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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초식동물은 채식하는 사람뿐입니다.

인류 2017. 9. 11. 02:43 Posted by 해양장미

 일정 이상 크기의 동물 중에, 순수하게 초식성인 동물은 채식하는 사람뿐입니다. 본문은 채식에 대한 채식주의자들의 망상을 비판하기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초식동물들은 육식도 합니다. 다만 사냥을 잘 못할 뿐입니다. 그런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초식동물이라 생각하는 포유동물들은 모두 육식을 할 수 있으며, 실제 자연 상태에서 일정정도는 육식을 하며, 기회가 되면 육식을 합니다. 조금 이야기해보지요.

 

 기본적으로 일정 크기 이상의 동물, 그러니까 벌레보다 큰 동물들은 벌레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고, 사실 의도하지 않아도 먹게 됩니다. 예를 들어 소가 풀을 뜯고 물을 마시다 보면 미처 도망치지 못한 벌레도 같이 먹게 됩니다. 그래도 탈은 나지 않아요. 모든 고등동물들은 비슷한 진화적 기원을 가지고 있고, 고기나 탄수화물 같은 것에 대한 소화능력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야생에선 초식동물들도 기회가 되면 얼마든지 육식을 합니다. 그 쪽이 에너지 효율이 훨씬 좋으니까요. 벌레, 새알, 죽은 동물의 사체, 뼈나 뿔 같은 건 먹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먹습니다. 자신보다 약한 동물을 공격해 잡아먹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 걸 보고 놀라거나 충격을 받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어차피 모든 포유동물은 육식성 조상을 가지고 있으니 놀라울 것도 없습니다. 진화 과정에서 풀을 주로 먹는 쪽으로 진화했을 뿐이고, 고기를 소화하는 능력이 사라진 건 결코 아니거든요. 애초에 모든 포유동물은 동물성 음식인 젖과 태반을 먹기도 합니다.

 

 우리 인류의 친척인 원숭이들 중 많은 종은 이미지에 비해 훨씬 육식을 좋아합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는 사냥도 합니다. 인류는 유독 사냥을 잘 하게 된 원숭이의 일종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을 보면 채식주의자들의 채식만큼 인공적이고 관념적인 게 없습니다.

 

 실제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은 어딜 봐도 육식성에 가깝습니다. 사람은 셀룰로오스를 소화할 수 없고, 뛰어난 사냥 능력과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식 동물들은 장내미생물을 통해 식물의 세포벽을 소화시켜서 에너지로 쓸 수 있는데, 인류에겐 그런 능력이 없고 대신 육식동물 특유의 높은 지능이 있는 것입니다. 맹장과 어금니의 퇴화도 육식동물의 특성입니다. ‘잡식동물로 인류를 흔히 분류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모든 동물은 잡식을 합니다. 다만 셀룰로오스를 소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초식이냐 아니냐의 주된 기준이 됩니다. 대형 동물이 자연 상태에서 충분한 에너지를 얻는 방법은 셀룰로오스를 소화하지 않으면 육식을 하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풀씨와 과육을 대량으로 길러먹을 수 있게 된 농경이라는 예외를 적용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높은 지능도, 의사소통능력도 사냥을 위한 진화입니다. 대체로 초식 동물은 지능이 높지 않은데, 높은 지능이 불필요할 뿐더러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뇌는 쓸데없을 정도로 에너지를 많이 씁니다. 초식은 에너지 섭취 효율이 매우 낮은데, 높은 지능은 필요 없기 때문에 지능을 높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냥을 하려면 높은 지능이 필요하고, 집단사냥을 위해선 더더욱 의사소통을 위한 지능이 발달해야하니 더 지능이 높아집니다.

 

 또한 흔한 오해와는 달리, 사실 채소들이야 말로 인류의 미각적 쾌락을 위한 장기간의 집념과 노력과 실험의 결과물입니다. 야생 나물들 같은 푸새를 제외하면, 인류가 밭에서 재배하는 모든 식물들, 남새는 야생의 그것과는 거리가 굉장히 멀고, 생존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영양학적 가치로 보면 꼭 먹지 않아도 되는 게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맛있는 식물들을 정말 많이 개발하고 키워냈습니다.



 케일, 콜리플라워, 브로콜리, 양배추, 콜라비, 카이란은 같은 식물입니다. 품종만 다른 겁니다. 배추, 순무, 청경채도 같은 식물입니다. 마찬가지로 품종만 다른 겁니다.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인류의 욕망과 노력이 만들어낸 재배종들인 겁니다.

 

 근래의 사회상을 볼 때 채식주의자들은 늘어날 것이고, 그로 인한 폐해도 일상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조적인 채식주의자들은 아이와 개, 고양이에게도 채식을 강요합니다. 아이와 개, 고양이에게 채식을 강요하는 건 학대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채식을 강요하는 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학대입니다. 입에 안 맞아서 고기를 안 먹는 건 별문제입니다만, 사람은 육식동물입니다.


인간의 치아는 채식의 증거인가?

인류 2013. 5. 5. 20:07 Posted by 해양장미

 채식주의자, 또는 채식주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인간의 송곳니는 위아래 한 쌍인데 반해, 어금니는 소구치와 대구치를 포함해 위아래 다섯 쌍이기에 곡물 등의 채식을 주로 하는 게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그럴까?


 이는 생물학에 대한 몰이해로 빚어지는 오해이다. 생물학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럴싸할 수 있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치아의 진화는 꽤나 복잡하고, 식이의 진화에 비해 필연적으로 느리다. 우리 인류는 포유강-영장목-사람과[각주:1]이기 때문에 영장목-사람과 계통의 치아와 감각을 가지고 있다.


 영장목의 치아는 그 내부에서도 비교적 복잡한 다양성이 있지만, 대체로 그 개수로 볼 때 송곳니보다는 어금니가 발달한 편이다. 송곳니는 길이가 긴 경우는 있어도 숫자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영장목은 각각의 종에 따라 그 식이가 비교적 다양한 편이며, 대체로 잡식성이다. 대형 유인원인 사람과의 경우는 다른 영장목에 비해 어금니의 개수가 적은 편이다.


 사실 치아의 비율이 어떠한 종의 식이를 판별하는 데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식육목에 속하는 판다는 거의 하루 종일 대나무만 먹고 사는 99% 초식동물이지만, 여전히 곰의 치아와 소화계가 남아있다. 식이 진화는 복잡하게 발달하고, 그것이 항상 좋은 선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판다는 별로 좋지 못한 선택을 한 종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번식력이 낮고, 멸종 위기종이 되었다. 판다는 대나무에서 충분한 영양을 얻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최소한으로 움직이면서 대나무를 먹는다.


 영장목의 주된 식사는 평균적으로 나무 열매와 여린 잎, 새알과 곤충 등이다. 대부분의 영장목은 억센 잎을 잘 소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여린 잎과 나무 열매를 구분할 수 있는 시각이 발달했다. 포유강 중 영장목을 제외하면 적색을 구분할 수 있는 포유강은 원시적 포유강에 해당하는 유대하강 뿐이다. 우리가 키우는 대부분의 포유강 애완동물은 붉은색을 구분하지 못한다. 최소한 적록색맹인 것이다.


 어금니가 곡물을 씹기 위해 발달한 것이라 생각하면 오류다. 야생에는 곡류가 거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고기를 먹을 때도 어금니를 잘만 쓴다. 무얼 먹건 간에 인간의 식이에는 어금니가 필요하다. 그리고 인류가 사냥을 하고 고기를 먹어온 역사 동안 송곳니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적은 없다.


 인류는 대략 700만 년 전, 열대의 정글에서 사바나로 나온 초기 사람과부터 그 역사를 시작한다. 사바나에는 정글과는 달리 사람과가 먹을 수 있는 식물성 음식들이 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직간접적인 조상들, 즉 원시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생존의 길을 모색했고 그 중 육식을 선택한 이들이 살아남았다.


 우리의 옛 친척들 중에는 식물 뿌리를 주식으로 삼으로 한 이들도 있었다. 만약 이들이 현재까지 살아남았다면, 그들은 아마 우리보다 턱이 비교할 수 없이 더 발달했을 거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화식을 하고 전분질을 거의 먹어오지 않았기에 턱이 발달하지 않았고, 밖으로 별로 튀어나오지 않았으면서도 비교적 갸름한 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곡류는 맛있다. 운동 때의, 또는 병에 걸렸을 때의 에너지원으로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99%의 시간 동안 이렇게 곡류를 먹어오지 않았고, 그나마도 이렇게까지 도정된 곡류를 일상식으로 먹게 된 것은 그야말로 극히 최근의 일이다.


 우리의 어금니는 결코 이런 곡류를 먹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이를 잘 닦아도 피할 수 없는 치아우식의 주범은 당분이고 곡류다. 우리의 어금니는 절대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구운 고기와 과육, 부드러운 새잎, 견과, 곤충 등을 씹는 데 사용되어 온 것이다. 우리의 치아 구조는 우리가 채식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1. 실제 인간의 생물학적 분류 계통도는 훨씬 복잡하다. 이것은 많이 축약한 것이다. [본문으로]

채식주의자들의 아동학대

식이 2013. 4. 23. 17:59 Posted by 해양장미

 개인적으로 비건으로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혹시 비건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이야기하자면, 비건은 흔히 생각하는 완벽한 채식주의자를 의미한다. 우유, 벌꿀도 먹지 않는다.


 비건 식사는 결코 인간에게 필요한 각종 영양소와 무기질 및 비타민을 온전히 공급할 수 없으며, 그나마 피해를 줄이려면 반드시 영양 보충제를 먹어야 한다. 물론 비건들은 이런 과학적인 상식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곤 한다. 진화를 부정하는 근본주의 크리스찬과 똑같은 식으로.[각주:1]


 사실 성인이 굳이 본인의 심신을 학대하겠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근래 한국에 비건들이 늘어나면서, 자신의 자녀에게도 비건 생활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데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 영유아에게 채식주의를 강요하는 것은 아동학대다. 모유를 수유한다 해도 비건 엄마는 결코 온전한 모유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보충제라도 먹으면 모를까) 그러나 비건들은 대체로 광신적인 경향이 짙기 때문에, 아동에게 채식을 시키면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분유도 우유 분유가 아닌 식물성 분유를 먹이기까지 한다. 그러다보니 식물성 아기분유의 시판 자체를 국가가 통제해야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실제 프랑스 등지에서는 채식주의자 부모에 의해 영유아가 심각한 건강 이상이 생기는 경우가 보고되고 있으며, 심지어 사망한 경우까지 있다. 성인은 육식을 하지 않아도 일정 기간정도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지만, 영유아는 완전히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나 비건들은 막무가내인 경우가 많다. 시부모 등 친척들에게 어떤 말을 듣건, 심지어 남편하고 의견이 갈리건 간에 영유아에게 채식을 강요하려 들곤 한다. 이런 건 비극적인 일이다. 부모가 막무가내로 아동을 채식을 시키려 들면, 현재의 사회 체제에선 아무도 아동을 보호할 수 없다. 그러나 아동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고, 애완동물도 아니다. 부모는 아동을 건강하게 키워내야 할 의무가 있고, 그 과정은 부모의 주관적인 믿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동이 아플 때 병원에 보내지 않고 푸닥거리를 하다 아동이 죽기라도 하면, 부모는 그 비합리적 선택에 대해 일련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정말로 푸닥거리가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다만 그것이 충분히 과학적인 개연성이 없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아동에게 비건 식사를 시키는 것 또한 아픈 아이에게 병원 진료 대신 푸닥거리를 하는 수준의 학대다.


 더구나 비건 부모는 의도치 않더라도 아동에게 육류 요리를 해주는 게 어렵다. 본인이 고기를 먹지 않는데다, 적잖은 경우 고기 요리 자체를 하기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또한 채식의 영양 문제 외에, 비건 식사를 요구받는 아동들은 향후 대인 관계 형성 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다른 아이들이 먹는 걸 같이 어울려 못 먹기 때문이다. 성인이 스스로 식사를 선택하는 것과, 아동이 인간관계 맺는 법을 익히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과정 속에서 식사를 통제받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실제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서 유난을 떠는 채식주의자 부모는 많다.


 한편으로 이미 아동에게 채식을 시켰다가 발육이 나쁘다는 이야기들은 종종 보이고 있다. 물론 반대로 아무 문제없다는 이야기들도 있으나, 아동의 신체적 발달은 단순히 짧은 시기에 외형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미 이러한 아동학대가 적잖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 사회의 채식주의자 부모들에 대한 무관심은 여러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인 관심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법률적인 대응 방안을 만드는 것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1. 좀 심각한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이 키우는 개나 고양이 사료도 고기가 안들어간걸 고르기까지 한다. 내 보기엔 동물학대다. [본문으로]

채식주의자 비판

식이 2013. 4. 15. 19:30 Posted by 해양장미


 한국 사회에서도 이제 채식주의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점차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고, 사회적인 힘을 발휘하는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필연적인 문제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채식주의자들은 충분히 검증된, 과학적인 주장을 배척하는 경향이 짙으며 맹신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온갖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굳이 채식을 선택하겠다면 그것은 각자의 자유다. 그러나 그것을 자녀에게 강요하거나, 타인에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유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미 채식주의자들은 다양한 문제를 저지르고 있다.


 이런 문제가 근래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사건은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연재되었던 조경규 작가의 ‘돼지고기 동동’이라는 만화에 대한 채식주의자들의 공격이었다. 그 사건은 채식주의자들의 무지함과 광신성, 그리고 공격성을 투명하게 드러내주었다 할 수 있다. 그 외 고기를 많이 먹는 게 몸에 나쁘다는 막연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런 잘못된 인지들은 식품과 농축산에 관련된 각종 산업과 의료보건 등등에 폭넓은 영향을 끼친다. 특히 한국에서는 철학적 이유보다도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하는 인구가 많다는 주장이 있는데, 쉽게 말해 어리석은 짓이다. 인간은 본래 육식동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조난을 당했다고 가정하자. 문명과는 거리가 멀고, 맨손이다. 어떻게든 스스로 자연 상태에서 먹을 걸 찾고 버티면서 구조대가 오길 기다리거나, 아니면 직접 다른 사람이 사는 곳을 찾아야 한다고 치자. 그럴 때 당신은 뭘 찾아 먹어야 할까?


 채식주의를 이런 상황에서도 고집한다 가정하자면 당신은 아마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연에서 인류가 먹을 만한 식물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나마 이른 봄이나 가을의 짧은 기간동안에는 먹을 게 많지만, 그것도 그야말로 한철이다. 나무 열매 같은 건 라즈베리 한줌이라도 야생에서 찾으면 나름 성공한 거다. 인간은 장기적으로 볼 땐 최소한 하루에 1500~2000kcal은 먹어야한다. 여기에 질병에라도 걸리면 더 잘 먹어야 하고, 먹을 거 찾는다고 종일 돌아다니려면 훨씬 더 먹어야 한다.


 모든 조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권장하는 건 당연하게도 육식이다. (베어그릴스의 시범을 보시라.) 원래 인간은 그렇게 살았고, 그런 만큼 생각보다 사람은 사냥을 잘한다. 조개를 캐고, 게를 잡고, 물고기를 낚고, 덫 등으로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이런 동물성 음식은 훨씬 집약적인 에너지, 특히 양질의 단백질을 제공한다. 인간은 굉장히 발달한 두뇌와 섬세한 신경 전달 체계 및 근육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에너지와 단백질이 필요하다. 애초에 충분한 육식이 제공하는 에너지와 단백질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구조다. 물론 당연하게도 성장기때는 훨씬 더 많은 단백질이 필요하다.


 채식주의자들은 엄청나게 많은 콩을 먹음으로 단백질을 보충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게 친환경적이라는 주장도 한다. 그런데 숙고할 필요가 있는 게, 콩단백만으로 인간은 충분히 균형 있는 단백질을 섭취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런 막대한 양의 콩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매우 고도의 테크놀로지가 필요한 일인 동시에 그리 자연적이지는 않은 일이기도 하다.


 절대로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그렇게 엄청난 양의 콩을 확보할 수 없다. 콩을 그렇게 확보할 수 있게 된 건 인류사 전체로 보면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좀 다른 말이지만 채식주의 하시는 분들, 혹시 콩을 키우는 과정이 어떤지 아실까?


 콩은 종자만 먹는 작물이 아니다. 콩잎은 꽤 맛이 좋은 잎 중 하나다. 그리고 맛이 좋다는 건 사람 입에만 맛이 좋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벌레가 꼬인다. 그럼 콩을 잘, 많이 수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벌레를 죽여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거의 모든 작물이 마찬가지다.


 농업은 그 자체로 다른 종족과의 전쟁이나 다름없다. 다른 동물을 죽이기 싫어서 채식을 하겠다는 꿈이 있다면, 직접 밭을 갈고 작물을 심어보길 바란다. 그러면 농업 또한 평화롭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온갖 해충뿐 아니라 새들이 날아와서 낱알을 노리고, 때로는 고라니나 멧돼지, 그리고 두더지가 당신의 작물을 노릴 것이다. 귀여운 토끼 한마리만 밭에 침입해도 그 나름대로의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식물들과의 전쟁은 적잖은 경우 더 첨예한 갈등이다. 채식주의자가 식물에게까지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기울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냥 돈을 내고 패셔너블하게 ‘난 평화주의자야!’ 라고 달콤한 꿈을 꾸며 채식을 하면 이런 건 신경을 안 써도 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밭에서 나온 거의 모든 작물은 위에 말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동물을 죽이지 않는 농업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도시의 시민들은 가시적인 먹이 그물에서는 빗겨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모든 동물은 먹고 먹히고, 빼앗고 지키는 관계 위에 서 있다.


 물론 잔혹함을 눈앞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감정 자체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채소가 거기서 예외가 되어있는 건 아니다. 모든 농업은 수많은 동식물을 죽이면서 결과물을 낸다. 밭에서 자라는 거의 모든 것들은 식물계의 가축들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그렇게 연하고, 크고, 환상적인 맛을 내는 식물이 대량으로 절대 존속할 수가 없다. 인간이 다른 종족들의 손에서 그들을 보호해주기에 그들은 대량 번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도 F1이라고, 우리가 먹는 농작물의 반 이상은 불임 작물로 유전 변이된 것들이다. 그 인공성은 동물보다 훨씬 더하다. F1 작물들은 씨가 맺히지 않는다.


 감정적으로 고기를 먹기 힘들다는 것과 채식주의를 바람직한 것으로 포장하는 것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채식주의는 근래 유행하는 신흥 종교로, 과학이나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식주의자들은 자신을 선량하다고 생각하고, 채식주의를 전도하려 애쓰며 육식을 좋아하는 이들을 공격하곤 한다. 이런 행동 패턴은 사이비성이 있는 종교 활동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한 어리석음의 예시는 이젠 더 이상 찾기 어렵지 않다.


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1377&contents_id=24836&leafId=1377


 예를 들자면 이런 것. 이 글은 고고학적 사실마저도 의심하는 맹신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어이없는 거짓말도 하고 있는데, 우선 힌두교도가 고기를 안 먹는다는 주장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힌두교 지역 인도음식에 고기요리가 없다고 생각하시나? 힌두교도도 고기를 많이 먹는다. 소고기를 안 먹긴 하는데 (이 또한 모든 힌두교도가 아예 안 먹는 건 아니다.) 대신 양고기나 닭고기를 많이 먹는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사람들은? 그들은 눈에 보이는 고기의 물리적인 부분은 먹지 않는다. 그러나 육수는 먹고 있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에 근거한 거라면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사실 별 의미 없는 행위다. 불교의 승려? 또한 보편적인 오해와는 달리 승려들도 육식을 한다. 불교엔 그런 계율이 없다.


 또한 채식주의가 건강에 나쁘다는 근거는 정말 많이 밝혀져 있다. 이는 영양학계 및 의학계의 메인스트림에 해당한다. 물론 그 반대의 주장도 있지만, 이는 채식주의자들의 진영에서 나오는 소수의 의견이다. 마치 생물학에서의 지적설계론이나 창조주의가 가지는 비과학성과 유사하다. 맹종이 학술을 침해하는 것이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인류는 채식주의를 실행한 적이 없다.


 현대의 육류가 옛날보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주장 또한 어느 정도 오해가 있다. 일단 그 무엇보다도 현대식 도축 과정이 훨씬 더 인도적이다. 재래식 도축 방식은 동물에게 적잖은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좀처럼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급적 고통 없는 도축을 해야 고기질이 좋다는 걸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오직 이슬람교도와 유태교도만이 이러한 합리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이들이 채식주의자들보다는 현명하다. 사육방식 또한 옛날이라고 꼭 현대보다 인도적이었던 게 아니다.


 또한 비건이 아닌 많은 채식주의자들이 포유류와 조류, 그리고 어패류를 차별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대체 그러한 구분에 어떠한 합리성이 있는지 심각하게 의심스럽다. 감정적으로 포유류를 먹기 싫다면 그런 거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각자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권장사항은 못된다. 비합리적 이유를 들어 그것을 합리화시키려 하기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어패류를 먹는 게 포유류나 조류를 먹는 것보다 윤리적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무지와 망상, 그리고 감정적 편향에서 비롯된다. 아마 팔딱이는 생선을 잡아본 적이 없으니까 마음이 편한 거겠지.


 채식주의자들은 채식을 우월한 것으로 규정하려는 망상을 그만둘 필요가 있다. 물론 당신들이 채식을 하건 어쩌건 그건 자유다. 다만 그것을 당신의 가족과 이웃에게 무리하게 권장하거나 강요하지 말라. 당신들의 합리화와 무지, 그리고 공격적 전도는 이 땅의 프로테스탄트가 하는 그것과 정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물론 단백질 섭취의 부족이 그러한 망상과 공격성을 만들어내기 쉽기는 하다. 어쩌겠는가. 영양 실조로 신경 전달 물질이 충분하지 못한 것을.


 글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은 조용히 채식을 실천하는 분들에 대한 글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의 취향 또는 개인적 철학이나 종교로 인해 채식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자유이고, 각자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만큼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에도 정당한 기준이 필요하다. 채식을 실천함으로 심신의 건강을 잃을 수 있으며, 그것이 꼭 평화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미리 감안해야 한다. 채식주의자들이 공격적으로 잘못된 지식을 퍼뜨림으로 인해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