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유행한 이런 말이 있다.
‘부자들은 채소와 과일을 먹고, 중산층은 고기를 먹고, 서민은 인스턴트를 먹는다.’
공감이 좀 가실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문제는 꽤나 복잡하다. 분명한 건 이게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거의 세계 어느 나라나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다만 한국은 변화 속도가 빠르고, 향후 다소 심한 양상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큰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로 인한 피해는 점차 확산되고, 더욱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어갈 것이다. 본문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가 생기는 이유와 피해 전망, 그리고 해결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한식이 현대의 모습을 갖추게 된 건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150년 전 조선시대 말, 우리 조상님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밥상 앞에 앉아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 백미밥과 배추김치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의 한식의 보편화는 근현대의 기술이 있지 않고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배추는 현대 한식에서 가장 중요한 잎채소이다. 그런데 사실 한국 배추처럼 거대하고 꽉 차게 결구가 되어있는 형태의 배추는 매우 드물다. 이런 형태의 배추는 작년부터 영어로 ‘Kimchi Cabbage’라 부르게 된 것 같다. 이는 본래의 배추 형태와는 달리, 포기김치를 담그기 위해 개량된 종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개인적으로 오랜 기간 의문을 가졌던 것 중에 ‘배추뿌리’의 존재가 있었다. 1960년대에 나온 건강 서적을 보면, 배추보다 배추뿌리가 몸에 좋으니 챙겨 먹으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은 나는 막상 배추뿌리를 본 적이 없었다. 시판되는 배추는 모두 뿌리가 잘려 있었으니까.
배추뿌리가 문화적으로 먹는 것이었다면 굳이 잘라서 팔 이유가 없었다. 부유해진다고 먹던 걸 일부러 잘라 버리는 건 좀처럼 생기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답은 의외로 쉬운 데 있었다. 한국에서 1960년대에 키우던 배추는 요즘 배추와는 종류가 다른 배추였던 것이다.
옛날 배추를 현대에는 보통 토종배추나 뿌리배추 등으로 부른다. 이 배추는 무처럼 뿌리를 먹을 수 있고, 흰 부분도 가늘며 속이 차지 않는다. 사실 알고 보면 배추는 식물학적으로 순무와 같은 종인데, 토종배추는 순무처럼 다소 매운 맛이 난다고 한다. 나는 아직 먹어본 적이 없지만. 토종 배추의 사진을 첨부한다.
현대적인 대형 결구배추가 대량 재배되게 된 건 1970년대부터이다. 그런데 배추를 한번이라도 키워 본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배추는 더위에 약한 채소다. 그렇기에 한국 기후에선 늦여름에 심어 가을동안 키운 후 김장을 담그는 채소인 것이다. 대형 결구배추는 이 짧은 기간 동안에 한 알의 씨에서 그리도 거대한 채소로 성장해야한다. 당연히 엄청난 영양분이 필요하고, 그마저도 한국인들은 일 년 내내 배추를 원하게 되었다. 1
이 문제 때문에 한국 고랭지는 엄청난 면적이 배추로 뒤덮이게 되었다. 고랭지는 여름에도 온도가 많이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연중 계속 배추를 키울 수 있다. 그런데 농업에 조금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이렇게 넓은 면적에 단일 작물이 자라려면 그만큼의 관행적인 영농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지속적인 종자개량과 다량의 화학비료, 농약의 투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배추는 배추흰나비라는 이름까지 붙은 해충이 있을 정도로 많은 벌레들이 노리는 작물이다.
그나마 한동안은 이런 식으로 수요를 버틸 수가 있었다. 기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유가도 그리 높지는 않았으며 농촌 인력도 그럭저럭 노동력이 있었다. 또한 땅심에도 어느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 누적되던 각종 문제들은 최근에 심각한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젠 기후가 변덕이 정말 심하다. 유가는 높아져서 화학비료와 농약의 가격도 올랐다. 물론 농촌의 노동력은 말할 필요도 없다. 50대면 젊은이 취급을 받을 정도니. 그리고 너무나도 오래 지속된 약탈적 농업은 한국 농지들의 지력을 크게 떨어뜨리고 말았다.
한국인들은 유교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윤리성을 가지고 국민을 부모처럼 보살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한국인은 일 년 내내 배추 가격이 안정되어야 한다는 식의 이상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 법칙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배추는 본래 가을에 한 번 재배되는 채소이고, 수요가 많다 보니 고랭지나 시설 재배로 부족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기후가 나쁘거나 하면 당연히 수확량이 떨어지는 게 자연의 이치고, 더 나아가 너무 오랜 기간 동안 무리하게 많은 배추를 길렀기 때문에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코스트로 같은 양과 품질을 가진 배추를 생산할 수는 없다. 배추는 쌀, 고추와 함께 한국에서 가장 첨예하게 산업화된 작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한 배추는 한 일례일 뿐이다. 사실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거의 모든 식재료들이 적잖은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한국 농업의 현실은 알고 나면 좀 골치 아픈 분야다. 기후는 점점 변덕스러워지고 있고,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생산량 위주로 재배를 해온 결과 유기물함유량이나 양이온치환능력같은 땅심은 크게 떨어졌다. 애초에 한국 땅은 화강암질이기 때문에 좋은 토질이 아니다.
한국 정부는 오랜 기간 동안 도시 서민들이 싼 가격에 충분한 채소를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런 정책이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 그리고 보건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런 정책이 지속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채소 가격이 요동치고, 종종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같은 재앙이 발생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또한 한국인들은 다분히 현대적인 기술이 적용된 것들에 전통의 탈을 씌우고, 그것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하나 예를 들어보자면 위에 말했듯 대형 결구배추는 현대의 발명품이고, 대체로는 상당한 화학비료와 농약을 투입해야만 나오는 작물이다. 흰쌀밥은 현대적인 도정 기술의 산물이고, 멸치는 현대적 조업 기술 및 대규모 가공 기술의 산물이다. 우리가 대체로 흔히 먹는 고추는 과거엔 이리 널리 퍼지지 못했고, 그 품종도 현대화되었을 뿐더러 대규모 재배를 위해 적잖은 화학 약품들이 투입된다. 고추는 병충해에 약하기 때문에 국민약골 소리까지 듣는 작물이다.
축산업은 공장식 축산 문제 이야기가 많이 나도니 굳이 이야기를 많이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조금 설명하자면 한국의 축산업은 집약적이고, 사료는 거의 수입하며 품종 문제등도 있다. 땅도 비싸고 인건비도 비싸기 때문에 방목하는 것도, 풀을 베어서 주는 것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물론 보다 신경 써서 풀도 베어주고 공간도 확보하면서 가축을 키우는 농가도 있기 때문에 전체를 나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여건은 아니라는 의미다. 무엇보다도 더 나은 방식으로 키운 농축산물이 아직 충분히 대접받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수입 개방 압력은 점점 커지고 있고, 도시 서민들은 싸게싸게만 외치면서 물가가 올라 죽겠다고, 유통업자들이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유통업은 문제가 아니다. 딱히 큰 부자가 된 전통적 유통업자를 나는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높은 물류비용이나 리스크, 보관 비용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유통을 현대화시킨 대형마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악의 축같은 대접을 받고 있으니, 상황파악에 좀 더 이성적일 필요가 있다.
정부는 앞으로도 더욱 저렴한 농축산물 공급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대형 영농을 탄생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지금껏 그래왔듯 더욱 농촌을 압박할 거고, 장기적으로 생산성을 더 낮출 것이다. 기후는 점점 더 예측하기 어려워질 거고 농산물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민들은 점점 더 국내산 신선식품을 먹기 어려워질 것이다. 서민들의 우는 소리는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고, 정치가들은 더욱 더 달콤한 말을 하면서 농촌을 더 압박하고 포퓰리즘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빈곤을 후대에 떠넘기면서 근시안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빈곤은 점점 누적되고 있고, 이 체제가 지속 가능한지에 대해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좀 더 지속 가능한 사회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칭 진보라는, 깨어있다는 시민들은 이런 문제엔 진지한 관심이 없다. 몇 년 전 구제역 사건 때 자칭 진보들이 걱정하던 것은 대체로 고기값과 수질 오염 뿐이었다.
수입에 의존하는 게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중국산 농산물도 시간이 지나면 결코 지금처럼 저렴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아직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고, 어쩌면 스스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것조차 어려워하게 될 수도 있다. 또한 12억 인구의 인도가 경제성장을 더 하게 되면 세계 식량은 더 모자라질 가능성이 높다. 한동안 지속적으로 국제 식량 가격은 올라갈 것이다.
국제유가의 추가 상승 여력도 문제를 크게 만들 수 있다. 모든 화학비료나 화학농약, 농기계에는 석유가 소모된다. 유통에도 석유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식량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은 도시 서민들의 식단을 더욱 불량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고, 이는 장기적으로 국민의 심신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과거에 미래로 미뤄둔 근시안적 빈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이런 문제를 개선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더욱 큰 비용이 나갈 가능성이 높다. 오늘도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더 저렴한 물가와 더 많은 복지, 더 낮은 세금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고, 사실 지금도 정부는 오래 지속되어온 포퓰리즘 정책으로 시민들의 불만을 누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떤 사회가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진보적인 사람들이 영리하고 이성적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자칭 진보들은 그런 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자칭 진보들이 징징대면 징징댈수록 빈곤은 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들은 남의 주머니를 털어 내 주머니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다.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이들이 지역을 끼고 갈라져 진영논리를 앞세우며 비아냥거리고 다투는 사이 우리의 미래는 점점 빈곤해지고 있다. 누구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 일부 추위에 강한 배추는 월동하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는 대체로 봄동이라 부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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