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궐 좀 재미있네요.

 

 개인적으로 둘을 딱히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정동영은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지도자의 자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정배에 대해서는 아예 별 생각도 감정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들이 이 나라의 답답한 양당제 고착을 흔들어줄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후안무치하고 사악한 달레반 파시스트들에게 일침을 가할 수도 있다고 일말의 기대를 가집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딱히 지지하지는 않지만, 미적지근하게나마 응원은 합니다.

 

 그들이 당선되어도 좋고,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돼도 좋습니다. 그들이 새민련 후보보다만 많은 표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진정성 없이 권력만을 탐하는 달레반들이 약간이나마 데미지를 입습니다.

 

 이미 동교동계는 새민련을 지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친노 및 486들이 해온 패악질이 또 한 번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요. 겉으로 보기엔 문재인이 지지율 높고 대세가 되어가는 것 같아도, 그 이면은 곪아터진 지 오래인 게 새민련입니다. 괜히 정동영, 천정배가 뛰쳐 나간 게 아닙니다.

 

 문재인은 지저분한 룰변경에 힘입어, 당원들의 지지가 아닌 여론조사를 토대로 당권을 잡았습니다. 이번은 그 첫 번째 검증무대입니다. 깨시스트들은 역시나 정동영과 천정배를 가혹하게 비난하고 있던데, 파시즘의 확산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정동영과 천정배는 애 좀 써줘야 합니다.

 

 많은 대중들이 달레반 깨시스트들의 상징조작과 언론 플레이에 속고 있습니다. 그 상징조작을 일부라도 파하려면, 일단은 친노세력이 야권의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라는 걸 좀 더 잘 증명해야 합니다. 지금껏 그 선택지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것은 손학규와 안철수였습니다만, 그들은 각자 대실수를 범하며 스스로 무너졌지요. 정동영이나 천정배가 그들과 같은 대안적 위치까지 자리매김하긴 어렵겠습니다만, 그들이 유시민식 몽니를 부릴 수 있는 정도의 위치만 올라가도 전반적인 정국엔 영향은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젠 치킨런이 남았습니다. 사실 저한테 가장 재미있는 시나리오는 관악을에서 새누리 오신환이 당선되고, 정동영이 2위를 하고, 새민련 정태호가 3위를 하는 동시에 변희재가 통진당 이상규한테도 밀려 꼴지를 하는 겁니다. 관악 주민들은 한번쯤 진지하게 지역을 위한 의원을 고를 필요가 있겠습니다. 순천 사람들이 그랬듯이요.

 

 전부터 이야기해온 건데, 박원순은 진정한 사고뭉치입니다. 그가 사고치고 다니는 걸 보면 광역자치단체장으로는 할 수 있는 거진 최대치의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저기 홍준표도 박원순에 비하면 제 보기엔 밀립니다.

 

 그는 이번 달 초 양천구에 쓰레기 500톤을 쌓아놓는 만행을 저지르더니, 도로교통 혐오자답게 결국 9호선 대란을 발생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깨시민 파시스트들이 박원순 변호하는 걸 보면 정말 기가 막힙니다만, 이미지뿐인 정치인을 뽑은 대가는 결국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9호선은 이미 예~전부터 콩나물 시루였습니다. 계획보다 운임이 낮았기 때문에 사람이 더 몰려들었지요. 공항철도 운임일원화 시점부터는 대한민국 공식 넘버원 지옥철이 되었고요. 그런데 박원순은 그렇게 낮은 운임을 강제하고 맥쿼리와 싸우면서도 9호선 증차에는 제대로 열의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질적으로 서울시민에 큰 손해를 가져다주는 재구조화만 했지, 시민을 위한 준비에는 진지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뻔히 이런 사태가 빚어질 건 예상되었는데 말입니다. 지금 서울시가 대응이라고 하는 것 중 하나가, 5대 혼잡 역에 구급차를 가져다두는 겁니다. 정말 멋진 해결책이죠. 증차는 내년 9월에나 된답니다.

 

 박원순의 이런 어이없는 행태는 한두 군데에서 발견되는 게 아닙니다. 근래엔 서울역 고가, 광화문 앞 도로도 없애버린다고 밀어붙이고 있지요. 작년엔 지하철 사고 났고, 안전에 쓰는 예산 줄인 것도 드러났고요. 그와 같은 정치인을 뽑으면 시민이 고생합니다. 심지어 그는 서울시내 도로 폭을 좁히자고까지 주장했었지요. , 그리고 맥쿼리랑 싸우면서 운임 가지고 온갖 착한 척은 다하더니만 이젠 또 운임 대폭 올리겠다네요? 깨시민 파시스트들은 평소엔 운임 조금만 올려도 입에 버블보블 물더니, 박원순이 올리니 착한 요금인상이라는 식으로 변호를 해주고 있고요. 정말 웃기지도 않아요.

 

 시민들도 바보는 아닙니다. 이런 짓이 누적되니 한때 1위 달리던 박원순 차기 대통령 지지율은 뚜렷한 하향세입니다. 사실 서울시장도 되지 않아야 했던 인물이지요.

 

 그러니 이 모든 게 오세훈, 정몽준 탓입니다. 오세훈이 그 바보짓만 안 했어도, 안철수가 양보만 안했어도, 정몽준과 그의 아들이 그런 멍청한 짓만 안 했어도 이런 사단은 안 났습니다.

 

 물론 9호선은 당연히 서울시민만 타는 게 아닙니다. 주변 다른 도시민들에게까지 민폐인거죠. 그리고 아직 9호선의 진짜 헬게이트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20173단계 개통되고, 마곡지구가 개발되고, 2018년에 김포도시철도가 완공되면 정말 끝내줄 겁니다. 과연 박원순이 그때를 위해 제대로 준비하고 있을까요?

 

 박원순의 후임 시장은 아마 적잖은 고생을 해야 할 겁니다. 박원순이 해온 정치쇼 같은 거 말고, 진짜 고생을 해야 할 거예요.

 

 근래 인권헌장 사태도 있고, 북아현숲 사태도 있다 보니 박원순의 실체 없고 광적이던 인기도 한풀 꺾이는 감은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박원순은 여전히 차기대선후보 여론조사 1위를 달리는 중이며, 그를 변호하는 (실드친다는 속어가 더 어감 상 어울리는 듯하기도 합니다.) 깨시민들이 제법 보이기도 합니다.

 

 말과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꿔 인권헌장을 억지로 막아버린 행태라거나 북아현숲을 불법적으로 개발한 사태 등은, 사실 저로서는 박원순이 원래 그런 사람인 건 잘 알고 있었기에 크게 실망할 건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것을 둘러싼 시각과 그를 변호하는 사람들의 태도 및 심리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사태에서 박원순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역시나 가치보다는 진영을 우선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사실 지난 오랜 세월동안 쭉 강성 야권 옹호론자 및 실 야권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던 태도입니다. 여기엔 야권은 어쨌든 간에 선이라는 무조건적이고도 이분법적인 관념과 망상이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진영논리를 우선하는 깨시민들은 결코 가치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처음 그들이 새누리당(과 그들이 생각하는 그와 연관된 모든 범보수) 세력을 적대하게 된 데는 가치의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더 이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깨시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 편’, ‘니 편입니다. 내 편이 집권을 해야 우리 사회가 더 잘 된다는 종교적 광신이 강합니다. 그 내용에 대한 성찰은 물론 현저하게 부족하고요. 그러다보니 결국 야권 정치인들이 정의’, ‘자유’, ‘평등’, ‘행복’, ‘신뢰같은 보편적 가치를 어길 때도 광신적인 비호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주시하고 욕하는 상대편과 똑같아지는 것이지요.

 

 저는 한국정치 문제의 핵심이 정치철학적 가치가 아닌 권력을 과도하게 우선시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이는 소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문제이며, ‘민주정 수립 이후의 성공 또는 실패문제입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행복과 안녕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권력을 우선시하는 건 정치인들과 강경한 정치 지지자들이 똑같습니다. 특히 이 면에서 민주당계는 매우 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의로운 척 하다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고, 권력 추구를 위해 국민의 권익을 등지는 게 워낙 일상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는 민주정의 실패를 불러옵니다. 당장 이번 인권헌장 사태만 봐도, 박원순 같이 형편없는 정치인의 권력욕 하나로 자유민주정의 자유주의적 가치와 민주적 절차 모두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박원순이 정의, 자유, 평등, 행복, 신뢰의 가치를 모두 어긴 것은 일단 이 사태의 전말을 아는, 상식적인 모두가 동의하리라 봅니다. 또한 박원순은 차별에 반대한다.’라는 세계인 모두의 보편적 가치를 고작 선언하는 절차마저도 자신의 권력을 활용하여 독단적, 독재적 판단에 의해 부당하게 무너뜨렸으며, 자신의 공약과 기존에 한 말마저도 아무렇지도 않게 뒤집어 버렸습니다. 이는 보편적이고 중요한 가치는 물론 민주적 절차마저 무너뜨린 것으로, 쉽게 표현하면 반민주적 독재행위를 한 것입니다.

 

 선출된 정치인은 국민의 정치적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자로, 그 위임받은 정치적 움직임을 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러한 인권 헌장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박원순을 찍었을 것입니다. 공약도 했고, 착한 척 워낙 한 박원순의 이미지도 있었으니까요. (물론 저처럼 그런 조작된 이미지와 거짓말에 속지 않은 사람도 소수 있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박원순은 자신의 미래 권력 획득을 위하여, 극단적인 일부 종교단체의 의견을 우선 수렴하여 독재를 행하였습니다. 이는 박원순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배신한 것이며, 또 한 번의 대표적인 민주정 실패 사례로 활용해도 될 사건입니다.

 

 박원순이 저럴 수 있는 이유 역시 이야기해야 하겠습니다. 저럴 수 있는 건 저래도 깨시민 파시스트들은 지지해주고 변호를 해 주며 또 찍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핏하면 새누리 콘크리트를 운운하며 욕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굳고 단단하며 악질인 콘크리트는 깨시민 콘크리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일관적으로 자유민주정을 부정하며, ‘위대한 영웅과 함께 하는 대중 독재인 파시즘을 꿈꿉니다. 그들이 자신과 다른 의견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고, 그들이 파시스트라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박원순은 그러한 파시즘 지도자로 매우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정치인에게 가치를 요구하고, 민주적 절차를 준수하길 요구해야합니다. 피 흘려 힘들게 세운 민주정은 지금까지 그다지 성공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앞으로 잘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유, 정의, 평등, 행복, 신뢰를 추구해야합니다. 고작 선언만을 하는 데도 이래서야 되나요. 광신 종교단체 하나 어쩌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이 앞으로 무슨 대단한 좋은 일을 하겠습니까.



비정상회담 폐지론과 대한민국 파시즘

사회 2014. 11. 2. 17:20 Posted by 해양장미

 신해철의 느닷없는 타계로 인해 조금 덜 회자되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만, 지난 월요일 방영되었던 JTBC프로 비정상회담BGM으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틀은 것으로 인해 일련의 사회적인 파장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파시스트들이 궐기한 또 한 번의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한국 파시즘이 그 세를 잃지 않고 유지되는 중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이 사건은 대한민국 파시즘의 개성적인 특징이 드러난 경우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선 개인적으로 비정상회담의 본 편은 보지 못했으나, 기미가요 BGM에 대한 사견을 밝히자면 큰 문제 없다입니다. 한국에서 기미가요를 트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90년대에는 모든 일본 음악을 트는 것이 불법이었으나, 그러한 반민주적인악법은 김대중 대통령의 치세에 사라졌고 이제 기미가요를 트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물론 역사적 관점에서 한국인이 기미가요를 싫어하는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각국의 국가를 정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권리입니다. 그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 또한 해당 국가의 몫이고요. 한국은 일본 국가가 기미가요인 것에 대해 항의를 하고 자국에서 그것을 공식적으로 방송하지 못하도록 규제할 수 있으나, 그런 규제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국가(national anthem)는 대체로 폭력적이고 국가주의적인 내용이 많고 (우리 한국 애국가 같이 평화로운 가사는 좀 드뭅니다), 나라끼리 역사적으로 악연을 쌓기 쉬운 만큼 특정 나라의 국가(national anthem)에 악감정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타국에 대한 악감정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미 한국은 기미가요의 방영 등을 금지하지 않기로 정한 상황입니다. 이것에 대해 각자가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현 시점에서 이는 세계적 표준에 부합하는 우리 사회의 규칙이며 사적으로 이 규칙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일단은 규칙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규칙을 갈아엎고자 하더라도 일단은 규칙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또한 '비정상회담'은 모토 자체 중 하나가 세계인의 화합이기도 하고요.

 

 저라고 일본이 기미가요를 국가로 쓰는 것에 대해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 내에도 류큐인, 자이니치 등이 있는 만큼 기미가요를 국가로 삼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이 많고, 개인적으로는 기미가요를 국가로 제정하는 일본이 대단히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 내 문제입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항의를 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내정간섭을 하긴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처한 진짜 문제는 우리 국가 내부의 파시즘입니다. 일본이 기미가요를 국가로 쓰건 어쩌건, 그건 기분이 나쁜 정도지 한국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의 파시즘은 그런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공격성과 무관용으로 대표되는 이런 반민주성 및 극우성은 우리 앞에 놓인 미래를 진짜로 어둡게 만듭니다.

 

 저 역시 어떤 사람들이 기미가요를 방송한 것에 대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할 사람이 나올 것이라는 것도 이해합니다. 비록 그런 행위가 극우적인 행위라는 것은 이야기 해야겠지만요. 그러나 사과를 넘어 폐지를 요구하며 맹렬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은 파시즘입니다.

 

 한국의 이런 파시즘은 비단 이번만의 일이 아닙니다. 황우석 줄기세포와 심형래 디워사태는 한국 파시즘의 대표적인 사례들이었습니다. 이젠 대다수의 사람들이 황우석 사태를 흑역사로 받아들입니다만,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된 문화 및 대중심리 구조가 크게 개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편으로 이러한 한국 파시즘의 현장에는 언제나 깨시민들이 있었는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번 본 블로그에서 이야기해왔듯, 파시스트들이 자칭타칭 진보로 불리는 게 21세기 한국의 너무나도 불행한 자화상입니다.

 

 비정상회담 제작진이 기미가요를 튼 것에 일본제국주의 찬양이나 식민통치에 대한 찬양의도가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 기미가요가 뭔지, 어떤 건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모두가 알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알아봐야 기분 나쁘기만 한 일이고, 딱히 그 이상의 현실적인 문제는 없는 사안이니까요. 또한 심지어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제작진에게 설령 일제를 찬앙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러한 과격하고 공격적인 인민재판은 자유민주정체국가의 국민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적어도 바람직하지는 않지요.

 

 만약 TV에서 기미가요 트는 게 보고 듣기 싫으면, 그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자고 주장하고 행동에 나서면 됩니다. 물론 그것은 다분히 극우적인 사고방식이고 조처라는 건 미리 이야기해야겠고, 저는 그러한 자유민주정의 적들에게 관대한 태도를 가질 생각이 없기도 합니다. 자유민주정의 핵심 사상인 관용은 오직 불관용만을 적대합니다.

 

 또 이야기해야 할게, 관용 없이 공격적으로 구는 파시스트들이 과연 특별히 애국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걸까요? 전 그건 아니라고 거의 확신합니다. 그보다는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공격할 만한 대상을 찾은 것에 가까울 테지요. 세금 조금 더 걷는다고 투덜거리고, 조금만 나라가 마음에 안 들어도 이민 가겠다고 하던 그 사람들이 가장 파시스트같이 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국과는 거리가 먼 불만분자들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저는 이 깨시민 파시스트들이 TV에 탈북자가 나올 때 북조선 애국가 (제목은 한국 국가와 동일하게 애국가입니다만, 다른 곡입니다.) BGM으로 나온다면 결코 기미가요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리라 예상합니다. 실제 북조선 애국가를 트는 건 기미가요와는 달리 불법이 될 확률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저야 북조선 애국가를 틀건, 기미가요를 틀건,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과 연합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쳤던 중국의 국가 의용군 행진곡을 틀건 그것이 우리의 이 사회와 자유민주정체에 대한 명백하거나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각자의 자유로 일단은 존중한 후, 그 뒤에 제 판단과 주장을 펼칠 것이지만 말입니다.

 

 파시스트들이 유독 기미가요에 심각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유는, 파시즘 심리에는 극우적 민족주의가 반드시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한국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우익 민족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고, 문화 또한 집단주의적이기에 파시즘에 물들기 쉽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고 중용의 미덕을 지킬 필요가 있으며, 대화와 타협을 우선해야 한다는 교육도 같이 받았습니다. 이 사회가 잘 돌아가려면 무엇이 우선일까요?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기미가요가 방송에서 가끔 나온다 해도 별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파시즘이 한국에 매번 넘실대는 건 이야기가 전혀 다릅니다. 뭐가 진짜 문제인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또한 일제시대에 대한 역사교육도 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좀 더 잘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일제시대는 단순한 독립운동의 시대도, 일본이 단순히 미쳐서 한국을 수탈하던 시대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도 사람들은 각자 생존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했고 그런 각각의 삶들이 모여서 역사가 되었습니다. 전체주의집단주의민족주의국가주의적 사관과 교육 체계는 그 시대의 실상을 전혀 알려주지 않습니다. 실제 파시스틱하게 구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매우 편향적인 정보만을 취합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저는 이번 사건에서 한국 파시즘에는 한국 특유의 문화적 결함이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매우 계승되기 쉬운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국의 여러 요건이 파시즘이 발달하기에 제법 좋은 토양이 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강화되었습니다. 실제 파시즘은 여러 국가에서 융성했었는데, 각 국가마다 개성적인 모습으로 전개되곤 합니다.

 

 다행히 한국 파시즘은 아직은 초기단계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화될 수 있는 여지는 있고, 심화되고 결국 집권을 해낸다면 매우 나쁜 결과가 있을 것이라 봅니다. 미리 무엇이 파시즘인지를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파시즘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관용의 적이 관용을 압도하게 되면, 그 사회는 매우 쉽게 집단화되고 결국 파시즘이 꽃피기 쉬운 조건이 됩니다. 관용과 이해가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를 만들려면 애국의 탈을 쓰고 완장을 차고 극우적 관점으로 타인을 공격하는 게 파시즘임을, 그리고 파시즘이 얼마나 위험하고 왜 나쁜지를 보다 더 널리 알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강성 야권 및 깨시민 파시스트들의 큰 사상적 문제 중 하나로 사회갈등 자체가 불러오는 위험성을 간과하는 경향을 꼽고 싶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절대선의 위치에 놓고, 선한 자신들이 권력을 잡아야 만 한다고 규정하는 가운데 그것을 위한 모든 사회갈등은 민주주의는 본래 이런 것이다라는 식으로 합리화시킵니다.

 

 그들이 대한민국 정치판의 한 주류로 부상한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보여온 태도는 끊임없는 갈등의 촉발과 공격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두를 공격하는 가운데 온건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은 침묵하게 되었고, 시민 사회와 언론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많은 것이 황폐화되었고, 황무지 위에 극단적인 반대세력이 출몰하였습니다. 갈등은 갈등을 부르고, 악은 악을 부릅니다. 세상에 서북청년당 재결성이라니, 강성 야권의 업적은 정말 대단합니다.

 

 돌이켜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을 해치려 한 자들도 용서하고, 사회 통합을 위해 애썼습니다. 노무현 정권이 자신의 세력에 칼을 꽂았을 때도 그는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의 그러한 정신을 이은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서북청년단 재결성 같은 소리가 나오는 건 가볍게 보면 안 됩니다. 서북청년단은 역사적인 비극이라 할 만한 범죄 집단이고, 그런 집단이 부활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기준에서 용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민주적인 관점을 떠난 것입니다. 민주정체가 아니라 귀족정이나 왕정일지라도 그런 집단은 용인해서는 안 됩니다

 

 새누리당은 서북청년단의 재결성을 적극적으로 막고, 자유민주정체 국가의 집권여당으로서 품위를 지키고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꼬인 정국을 쉽게 돌파하기 위해 악의 손을 잡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저는 현재 새누리당이 제정신과 균형 감각을 상실한 면이 있다고 봅니다. 서북청년단을 결성하려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그 배후에 새누리당 차원의 지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뭘 만들고 뭘 어째도 어지간해서는 별 사고는 못 치겠지만, 결코 현명한 방식이 아닙니다.

 

 만일 서북청년단 같은 게 진짜로 활동하면 강성 야권과 깨시민들도 더더욱 과격한 언행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파시즘적 속성도 다음 단계로 본격적으로 진화해 사회 갈등은 더 첨예해지고, 보다 위험한 사회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집권여당은 국민을 통합시키고 평화로운 사회 분위기를 조성할 의무가 있다는 걸 상기해야합니다. 만일 그런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면 새누리당의 미래도 결코 밝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의 한국은 민주정체가 아닌 입헌주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입헌주의가 전제하는 시민적 자유와 정의, 인권을 추구하는 정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민적 자유란 무엇이든 해도 되는 무질서함이 아니고, 서로의 권리와 시민권을 존중하고 나의 권리와 시민권을 지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서북청년단의 재결성은 입헌적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체제에 대한 반역입니다.

 

 사실 서북청년단 재결성 같은 어이없는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시민 각자에게 입헌적 질서의 혜택이 충분히 체감되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강성 야권은 이명박 집권 이후 정권에 대한 반대만을 반복하며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지 못했고, 이번 국회에 들어서는 국회선진화법과 더불어 아예 입법마비를 일상화시키는 가운데 시민들에게 큰 고통을 전가하였습니다. 또한 야권에 보다 가깝던 광범위한 시민 사회와 진보 정치권은 민주당계 정치권에 포섭되고 반MB에 매몰되어 와해되다시피 하였고, 노무현 사후 야권 언론도 너무나 변질되어 언론으로서 전혀 제 기능을 못하고 있습니다. 87체제는 실패했고, 신자유주의와 IMF, 글로벌 금융위기 등으로 인한 침체와 불황은 우리의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악조건은 시민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쉽게 합니다. 강성 야권과 깨시민들은 이러한 악조건의 조성에 너무나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앞으로 더 큰 비극이 출현할지, 아니면 우리 사회가 위기를 이겨내고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을지는 하기 나름입니다. 계속 나쁜 선택과 사건들이 이어진다면, 우리는 또 한 번 역사에 비극적인 기록을 쓰게 될 지도 모릅니다.

 


 본 사건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므로 본문에서 딱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아직 소식을 못들은 분들은 검색하면 바로 나오니 기사를 찾아보세요.

 

 이 사건에 대한 강성야권의 전반적 반응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체험 파시즘의 현장.’ 진짜 CCTV가 영웅이고 정의입니다. CCTV 없었으면 피해를 당한 분들은 끔찍한 사태를 모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 사태가 얼마나 지저분하고 사악한지에 대해서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것입니다. 이런 비열함과 이중잣대는 그들 인성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제가 지난 세월호 특별법 관련 포스트에서 이야기했듯, 애초에 세월호 사건은 이런 식으로 확대될 일이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키운 장본인들이 왜 키웠을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본 사건은 도덕, 윤리, 정의, 선함의 문제입니다. 세월호 단원고 피해자 유가족 대표단과 김현 의원은 대단히 악질적인 범죄를 저질렀고, 권력을 이용해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며 깨시민들을 포함한 강성 야권 지지 세력은 또 한 번의 이중잣대 내로남불식 여론몰이를 펼쳤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인터넷 파시즘의 현장을 딱 하나만 링크합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78711

 

 다행히 본 사건의 경우 피해 대리기사의 생명엔 지장이 없는 것 같지만, 만일 잘못되면 죽거나 영구적인 장애가 남을 수도 있는 게 일대 다수의 집단폭행입니다. ‘의도라는 면에서만 본다면 이 사건은 세월호 사고보다 훨씬 더 사악합니다.

 

 많은 분들이 본 사건을 통해 실망감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실망감은 저들의 인성과 의도를 잘못 파악한 데서 기인합니다. 생각 없이 광신적으로 한쪽편만 보고, 한쪽편만 드는 파시스트들에 대한 사회적인 주의와 경계가 필요합니다.

 


 안철수의 몰락과 함께 야권의 몰락은 선명하게 가시화된 현상이 되었습니다. 안철수가 야권의 몰락을 부추겼다고 할 수는 없고, 야권은 이미 몰락했는데 안철수의 인기와 그 기대가 잠시 몰락의 가시화를 덮어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저는 본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야권의 문제를 짚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가 한 이야기들은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야권은 수십 년 동안 굉장히 복합적인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더러 지면도 많이 필요한 일입니다. 한편으로 실제 야권의 주 지지층은 20~30대인데, 평균적인 20~30대가 현재의 야권이 왜 이리 지리멸렬한지를 알기는 좀 어려운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최근에 야권에 편입되었기에 편향적인 자료만을 보고들은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현 시점에서 야권이 처한 가장 큰 위기 요인을 사상과 인물로 봅니다. 이 중 인물 - 인재 수급 - 의 문제는 몇 번 이야기해왔는데, 사상의 문제는 그들이 민주정 지지자가 아니다라는 표현 외엔 아직 충분하게 이야기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걸 설명하려면 무엇이 민주정인지, 무엇이 민주적인 것인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사실 여러 번 이야기한 것이지만 한국은 민주정이 자생적으로 발달한 게 아니고, 이승만에 의해 이식된 후 그것이 규범화된 민주정 발달 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국인의 평균적 기층 심리엔 본래 민주적인 것과는 다분히 거리가 먼 요소들이 적잖게 포함되어있고, 더 나아가 거의 예외 없이 민주정에 대한 이성적, 정서적 이해가 부족합니다. 야권 구성원 및 지지층만 이렇다는 게 아니고, 이 나라 사람들이 대체로 다 그렇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는 양쪽의 지향 방향에 있었습니다. 현 여권의 성향을 단일하게 규정하는 것은 어려우나, 여권은 대체로 서구적 근대성과 그 강함을 더 동경하였고 미국이나 서유럽의 많은 것들을 닮으려 애썼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유민주정체를 채택한 국가였지요.

 

 여권이 수용한 서구적 가치는 교회를 통해 전파된 면도 많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유주의가 전파되었고, 이 자유주의적인 경향은 민족과 국가, 집단을 우선하던 사회 분위기에서도 특유의 사익 추구 성향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개인성입니다. 여권의 권위주의 이면에는 개인주의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여권의 개인주의가 다분히 이기주의적이긴 합니다만, 그것이 결국 여권을 어느 정도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민주성은 나의 입장 및 이해관계와 너의 입장 및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만일 국가 같은 특정 사회가 단일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 나와 네가 모두 동등한 이익을 누린다면 민주성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사실 많은 시민들은 내 분야를 벗어난 것에 대한 이해가 심각하게 부족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정체는 서로 다른 입장, 이해관계, 사고방식을 조율할 수 있습니다. 선출권력의 기한 자체를 제한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민주정의 장기적인 성공확률은 다른 정치체제에 비해 높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은 단순하게 금전적인 것이 아니고,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것 모두를 포함합니다.

 

 이렇게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서로간의 반복을 줄이며 타협을 해 나가는 세월이 쌓인 결과 결국 여권은 민주정을 체화하였습니다. 비록 보수적인 꼰대에 권위적이긴 하지만, - 아마 다른 나라를 보고 배우지 않았다면 그런 문화에서 자체적으로 민주정이 탄생할 수는 없었겠지만 - 그것이 민주정의 틀을 벗어나는 경우는 이제 별로 없습니다. 이는 사실 그 나름대로의 공화정 탄생 과정이나 다름없습니다. 생각과 감정이 따르지 않더라도 습관에는 이미 민주성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권은 좀 다릅니다. 본래 민주적인 기반이 없고 권위적이던 건 여야가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여권이 서방 세계의 근대성을 향해 진보하는 동안 현 야권의 기반이 되는 운동권 세력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 심지어 주체사상에도 많은 눈길을 줬습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공산권 치고 독재 안하는 나라가 없다는 겁니다. 공산주의라는 게 나의 판단이 이 사회에 최선이며, 그 반대자는 악이라는 전제를 깔거든요. 합의가 바로 안 되는 악에는 강한 폭력성을 용인하는 게 공산주의이기도 합니다. 또한 운동권은 미제와 각을 뜨자면서 상당히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보이며 본인들을 마치 독립운동가의 후예인 양 여기기도 했습니다.[각주:1] 당연히 이런 과정에서 개인성이나 민주성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다만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충분한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 게 야권의 잠재의식이라는 건 차후에 기회가 되면 논하겠습니다.

 

 결국 매 순간 여권이 지금 어떻게 해서 권력과 이권을 얻을(지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동안 야권은 우리가 옳고, 우리가 정당하니 이길 때까지 싸우자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다르기 마련이고, 또한 아주 쉽게 내가 옳고 남은 그르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성향이 제어되지 않으면 꼰대 답정너가 되는 거고요. 더구나 정치적으로 이런 부류는 이익에 초연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로 간에 대화와 타협이 있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많이 발생합니다. 또한 사람이 저렇게 생각하더라도 어쨌든 본능적으로 내 이익은 알음알음 챙기기 마련인데, 주변 사람 이익은 진짜 안 챙겨주다 보니 결국 인망을 잃기 쉽습니다. 괜히 여권보다 야권의 분열이 잦은 게 아닙니다.

 

 결국 민주정이라는 건 야권에겐 일종의 규범이자 정의일 뿐입니다. 민주정 그 자체, 정확히 말하면 국민주권론에 기반한 87 대의민주정 체제를 야권은 진심으로 수용하고 그것에 충실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단 민주정과 규범(도덕), 그리고 민주정과 정의는 서로 온전히 일치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장기적으로 민주정은 사회정의에 일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그게 단기적으로도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인 규범과 민주적 가치 및 결과는 충돌할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야권의 본질적인 문제는 이런 사상의 모순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데 있습니다. 심지어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지요. 뭐가 민주적 문제인지 뭐가 정의인지 어떤 게 규범적 문제인지도 제대로 이해를 못 하고, 더 나아가 누가 바른 말을 해도 인정을 못 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입니다

 

 위에 이야기한 것들을 조금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여야 둘 다 모두 자생적으로 민주정을 발달시킬만한 정서적문화적관습적 기반은 원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권은 자유민주정체를 도입한 국가들을 모방하는 가운데 각자의 이익을 조율하며 민주정을 체화시켜 나간 반면, 야권은 민주정과는 거리가 있는 쪽에 눈길을 주면서 급진적으로 각자의 생각을 내세우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 수위는 스스로 문제 진단도 안 되는 정도고요.

 

 이에 대한 제 결론은 현재의 야권은 가망이 없다는 것입니다만, 그래도 이유는 알고 문제를 파악해야 향후 야권의 빈자리를 채울 다음 세력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여권처럼 지름길을 가지 못한다면 자생적인 사상의 발전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지지자들을 포함한 야권이 가장 우선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은 이 지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가장 온건하고 느슨한 야권 지지자들의 몫이라 생각하고요. 중도층과 새누리당의 느슨하고 온건한 지지자들과 연대할 필요가 있기도 합니다. 정치세력을 단 둘로 나눈다면 좌/, 진보/보수가 아니라 온건/과격으로 나눠야 한다는 게 제 사견입니다.

 

 그럼 야권이 어떤 매커니즘으로 반민주적이 되는지를 살펴봅시다. 야권의 사상적 뿌리를 살펴보면, 사실 야권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주의적인 정서를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보다 더 (융화된 형태나마) 서구 지향적이었던 여권 지지층과 약간 대조적입니다. 본 블로그에 여러 번 이야기했듯 경제정책도 야권이 더 보수적이고요.

 

 지금까지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야권 식 보수주의는 주로 민족주의적이고 전통적 가치라고 판단되는 것을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처음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청년층에게 야권이 더 지지를 얻는 주된 이유로 이것을 꼽아야 합니다. 아주 기본적이고도 교과서적이고 성장 과정에서 체화된 윤리적 가치관을 야권이 더 잘 만족시켜주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야권이 더 윤리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권 지지층은 대체로 야권 지지층과는 다른 유형의 윤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방식이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학적 연구 결과로 증명되었고, 그렇기에 야권 강성들의 말도 안 되는 선악 프레임이 현실에서 통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서 위에 야권은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민주정을 도덕적 가치로 덮었습니다. 여기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데 민주정체, Democracy~ism이 아닙니다. 이 번역과정에 문제가 있어서 민주주의로 번역한 게 많은 이들에게 문제를 야기했습니다만, Democracy는 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며 정치 시스템을 지칭하는 어휘입니다. 본래 이 민주정체는 중세 이후 상공업자들의 자치도시들이 시행하던 통치형태였는데 - 괜히 민주정체 인민을 '시민'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 근대에 민주정체가 근대국가단위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리퍼블리카니즘(공화주의)과 리버럴리즘(자유주의)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보다 근현대에 어울리는 형태로 점차 체계화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민주정은 정치 시스템으로 어떠한 가치 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니고,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추가적인 설명을 위해 과거로 돌아가 유럽 근대사를 살펴보자면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정에 반대했고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정에 찬성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시민권이 보편적으로 확장된 민주정을 지지했습니다. 저 때 보수주의자들이 민주정에 반대한 건 민주정이 보수적 가치를 훼손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회주의자들이 시민권의 범위를 확대해야한다고 생각한 건 그것이 사회주의 구현에 이득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민주정의 의미에 대해서도 바른 성찰을 해낼 확률이 높습니다. 민주정은 정의도 자유도 공공선도 도덕도 평등도 번영도 아닙니다. 그런데 야권 세력은 예로부터 민주정을 저런 가치들과 혼동하였고, 교조화시켰으며 그 흐름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나쁜 결과를 낳았고 지금도 낳고 있지요.

 

 결국 민주와 정의, 도덕을 혼동한 멍청한 야권은 민주성의 확대 그 자체를 선하고 옳은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김대중이 대통령을 하던 시기까지는 그래도 리더가 있고 조직이 있다 보니 이 멍청함이 수습 불가능한 문제가 되지는 않았는데, 이후 당내-직접-참여 민주주의 등이라 부를 수 있는 망상에 가까운 시도들이 야권에서 끊임없이 시도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 문제를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일단 우리가 추구하는 각종 가치들은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며, 한 가치를 극대화시킬 경우 다른 가치를 침해하는 게 많습니다. 본래 세상이란 균형이 필요한 것이고, 그 균형이 크게 어긋날 경우 파괴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는 마치 큰 기압차가 폭풍을 불러오고 큰 전위차가 벼락 등의 방전현상을 만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들 역시 극단화될 경우 필연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정의 VS 자유, 평등 VS 자유, 발전 VS 평등, 도덕 VS 자유 등등들 처럼요.  더 상세하게 들어가면 너와 나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정의에 대한 인식이 다르며 도덕 관념 또한 다르기에 결국 갈등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가치가 아닌 체제인 민주정을 극단적으로 만들 경우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하면 결국 민주정의 민주성 그 자체가 극단화되어 보편적 가치들을 모두 잡아먹어버립니다.

 

 민주성은 권력을 분산하고 가장 작은 단위에까지 권력을 부여하며, 외부로 권력을 나눠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극단화되면 결국 아무런 유의미한 권력도 남지 않고, 소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남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여기서 끝나지 않은 것이, 민주성은 어떠한 특정 사회에는 구현할 수 있더라도 우리는 다양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사회의 권력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권력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연성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내가 어떤 다른 사람 A와 무인도에 표류되었는데, 내가 그 사람보다 훨씬 더 사냥과 채집을 잘 하고 각종 생존 기술에 능하다면 당연히 내가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에서 권력 자체를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민주성의 극단화는 그것을 추종한 집단을 소멸시킬 뿐입니다. 난방 뜨습게 하려다가 집 태우고 타죽는 격이죠.

 

 물론 이런 설명은 현실적으로 민주당계에 발생한 문제들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합니다. 비리와 부정, 무관심이라는 요소들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직접 민주주의 요소 도입한다고 모바일 투표 하게 되면 결국 그거 죄다 돈 선거에 부정선거 됩니다. 당내 민주주의가 심해지면 결국 나오는 결론은 온갖 암투와 음해를 동반하는 극단적인 계파투쟁이고요. 참여민주주의에 진성당원제 하겠다던 모 유망했던 정치인은 결국 정당 2번 깨먹고 평당원들 부역시키고 남의 돈 먹튀한 후 부정선거를 저지른 후 은퇴했지요.

 

 그럼 다음 차례로 깨시민들의 문제를 살펴봅시다. 사실 깨시민들은 사상적으로 야권 강경파들과 맥락을 같이 하기에 중요하게 살펴야 합니다깨시민들의 일차적인 문제도 민주정과 정의, 도덕을 구분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도덕을 곧 민주성이라고 착각하고는, 그것을 강압적으로 타인에게 강요하는 데서 파시스트로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깨시민들이 이런 착각을 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도 있습니다. 민주정이라는 시스템을 구현하려면 룰이 필요한데, 이 룰을 상대 쪽에서 어겨가면서 권력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룰을 지킨다는 건 일정 이상 도덕의 문제고, 이 연장선상에서 도덕과 민주성을 혼동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룰은 사실 양쪽 모두에서 어깁니다. 원래 사람 심리가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인 면이 있는데 깨시민들은 성격적으로 이 성향이 강합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는 그리 이상한 건 아닙니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 발생하지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나 도덕을 타인에게 제안하는 건 인간이 사는 과정에서 정당하고 당연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민주적인 방식은 설득, 제안, 타협, 협상, 인정, 이해, 보상, 존중 같은 것들입니다. 위에서도 계속 이야기했듯 민주정은 일종의 툴이고, 위에 나열한 방식들은 이 툴의 바람직한 세부 툴입니다. 비유하자면 민주정은 현대적인 공구 박스고, 저런 방식들은 좋은 공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깨시민들은 저렇게 민주적인 방식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상대를 매도, 폄하하고 권위적으로 윽박지르면서 이게 먹히지 않을 경우 추방하고 정신 승리하는 야만적인 방식을 씁니다. 그들은 민주정과 민주성에 대한 본질적 인식 및 이해 자체가 거의 전무하며, 그러다보니 자신들이 뭘 하는지도 모릅니다. 실제 그들의 행태는 고대 씨족사회의 전투적이고 배타적인 사람들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도덕과 정의는 있습니다. 원시인들에게도 있습니다. 즉 깨시민들은 민주정이라는 공구 박스는 근사해 보여서 그걸 비슷하게 만들어 들고 다니지만, 그 안에 스패너와 드라이버 및 윤활유 대신 돌도끼와 화살촉을 넣고 다니는 셈입니다. 대조적으로 새누리당 주류는 가죽 주머니에 돌로 만든 스패너라도 넣어 다니는 셈이고요.

 

 원래 세상 모든 강경파들이 자신들이 정의요 선이요 도덕이라 생각합니다. 무장 테러 단체건 독재자건 파시스트건 마찬가지입니다. 본질적으로 민주적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그 언행 양식과 시스템에 따른 차이입니다. 그리고 깨시민들의 사고방식이나 언행은 그 어느 구석도 민주적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들을 제거 대상으로 생각하고 배제하고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이 그들을 지배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들은 같은 시민권을 지닌 타자의 선택을 존중하고 결과를 인정하며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말하고 설득하려 노력하는 민주 시민의 기본적인 태도가 전무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 엘리트이거나 충분히 전문적인 것도 아닙니다. 민주와 정의도 구분 못할 만큼, 그리고 정의와 도덕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도 거의 없을 정도로 반지성적이지요. 결국 그들 또한 대중(Demos)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인식 속에서 그들은 특별히 깨어 있는대중입니다. 이런 전반적인 특성은 파시즘과 상당히 유사하지요.

 

 그런데 정말 우스운 건 거의 절대 다수의 깨시민은 초기 파시즘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고, 자신들이 파시스트라고는 상상조차 못하며 실제 적대세력을 파시스트로 낙인찍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문제들은 단순히 인터넷 게시판 깨시민들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진짜 야권을 구성하는 주요 인물들에까지 이어집니다.

 

 사실 그러니까 선거만 하면 지지요. 아는 것도 없고 생각도 없는데 오만하고 폭력적이거든요. 그래서 종종 생각 있는 사람들이 중도적으로 온건하게 가야한다고 주장하고 나서기도 하는데, 그러면 강경파가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서 선명야당론을 내걸고 더 싸워야 한다고 우깁니다. 그렇지만 타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강경함으로 민주정에서 어떻게 이기겠습니다. 결국 지고 국민이 멍멍이 새끼라고 울부짖는 게 매번 반복될 따름이지요.

 

 어차피 이제 강경하고 무식한 야당과 깨시민들의 수명도 다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워낙 배타적이고 오만하고 권위적이다 보니 사람이 들어오지 않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는 가운데 그 권력의 공백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해질 것입니다. 물론 그 무언가는 기존의 야권 같아서는 안 됩니다. 자유, 민주, 정의, 도덕 등에 대한 통찰과 경제, 사회문제, 평등, 문화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설득력을 갖춘 정당이 설립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들은 과격하고 무식한 정치에 환멸을 느낀 지 오래고, 새 희망으로 안철수를 잠시 밀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안철수는 끝났고, 이젠 다음 희망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다음에 누군가가 성공하려면 현 야권의 문제를 먼저 되짚어봐야 합니다.

 


  1. 그래서 성공한 운동권은 캐딜락이 아닌 벤츠를 탑니다. [본문으로]

 언제나 깨시민들의 패턴은 같습니다. 선거에서 지고, 그러고 나면 잠시 멘붕하고, 멘붕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개론을 소리 높여 외칩니다.

 

 그나마 온건하고 현명함이 남아있는 야권 지지자들은 슬슬 이런 깨시민의 언행 패턴이 자신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닫는 것 같습니다만, 깨시민들을 말리는 건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의식은 근본적으로 민주정을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보지요.

 

 깨시민식 국개론 말마따나 국민(수준)이 다 큰 강아지라 올바른 정치적 선택을 할 능력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논리적인 결론은 간단합니다. 투표권 박탈하고 민주정 그만 해야죠. 제대로 선택 못 할 사람에게 정치적 선택권을 주면 나라가 망할 거 아닙니까? 특히 양당제 현실에서 깨시민들 말대로라면 새누리당은 집권할 자격이 없는 부도덕한 정당이니 당연히 민주당계가 계속 독재해야죠.

 

 깨시민들이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명백합니다. 정리해보죠. 그들 기준에 안 맞는 사람들의 투표권은 박탈하고, 그들의 기준에서 올바른선택능력이 있는 사람들만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계속 해먹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비아냥이 아니고 그들이 말하는 방식의 논지를 계속 전개시켜나가면 이런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요? 그들은 남들이 민주주의가 옳다고 하니까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민주주의라 써진 간판을 들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선거 결과가 마음에 안 들어도 국개론을 펼칠 수 있는 민주정 지지자는 없습니다. 국개론은 민주정의 전제 조건을 부정하는 독재자나 제국주의 외세의 논리입니다.

 

 게다가 백날 말하듯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사상도 빈약하고 도덕적이지도 않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도 않지요. 할 말이 없으니 그저 니네가 더 나쁘고, 나쁜 놈들이 뭘 해도 밀어주는 국민이 강아지고, 운동장은 기울어져있다고 징징댑니다.

 

 그런데 이 징징이 조금 더 가면 뭐가 되는지 아십니까? 민주정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민주정을 파괴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 형태를 내세운 결과는 역사 속에 수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물론 외눈박이 바보들이 유토피아를 건설한 사례는 없어요. 매번 현세의 지옥을 만들었을 뿐이죠. 제가 괜히 그들을 파시스트라 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초기 파시스트들하고 패턴이나 정신세계가 꽤 비슷해서 그렇습니다.

 

 물론 깨시민 개개인은 의식적으로 파시즘이 나쁘다고는 생각합니다. 민주정이 뭔지 모르듯 파시즘도 뭔지 잘 모르지만요. 또한 그들은 대체로 권위주의나 독재, 전체주의 등이 나쁘다고도 생각합니다. 실제 무의식은 권위주의에 가득 차있고, 독재를 번번이 지향하기도 하지만 의식과 무의식이 따로 논다고 봐야죠. 이런 모순이 워낙 심하기에 제가 그들을 철학도 사상도 뭣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주워들은 것들을 체계화시키고 자기 스스로를 성찰할 지식과 지혜가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충동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이며 도덕주의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가끔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말하는데, 제가 말하는 도덕주의는 경직된 사고방식에 세상의 복잡성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떨어지고 근거 없이 자신이 도덕적으로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에게 훈장질을 하는 꼰대인 반면 막상 본인은 도덕률을 잘 안 지키는 걸 의미합니다. 도덕주의자들이 넘쳐나는 사회엔 결코 도덕이 없지요. 또한 민주정과 도덕주의는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사실 역사상 수많은 철학자들이 민주정에 반대했습니다. 민주정은 분명 큰 단점이 있고, 파국으로 치달을 위험성이 상존하는 체제입니다. 그러나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민주정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민주정이 현실적으로 가장 나은 제도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필연적으로 민주정 지지자들은 민주정의 단점과 위험성을 잘 인지하고,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정당과 관료를 기반으로 한 현대의 민주정 체계는 오랜 시행착오와 보완 과정 속에 형성되었고, 계속 보완과 개량 중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민주정을 반대하는 것 자체를 덮어놓고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비판과 논박은 강도 높게 하겠지만요. 그런데 깨시민들은 자신들이 민주정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고, 더 나아가 자신들을 민주주의자로 규정하다 못해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양 자처합니다. 이러한 일자무식과 뻔뻔함은 진짜 위험한 문제입니다. 양심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민주정 지지자가 아니라는 걸 선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민주정은 너와 나의 입장과 사고방식은 다르고,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며 각각의 시민들은 각자 자신을 위해 장기적으로는 최대의 이익이 되는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전제 및 가설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깨시민들은 이 전제 중 그 무엇도 갖추지 못합니다. ‘내 생각은 옳고, 네 생각은 그르다. 내가 대의다. 니들과는 대화할 것도 타협할 것도 없다. 그리고 니들은 옳은 선택을 하지 못한다.’ 이게 그들이 쭉 보여 온 언행입니다. 전형적인 독재자의 궤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국개론에 마음이 동하는 분들을 위해 첨언합니다. 민주정에서 항상 시민들이 옳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그른 선택을 하기도 하고, 때때로 민주정 자체를 붕괴시키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 박정희 유신 체제는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었지요.

 

 그렇기에 민주정 지지자들은 민주정을 보다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한 고심을 오랜 세월 해왔습니다. 정당을 기반으로 한 민주정, 관료 및 각 분야의 엘리트, 자유로운 언론, 헌법과 3권 분립 등이 이런 고심 끝에 나온 안전장치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새민련은 어떤가요?

 

 일단 새민련은 정당을 기반으로 한 민주정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그 정당엔 인력수급이 제대로 안 된지 오래고, 걸핏하면 찢어졌다 합쳤다 선거마다 군소정당과 합세하고, 계파다툼은 눈뜨고 보기 뭐한 수준이며 무엇보다도 한 정당으로서의 어떠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또한 관료와 엘리트들은 새민련에 등을 돌린 지 오래고, 노무현은 3권 분립을 침해했었지요.

 

 제대로 돌아가는 민주정 체계는 시민들의 실수를 미연에 줄이고, 실수를 하더라도 그걸 극복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민련은 이러한 안전장치를 지나치게 무시합니다. 새민련 구성원과 지지자 중 너무 많은 비율이 사실 민주정 지지자가 아니라서, 민주정에 대한 성찰과 고민이 심각하게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월 속에서 과거 민주정을 지지하고 DJ를 지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선지 오래입니다. 현재의 40~50대의 평균이 처음부터 새누리당을 지지했을까요? 국개론은 민주정을 반대하기 위해 창조된 망언입니다.

 

 현실 속에서 민주정은 민감하고 감정적이거나 또는 무관심하고 단편적인 시민들과 탐욕스러운 정치인들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의외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나갑니다. 민주정은 세상사의 복잡성을 극대화하고, 서로간의 피드백을 통해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체제입니다. 집단주의적이고 도덕주의적인 단편성으로 이 복잡한 민주정을 쉽사리 재단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도덕주의자의 결론은 언제나 독재가 되고 맙니다. 도덕을 강요하기 위해서는 독재 권력이 필요하니까요.

민족주의와 식민사관 논쟁에 대한 소고

사회 2014. 6. 17. 03:51 Posted by 해양장미

 근 며칠 문창극 총리지명자의 자질에 대한 이야기로 조금 시끌시끌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블로그를 통해 그 논란에 본격적으로 끼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각주:1], 그에 대한 논란 중 식민사관 논쟁이 있어 조금 흥미를 끕니다. 저는 이 논란이 언제고 해결되어야 할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선 교학사 역사교과서 논란이 떠오릅니다. 당시 직접 블로그를 통해 밝히진 않았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제가 무엇보다도 끔찍하게 본 것은 민족주의 사관과 민족주의자들의 극우성입니다. 그에 비하면 교학사 교과서의 오류는 상대적으로나마 사소한 것으로 느껴졌고, 이후 검증을 통해 개선된 부분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다른 교과서들은 교학사 교과서에 비하면 충분한 검증을 통과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교학사 교과서가 사회적 압력으로 인하여 훨씬 엄정한 검증과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역사 애호가인 친구와 교학사 교과서에 관한 사담을 나눴었는데, 그 친구는 반일감정을 저보다 강하게 가진 편이라 그런지 교학사 교과서의 문제에 대한 발언들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제 반응은 다음과 같은 식이었습니다. ‘교학사만 문제가 아니라 다 문제죠.’

 

 사실 제가 보기엔 교학사 아닌 다른 역사교과서들 문제가 현 시점에서는 더 심합니다. 아마 역사를 좀 파본 사람이 아니라면, 제 말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알아가는 사람이라면 제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길 거라 생각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한국의 역사 교육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편파적인 민족주의 사관을 가지고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그들의 사관과 태도는 역사교육 자체를 거의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고등 역사교육 다 받아봐야 왜 조선이 망했는지, 조선의 사회 양상은 어떠하였고 어떤 식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는지, 우리가 역사 속에서 뭘 배울 수 있는지, 일제 땐 실제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대한민국 건국 과정은 실제로 어떠하였는지... 전혀 감도 못 잡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입니다. 커리큘럼 전체가 잘못되어있고 왜곡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역사 공교육은 거의 쓸데없는 거나 반복해 외우게 시킵니다. 그러니 학생들은 역사 과목을 싫어하고,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 민족은 위대해!’ ‘고난을 슬기롭게 이겨냈어!’ 같은 거나 배우죠. 물론 이런 건 지식도 지혜도 아닙니다. 세뇌죠. 현실적으로 좋은 교사를 만나지 않는 한 거의 아무 것도 못 배운다고 봐야합니다.[각주:2]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걸 의심하기보다는 신뢰합니다. 그게 윤리적이라 느껴질수록, 권위를 확보하고 있을수록 더 그렇습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인간의 본능이고, 어느 정도는 문화적인 현상입니다. 형성된 믿음을 깨고 무엇이 진짜 사실인지를 알아가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주 원인은 민족주의입니다. 민족이라는 근대적인 개념은 이것이 우리에게 이식된 이후, 거의 모든 역사 관념에 개입하여 뒤헝클어놨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에 대해 조금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민족은 Nation 또는 Volk의 역어입니다. 같은 단어가 국민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물론 유럽어의 번역어인 만큼 매우 근대적인 개념입니다. 쉽게 이야기해 조선에는 민족 개념이 없었습니다. 조선 이전에도 그렇고요.

 

 민족주의 개념이 짙은 사람에게는 이런 설명이 이해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왕이 있는 사회엔 본래 민족개념이 없습니다. 왕 아래 신민들이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조선은 단일 민족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개국공신 퉁두란이 여진족이었던 건 대체로 아실 겁니다. 조선 초기 퉁두란 뿐 아니라 여진족이 조선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물론 여진족만 들어왔던 건 아니고요. 초기 조선은 무려 이민자 대접이 좋은 나라로 소문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조선 말기에도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동학농민운동 때 조선 정부는 외세를 끌어들여 농민군을 말살시켰습니다. 이는 민족주의가 없는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실제 한일합방 당시 양반들은 조선의 멸망보다 신분제의 폐지에 훨씬 강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하였었습니다.

 

 민족 개념은 근대적 공화국의 국민개념을 위해 창작되었습니다. 사람은 본래 그리 많은 수의 집단이 어떠한 일체감을 가지게끔 되어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민족 근대국가가 형성됩니다. 근대적 공교육은 민족 개념을 강화하였고, 그것은 어떤 부분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보기도 했으나 부정적인 면도 많았습니다. 그 중 가장 심각했던 걸 하나만 꼽자면 파시즘입니다. 파시즘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근대적인 현상입니다.

 

 인간의 의식은 본래 나와 가족부터 근처의 부족까지 확장됩니다. 오래 전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그리 많은 수의 타인에 대해 알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인식 방식은 아직 이 시기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한 인간이 수천만 명, 심지어 수억 명 이상을 같은 '민족'으로 인식하게 되는 건 어디까지나 상상의 문제입니다. 저는 비신론자라서, 비신론 입장에서 비유하자면 민족은 일종의 종교와 같은 것입니다.

 

 민족주의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국가주의적인 색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멸망과 일제의 지배라는 굴욕적 역사를 부정하기 위한 여러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역사 인식은 왜곡되었고, 과거의 문제점을 성찰하는 태도는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또한 민족주의는 신생 국가 대한민국의 아이덴티티를 긍정적으로 확립하는 데 나쁜 영향을 주었는데, 이 관점에서 볼 때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건국은 하나의 민족국가를 설립하지 못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논의 전개를 위해 잠시 문창극 총리지명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역시 교회에서 했던 발언 전반을 보면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발언에서 우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 등등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가 말하는 주제는 한민족이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논란이 되는 부분은 소위 식민사관 문제인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엔 민족주의자들이 극우적인공격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안타깝게도 이 사회에서는 글로벌 기준에서 극우파들이 [진보좌파] 타이틀을 달고 있어요.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제 말은 문창극의 발언이 충분히 타당하다거나 합당한 이야기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교회 내의 언어라는 게 본래 그다지 논리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그의 이야기 주제는 하나님의 시련이었다고 판단합니다. 그가 총리로 적합한가에 대해서는 저 역시 정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민족주의적으로 민감하게 구는 건 그의 자질 문제보다도 더 큰 사회문제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럼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식근론)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단 조선 말기는 국가 자체가 제대로 유지되지 않던 상황이었고, 근대성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던 게 사실입니다. 약간의 개인적인 가치판단을 첨부한다면, 그런 국가는 국가로서의 존속가치가 없습니다. 이는 현재의 북조선이 국가로서의 존속가치가 없는 말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당시의 조선은 국가를 유지할 만한 역량을 유지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즉 어떤 열강에라도 정복되기 대단히 쉬운 상황이었으며, 아마도 일본이 점령하지 않았다면 다른 열강에 의해 점령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조선의 지배층이 너무나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잘못을 했기 때문이며, 저는 현대 한국인들이 역사에서 이런 문제들을 배우고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역사의 가치라면 이런 데 있을 겁니다.

 

 그러나 민자영을 명성황후라고 안 불러준다고 뭐라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입니다.[각주:3] 갈 길이 너무 멀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식근론보다는 내가 조선의 국모다!’론 같은 게 진짜 문제입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과거미화는 결국 파시즘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일제가 한반도 근대화에 도움이 된 것 자체는 절대적으로 참입니다. 일제는 조선을 단기적 착취대상인 식민지로 삼으려 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일본 제국 내에 한반도를 포함시킬 계획으로, 장기적인 접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을사조약 이후, 태평양전쟁 전까지 한반도 민중의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됩니다. 이는 많은 데이터들에 의해 쉽게 증명됩니다. 그래도 일제가 잘못을 많이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태평양 전쟁 시기를 제외한다면 조선의 지배층들이 일제 이상으로 잘못했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중의 입장[각주:4]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국가의 이름이 무엇이냐, 지배층이 어떤 왕조냐가 아닙니다. 특히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관점일수록 민중 자체의 삶을 중요한 기준으로 다뤄야 합니다.

 

 국가, , 정통성, 충성... 이런 걸 중시하는 것은 대조적으로 보수주의적이며 집단주의적인 관점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것을 중시하는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적이면서 집단주의적인 극우파의 자세입니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민중의 삶은 국가의 정통성에 비해서는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각각의 행복 추구권, 개성, 인권... 이런 건 상대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소위 진보세력이 극우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참으로 문제입니다. 이 사회엔 진짜 진보가 필요합니다.

 

 역사적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진 데는 나름대로의 역사적이유가 있기도 합니다. 1980년 무렵까지 한국 사학계는 조선 이후의 근현대사 자체를 다루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갈등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80년대에 들어 사학계 일부는 현대사 연구를 시도했습니다만, 전두환이 그것을 불온하다하여 막았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냉정한 성찰 자체를 불온하게 여기는 것은 한국-일본에서 쉽게 발견 가능한, 매우 심각한 문화적 결함입니다. 이런 문화적 결함은 좌우파를 가리지 않습니다.[각주:5] 그러나 일부 성찰을 시도한 집단이 있고, 그들은 현재 한국 사회의 파벌 중에는 소위 보수에 주로 붙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진보가 아닌 보수성찰을 더 한다는 것은 그 단어 자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은 많은 대중에게 인식의 오류를 불러일으키기 쉽기도 합니다.

 

 사학계의 실증적 연구가 권위주의적 억압에 가로막혀 있는 사이,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소위 재야학계와 운동권이었습니다. 이들은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고, 적잖은 거짓말을 섞어가면서 인기를 끌게 됩니다.[각주:6] 그리고 이 영향은 실제 사학계 또는 역사교육학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진실이 감춰진 사이, 수많은 오류들이 역사교육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관의 문제이기에 현대사가 아닌, 우리가 역사를 보는 관점 전반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민족주의자들은 역사를 논하고 가르치는 데 있어 수많은 진실을 식민사학으로 낙인찍고, 자신들의 주장과 아집을 듬뿍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 날개를 답니다. 한편으로 1992년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유행하였던 배일호의 신토불이열풍과 줄곧 유행하던 민족주의적인 각종 문예, 드라마, 다큐멘터리.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의 성공 등이 민족의식을 강화시켜갔었습니다.

 

 이것과 연관된 수많은 문제를 단순화시켜 논하는 것은 사실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이야기할 문제 자체가 너무 많은데다 자료도 충분히 정리되어 있지 않아 하나하나 찾아야 하는 것 역시 많고, 이 사회의 한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대항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숙하게나마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있고, 그 움직임을 주도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그럼 이제 뉴라이트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별로 이미지가 좋지 못한 뉴라이트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그나마 그 집단이 민족주의 사관에 대항하고 있는 가장 메이져한 그룹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미숙함과 각종 문제에도 불구하고, 저는 뉴라이트가 이 사회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들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이것을 제가 그들을 좋아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많은 부분 87 민주화 이후 동구권의 몰락을 본 이들의 변화에 기원합니다. 이들의 주류는 대체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던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민주화에 앞장서던 사람들 중 사회주의에 심취하던 사람들이 많았으나, 공산권의 몰락이 이들에게 진실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저는 이들의 태도는 그래도 진보적이라 평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보라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믿던 것을 의심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태도, 그리고 나쁜 구습을 바꿔나갈 수 있는 추진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적어도 기존 사상보다는 훨씬 쓸 만한 사상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가진 새로운 사상에 문제와 미숙함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만, 적어도 그들은 민족주의에 대항할 만한 사상을 확보하고 힘을 모으게 됩니다.

 

 뉴라이트와 민족주의 계열이 벌여온 충돌을 서술하는 것은 너무 힘들고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라 일단 본문에서는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또한 뉴라이트에 대한 비판은 이미 사회에 넘칠 정도라 제가 보탤 게 별로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저는 너무나도 민족주의적인 평범한사람들이 뉴라이트를 손쉽게 으로 낙인찍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해야겠습니다. 그런 태도는 극우적이고 다분히 파시스틱한 태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파악하기에, 역사왜곡은 양쪽 모두에서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쪽 중 민족주의 계열이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균형과 견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역사인식 문제에 있어 아직 균형은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자들은 진짜 식민사관을 가진 것과, 조선 말기의 문제 및 무능 및 당시의 세계사적 현상 등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식민사관은 그러므로 일본은 조선을 지배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핵심입니다. 대조적으로 객관적인 사관은 당시의 조선은 이러저러한 문제가 많았고, 이러저러해서 일본에 지배당하게 되었으며 일제 당시엔 어떠어떠하였다.’라고 진실을 파악하는 데 주력합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역사란 역사적 사실에서 배울 게 있기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를 소위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 민중사관에 대한 비판으로 연장해가고 싶습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정말 광범위한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그러기엔 이 본문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것에 대한 내용과 비판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할 것 같습니다.

 

 우선적으로 본문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족주의적이지 않은 태도식민사관으로 이분화 시켜, 이것을 양극단의 진영 논리적 정치 갈등으로 발전시키는 일련의 흐름.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한 우려입니다. 물론 현재 이 사태 자체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현 정부도 적잖은 책임이 있으나, 저는 이 사태 이면에 있는 만성적인 민족주의 담론 문제를 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1. 사실, ‘설마 그런 사람이 통과되겠느냐’ 정도로 좀 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2. 사담을 첨부하자면, 지인 중 공무원 시험에 좀 뒤늦게 도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국사를 싫어하다보니 국사 과목에 많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데, 저는 민족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주요 커리큘럼에서 누락시키고 역사를 흥미로운 흐름으로 파악하지 못하게끔 만든다고 대기근과 소중화사상 등 몇몇 예시를 들어 설명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뭉뚱그려 설명하자면, 민족주의 사관은 비판적인 시각을 최대한 빼고 가능한 한 긍정적인 민족사를 ‘만들어’ 가르치려다보니 역사의 흐름을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3. 통상적으로는 민자영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잘 모르는 사람일수록 ‘명성황후’라고 챙겨 불러줍니다. 알수록 싫어할만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민자영을 명성황후라 부르는 게 별 문제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럴 거면 고종도 광무황제로, 흥선대원군도 헌의대원왕으로 챙겨 불러줘야 형평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4. 이 말을 ‘민중사학’과 혼동할까봐 조금 우려가 됩니다. 한국에서 민중사학은 민족주의 사학의 한 계열로,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사회주의적 색채의 민족주의 사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제가 이야기하는 관점과는 적잖은 거리가 있습니다. 본문의 주제에 대해 좀 더 심도 있는 접근을 하려면 민중사학에 대한 자세한 조명이 필요하겠으나 분량 등의 문제로 줄입니다. [본문으로]
  5. 제 개인적으로는 소위 진보좌파가 이런 문화적 결함을 더욱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는 경험적인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6. 이 가장 극단적이고도 유명한 사례가 환단고기입니다. [본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일단 내 생각엔 깨시민이라는 용어는 꽤 괜찮게 잘 만든 것 같다. ‘깨시민노빠와 유의어이지만, 약간의 어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1) 노빠라는 말의 기원을 찾자면 노사모부터 이야기해야 할 텐데, 근래 깨시민 짓하고 넷을 돌아다니는 아가들 중 태반은 노사모 전성기 시절에는 꼬꼬맹이였음.

 

2) 노무현 사망도 이미 5년 전의 사건이 되어서, 현재 친노’, ‘노빠라고 할만한 세력은 노무현 생전의 친노’, ‘노빠와는 100% 일치한다고 하기는 어려움.

 

3) 개인적으로는 정말 많은 깨시민들의 탄생과 언행이 노무현 사후 그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함.

 

 정도를 꼽고 싶다.

 

 이런 깨시민들은 마이너리티를 지향하는 일베충에 비해 상당히 메이져한 정치집단이고, 그 활동량과 파괴성은 숫자대비 기존 한국에 있었던 그 어떤 정치집단보다도 강력하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성향은 학술적으로 파시즘과 상당히 가깝기 때문에, 언제든 굉장히 문제될 수 있는 집단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깨시민이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근본적인 이유는 누가 봐도 유별나게 깨어있다고 보기 불가능한 뇌내 청순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 깨어있다고 자처하였으며, 더 나아가 참으로 멍멍이같은 국민 멍멍이론을 웅변하면서 우리들이야말로 깨어있는 시민으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다!! 같은 되도 않고 기가 막힌 선민의식을 노출증 환자처럼 노출해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깨어 있는 시민이라는 어휘는 탄생 시점부터 깨지 못한 시민의 존재를 상정하고 차별화시키기에 반민주주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위험한 것은 깨시민 교리의 파급성에 있다. 깨시민은 깨시민 교리를 받아들인 대체로 평범한 사람들이며, 깨시민들은 본인 언행의 문제점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나는 이 사회의 여러 근본적인 문제들이 젊은 깨시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며, 파시즘의 확산을 막고 민주주의 체제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깨시민이 왜 탄생하고 그들이 왜 그런 모습을 보이는지를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일단 깨시민의 등장과정을 이해하려면 대선 무렵부터의 노무현 지지자들이 어떤 갈등을 겪고, 어떻게 분열되고 어떻게 지지세력이 줄어들고 종교화되어갔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나는 본문에서 상세한 기록을 남길 생각까지는 없고, 정말 간단하게 뭉뚱그려서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무현은 어린 깨시민들의 그릇된 신앙과는 달리 취임과정부터 엄청난 실정을 반복하였고, 그 실정의 총량은 감히 그 2MB각하를 상회한다고 평할 만 하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수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지지자들이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고 이탈을 반복했는데, 그 과정에서 언제나 노무현은 옳다는 식으로 광신적인 비호를 해대며, 노무현과 적대하는 모든 이들을 무차별로 공격해댄 세력이 있었으니 이들을 사람들은 노빠라 불렀다.

 

 ‘노빠들은 그들이 처음 등장한 이래 인터넷 세상에서 엄청난 화력과 단결력을 자랑했다. 물론 그들은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듯이 한나라당을 절대적인 악으로 취급하고 - 그땐 한나라당도 정말 엄청나게 밉상으로 굴어서 노빠들이 큰 힘을 얻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 한나라당이 하던 짓을 근래는 야권이 하고 있다. - 한나라당이 아닌 모든 정치세력을 노빠 밑에 복속시키고자 하였다. 그 노빠의 필두라 할 수 있는 정치인은 유시민이었고, 그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면서 거의 모든 인터넷 커뮤니티를 장악했다. 사실 30~40명 정도가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면 아무리 큰 인터넷 커뮤니티라도 장악될 수밖에 없다. 이 당시 이들의 힘은 정말 컸기에, 열린우리당 정치인들조차 이들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파국적 결과를 낳았다.

 

 본문은 노빠의 사악함과 광기를 지적하려는 게 주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치 친위대의 인터넷 버전이라 할 만 했다. 노무현이 정치적으로 워낙 실정을 거듭했고 인기를 금방 잃었기에 이 문제는 현실 속에서 크게 심각해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실정으로 인한 다른 문제들이 축적되었고, 그들과 친노 정치인들의 패악질 속에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현재의 야권은 반영구적으로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깨시민들은 온갖 망상과 궤변으로 무시하는 분야이지만, 현재 30대 후반~50대 초반 정도의 새누리당 지지자들 중 다수는 과거 노무현 지지자였다. 그들은 노무현의 실정과 야권의 철학 없음, 그리고 노빠-깨시민들의 패악질에 실망하여 현 여권 지지로 돌아섰다.

 

 본 주제로 돌아가 노무현이 아직 집권하면서 실정을 거듭하고 있을 때, 이미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노빠들이 파시스트 종교집단이라는 지적은 적잖게 있었으나 그 현상이 이런 식으로 진화할 거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보편적으로 특정 정치인 추종집단의 생명은 그 정치인의 권력이 사그라짐과 함께 같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이명박으로의 권력승계는 여러 정보로 추론해볼 때 노무현 정권의 의도였지만 - 고건과 박근혜, 이명박 중 이명박을 작정하고 골랐다는 의미 - , 두 정권의 거래는 2008년 촛불정국으로 인해 파토나고 만다. 이명박 정권은 시위 자금의 출처 등을 조사하다 촛불의 주체를 노사모라 판단하게 되었고,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에게 적잖은 배신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에 당시 친노-노빠 집단은 촛불정국으로 이명박 정권을 뒤흔들어 바닥까지 떨어졌던 권력을 탈환하는 데 주된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는 결코 당시의 모든 촛불 시위대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본인은 아무 생각이 없던 건지, 다른 노빠들처럼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명박 대통령의 불편을 가중시키는 언행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촛불정국으로 인한 이명박 정권의 인사 물갈이는 노무현 정권 인맥과의 핫라인이 끊기는 것을 의미했다. 당신의 혼란 속, 이명박 정권 내부의 권력 투쟁은 엄청나게 치열했다. 적잖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다.

 

 자살하지 않았다면 노무현은 아마도 감옥에 갔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가 포괄적 뇌물죄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결과가 나왔다면 깨시민이 등장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살했고, 사회 분위기는 급변하였다.

 

 사실 그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노무현에 대해 막연한 호감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그것은 대부분 그의 단순하고 직설적인 모습 및 이미지 메이킹에서 기인한 것이었지만,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고 노무현의 그러한 일면은 다른 정치인들이 가지지 못한 대중적 장점이었다. 고 노무현에 대한 추모열기는 탄핵 때 이상으로 폭발하였고, 촛불시위와 노무현 자살을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람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위에 이야기했듯 노빠들이 만들어내는 종교적 컨텐츠를 주로 학습하게 된다. 깨시민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깨시민의 교리는 수많은 사이비 종교들처럼 기존 세상의 상식을 버리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면서도 깨시민 교리가 강력한 건 그것이 이 사회의 문화적 약점들을 더할 나위 없이 잘 공략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신흥 종교의 교리는 매우 잘 만들어졌기에, 평범한 한국 젊은이라면 누구나 깨시민이 될 수 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선과 악을 구분하고, 내 편과 적을 흑백논리로 나눈다. 물론 당연하게도 내 편이 선이고, ‘진정성을 가진 노무현과 그의 후계자들이 그들의 선한 대표자가 된다. 그들의 종교관 속에서 교주는 노무현-유시민-문재인-(박원순)으로 이어진다. 교주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대체로 종교인들이 그렇듯 굳건하기 때문에, 양떼들처럼 그들을 따라다니며 교리를 전파하게 된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정의공정’, 그리고 민주주의는 개신교의 믿음’, ‘소망’, ‘사랑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이러한 행동패턴은 사실 그리 특이할 건 없다. 인류의 원시적 특성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행동패턴이 저런 식으로 정치 집단화될 때는 그것이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더 나아가 대단히 위험하다는 데 있다.

 

 쉽게 이야기해보자. 민주주의는 시민이 정치 지도자를 선택하고 판단하는 체제다. 즉 이 과정에서는 회의와 계산, 그리고 재고가 필연적이다. 그리고 시민과 정치인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동등하며, 이 사회 구성원들끼리는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가지더라도 이해와 대화와 타협,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거나 잊어버린 기본적 윤리다.

 

 그런데 깨시민들은 이 윤리 자체를 전복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정치 지도자를 내심 시민보다 한 단계 더 높이고, 그들을 의심하거나 견제하는 것을 거부한다. 더 나아가 이들은 자신들이 적대하는 집단을 적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적대집단에 끼워 맞추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그들의 적대감과 공격성은 상식을 초월한 지 오래다.

 

 그들에게 있어 다른 야권 세력은 굴복시키고 지배해야 할 대상이며, 여권 세력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제거의 대상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화신인 것처럼 포장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모자란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개념 자체에 엄청난 오해를 하게 되기 쉽다. 물론 깨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오해를 확산시키는 데 쉽게 앞장설 수 있다.

 

 한국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자연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구의 경우 민주주의의 역사가 오래 되었거나, 민주주의가 자연 발생했기에 그에 어울리는 문화가 체화되어있다. 그러나 한국은 민주주의가 이식된 후 그것이 규범화되었고, 규범화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다른 여러 가지 기존 윤리적 관점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깨시민 현상은 이런 아노미가 어떤 식으로 폭발할 수 있는지를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충분히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문화에서, 충분히 민주주의적이지 못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다. 여전히 한국 문화는 다분히 군대식이고, 대화와 타협에 익숙하지 않으며 권위적이고 성급하다. 또한 쉽게 집단적 불안감을 느끼며, 무언가 근본적인 잘못됨을 곧잘 체감하지만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고민이 없다. 이에는 한국 특유의 반지성적이고 파괴적인 집단주의가 큰 역할을 한다.

 

 깨시민의 비극은 그들이 문화적 진보를 추구하는 것에 비해 실질적인 진화의 노력은 전무하다는 데 많은 것을 기원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인데, 사람은 본래 자연 상태에서는 감정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이성을 활용하려면 훈련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깨시민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이 거의 되어있지 않고, 그렇기에 종교적이며 타인 또한 종교적으로 만든다.

 

 깨시민 교리는 대부분의 종교 교리가 그렇듯 마음속의 불안감과 문제의식을 자극한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는 무언가 잘못되었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에 대안을 찾고 싶어 한다. 그리고 깨시민들은 이 지점에서 그럴싸한 대안을 제시한다. 이 대안은 받아들이는 사람한테는 매우 편하다. 딱히 어려운 지식을 학습할 필요도 없고, 역대 교주들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 하나면 반쯤 끝나기 때문이다.

 

 이들이 언제나 안티질에 집중하는 이유 또한 교리 구조가 그래서이다. 이들은 기존 체제의 잘못된 점에 불안감을 느끼는 자들에게 매국노 수꼴들이 문제야!’ 라고 포교를 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늘려나갔다. 물론 실제 친일 출신은 야권도 만만치 않은 정도를 넘어 더 많을 지경이고, 알고 보면 수꼴스러운 건 깨시민이 챔피언 먹을 지경이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렇다보니 이들은 새누리당 안티질 자체에 온 능력을 집중할 뿐, 자신들이 어떠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성찰이 거의 없다.

 

 그저 종교인들답게 그들은 이상적인 공공선을 러프 스케치처럼 대~충 상상하며, ‘깨어 있는자신들이 그 공공선을 수호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들의 교리에서 그들의 주적인 새누리당 세력은 언제나 그 공공선을 침해하기 때문에, 기회가 될 때마다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권력을 빼앗아 와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민주주의 체제에 어울릴 리가 없다.

 

 철학적 빈곤과 반지성주의는 깨시민들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이성의 등불이 밝혀진 곳에 광신이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이 상상하는 공공선은 결코 철학적 완성도가 있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 그들은 민주주의뿐 아니라 정치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기에 모든 것을 제멋대로 상상하고 재단한다. 그리고 그들이 창조해낸 종교 교리 가치관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각자의 갈등을 조율하고, 공동체의 번영을 통해 사익을 지키려는 역사적 기원에서 출발하였다. 민주주의의 성공사는 그 현실성의 승리라 할 수 있다. 한 사회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갈등을 평화적으로 조율하는 가운데 가급적 모두의 이익을 챙기는 체제가 다른 체제보다 우월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성찰이 높은 수준이었기에, 불필요한 사회 갈등을 줄이고 마침 다가왔던 국가적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애썼다. 비록 모든 판단을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는 어느 정도 진정한 민주주의적 대통령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후임인 노무현의 행보는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불필요한 갈등을 키웠고, 사회분열을 끊임없이 야기했다.

 

 깨시민들은 김대중의 이름을 항상 팔아먹고 다니지만, 김대중의 가치관이나 정신은 손톱만큼도 이어받지 않은 거짓된 자들이다. 그들은 취임하자마자 김대중 정권을 무차별로 공격했던 노무현 정권의 종교적 추종자이며, 그렇다고 노무현 말은 잘 듣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근본주의 종교집단답게 민주주의에서 필요한 화합과 타협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노무현이 사악한 세력을 너무 봐줘서죽었다는 망상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면 종교적 착각에 근거해 피해의식을 키우고, 앞뒤 안가리는 공격성을 가진 정치적 집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철학의 빈곤 문제는 노무현 정권 자체부터 따져 봐야한다. 노무현은 민주 정치 뿐만 아니라, 정치 자체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했다. 일례로 노무현 캠프는 경제공약 자체가 없었는데, 훗날 대선캠프 공약팀장 이병완이 이야기하기를

 

권력을 왜 잡느냐. 지속적으로 권력을 잡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죠. 예전의 박정희라면 권력은 수단이거든요. 최종적인 가장 큰 수단이 대통령입니다. 꿈을 잡기 위해 꿈을 이야기 하고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 중에 유일하게 꿈과 비전을 애기하지 않은 분이 딱 한 분이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후보였습니다.”

 

원칙과 상식, (노무현 후보는) 이 가치만 이야기 했습니다. 가치를 내세워 대통령이 된 유일한 분입니다. 노 대통령은 정치적 성공이 아니라 정치 자체와 싸움을 벌였습니다. 대통령은 정치와 싸우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후략)”

 

 이 모양 이 꼴로 이야기하는 수준의 형편없는, 정말 순화해서 이야기해 어린 소년 같은 수준의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니 정치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정치를 해야 할 대통령이 정치와 싸우기 위해 분노를 품고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그는 정치를 하지 않고, 정치와 싸웠다. 그것은 종교적인, 그리고 정치를 혐오하는 행위이고 그의 파괴성에 한국 정치는 많은 부분이 부서졌다. 초대 교황이 이랬으니 깨시민들도 그를 이을 법 하다.


 그리고 정말 안타까운 건 노무현이나 깨시민, 아니면 더 나아가 어떤 야권 지지자들의 착각과는 달리 현 한국 정치 시스템은 완벽한 민주주의고, 그들이 적대하는 정치민주 정치그 자체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적이며, 민주주의의 파괴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이는 집단주의와 타자에 대한 심각한 배타성, 일상적인 낙인찍기, 종종 보이는 강력한 민족주의, 도덕주의와 이중잣대, 무한한 피해의식과 선민의식 등등은 종합하여 학술적으로 보면 영락없는 파시즘이기에 참으로 우려스럽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첨언하고 싶은 이야기. 사실 극단적인 깨시민 자체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인터넷 사회 전반을 잠식하고, 더 나아가 소위 진보언론의 대부분을 잠식하여 광신적이고 위험한 정보조작을 일상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그에 정말 많은 이들이 큰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 폐해는 너무 광범위해서 어디에서나 악령처럼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다. 심지어 여초에서 요리 레시피를 찾아보더라도, 간단한 유머글을 보더라도 뜬금없는 문재인찬양, 박원순찬양을 볼 수 있을 정도다.

 

 어떤 친구는 광신 노빠는 실제 야권에서 진짜 일부일 뿐이라고도 한다. 야권 지지하는 사람들 중 노빠 싫어하는 사람들 정말 많다고 한다. 그러나 깨시민과 그들이 지지하는 친노들은 현실 속에서 야권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뜬금없이 민주당 당권을 장악하고 총선에 나선 후, 거기서 어이없이 실패한 후에도 손학규를 물리치고 안철수까지 꺾고 국민들 사이에서 듣보에 가깝던 문재인을 대선후보로 앉히는 만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 위인들이다. 나는 사람들이 그들의 위험성을 보다 더 제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