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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양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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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제도가 지극히 불합리적이라면, 그런 제도는 오래 유지될 수 없다. 근래 들어 제사건 차례건 없어지는 추세에 있는 것은 제도가 불합리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식 제사라는 피곤한 제도가 오랫동안 존속해온 것은 단순히 여성 권리가 낮아서라거나, 유교 의식이 마냥 투철해서는 아니었다. 현실에서의 종교 의식이나 예의 등은 어느 정도는 무조건적이지만, 일정 부분은 현실적으로 그럴싸한 이유가 있으니까 발달하고 유지된다.


 제사가 우리가 잘 아는 형태가 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 장자상속이 보편화된 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려면, 조선 시대의 경제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조선은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재산은 토지와 노비라 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었다.


 토지 위주의 경제는 매년 재화를 창출하지만, 이 재화가 좀처럼 축적되지는 않는다. 물론 토지를 늘려나가는 방법이 있지만 그 또한 발달한 시장경제와는 차이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사는 재화를 분배하는 주된 수단이었다.


 제사가 잦을수록, 일가친척은 자주 모였고 식량을 얻었다. 종가는 재산을 상속받았기에 매번 젯밥을 제공해야 할 윤리적 의무가 있었고, 다들 모여서 먹고도 남아돌 정도로 음식을 해야 했다. 젯상에 올라가는 음식들은 전이나 적, 소채, 과일 등 어느 정도 보존성이 있는 음식이 많다.


 산업화 이전의 사회는 현대의 기준에서는 지극히 가난하고 먹을 게 없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종가의 제사는 수많은 일가친척들에게 모처럼 배불리 먹고 덤으로 전, 과일까지 좀 얻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편으로 명절의 차례가 제례의 형태를 지니게 된 건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본래 명절은 제사날이 아닌 잔칫날이었고, 차례는 단출하게 조상의 사당에 차를 올리는 정도의 예법이었다. 기뻐야 할 명절 아침부터 고인을 생각하며 침울해지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조선 말기엔 제사가 ‘우리 집안 이렇게 잘나간다.’라고 과시할 수 있는 척도였다. 그 결과 차례는 변질되었지만, 젯밥이 생긴다는데 별 불만을 가질 사람은 없었다.


 한국에서 장자상속 원칙이 깨진 것이 언제일까? 1989년이다. 무려 그때까지 한국은 장자상속법이 있었다. 또한 한국 사람들이 대체로 굶어죽을 걱정을 안 하게 된 것도 대략 그쯤이다. 제사는 극히 최근까지 존속할 만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그럴 만한 합리적 이유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급속도로 사라지는 중이다. 물론 지금은 과도기이게 수많은 사람들이 명절이나 제삿날마다 불만을 토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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