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추천 브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iK27wBt-zo

 


 조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왜 망했는지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이것부터 정리합니다. 광복 후의 혼란과 분열상을 정리하려다 보니 많이 앞쪽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합니다. 역사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역사의 중요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 역사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합니다.

 

 본문은 미흡할 수 있으니 읽는 분들이 내용을 보태주시거나, 잘못된 점이 있으면 수정에 도움을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수의 대중들은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후기를 망했어야 했을 나라라거나, ‘숨만 붙어있던 나라같이 생각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건 과히 폭력적이고 무식한 이야기입니다. 시기만 봐도 병자호란은 1637년의 일로, 아직 유럽인이 뉴질랜드를 발견하기도 전이고 르네상스가 막 끝나고 근대의 여명이 시작되던 먼 옛날입니다. 병자호란에서부터 대한제국이 문을 내리기까지는 무려 273년이나 걸렸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패전과 대기근 등으로 어려움을 겪긴 하지만 다시 일어납니다. 전근대 국가임을 감안할 때 조선의 행정력과 사상은 결코 세계적으로 뒤떨어지는 편이 아니었고, 민중들의 삶도 최악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일단 병자호란 이후 시점에서 인조의 정통성 문제부터 이야기해볼까요? 이쯤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인조는 광해군에 반정을 일으키면서 왕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신권이 강해졌고 이에 더해 병자호란에서 패전하면서 권위를 잃었습니다. 청은 인조의 아들이었던 소현세자를 이용해 인조를 압박했고, 인조는 소현세자를 멀리하였으며, 청에 갔다 돌아온 소현세자가 급사하면서 인조는 입지가 더 나빠졌습니다. 그 이후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둘째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고, 소현세자의 아내였던 강씨에게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사약을 내립니다. 이 사건은 인조에 대한 평가를 더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왕실의 정통성 문제를 심화시킵니다. 본래 종법대로라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세손이 되어야 했거든요.

 

 그나마 인조는 대중적인 평이 최악인 것 치고는 그만큼 무능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가 완전히 무능한 인간이었다면 신하들이 떠받들어 왕으로 모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온갖 난을 겪으면서 왕좌를 지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왕좌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닙니다. 기울어버린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도 꽤 했습니다. 흔한 이미지와는 달리 광해군은 쫓겨날 만큼은 암군이었고, 인조가 광해의 잘못을 많이 복구하였습니다.

 

 이후 봉림대군은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되었는데, 정통성은 약했지만 효종은 유능하고 현명한 왕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림들은 병자호란의 패전, -청 교체, 효종의 정통성 문제 등으로 관직을 거부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효종은 북벌론을 뻥카로 주장하면서 사림들을 끌어들입니다. 효종의 북벌론은 명분을 쌓기 위한 것이었을 뿐, 결코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조선이 무슨 수를 써도 청을 이길 수는 없었고, 효종은 어릴 때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왕자여서, 청이 얼마나 강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효종은 즉위 10년 만에 종기를 침으로 치료하다가 과다출혈로 사망하는데, 조선 왕 27명중 종기로 5명이 죽었을 정도로 전근대 의학은 형편없었습니다. 전근대의 삶이란 그 누구라도 죽기 쉽고 운이 아주 좋아야 오래 살 수 있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효종이 죽으면서 그 유명한 예송논쟁이 벌어집니다. 예송논쟁은 통상적인 인식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리학은 조선 세계에선 종교이자 철학이자 세계관이었습니다. 이는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에서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온전히 벗어난 철학과 과학이 있기 힘들었던 것과 같습니다.

 

 예송논쟁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조의 정비는 인열왕후 한씨였는데, 42세에 산욕열로 사망합니다. 그 후 15세의 장렬왕후가 인조의 계비가 됩니다. 인조와는 29살 차이였고, 효종보다도 5살이 어렸지요. 소현세자와 효종은 모두 인열왕후의 자식이었고, 장렬왕후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장렬왕후는 자의대비가 되었는데, 명목상 연하이나 효종의 의붓어머니인 자의대비가 몇 년 상복을 입느냐가 1차 예송논쟁의 주제였습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하면, 장자가 아닌 효종이 정통이냐 아니냐 논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효종의 아들이자 효종 다음 왕이었던 현종의 정통성까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정통성은 현대에도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도 어처구니없이 논란거리가 되지요? 예송논쟁은 그보다 훨씬, 비교할 수도 없이 중요한 논란거리였어요. 왕이 정통이냐 아니냐는 보통 논란거리가 아니지요.

 

 어쨌든 당시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1년론이 받아들여집니다. 서인은 1년론을 주장하면서도 장자도 1년 상을 치른다는 경국대전을 빌어 현종의 정통성을 애매하게 인정했지요. 여기까진 시끄럽긴 하지만 어쨌든 수습이 될 수 있었습니다만...

 

 그로부터 15년 후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친모인 인선왕후가 사망합니다. 그런데 자의대비는 이 때도 생존상태였습니다. 인선왕후보다 자의대비가 어렸으니까요. 이 때 자의대비가 상복 얼마짜리 입느냐로 또 싸우게 됩니다.

 

 일단 문제가 15년 전에 경국대전의 룰을 따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 룰에선 장자와 차남의 상복이 1년으로 같았는데, 며느리는 맏며느리는 1년이고 맏며느리가 아닌 경우 9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강씨는 사약을 받았으므로 인선왕후는 맏며느리라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인들은 1년 상복으로 처음에 결제를 받았는데, 그 다음엔 효종은 장자가 아니므로 9개월짜리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결국 현종이 분노했고, 자의대비는 남인들 주장대로 1년복을 입게 되었지요.




 여기서 또 예송논쟁의 중요한 점을 이야기하자면 서인과 남인은 다른 학파였다는 것입니다. 서인은 오천원 모델 율곡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남인은 동인의 분파여서 천원 모델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게 왜 중하냐 하면, 이 철학이 단순한 형이상학을 넘어 정치철학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대소신료들은 어쨌든 현실을 보고, 현실을 다루는 사람들이다보니 세계관대로 현실을 이해하고,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잠시 애초에 성리학이 무엇인지, 왜 조선이 성리학에 빠졌는지부터 이야기해보지요. 공자와 맹자가 유학을 정립할 때만 해도 유학은 그냥 지극히 실용적이고 현세적인 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후한 말 유학은 강한 도전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샤카족의 성자(샤카무니-이 산크리스트어 음차가 석가모니입니다), 고타마 싯타르타의 종교가 그것이었습니다. 그 때 중국에 유입된 거지요.

 

 후한이 온갖 군벌의 득세 끝에 멸망하고 삼국-서진-동진/오호십육국-남북조라는 400년간의 난세를 거치는 동안 불교는 중국 전역에 널리 퍼집니다. 도교도 부흥했고요. 난세는 유학이 힘쓸 수 없는 시기였지요. 이후 통일왕조로 자리 잡은 당나라에서도 불교와 도교가 활성화되었었습니다. 당은 다양한 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국가여서 크리스트교 네스토리우스파의 현지화 버전인 경교, 배화교 또는 현교로 불리던 조로아스터교, 현대엔 사라진 마니교 등도 퍼졌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듯 종교라는 건 문제를 곧잘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당나라 시절 불교도 꽤 문제가 많았다지요. 그리고 당의 뒤를 이은 송대에 나오게 된 성리학은, 쉽게 이야기하면 불교를 비판하는 관점의 유학입니다. 불교철학까지 포함하여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면서, 불교의 내세나 도교의 선계 같은 걸 반박한 것이랄까요. 다시 말하지만 유학은 출발부터 현세적인 학문입니다. 그런데 불교나 도교 같은 걸 나름 논리적으로 반박하려다 보니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된 것이지요. 그렇더라도 성리학의 목표는 현세적이었습니다. 일례로 성리학의 시초 주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귀신이 내세에서 돌아온다는 식의 발상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조선 건국 당시 성리학이 중시되었던 건 필연적이었습니다. 고려또한 국교나 다름없던 불교의 타락이 심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고려 말엔 사찰들이 부패한 기득권이자 적폐였습니다. 개혁적인 사대부들이 불교를 논박할 수 있는 성리학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불교는 금지까지는 아니라도 억압됩니다.

 

 다만 성리학을 연구하다보니 내부적인 모순 및 설명 부족 같은 것이라거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라거나 하는 게 발견되게 됩니다. 이는 당연하리만큼 세계의 법칙을 철학적으로 보다 잘설명하려는 시도로 이어졌고, 이런 시도 자체는 학술이 발달하면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만 조선은 현상을 관측하는 기술과 실험으로 검증하는 과학적 절차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고, 그에 관념적인 것이 중시되는 경향이 한동안 이어집니다. 사실 이런 경향은 현대의 인문학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이기론으로 돌아가서, 이기론을 쉽게 설명하면 이는 자연법칙 같은 거고 기는 현상이며 만물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어감이 다소 변하긴 했으나, 참된 이를 뜻하는 말이 진리라는 것에서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는 를 어느 정도 직관할 수 있고, ‘는 현대에 이해되는 에너지 같은 개념이라기 보단 우주 만물의 생성소멸이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한다고 옛 사람들은 생각했었습니다. 한편으로 성리학의 성이란 사람 마음의 성정중 성, 즉 본성을 뜻하는 것으로 사람의 본성은 곧 ()리라고 생각한 것이라 이해하면 쉽습니다. 그리고 성정 중 정, 즉 감정을 기라 이해한 것입니다. 성리학은 철저히 인본주의적이며, 성선설에 해당합니다. 이기론은 세계보다도 인간을 해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기의 관계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황과 이이는 견해가 달랐습니다. 이황은 좀 더 전통적인 시각이었습니다. 이가 먼저고, 더 중요하고, 더 존귀하다는 관점입니다. 이런 사상의 양상은 서양에도 있고, 어느 정도 인류 보편적인 옛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이것을 주리론이라 표현합니다. 이데아가 더 중요하다거나 육체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다거나, 그런 식 말입니다.

 

 그런데 이황과 정반대로 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주기론자가 있었으니, 송도삼절 중 하나로 꼽힌 화담 서경덕입니다. 이황과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그는 중국 성리학과는 다른, 독창적인 기 중심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다른 송도삼절 둘은 황진이와 박연폭포라 했지요. 그러나 서경덕의 후계 학파는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한 세대쯤 후의 인물인 율곡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을 어느 정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황의 주리론과 조화시킵니다. 이이가 주장한 것은 서경덕의 주기론과는 좀 다른 이기일원론인데, 이와 기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황 학파쪽에서는 이이를 주기론자라 공격하기도 했고요.

 

 조선의 붕당정치는 이이 시대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이는 붕당의 갈등 문제를 처음엔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군자들끼리 그렇게 치졸하고 집요하게 수백 년 간 싸울 거라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그지만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는 붕당의 한 일파인 서인의 시조가 됩니다.

 

 이이 본인은 붕당에 초연했지만 관직 할 때 적이 많았습니다. 뭐든 다 따지고, 선배 학자들 끝까지 비판하는 스타일이라 온갖 악감정을 만든 것입니다. 또 원체 잘난 천재에다 실무능력까지 있다 보니 질투도 많이 샀지요. 결국 이이의 제자들과 이이 시대에 밀려났던 훈구파의 후예들이 하나의 붕당 파벌이 되니, 그것이 서인입니다.

 

 이후의 붕당정치는 결국 본질적으로 집안 인맥 파벌 싸움이긴 합니다만, 다른 면에서 보면 퇴계학과 율곡학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예송논쟁으로 돌아가서, 주리론(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이 어떤 해석을 가능하게 했느냐하면, 이기론에서 이는 왕으로, 기는 사대부로 비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해석은 예송논쟁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로까지 이어집니다. 왕실의 법도와 사대부의 법도가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요.

 

 여기서 이기이원론은 왕실과 사대부의 법도는 다를 수 있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그렇지만 이기일원론에선 이와 기는 다르지 않다는 사상이니, 왕실의 법도와 사대부의 법도는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연장선상에서 율곡-서인의 이기일원론은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만민평등사상 비슷한 것까지 발달합니다. 누구나 사대부이며, 왕이고 노비고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는 철학적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실제 서인들은 신분제를 폐지하고 조선을 자영농의 국가로 만들어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상황이 좋았다면 그보다 좀 더 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후의 역사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지요.

 

 대조적으로 이기이원론은 이와 기의 위계를 인정합니다. 퇴계학파였던 남인들은 이라는 절대적 도덕 및 권위가 있고, 그에 대한 관념을 강화하고 질서를 회복해야한다는 입장이었지요. 그런데 현종 당시 붕당 파벌로는 서인이 남인보다 강했습니다. 그리고 현종은 남인에 약간 힘을 실어주고 균형을 맞춥니다. 사실 현종 입장에선 남인이 좋을 만도 했습니다. 서인의 권력을 현종이 바로 어쩌기 어려웠습니다만.

 

 그리고 현종은 원래 몸이 약했는데, 하필 2차 예송논쟁이 마무리되자마자 죽습니다. 이후 숙종이 즉위하지요. 예송논쟁은 그 사안의 중요함과 역사적 의미에 비해선 아무도 죽은 - 자연사 및 스트레스사 제외 - 사람이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논쟁이었습니다만, 숙종 대에 후폭풍이 발생합니다. 사실 유럽 같은 데선 예송논쟁 같은 거 있으면 그냥 전쟁이었지요. 어쨌든 조선 사대부는 나름 평화로웠던 겁니다.

 

 이런 와중에 즉위한 숙종은 조선 왕 중 가장 강한 왕권을 지닌 군주였고, 타고난 정치인이었으며 다혈질에 냉혈한이었습니다. 숙종은 조부 효종과는 대조적으로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효종의 장자인 현종의 장자였고, 3대 독자였습니다. 만약 숙종을 폐위시킬 경우 대신 앞세울 대군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신권이 극단적으로 강했던 인조 시대에서 4대만에 왕권이 극단적으로 강한 시대로 변한 것입니다.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의 책임을 물어 서인들을 내 쫓고,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귀양 보냅니다. 그리고 이후 숙종은 47년간 재위하면서 전기 20년 동안 3번의 환국을 일으키며 붕당정치를 뒤흔들어버립니다.

 

 붕당-탕평-세도-몰락으로 이어지는 조선후기사에서 숙종은 강한 왕권에 의한 탕평으로의 전환을 시작한 왕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으로 인해 왕도 사대부 중 하나라는, 정도전에서부터 이기일원론의 율곡을 거쳐 서인까지 이어지는 조선성리학의 한 흐름과 발달 양상은 멈춥니다. 즉위하자마자 서인을 쫓아내는 시점에서 숙종은 왕과 사대부의 격차와 위계를 선언한 것이었으니까요.


(다음 편에 계속)

 스스로를 마초라 부르는, 그러나 진실은 찐따에 좀 더 가까운 이 시대의 다수 남성들은 그들의 ‘평균적으로 박약한’ 지적 수준 때문에 남자는 원래 가사노동을 안 하는 거라고 믿으며 - 그러나 종종 마지못해 하며 - 숨을 쉬고 있다. 그러나 남자들이 집안일을 안 하게 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사랑방’이라는 단어는 다들 알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이 단어가 정확히 뭘 뜻하는지 잘 모른다. 전통한옥의 구조를 보면, 사랑방은 안방보다 대문 쪽에 가까이 있는 일종의 손님 접대용 방으로, 남성이 사용하였다. 대조적으로 안방은 여성의 공간이었고 부엌과 접해 있었다.


 조선 문화에서 남성들은 안채의 주인은 아니었지만, 사랑채의 주인은 되었다. 그런 만큼 노비를 충분히 둘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면, 당연하리만큼 ‘가사노동’을 했다. 이 가사노동은 여성들이 하던 요리, 빨래 등은 아니었지만 보다 중요할 수 있는, 남성적인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건축, 건물 보수, 장작 패기, 장작 마련, 쇠죽 쑤기 등등.


 이런 일들을 옆에서 구경이라도 해 보면 알겠지만, 남성들의 가사노동량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옛날엔 어지간한 집은 거의 가장 본인과 일가친척, 이웃 등이 힘을 합쳐 직접 지었고 끊임없는 보수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초가집은 매년 지붕의 건초를 갈아야 하는데, 그것은 주로 남자들의 일이었다. 또한 진흙으로 쌓은 벽은 시간이 지나면 쉽게 무너지기 때문에, 그 역시 지속적인 보수가 필요하다. 농사에 필요한 소를 키우고 다루는 것도 주로 남자들의 몫이기 때문에[각주:1], 가정에서 남성들의 노동력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당시 남성들이 가정 내에서 대접을 잘 받았던 건 어느 정도 이상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또한 당시엔 남자들이 아들들을 교육시켰다. 남자의 일들을 남자에게 배우면서 자랐던 것이다.


 그러던 조선 남자들이 집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건 일제시대와 그들에 의해 시작된 급속한 산업화 때문이었다. 일본은 제국주의 시대의 그 어떤 다른 국가보다도 자신들의 식민지를 체계적으로 근대화시키고자 했다. 당시 일본 내에는 크게 두 가지 세력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세력은 장기적으로 조선 등의 식민지를 일본 제국의 영토로 만들 계획을 품고 있었다.[각주:2] 일본이 당시 조선인들에게 했던 행동들을 돌아보면 비난할 만한 것들이 꽤 있지만[각주:3], 그들은 그런 여러 가지 어이없는 ‘근대적인’ 행위들을 자국민에게도 했었다. 일례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일본인이 서양인들에 비해 유전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본을 들른 서양인 남자들의 유전자를 최대한 받아 일본인을 유전적으로 개량하려고 들기도 했었다. 이 시대에 그런 행위를 하면 막장국가 소리 듣기 딱 알맞겠지만, 그때의 일본인들은 진지했었다.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조선을 점령한 후 근대화를 시키려 들었으니, 딱히 악의가 크게 없었을지는 몰라도 당하는 쪽에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긴 했다.


 여하튼 산업화 과정에서 일본은 일단 남자들을 집에서 내보냈다. 농경 사회는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남자들은 일터에서 일을 하고 돈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제는 학교를 세워 그 동안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던 여성들을 교육시켰고, 그 여성들은 일제에게 교육받은 방식으로 아들들을 가르쳤다. 나쁘게 말하면 식민지형 찐따들의 최초 생성이었다.


 아버지들이 아들을 교육시키지 못하게 되면서, 남성들의 문화는 급속도로 단절되었다. 조선 시대에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귀고리를 했고, 집안에 두루미와 매를 키우며 시와 서화와 활쏘기를 즐겼다. 그러나 일제시대 이후엔 윤리적이고도 바람직한 취미들은 거의 사라졌고, 문화적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대단히 퇴폐적이고 말초적인 유흥 문화였다.[각주:4]


 새로운 식민지 남성들은 바람직한 삶의 모델을 새로 만들어야만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일제가 시작된 지 100년도 더 지난 오늘날에도 평균적인 한국 남성들의 문화는 다분히 불건전하다. 한국은 세계 최고액의 스카치위스키 소비국이다.[각주:5] 그리고 이 위스키는 대부분 룸살롱에서 소비된다. 알려지기론 한국의 GDP의 5%정도가 성매매 또는 유사성매매가 포함된 유흥업에 사용되고 있다. 통계 조사 결과 한국 남성의 성매수율은 50%가 넘는다. 그에 비해 도서구매율은 여성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 해도 당장 그때부터 남성들이 집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남자들이 집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 시기는 오래 이어졌다. 집이 전통가옥인 이상, 남자들은 집안일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다. 끊임없이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박정희 시대에 들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박정희는 노동 시간을 대폭 늘렸고, 남성들을 반영구적으로 가정에서 쫓아냈다. 물론 남성들만 집에서 쫓겨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는 기혼 여성의 근로비율이 낮았다. 또 박정희 시대에 시멘트를 사용한, 전문 건설업자들이 지을 수 있는 그런 주택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공동 주택이 보급되었다. 이 새로운 주택들은 남성을 완벽하게 집안일에서 해방시켰다. 난방 방식도 연탄으로 바뀌었다. 이젠 남자들이 집을 짓고, 고치고, 장작을 패고, 쇠죽을 쑬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 시기는 대략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 정도다.


 그리고 1990년대부터는 여성들의 본격적인 사회 진출이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남성들은 기존에 여성들이 하던 집안일을 분담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러나 아직 남자들은 그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다. 이미 그 때로부터 근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젊은 남자들조차 여자가 밥상을 차려주지 않으면 식사를 제대로 못 챙기곤 한다. 수많은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남편을 ‘우리 집 큰애’라고 부른다. 그런 소리를 듣는 남자들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화신처럼 행동하곤 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내 여자가 된 엄마’쯤 되는 것 같다.[각주:6]


 한국에 널린 아파트들은 집주인이 직접 고치고 보수할 필요도 없고, 하고 싶어도 쉽지 않다.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거나 위험한 경우가 많다. 난방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장작을 패기는커녕, 연탄을 갈 일조차 없어졌다. 한편으로 가사 도구들의 발전은 어쨌든 집에서 여성이 하던 일을 줄였기 때문에, 여자들은 투덜대면서도 혼자 힘으로도 가사 일을 어느 정도 다 할 수는 있다. 남자들은 굳이 자신까지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가사 노동에 있어 아파트 주거가 일반화되지 않은 외국은 남자들 일이 여전히 많다. 그들은 잔디를 깎고, 정원을 가꾸고, 집과 차를 고친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집에 애정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가정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다.


 대조적으로 박정희식 산업 모델은 남자들을 거의 완벽하게 집 밖으로 몰아내 버렸다. 그 과정 속에서 야근은 일상화되었고, 남자들은 집안일에 면책 특권을 받았다. 그러나 그 세월은 불과 2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다. 이젠 시대가 변했지만, 남자들은 여전히 그 면책 특권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잘 통할 리 없다.


 당장은 집안일을 안 하는 게 남성들에게 이득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하다. 무엇보다도 자식들이 문제다. 자식들이 보기에,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집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빈둥거린다. 그들의 어머니가 뼈 빠지게 바깥일을 하고, 집안일까지 해서 식탁까지 차려주는 동안 아버지들은 잔소리나 안 하면 다행인데, 보통은 일은 안 하면서 잔소리까지 한다. 음식이 맛이 없다는 둥, 요즘 너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둥.


 물론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건 가정을 지켜나가고 화목함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아내는 그것을 이해할지 몰라도, 자식은 아니다. 자식들은 꽤 나이가 들기까지는 돈의 흐름을 체감 상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자식들의 눈에 비치는 아버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에 가정의 진정한 구성원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그렇게 된다.


 직장에서 괜찮은 사람인데 집에서 폭군이 되는 아버지는 흔하다. 집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세월이 결국 그들이 집에 있는 것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직장에서 은퇴한 남성의 삶은 많은 경우 비참하다. 대체로 그들은 평생 집에 돈을 벌어다 줬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가족들에게는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집 안에 와서는 오직 받기만 하고, 다른 가족들을 불편하게 해왔기 때문이다.


 대화가 안 돼서? 그 이유도 중요하다. 그러나 어머니와 자식들 사이에도 대화가 잘 안 되는 집은 흔하다.[각주:7] 그렇지만 그 갈등 관계는 보통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루어질 뿐, 가족으로 못 느끼는 양상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어쨌든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물론 예외도 있지만) 집안일을 도맡아 하기 때문에, 자식들 입장에서는 갈등의 요소가 있더라도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내가 먹을 식사를 해주고 내가 입을 옷을 빨아주는 사람과는 밀접할 수밖에 없다.


 가정이라는 곳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남자들은 결국 가정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의 역할과 일을 가정 내에서 만들 필요가 있다. 잔소리쟁이나 자기자랑꾼처럼 모두가 싫어하는 위치에 있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자식들에게 무언가 필요한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좋은 아버지의 조건이다.


 물론 자식들만 문제는 아니다. 황혼이혼율이 괜히 높은 게 아니다. 아내 입장에서도 남편이 밖에서 일을 하는 게 고생스러울 거라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한 공감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게다가 요즘은 여자들도 거의 일을 한다. 같이 일하고 피곤한 상태인데 집에선 남자 쪽만 주로 놀면 여자 눈에 좋아 보일 리가 없다. 처음에야 애정으로 봐 준다 쳐도, 수십 년 그런 세월이 쌓이면 싫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남자도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건 딱히 페미니즘 같은 게 아니다. 남성은 농경 사회 이후 언제나 집에서 일을 해왔다. 다만 아주 짧은 기간,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아주 잠시 남성이 집안에서 몰아내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 혼란기도 이제 끝났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집안들을 찾음으로 가정의 일원으로 복귀해야한다. 안타깝지만 가정에서 자신의 일자리가 없는 남자는 결국 돈 벌어오는 기계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 그렇게 보이게끔 행동하기 때문이다.

 


  1. 일소를 다루는 건 다소 위험성이 있는 일이고, 여성에게는 쉽지 않은 면이 있다. [본문으로]
  2. 만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지 않았다면, 이 계획은 실제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3. 향후 부패한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일본 제국은 좀 다른 성격의 국가가 되어버려서, 전쟁의 확대와 함께 조선을 처참하게 수탈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을 처음 합병할 당시의 일본은 딱히 꼭 그런 성격의 국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결과 2차 대전 이후 다른 서구에게 점령당했던 식민지들보다는 일제에게 지배당했던 식민지들의 경제 성장이 두드러지게 빨랐다. 물론 일본이 서구보다 더 못한 점도 있다. [본문으로]
  4. 정확히 말하면 그 보편성에서는 민주화 이후 시대가 더 심하다. [본문으로]
  5. 소비 양상을 보면 더 나쁘다. 에이지드(숙성년수)가 높은 위스키가 많이 팔리고, 싱글 몰트 시장은 작다. 위스키를 음미하기보다는 원샷을 하고 폭탄주를 만들어 먹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일부 브랜드의 위스키는 아시아 수출용이 내수용보다 도수가 낮다. [본문으로]
  6. 설명을 하기 위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개념을 이야기했을 뿐,, 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7. 물론 보통 아버지들이 더 심각하다. 평균적인 한국 아저씨들의 화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 대체로 말 자체를 잘 못하는데다 상대의 감정도 잘 못 헤아린다. 전반적인 문화적 결함 탓으로 보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