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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9.07 조국 청문회에서 나왔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은 어렵습니다. 22

 추천 브금

 

https://youtu.be/_bpS-cOBK6Q

 

 

 글을 읽기에 앞서. 본문은 부족하고 허술하게 작성되었고 여러 이유로 충분히 완성도를 높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틀린 개념이 있다면 수정요청을 해주시고, 모자라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보기에 따라 다소 혐오스러울 수 있는 사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미리 감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롤즈의 정의론 이후, 현대적 자유주의에는 정의라는 개념이 삽입되었고 고전적 자유주의나 리버테리어니즘과는 분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미국식 리버럴이 탄생한 것이지요.


 

 영미정치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정의는 통상적 언어의 정의와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평등과 비슷한 느낌의 개념이거든요. 그런데 동시에 주류 영미정치철학은 평등을 지양해야 할, 그러니까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의평등을 구분하고 그 중 정의를 지향해야 할 것으로, ‘평등은 지양해야 할 것으로 본단 말이지요.


 

 조금 먼저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롤즈의 정의론은 자유주의적 정의론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유명한 샌델은 그의 유명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동체주의적 정의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샌델은 보수적 공동체주의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샌델의 주장은 보다 보수적인 정의론입니다. 자유주의자의 정의와 공동체주의자의 정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롤즈 식의 다원주의적인 중첩된 합의로 정의를 규정하자면, 그것은 대략 기본권 보장에 가까운 개념이 됩니다. ‘누구에게나 기본권은 보장한다.’라는 명제를 놓고 본다면, 현대적 자유주의는 그것에 동의하지만 고전적 자유주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견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국가는 사회계약에 의해 계약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쪽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가 아닌 현대적 자유주의자에 속하고요. 다만 나는 국적이나 시민권의 획득과 그 유지에 있어 보다 엄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나는 국가와 국민 사이의 사회계약은 파기할 수 있는 계약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롤즈에 의해 미국식 리버럴리즘이 탄생한 건 좋았는데요. 이게 좀 원천적인 문제가, 소셜리스트들이 끼어들고 과하게 오염시키기 쉬운 개념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일단 인정하고 시작해야 할 게, 현대적 자유주의건 데모크라시건 사회주의 영향을 전혀 안 받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으면서 진화를 했어요. 그런데 이게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아주 옅게 있을 때는 아예 없는 것보다 나은데, 일정 농도 이상이 되거나 변질되면 탈이 납니다. 원래 인체에도 미량 존재하면서 대사에 꼭 필요한 물질인데, 너무 많이 섭취하면 탈이 나고 심하면 죽기까지 하는 물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나는 제대로 끼니를 못 챙기고 있는 세대가 있다면, 그리고 어떤 국가가 그들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국가는 사회계약에 따라 그런 세대를 보호하고 원조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현대적 자유주의의 기본적인 합의이고, 우리나라의 헌법이건 법률이건 그러한 관점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사회주의적 요소라고 부릅니다만, 나는 현대 자유주의적 정의로 부릅니다.


 

 그런데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국가는 그 몸집을 비대하게 키워서는 안 되고, 무제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어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국가 스스로가 약자를 도와줄 여력을 계속 확보해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도 생각해야합니다.


 

 한편으로 현대적 자유주의는 다원성을 포괄하는데,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해치지 않을 정도의 사회주의적 발상도 다원주의로 포괄합니다. 사회주의적인 사상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인데, 자유주의가 무너지지 않을 정도라면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보호할 방패는 가져야 하지만, 방패로 섣불리 때리게 되면 자유주의로 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정의를 사회주의적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는 사회주의적 영역을 확대하려 합니다. 영미 주류정치철학에서 지양하는 개념인 평등을 들고 오지요. 그래서 결국에는 소셜 리버럴리즘(사회자유주의)을 소셜 데모크라시(사민주의)까지 왼쪽으로 당겨놓습니다.


 

 중요한 건 자유주의의 개인성과 사회주의의 집단성은 같이 갈 수 없고, 국가권력이 비대해지면 사회계약은 유명무실해지며 개개인이 국가에 대항할 방법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데모크라시건 리퍼블릭이건 개인이 기존 국가에 맞서면서 국가의 권력을 약화시킴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국가가 다시 힘을 많이 가지게 되면 그것은 곧 데모크라시의 파멸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권력자는 언제나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싶어 하기 때문에, 유권자는 권력자의 권력에 맞서기 위해 가급적 언제나 작은 정부를 추구해야만 국가권력의 비대화를 막을 수 있습니다. 독재자는 언제나 국가권력의 한없는 비대화를 노리는데, 군사독재는 군사력과 강압을 통해 그렇게 한다면 포퓰리즘 독재는 대중을 꼬드기고 부추겨서 그렇게 합니다.


 

 공산권 붕괴 이후, 합리적 설득력을 잃은 사회주의자들은 포퓰리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는, 누군가는 강한 권력을 쥐고 강제적인 분배를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국가의 권력자가 사회적 강자들에게서 금권과 이권을 빼앗아야 하니까요. 당연히 강한 권력이 필요하잖습니까. 이걸 데모크라시로 이루려면 권력자는 아주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을 가능한 열광시키고 맹목적으로 지지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는데, 그 부정적인 결정체 중 역사에 남을 만한 결정체가 우리가 보고 있는 문재인 정권입니다.



 현실은 각자의 힘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장이고, 자유주의의 본질은 그러한 각각의 이해관계와 입장을 존중하고 각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온전히 섞일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만일 둘을 동시에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본인이 유리한 대로 취사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자유는 소중히 여기지만 남의 자유는 아니고, 내 재산은 분배하기 싫지만 남 재산의 분배엔 앞장서기 쉽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대체로 이중적이고 내로남불이 심한 건 결국 사상의 문제입니다. 사상의 완성도가 낮고, 모순이 있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에 단독 조무무사시 선생의 양파게이트로 진실의 일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에서 단독 조무무사시 선생과 그 가족만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일 거라 생각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