흐르게 됩니다.

 

 이 문제에서 영조를 마냥 탓하기도 어렵습니다. 영조는 실제 평생 암살을 걱정할 정도였거든요. 취임하자마자 내전 겪고 아무리 탕평하려 해도 말을 듣긴 커녕 잦은 반역, 남은 세력도 못 믿으니 영조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삶이 원인일까요. 영조는 나이가 들수록 나쁜 성격을 드러냅니다. 편견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그의 단점이 정말 극단적으로 나쁜 방향으로 표출되는 유명한 사건이 생기니,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게 그것입니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임금이 세자를 그런 식으로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 건, 영조가 좋은 임금이고 아니고를 떠나 더 이상 조선이 유학의 나라로 남긴 어렵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때 이미 나라는 다 기운 것이지요.

 

 그러나 영조의 뒤를 이었던 정조가 워낙 밸런스 브레이커 또는 치터라 조선의 중흥기는 좀 더 이어집니다. 영조의 비정한 사도세자 살해가 결과적으로 조선 백성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결과가 되긴 했는데, 문제는 그게 끝물이었다는 거지요.

 

 정조는 임금으로 갖춰야 할 거의 모든 자질을 다 갖춘 왕이었습니다. 다만 정조가 조선에서 마지막 좋은 임금이었던 건... 굳이 보면 정조가 넘칠 정도로 천재였던 게 문제입니다. 이미 붕당정치는 깨지고 유학도 기운 상황에서 밸런스 브레이커 정조가 이끌던 게 당시의 조선인데, 그러다보니 그 국가 시스템은 정조만이 돌릴 수 있는 쪽으로 변화했습니다. 게다가 정조의 업무량은 너무 가혹해서 건강을 빨리 잃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한 스포츠 팀에 초월적인 실력을 가진 슈퍼스타가 있어 좋은 성적을 한동안 거두지만, 혹사로 인해 선수생명이 짧아지고 그가 은퇴한 후에 팀이 몰락하는 사례랄까요. 실제 드문 경우가 아니지요.




 정조의 장점은 정말 많지만 특별했던 건 관대함입니다. 정조는 신하가 자신에게 막말을 해도 더 심한 막말로 응수했지 기분 나쁘다고 큰 벌을 내리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신하를 구박은 해도, 말을 들으면 그만큼 보상을 해줬습니다. 전반적인 형벌도 완화시켰고, 격쟁도 잦았습니다. 격쟁은 임금에게 백성이 직접 민원을 넣는 건데, 정조가 한 번 행차하면 백성들이 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다가와 이런저런 하소연을 했고, 그게 대략 한번 행차시마다 50회 정도 되었다 합니다.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있었으나, 조선 시대엔 평민 또는 천민은 글을 잘 몰랐으니까요. 천민도 왕에게 직접 다가가서 억울함을 고할 수 있었던 나라였던 게 조선입니다. 격쟁이 들어가면 보통 사흘이면 답이 돌아왔다고 하니, 소통하는 척/민주적인 척/온갖 착한 척 하다가 청와대에 13만 명이나 의견을 모아 넣었더니 코웃음치고 놀리듯 20만 명 모아 오라는 현 대통령 및 정부와는 달라도 정말 다르지요.

 

 세도정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정조는 남인까지 다시 활용하는 등 이 세력 저 세력을 마음껏 주무르면서 아예 정치 구도 자체를 재편집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정조가 아무리 잘났어도 각 붕당들끼리 증오를 내려놓고 평화로운 경쟁을 하게 만들 수는 없었지만요. 그런데 갑자기 정조의 건강이 악화됩니다.

 

 결국 정조는 50살도 되기 전에 사망. 정조의 뒤를 이은 세자 순조는 즉위할 때 나이가 겨우 11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그 유명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조격이 되긴 하는데... 사실 김조순을 그 위치에 올려준 건 세자를 보호하려는 정조였고, 막상 김조순은 인품도 능력도 괜찮은 편이라 김조순이 살아있을 땐 세도정치 문제가 별로 없었습니다.

 

 순조대의 문제는 좀 다른 것이었는데, 순조는 일단 즉위 시 너무 어려서 1804년까진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81112, 순조의 의욕을 꺾는 사건이 일어나니... 다름 아닌 홍경래의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은 굳이 보자면 조선 시대 내내 계속된 평안도 차별로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평안도는 현재 북쪽 조선로동당 강점지 중 평양을 포함한 평안북도, 평안남도, 자강도를 합친 넓은 지역입니다. 평안도는 조선 입장에선 변경이고, 늦게 영토에 편입된 지역도 많은데, 신세 비슷한 함경도는 태조 이성계의 본거지였던 반면 평안도는 기댈 데도 없다보니 중앙 사대부 사회에 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홍경래의 난이 있을 무렵에 이미 평안도는 남쪽 지역과는 달리 상업과 광업이 발달하고, 흉년에 삼남지방에서 몰려온 유민들이 많은 혼란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연줄이 없어 중앙 정부의 부패한 면엔 가장 쉽게 피해를 보다보니, 반란이 일어나기 쉬운 상태였습니다.

 

 난은 규모가 꽤 있었음에도 반년 만에 제압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순조가 마음고생이 많았던 건지, 원래 몸이 약했던 건지. 여하튼 이후 순조는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국정에 신경을 많이 안 씁니다.

 

 그럼에도 순조 때 당장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순조는 업무를 적게 한 거지 딱히 나쁜 왕은 아니었고, 김조순도 살아있을 땐 딱히 세도정치 문제가 두드러지진 않았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었지요. 선대인 정조가 이미 왕이 영웅적 활약을 해야 돌아가는 나라를 만들어 놨었는데, 순조는 방목 스타일이었고 세도가들이 이 순조 대에 힘을 잔뜩 키웁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세계 전반은 아주 바쁘고 혼란스럽게 돌아가지요. 빨리 개혁해도 모자랄 나라가 안일하게 세월을 보낸 셈입니다.

 

 그나마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매우 총명해서 순조가 많은 기대를 했다고 하는데, 문젠 순조가 건강이 악화되어 효명세자가 집무본 지 4년 만에 효명세자가 겨우 22살 나이로 요절합니다. 사인은 분명하지 않으며 과로사 추정. 그리고 순조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효명세자 사망 전 해엔 차녀 영온옹주가 사망. 그리고 2년 후 명온과 복온, 두 공주가 사망.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순조 본인도 건강악화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순조 사망 시점에 살아있던 유일한 자녀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였는데 (임금의 적녀만 공주고, 적녀가 아닌 딸은 옹주입니다. 덕온공주 이후 왕의 적녀는 태어나더라도 공주에 봉해지기 전에 죽었습니다.) 이 덕온공주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23세에 급체로 사망(...) 합니다. 현대 기준에서 보면 급체는 소화불량일 뿐이지만, 당시 기준에선 온갖 질병들이 급체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위천공이나 급성 췌장염, 심근경색 같은 것들 말이지요.

 

 이렇게 순조-효명세자 및 공주, 옹주 일가가 줄초상이 났고, 이에 조선의 미래도 한없이 어두워집니다. 순조가 명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하들에 대해 위엄은 있었고, 여러 문제는 있었으나 당시만 해도 세도정치가 아예 막장은 아니었습니다. 김조순도 정조의 명은 지켰다 볼 수 있지요. 그러나 효명세자의 아들이었던 헌종이 1834, 8살 나이로 즉위하면서 조선의 앞날에도 종이 칩니다.

 

 왕 일가는 씨가 말라. 붕당 균형은 깨진지 오래. 세도정치는 김조순 및 명온과 복온, 두 공주가 죽은 후 (셋 모두 1832년 사망.)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한 상태였고, 이미 이 때 조선엔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의료봉사 등을 하며 개항을 요구하던 시기였으나, 조선 조정은 하필 효명세자가 죽은 시점이라 전혀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세도정치가 커지게 된 덴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위에서부터 쭉 이야기했듯 숙종의 환국 이후 붕당끼리의 어느 정도 건전한 경쟁은 끝났고, 그 혈투는 왕이 찍어 누르고 다스려야 하는 상황이 이어져 왔습니다. 유능했던 영조, 밸런스 브레이커 정조 대까진 괜찮았지요. 그런데 몸이 약한 순조의 치세가 어찌 골골대면서도 35년간 이어지면서, 정조가 순조를 돌보려 세웠던 김조순이 살아있는 동안엔 극단화되진 않았습니다만 그 동안 안동 김씨는 온갖 요직을 장악하긴 했고, 또 한편으로 숙종 때부터 남인이 몰락하면서 사림이 중앙-지방으로 나뉘어져 수도권 명문사족만 관직을 얻을 수 있는 부정부패가 심해진 상황이었고, 지방 사족은 필사적으로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상황이 되어, 이미 조선 조정은 인재를 충분히 수급하고 각 지역의 균형을 맞추기 힘든 입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숙청으로 인재를 워낙 많이 잃기도 했고요.

 

 전편에서부터 이야기했지만, 조선은 그 건국 철학부터 민주정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할 수가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권과 왕권의 다툼에서 계속 왕권이 승리했고, 이는 지도자가 유능할 땐 별 문제가 없으나, 그렇지 않으면 무너지기 쉬운’, 민주적이지 않고 닫힌 정치체제의 전형적 단점으로 표면화되어 버립니다.

 

 세도정치가 정말 답이 없었던 걸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위에 이야기했듯 이미 조선은 정당하게 교육과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막힌 사회였는데,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등의 세도가가 장악하면서, 세도가에 줄을 대야 관직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첫 번째 문제였습니다. 사실 현대 한국도 모 정치세력이 교육에 손댈 때마다 벌어지는 사다리 걷어차기문제가 있는데, 시민들이 위선에 속지 말고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세도가에 줄을 대고 관직을 얻은 사람들은 줄 대느라 소모한 재산을 만회하기 위해 백성을 쥐어짰고, 이에 부정부패가 일상화됩니다. 너무 심한 수탈에 백성들은 떠돌거나 도적이 되기 시작했고, 출세길이 막힌 양반들까지 점차 견딜 수 없어져 결국 민란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세도가문들은 조선을 잘 다스리고 개혁하는 것엔 정말 참담할 만큼 관심이 없었는데, 권력은 가졌으되 책임의식은 없었던 겁니다.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정치인은 책임지는 자리라는 건데, 책임을 회피하는 정치인이나 책임의식을 도외시하는 맹목적 지지자들을 항상 주의하고 견제, 낙선시켜야 합니다.

 

 헌종 이야기로 돌아가 마무리하자면, 헌종은 8살에 즉위했기에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는데, 순원왕후는 김조순의 딸로 안동김씨입니다. 순원왕후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치적 능력은 좋지 않았고 친정에 의지했는데, 그 바람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심각한 지경이 됩니다. 왕실 기강 살린다고 나라살림도 어려운데 지출도 많이 해 민심까지 잃었고, 이후 시간이 지나 헌종이 친정을 하면서 세도정치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는데 그 바람에 할머니인 순원왕후와 갈등이 심해집니다. 그러다가 헌종은 23세로 젊은 나이에 급사해 버리지요. 헌종에겐 자식이 없었습니다. 옹주가 하나 있었지만 태어난 날 죽었지요. 헌종의 죽음에도 여러 설은 있습니다만, 확실한 건 없습니다.

 

 이에 효종 때부터 이어진 조선 왕가의 직계 혈통은 단절됩니다. 실질적으로 이 때 조선왕가는 기운 것입니다. 무슨 유전병이라도 발현된 건지, 순조의 자녀들과 손자들 모두 25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으니까요.

 

 왕이 제어해야만 하는 나라가 왕의 혈맥이 끊겼고, 관직은 탐욕스러울 뿐 책임감도 현명함도 비전도 없는 세도가들이 장악했으며, 시대는 급변하는 난세였으니 조선의 국운은 끝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이 망해가는 와중에 정말 주목할 만한 것이 하나 있으니, 딱히 나쁜 왕은 없었다는 겁니다. 거의 다들 그 나름대로 열심이었고 덕치하려 애썼고 딱히 부귀영화를 탐하거나 폭군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기우는 걸 막지 못했지요. 이는 조선 왕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단 입헌군주화가 되지 않음으로 왕정이 가진 태생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파벌들끼리 서로 싸우고 증오하는 걸 왕조차 어쩌지 못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걸 명심해야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역사를 중시한다는 사람들이 실제 역사를 모르고, 역사를 경시하며,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걸 항상 봅니다. 역사적 사건들을 외우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미 드러났던 문제가 반복되지 않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