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네 번 선거에 나가면서 네 번 모두 정당이 달랐던 한 정치인이 있다. (무소속을 포함한다.)  그가 공식적으로 지지했던 정당은 더욱 많고, 출마지역까지도 다양하다. 그는 이명박 정권 이후 대외적인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지만, 얼마 전 자신이 속한 당대표 선거에서 단일 후보로 출마한 후 무려 97%의 득표로 당대표가 되었다. 이번에 다가오는 27일 재보선에서도 분란을 만들고 있는 그 정치인은 유시민이다.


 최근 재보선 사건의 요지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른 지역도 문제가 많지만, 선거 지역 중 경남 ‘김해 을’에서 여당 후보로 전 도지사였던 김태호가 나오게 되었다. 야권 연합을 하지 않으면 상대하기 어렵다 보니 역시나 이번에도 야권 연합은 시도되었고, 또 역시나 경선 협상안이 스무스하게 잘 진행되지는 않았다.


 유시민과 국민참여당의 주장은 100% 여론조사로 단일화를 하자는 것. 그리고 민주당과 곽진업 후보의 주장은 국민참여경선을 하자는 것. 국민참여당이 국민참여경선을 ‘돈과 조직의 선거로 소수당에게 불리하다.’ 라고 주장하면서 여론조사로 하자고 버텼다.


 야권 연대의 논의는 공식적으로 2월 22일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명목상 야권 연대를 주도한 것은 시민단체이며, 네 시민단체가 주축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3월 20일까지 7차례에 걸친 협상이 진행되었다. 3월 21일에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협상안을 수용했다.


 국민참여당은 3월 25일이 되어서야 시민단체의 중재안을 조건부 수용하기로 하였었다. 그러다가 지난 4월 1일, 유시민은 양 쪽 주장을 반씩 섞은 시민단체의 중재안이 민주당에게 유리하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비난이 빗발치자 그는 이것을 ‘우리가 저지른 죄는 강자에 대해 굴종하지 않은 것.’ 이라고 하더라.


 여기서 한 가지 포인트. 국민참여경선은 여론조사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선거는 4월 27일이고, 시간적 여유를 두고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사실 곽진업도 유시민도 선거에서 이길 확률이 적기 때문에 국민참여당은 일종의 치킨 런 게임을 한 셈. 시간이 촉박해지면 단일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여론조사밖에 없어진다. 이 때 내 심정은 이랬다. ‘그냥 연대하지 않으면 좋겠다.’


 결국 오늘 4월 6일, 민주당 곽진업 후보는 국민참여당이 끝까지 고집한 100%여론조사를 수용했다. 이 사건이 유시민의 승리일까? 개인적으로는 씁쓸함이 좀 남는다. 결과는 두고 봐야 알겠지.


 서로 다른 정당의 후보가 단일화를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각자 가진 지지율과 조직이라는 판돈을 걸고 배팅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연히 여기에는 수반되는 이익과 같이 할 수 있다는 신뢰, 그리고 공통된 지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번에 한 전문 딜러가 또 한 번 판의 신뢰를 파괴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돈 선거를 하지 말자.’ 라고 주장하면서 100% 여론조사로 서로 다른 정당 후보 간의 단일화를 실현하자는 유시민의 주장은 과연 좋은 방식일까?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하부 시스템으로 어느 정도의 정당성이 있을까? 이는 이번에 이슈가 되어서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된 것이지, 평소 당내 경선이나 서로 다른 정당 간의 단일화 등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논제이기에 언제고 한번쯤 이야기를 꺼낼 만 하였다.


 나는 사실 이런 경우의 여론조사는 ‘현 시점에서의 당선 가능성을 확인해서 그것으로 비교 우위를 점하는’ 의미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여론 조사라는 것은 선거를 미리 모의로 해보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선거에 수반되는 여러 행위와 과정들은 제약되며, 단순히 ‘명사’에게 유리한 방식이 된다.


 이런 방식은 민주주의의 맹점을 크게 만들기 쉽다. 좋지 못한 시스템이라는 이야기다. 민주주의에는 잘 조절된 시스템이 필요하다. 잘 조절된 시스템은 많은 반민주주의자들이 우려하는 민주주의의 단점 및 실패 - 중우정치 등의 - 를 보완하고 방지해준다.


 당 내에서 경쟁을 거쳐 후보가 선출되는 과정, 그리고 조직의 동원과 시민들에게 어필하려는 노력, 잘 조정된 선거 방식 등은 실제로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초래할 수도 있는 비극적인 결과를 미연에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 사람은 같은 조직 내의 타인을 속이는 것보다는 자신을 잘 모르는 타인을 속이는 게 훨씬 쉽고, 당 내 인사들은 같은 당 내 인사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또한 정치인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조직을 동원하고 유권자를 포섭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능력을 키우고, 유권자의 요구사항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서로 다른 정당 간의 통합 문제는 같은 당 내부만큼 이 장치가 잘 작동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더라도 기본적인 것은 유사하다. 여론조사에 가까운 것이 될 수록 안전장치는 사라진다. 상대적으로 국민참여경선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선거의 절차를 충족하는 요소가 있다.


 여론 조사 방식이 단점을 보이는 일례를 들어보자.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내부의 사람들은 박근혜의 편을 들었다. 그렇지만 여론조사를 비중 있게 도입함으로 후보는 이명박이 되었고, 이명박은 최대의 라이벌을 여론조사의 힘으로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긍정적이었을까? 


 비록 선거는 이미지와 인기에 좌우되기 쉽지만, 정치는 이미지나 인기로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치는 현실이고, 정치적 행위를 잘 해 나가기 위해서는 조직과 돈, 그리고 전문적 능력과 경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잘 조정할 수 있는 신뢰와 조율 능력이 필요하다. 이 모든 제반 조건은 후보로 결정된 시점에서 통과되어야 할 선결 과제인 것이다.



꼬리.


 김해 을에서 여론 조사에 응하게 될 분들이 현명하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였으면 좋겠다.


꼬리 2.


 누구라도 본문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막말 & 악플 엄금. 써놓고 악플러 무서워서 올릴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 올림. 악플로 판단되는 글은 경고 없이 삭제 및 차단조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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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문제점과 민주주의

정치 2011. 3. 29. 21:27 Posted by 해양장미


 본 글은 오랜 세월동안 생각해온 것을 정리해보는 것일 뿐, 결론의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 충분한 자료 검토를 거치지 않았으며, 아직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글로 생각을 정리해두는 것은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세계에서 한국만큼 유교의 잔재가 깊이 남아있는 국가도 드물다. 그렇지만 나에게 유교 문화는 민주주의와는 극단적으로 상충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실제 세계사를 보면 특정한 조건에서 민주주의는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여러 번 부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 중에 민주주의적인 형태에 대한 욕구가 내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인간의 본성은 민주정과 전제정 사이 어딘가 쯤에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풀기 위해 미리 설명해야 할 게 있다. 사실 민주정은 ‘이상적’인 정치 방식이 아니다. 그보다는 굉장히 현실적인 방식에 가깝다. 어떤 의미에서 민주정은 철학자 왕의 정치(철인정치)나 삼황오제같은 선군에 의한 덕치의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에 기인한다.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는 적극적으로 욕망을 쟁취하려는 행위이며, 서로 상충되는 욕망의 (비교적 평화로운) 타협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민주정 하에서는 이런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당연하게도 과거의 많은 철학자들은 이러한 민주주의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떠한 - 그러나 다수를 차지했던 - 윤리적인 관점 아래 민주정의 이런 요소는 비윤리적이고 위험한 것이었다. 종교화된 수많은 윤리적 가치관은 적극적인 형태로 민주주의를 부정한다. 이는 현대에 남아있는 주류 종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인민들의 가치관 인식은 어느 시대에나 현실과 철학, 종교가 뒤섞여있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유독 동아시아에서는 민주화의 꽃이 피어나본 적이 없었을까? 이는 사실 인류 전체를 볼 때 독특한 현상인 것 같다. 동아시아는 예부터 많은 인구가 모여 살던 곳이고, 역사도 오래 되었으며 오랜 세월 동안 다른 지역에 비해 부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독 동아시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민주화의 싹조차 제대로 피어나본 적이 없다.


 현재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주의는 서구에서 이식된 것이다. 더구나 제대로 민주주의가 이식되지 못한 중국은 그들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제대로 민주공화국을 이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에 대한 나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동아시아의 여러 조건과 특색, 일찍 발달한 기술과 부는 서구에 비해 훨씬 일찍 강한 중앙 집권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유학이라는 사상 체계가 일찍 생겨났고 이는 빠른 시간 내에 종교화되는 동시에 정치와 결합했다. 안타까운 점은 동아시아에는 유학 말고도 일찍부터 다른 여러 사상 체계가 있었지만 유학만큼 빠르게 종교화되고 오랜 시간동안 변형되어 악습을 남긴 사상은 없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빠른 중앙 집권화와 유교의 결합이 다른 지역에서의 왕권 강화와 제정이 분리되지 않은 정치와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 것 같다.


 사실 나는 공자나 맹자의 사상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종교화된 사상 체계는 기존의 사상이 가진 단점을 보완하고 혁신하지 못하는 특색이 있다. 그리고 빠르게 권력과 융합한 유교는 그 단점을 보완할 기회를 더더욱 가지기 어렵지 않았나 생각한다.


 유교는 다른 여러 원시적인 사상 체계가 그렇듯 자체적인 단점을 적잖게 가지고 있다. 나에게 느껴지는 유교의 가장 큰 단점은 유교는 목표만을 설정할 뿐,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향을 합리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 끊임없이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과 비슷하고, 음식을 가리는 아이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으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비슷하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행정이 아닌 정치는 근본적으로 욕망을 달성하고, 갈등을 조정하고, 서로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통치이자 타협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욕망을 억압하여 근본적으로 갈등의 요소를 줄이고자 하는 종교적 속성과는 반대되는 일면이 있다. 이미 사회ㆍ문화적으로 욕망이 억압된 후에도 생기는 사회적 갈등은 정치적인 해결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유교는 갈등을 해결한다기보다는 덮어버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유교는 정치에 사용하기에는 당장 권력자들에게 유리했지만, 지나치게 세속적인 속성이 없어 욕망을 끊임없이 억압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런 문화는 갈등을 적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지만, 그 이상의 많은 단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인내심은 무한하지 않고, 인간은 욕망을 충족해야만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 가치관 하에 인간의 인내심은 무한해야 하고 욕망은 죄다. 또 갈등이 억압되기에 부당한 권력마저도 도전받을 기회가 적어진다. 이는 민주주의와는 정 반대의 속성이다.


 극단적으로 억압되는 욕망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는 현대의 심리학이나 정신 의학, 또는 정신 분석학 등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화병(홧병)’이 세계적으로 독특한 한국의 문화적 결함 증후군인 것은 한국의 성리학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성리학은 유교 중에서도 최악의 일파다.


 유학이 지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런 근본적인 단점은 통치 사상으로는 좋지 않았다. 목표를 달성하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사상 체계가 현실에 적용되면 그 집단은 몰락하고 도태되기 마련이지만, 유교는 숭배자들이 지나치게 많아 끊임없이 부활했다는 게 더욱 큰 불행이었다. 유학을 숭상한 중국의 역대 왕조는 여러 번 처참하게 몰락했지만 유학자들은 그것이 ‘유학을 잘 지키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유학은 큰 혁신을 하지 않는 이상 ‘오랜 시간 동안 잘 지켜질 수가 없는’ 속성을 지닌다.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흔했지만, 이렇게까지 욕망을 부정한 사상 체계가 오래 지속되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유교는 얼핏 보기에 인본주의적이지만 대부분의 신앙ㆍ사상보다 강하게 인간의 욕구를 억압한다. 더구나 유교의 목표인 덕치가 역사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진 시기는 지극히 짧다.


 또한 유교 국가의 신분제 문제는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굳이 따로 적을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사농공상이라는 신분 의식은 정말 국가의 기둥뿌리를 뽑기 알맞다. 인재가 모두 공무원이 되고, 상업이 천시되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가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겠는가. 이런 구조는 국가 전체의 부를 줄일 뿐만 아니라 인민들의 생존에도 해가 되기 쉽고, 부르주아가 등장하는 길을 막기 때문에 부르주아에 의한 민주화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상업과 물류의 발달은 흉작이 난 곳에 식량을 공급하게 됨으로 인민의 굶주림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였고, 거의 모든 민주화는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계급이 왕과 귀족 계급에 도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어쩌다 돈을 꽤 번 상공업자가 정치에 참여하려고 하면, 돈으로 벼슬을 산 부패한 관리로 낙인찍힐 뿐이었다. 권력이 평화적으로 분배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당하고, 신권이 강한 가운데 통치자의 권력이 끊임없이 약해지면서 인민들이 덕치의 혜택을 보기 어려운 조건에 쉽게 놓이게 되는 지배 구조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여러 단점을 가진 유교 문화는 아직도 한국에서 사라지지 않았기에 현재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자생적인 결과물이라 보기 어려운 민주주의는 문화적으로 정착되지 않고, 대중은 끊임없이 민생 파탄에서 자신을 구해줄 성군과 충신이 등장하기를 기원한다. 계급적 균열은 제대로 생기지 않았고, 공공성과 공익을 우선해야 한다고 외치는 목소리는 빈번하게 소수자나 약자를 억압하곤 한다. 또 한편으로 자유로우면서도 상대의 기분을 해치지 않는 의사 표현 능력이 좀처럼 길러지지 않는 데 유교의 잔재 또한 깊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갈등의 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사회라 할 수 있다. 하물며실제의 법률에도 유교적 가치관이 적용됨으로 여성, 자식 세대, 미성년자 등이 제대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지 않는가.


 한편으로 나에게 소위 ‘유교민주주의’의 논의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유교와 민주주의는 성질이 다르다. 유학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반민주주의 철학이다.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철학을 자꾸만 민주주의와 결합시킬 노력을 하는 게 얼마나 효율이 있을 지 회의적이다.



후쿠시마의 교훈

정치 2011. 3. 17. 03:13 Posted by 해양장미


 원자력 발전은 언제나 논란거리일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이 하는 일을 그리 신뢰하지는 않는 편인데다, 내가 아는 한 우라늄 235의 매장량과 그 농축 및 운반, 관리, 폐기에 필요한 에너지는 원자력의 효율성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게 하기에 나는 다소 유보적인 반핵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번 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 원전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고, 이에 대해 나는 어느 정도 올 게 왔다는 느낌인 동시에, 원자력 전문가들이라는 분들의 ‘안전하다는’ 홍보가 상업적인 의도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원자력 발전소는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반드시 일어나는 성질의 것에 가깝다. 이론적으로 인류가 원자력 에너지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러나 이론 또한 핵폐기물 문제와 우라늄 매장량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는 못한다.) 사람이 하는 일은 반드시 실수가 있기 마련이며 건축 및 수리는 결코 과학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멀쩡한 백화점이나 다리도 갑자기 무너지는 게 인간이 하는 건축이 아니었던가.


 한편으로 사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좀 불쾌했던 부분은 여럿 있다.


 우선 원전의 내진 설계가 리히터 스케일 7.9까지만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리히터 스케일 8정도의 대지진이 10년에 한 번 꼴로 일어나는 나라다. 일본과 원전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7.9의 내진설계는 애초에 위험성이 있었다. 또 한편으로 설계가 어떻게 되건 실제의 시공은 그보다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는 지진이 일어난 후 요미우리 신문에서도 지적한 부분인 듯하다.


 그 외 일본 정부나 한국의 전문가들이 ‘안전하다’, ‘문제없다.’ 라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 너무나 빤히 보이게 원전의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다는 점은 대중의 관점에서 그들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기 어렵게 한다. 물론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고, 낮은 강도의 방사능이 인간에게 얼마나 해로운지 아직 미지수인 부분은 있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소위 원자력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사고방식이 우선적으로 있으며, 낙관적으로 상황을 전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고는 재수가 없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거라 정상적이고도 낙관적인 전망과는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알기로는 한국 원자력 발전소들 또한 여러 번의 사고가 있었다. 이미 원자력이 안전하다고 홍보하는 데 소비되는 세금도 적지 않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원자력 비중이 상당히 높은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화력이나 수력 발전 등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아직까지 개발된 소위 친환경적인 발전 방식들은 충분한 발전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또한 원자력에 대한 대중의 공포는 쉽게 과장될 수는 있다. 이번 사고도 체르노빌처럼 극단적인 사고로 확대될 확률은 아직 그리 높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근본적으로 유일한 대안은 전기를 - 더 나아가서는 에너지를 덜 쓰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에너지 소비에 관해서 한국의 현재 상황이나 정책은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다. 한국은 굉장히 인구가 밀집되어있는 주거 형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인 출퇴근 거리는 멀고,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회사는 특정 지역에 몰려 있다. 또한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부실하게 설계되어 충분한 단열 효과를 가지지 못하고 과도한 도시화는 여름에 열섬 현상을 심하게 한다. 난방 방식 또한 전기에 의존하게 되는 세수 형태를 지니고 있고, 정책적으로도 전기 소모를 절약하려는 의도가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화석 연료의 고갈을 생각해볼 때 대체에너지의 개발이 지금처럼 지지부진하다면, 결국 인류는 플루토늄처럼 위험한 연료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전기 소모를 줄일 수밖에 없으리라 예상한다. 조금 더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하고 각자 풍요를 덜 누리면 각자 조금 더 안전해질 수 있고, 타인을 사지로 덜 몰아넣어도 되지 않을까? 내 생각에는 이것이 답이지만, 오만한 욕심쟁이들이 양산되는 시대이기에 과연 안전한 길로 인류 또는 이 나라의 국민들이 접어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바꿔 말하면 현대한국의 전기적 풍요를 온전히 누리려면 당분간 원자력은 존속될 수밖에 없다.




2011년, 반 MB를 넘어서

정치 2011. 1. 4. 19:31 Posted by 해양장미


 새해가 되었다. 근래의 정치사회적 움직임은 이명박의 통치시기를 넘어서는 기점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려하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어떠한 커다란 악이 있을 때, 어쩌면 그 악과 싸우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렇지만 악이 남긴 파괴를 딛고 그 다음을 기약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지금까지 해온 게 싸움밖에 없다면 더더욱.


 담론은 이미 옮겨지고 있지만 중앙 정부의 정치적 힘은 한나라당이 독점하고 있다. 다른 정치세력들은 반 MB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았으며, 지금도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다. 오히려 거대담론들은 민주주의의 확산에 좋지 않게 작용했고, 지난 2010년에 민주당계를 제외한 진보세력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 분위기가 지독하게 나빠진 것은 여러 정치사회 담론과 문화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거대담론과 네가티브에 휘말리기 쉬운 상황이 반복해 발생했고, 문화는 날이 갈수록 빠르게 천박해졌다. 심해진 배금주의는 더 심한 배금주의로의 악순환을 반복시켰고, 내 주변의 거의 모두가 몇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난해졌다.


 나쁜 쪽으로 가속화된 정치사회적 흐름은 대안으로 거론되는 여러 담론들을 포퓰리즘에 가까운 것으로 만든 것 같다. 물론 그런 조짐은 계속 있었지만, 이 시대의 정치적 퇴행은 무시하기 어려운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근래의 군사적인 갈등은 이념적 균열에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문제는 몇 년 내에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현재는 아주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렇더라도 이제 네가티브는 끝났다. 이명박 정권 다음을 논의할 때가 이미 다가왔으며 그렇다면 반 MB를 넘어 새로운 대안을 이야기해야 한다. 복지 이야기도 좋지만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어지간한 수준의 복지가 자신의 삶을 우선적으로 개선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복지가 세금을 늘릴 거라 생각한다. 정치는 윤리적 욕구뿐만 아니라 실질적 욕구도 충족시켜줘야 한다.


 MB의 비윤리적 권위주의식 통치 시기는 필연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끝을 맺게 되어있다. 막상 그 끝을 앞둔다면, 사람들은 결코 윤리적 욕구만을 고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더 나은 비전을 제시하고 더 포괄적인 시민들을 돌보고 포용할 것인가? 이 의문의 답은 아직 변수가 많다.


 한편 개인적으로는 근래 시민들의 이성적, 윤리적인 수준이나 욕구가 전반적으로 저하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부분이 많은데, 이는 결과적으로 앞으로의 정치사회문화적 양상에 일정 부분 이상 변수로 작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반적으로 사회의 여러 건강한 모습이 사라진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것이 파괴되었다. 많은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고, 사람들은 적어도 무언가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열망이 단순한 포퓰리즘으로 기울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 앞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은 포퓰리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이 어느 정도나 있을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또한 이것과 별개로 아직도 야권에서 주로 논의되는 이야기는 반MB연대이며, 안타깝게도 이런 연대는 박근혜의 좌향좌에 의해 이념적, 정책적 차별을 유의미하게 확보하지 못하게 된 게 현실이다. 올해는 나에게 보이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 및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천천히 해나가게 될 것 같다.


 내 생각에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이 자유민주주의의 틀을 일차적으로는 유지하는 가운데 문제점 하나하나를 충실하게 보완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은 절차적 민주주의 체제를 보완해가면서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노력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물론 반 MB담론은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현재의 추세로 정권을 교체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무엇이 나아질 것인가? 물론 MB정권에 비해 더 윤리적인 행정 절차를 밟을 수 있고, 언론은 좀 더 자유로워져 노무현 때 수준으로 수구언론의 권력은 내려갈 것이며, 새만금은 하더라도 4대강 같은 수준의 어이없는 공사는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 분위기는 현재보다는 나아질 것이며 서민이 구제받을 확률이 2%내지 5%는 더 생길 것이다. 북조선과는 지금처럼 냉전으로 달려가지 않을 것이며, 제국주의적인 군사주의의 망령도 덜 소환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나은 기회들이 생길 거다. 국민들끼리의 사회적인 신뢰도 아주 약간은 회복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는 근본적으로는 거의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성장 및 그 부수효과들 외엔 뚜렷한 업적 없이 정권을 빼앗기고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켰음에도 그런 실수는 반복될 가능성이 적지 않고, 노무현과 유시민의 신도들은 노무현 정부 및 관련 인사들에 대한 비판 자체를 불허하면서 매우 폭력적인 대응을 일삼고 있다. 국민참여당은 이제 민주당보다 정치학적으로 진보적인 특색이 없다고 판단됨에도 그들이 더 진보적인 것처럼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으며, 좌파 정당들은 호남의 민주당보다는 영남패권주의적인 국민참여당과 함께하려고 하고 있다.


 사실 내 생각엔 이제라도 가장 기초적인 것을 해야 한다. 정당이 좀 더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젊은 정치인을 성장시키며 이념적으로 포괄해야 할 계층에게 어필하고 요구를 수용하면서 세력을 늘려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렇게 하려면 현실적이고 시대의 변화에 어울리는 진보적 변화와 행동이 필요하다. 쉽게 말하면 이는 민주주의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정당이 시민의 요구사항을 수용하지 않으면, 절차적 민주주의 정치는 뼈대만 남은 통치에 불과하다.


 한편으로 현재의 복지 담론은 저도의 포퓰리즘성 시혜적 복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바람직하고 수준 높은 복지로 연결될 확률이 낮다. 박근혜도 오세훈도 유시민도 복지를 말하지만, 그것은 아주 낮은 단계의 - OECD 국가 중 형용할 수 없이 최저인 - 복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복지 레벨은 높아질 것이지만, 그 복지 양상은 각각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포퓰리즘 성향을 가질 확률이 높다. 보다 민주주의적인 변화가 필요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