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언제가 좋은 시기였는지 기억이 아득하다. 아마 한국 경제의 상대적 황금기는 1990년대 중반기였을 것이다. 그 땐 대체로 모두가 적당히 잘살았다. 지금보단 객관적으로 가진 게 없었지만, 체감 상으로는 잘 살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인들은 항상 불경기라 느끼고 있다. 큰 불경기냐 작은 불경기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박근혜 후보의 당선은 군사정권 당시의 성장에 대한 향수가 또 한 번 발휘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실제 경제 공약에 있어서도 객관적으로 문재인 후보보다 많이 낫기도 했다. 그렇다면 박근혜 후보는 한국에 호황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과연 경기는 언제 풀릴까?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로 나는 지난 포스트, ‘한국은 잘나가는데 왜 한국인은 가난할까?’ 에서 외국인 투자자에 의한 국부 유출을 주된 문제로 든 적이 있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 2010년을 돌아보면, 당시엔 한국의 무역이 잘 되어서 예상을 상회한 최대 흑자를 기록하였다. 흑자 금액은 $417억 정도. 당시 환율로 대략 47.3조원에 육박하는 수준의 흑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해에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 주식시장에서 이익본 돈이 대략 62조원이라는 것이다.
이건 간단히 말해 한국 안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밤새서 일해 번 외화, 약 47조원보다 15조원 많은 62조원을 외국인 투자자들이 빨아먹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 계산엔 한국인 투자자들이 외국 증권에서 번 손익이 집계되지 않긴 한다. 그런데 그런 소득이 얼마나 있겠는가. 정보력에서 앞서는 홈그라운드에서도 탈탈 털리는데. 한편으로 채권 투자액에 관한 건 아예 언급도 안했다.) 당연한 건데, 이래서야 무역해서 이익을 얻어 봐야 별 소용이 없다. 한국 기업이 번 무역 흑자가 한국에서 좀 돌아야 내수 시장도 돌아갈 텐데 외국으로 죄다 빠져나가는 걸 넘어, 개미 투자자들이 그나마 있는 돈까지 더 가져다 바치니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한국의 경제가 진정으로 개선되려면 주식시장을 통한 국부의 유출을 제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를 막으라는 게 아니다. 매년 수십조씩 털려서는 곤란하다는 거다. 밤새서 폰만들고 차만들고 이것저것 만들어봐야 수익이라는 면에서는 사모, 헤지펀드들 클릭 좀 해대는 것만도 못한 현실이다. 그러나 소위 민주화 세력이건 자칭 보수세력이건 (이름들이 아깝게도) 아예 이런 문제 인식 자체를 제대로 못하는 게 현실이다 보니, 여기엔 당장은 별 기대가 없다. 얼른 시민 사회에서라도 사태 파악을 하는 게 먼저다.
(한편 근본적으로는 한국 특유의 문화적 결함들이 개선되어야 금융에서 좀 이익을 창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지금은 걸고는 맨날 잃는다. 그저 안습. 한국인 평균 성격을 보면 금융에서 절대로 절대로 죽었다 깨어나도 돈을 딸 수가 없다. 여하튼 깨시민부터 좀 재우자. 그들은 너무 오래 깨어있었다.)
그보다 현실적으로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부터 보자면, 그리고 실제 박근혜가 손 댈 수 있는 문제를 보자면 소위 ‘돈맥경화’를 들 수 있겠다. 경기가 시원찮다는 건 쉽게 말해 화폐라는 경제의 혈액이 빠르게, 많이 흐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돈은 재화의 매개수단이고 돈이 타인의 손으로 빠르게 오고갈수록 경제는 활성화된다.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돈을 많이 쓸수록 내가 돈을 많이 벌게 된다. 물론 분배가 공평할 때의 이야기다. 물론 사회가 가진 총생산력 이상의 생산은 불가능하고, 화폐가 아무리 잘 흘러도 이 이상 부유해질 수는 없지만, 잠재 생산력 자체가 현실에서 최대한으로 돌아갈 때는 거의 없다. 전시에 군수품 만드는 거라면 모를까.
문제는 이 흐름의 방향 제어와 심리에 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재화 흐름 중 많은 부분이 외부로 유출되게 되었다. 그나마 극심한 고통 없이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느꼈던 것은 재화 자체의 양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한계에 부딪친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 고통이 가중되었다. 재화의 증식이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소위 진보좌파들의 가장 큰 착각 중 하나가 부동산에 대한 인지이다. 부동산은 재화의 주된 척도 중 하나이며, 부동산 가격 상승은 추가적인 화폐 흐름을 만들어낸다. 소비는 현재의 소득보다도 미래의 기대소득에 의해 좌우되는 면이 강하다. 다만 노무현 정권 때의 부동산 가격 상승은 너무나 가팔랐기에, 늘어난 재화가 부동산으로 재투자되는 경향을 가져와 실물경기에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한 면이 있었다.
부동산 가격은 어느 정도 완만하게 상승하는 것이 실물 경제에 가장 좋다. 안전한 채권보다는 높은 수익률에, 투기용 채권보다는 덜한 리스크 정도면 이상적이다. 오늘날 적잖은 자칭 진보좌파들은 부동산이 투자자산이어서는 안 된다고 헛소리를 해대지만, 사유지는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언제나 투자자산이었고, 투자자산이 아닌 이상 비유동자산을 구매할 바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문제는 근래 5년간 부동산, 그 중에서도 주택 가격이 실질적으로 떨어졌고 그로 인해 부동산 거래가 마비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낮은 가격으로라도 거래가 되면 그나마 괜찮은데, 주택은 좀 특수한 시장이어서 가격이 회복될 때까지 세를 주고 대출을 돌려 막으면서 버틸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주택을 가진 수많은 중산층의 지갑이 굳게 닫혔다.
한국 수도권 중산층의 자산 중 가장 많은 부분이 부동산, 즉 자가 소유의 공동 주택에 들어가 있다. 이 막대한 자산이 지닌 유동성이 사라진데다 단기적으로 상승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소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소비의 감소는 곧 생산의 감소 및 시장의 불황으로 이어진다. 화폐의 흐름이 마비된 것이다. 한국은 이런 상황에 대응할 만한 시스템이 없다. 부동산 시장이 풀릴 때까지는 무한한 불황과 고통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부동산 가격이 더 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재인도 그랬다. 당연히 헛소리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럴싸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도, 부동산 거래가 안 되는 이상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의 주머니로 돈이 들어갈 일은 거의 없다. 돈이 돌아야 누군가가 창업을 하고, 창업을 해야 일자리가 생기고, 일자리가 좀 있어야 노동자도 돈을 좀 쓰지 않겠는가. 이런 불경기에 창업을 하는 사람은 위인이거나 바보다.
한편으로 도전적인 창업이 어려울수록 프랜차이즈가 흥하고, 프랜차이즈의 점주 등쳐먹기도 그만큼 심해진다. 상황이 이래서는 일자리가 생길 턱이 없다. 일자리가 없으니 영세 자영업이 늘어나고, 영세 자영업이 늘어나도 소비해줄 지갑 두꺼운 소비자가 없는데다 경쟁이 더 심해지니 다 같이 망한다. 부동산에 고여 있는 막대한 자금이 풀리고, 새로운 창업 붐이 일어날 정도가 되어야 이 극심한 불경기가 해결된다.
전세값 오른다고 다들 난리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다. 물론 가끔 재산에 여유가 있어서, 여기에 더해 자비로운 마음으로 전세를 계속 싼 가격에 주는 집주인들도 있긴 있다. 그러나 전체 인구 중 돈에 여유있는 생불이 얼마나 되겠는가. 보통 집주인들도 그리 꼭 부자는 아니다. 또한 부자는 대체로 부자일 만 하니까 부자다. 돈 버는 센스가 없는 갑부는 거의 없다는 거다. 게다가 집주인이 있어야 세입자도 있는 게 아니겠는가.
냉정하게 말해 부동산 가격이 안 오르면 전세는커녕 월세도 지금보다 훨씬 더 오른다. 그나마 지금은 아직 전세도 남아 있고, 미분양 아파트들도 있고, 부동산 시장 회복의 기대도 남아있기에 월세금액의 상승이 가파르지 않은 것이다. 만일 이런 상황이 더 지속되어 부동산 소유 모델이 본격적으로 수익형으로 변하게 되면, 월세는 크게 오르고 불경기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아직 임대인 입장에서 주택 임대차 수익은 채권 수익만도 못하다. (임대용 원룸형 주택 제외) 또한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현 주택 소유 중산층 가정이 늘어날수록, 다가구를 소유한 부동산 부자 수도 늘어나게 되어 있다. 어차피 서민은 본인 자본으로 집을 못산다. 그나마 가격이 오를 거라는 기대가 있어야 빚이라도 내서 사는 거다.
박근혜가 취임 후 갑작스레 엄청난 세금을 거둬, 엄청난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경기를 살릴 거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 식으로 경기를 회복시키려면 브라질이 하는 것처럼 기본소득이라도 줘야 할 거다. (한편으로 나는 소액 기본소득이 있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박근혜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박근혜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장기적인 한국 경제의 펀더멘탈을 개선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경기가 언제 풀릴까? 답은 간단하다. 부동산 가격 하락이 끝났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거래가 활성화되고, 가격이 완만하게 상승하기 시작하면 적어도 현재의 극단적인 돈맥경화는 해결된다. 물론 너무 가파르게 가격이 오르면 오히려 비유동자산인 부동산으로 막대한 자금이 흘러가서 경기가 죽는다. 그리고 부동산 문제가 해결된다고 모든 경기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부동산에 모든 통화가 고여 있는 한, 불경기가 나아질 일은 없다. 아예 사회주의 정권이라도 들어서면 모를까. 여하튼 부동산 종말론자들에게 속지 말자.
뱀발. 노무현 정부 때는 부동산 가격상승 외에도 사교육에 엄청난 자금이 흘러들어갔다. 정확히 말해 둘은 연합하여 통화를 빨아들였다. 그로 인해 총 경제 규모는 성장했지만, 실질적 통화 흐름은 좋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는 노무현 때와는 달리 인구수의 감소로 총 학생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교육이 신분의 상승을 가져오는 효과 또한 가시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앞으로 사교육과 부동산의 가격 흐름은 기존과는 다른 양상이 될 것이라 전망할 수 있다. 한편으로 한국 부동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전망에 대한 글은 다음 기회에. 애초에 왜 노무현 때 부동산이 폭등했는지부터 이야기를 풀어야 한다. 알고 보면 정말 많은 게 IMF 탓이다.
(본문 업데이트 약 1시간 후 금액 부분 등의 오류를 발견하여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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