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지하경제 양성화 공약과는 정반대로, 근래 지하경제의 성장은 내 눈에까지 가시적으로 보이고 있다. 특히 그 움직임 양상이 조세회피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장기적 투기라는 점에서 경제에 끼칠 마이너스가 심각하다 할 수 있겠다.


 이 문제가 시작된 주된 원인은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금액이 올해 1월 1일부터 4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내려갔다 데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금액 이하의 금융소득에 대해서는 (모두들 적금 탈 때 경험해봤겠듯이) 15.4%의 세금을 일괄 부과하게 된다. 그런데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금액 이상의 금액에 대해서는 종합소득으로 계산하게 된다.


 종합소득은 누진세율이 붙기 때문에, 이는 결국 금융소득에 대한 세율이 증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이는 사회주의적인 법률이고, 근래 한국 사회가 사회주의적인 흐름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일례이다.


 그런데 이렇게 과세표준을 바꾸면 실제로 서민에게, 그리고 국가와 사회에 좋을까?


 이제 본문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사회주의와 초기 케인즈주의가 실패한 원인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과세를 늘린다 해서 그만큼 세수가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해당 시민이 받아들이지 않는 과세는 결국 강경한 조세저항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금액 감소에 대하여, 시민들은 결코 그냥 과세당하지 않는다. 투자자들은 새로운 기준에 맞춰 최대한 절세하는 방향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성하였다.물론 이 과정은 필연적인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정부가 커지면 커질수록 비효율적이라는 말 속에는 이런 현실도 포함되어있다. 정부와 시민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비용’을 만들어버린다. 없었다면 보다 생산적인 데 쓰일 수 있었던 재화와 시간이다.


 그런데 이 포트폴리오의 재편성 방향은 당연하게도, 일정 이상 정부의 눈을 피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사실 절세를 위해 노력해본 사람은 모두가 알겠지만, - 돈 없고 앞으로도 없을 ‘실패한 먹물’들은 이걸 잘 모르지만 - 어떠한 과세 체계도 어느 정도 합법적으로 피해나갈 방법은 있다. 심지어 잘만 하면 100% 피하는 것도 불가능한건 아니다. 다만 이 과정에 그 나름대로의 적잖은 비용이 필요할 뿐이다.


 2월 말부터 4월 말까지 은행에 예금되어있던 정기예금이 약 5조원 줄어들었다. 금리의 저하 문제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 정도의 이탈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 이런 변화의 주요인은 은행권 예금은 정부의 눈에 바로 가시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다. 은행에 예금된 돈은 지급준비율을 제외한 나머지, 즉 정기예금의 경우 예금액의 98%에 해당하는 금액이 다시 대출되어 시장에 흘러 다니는 유동자금이 된다. 그리고 이 유동자금이 흘러 또 예금이 되면, 그건 다시 지급준비율을 제외하고 대출됨으로 호황을 불러오게 된다. 그러나 세금을 피해 지하로 숨기 시작한 돈은 그렇지 않다.


 여기엔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박근혜 정부의 정책도 한몫하고 있다. 분명 역설적인 결과가 나오고 있는 것인데, 현 정부는 국세청에 의해 ‘탈세가 의심될 경우’ 보다 쉽게 금융정보를 받아볼 수 있도록 법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현재의 기준은 ‘조세범죄 혐의’가 있을 때에만 금융정보를 받아볼 수 있다. 당연히 ‘탈세 의심’과 ‘조세범죄 혐의’ 사이엔 엄청난 격차가 있다.


 그런데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세금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금융에 대한 변화는 지하경제가 밝은 양지로 나오게 하기보다는 더 깊이 숨어버리도록 조장하고 있다. 실제 사람들의 대응이 어떨까?


 답은 간단하다. 금괴, 즉 골드바 판매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특히 추적이 쉽게 되는 은행 골드바 판매가 아닌, 추적이 어려운 시중 골드바 판매가 늘어났다. 시중 골드바는 현재 은행 골드바보다 훨씬 비싼 상황이지만, 그래도 없어서 못 팔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정용 금고에 그 금괴들을 보관하기 시작했다. 국제 금값이 크게 내려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다. 금값이 다시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세금폭탄을 얻어맞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여기엔 상속문제가 걸려있기도 하다.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금괴를 몰래 상속할 경우 어지간한 거액이 양지에서 일시에 움직이지 않는 한 그걸 잡아낼 방법은 거의 없다.


 근래 경제민주화니 복지니 하는 좌파적 화두가 대두되었었다. 이 모든 움직임은 그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방안이 성공한 역사는 실제 1970년대 이후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들은 정부의 증세 정책에 결코 순종하지 않는다. 각각의 시민은 개개인이 처한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주체이다. 시민사회는 근래 들어 여러 모로 커졌고, 정보를 다루는 기술이 발전해 대응속도도 과거에 비해 훨씬 빨라졌다. 이제 정부는 시민을 이기는 게 쉽지 않다. 특히 세금문제에서 정부가 상대해야 하는 시민들은 시민들 중 가장 강하고 영민한 자들이다. 힘은 정부가 강할지 몰라도 정부의 일은 결국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에 비해 시민의 대응과 회피는 훨씬 빠를 수밖에 없다.


 현 시점에서, 좌파적 의제에 의한 법률의 변화방향은 결국 가장 진중한 가치투자자들이 설 자리를 좁혀버렸다. 이럴 때 투자 양상은 보다 투기적이고 불법적인, 또는 각종 꼼수를 동원하는 양상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세금을 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 예외적인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 정말 없다. 기부를 하면 했지.


 한국의 경우 금융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조업에서 무역흑자를 크게 기록하더라도 그걸 금융에서 잃는 게 현실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무역흑자를 쉽게 상회하곤 한다. 그런데 정부의 규제 방안은 건전한 투자를 방해하고, 투기를 조장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특히 금을 사서 금고에 넣어두는 것만큼 ‘나쁜’ 투기는 없다. 금고에서 잠자는 금은 다른 투자자산과는 달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주식이나 채권, 또는 예금을 구매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투자다. 그 돈은 결국 제조와 서비스, 각종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투자금액인 것이다. 아니면 유전의 지분에 투자하더라도 그 석유를 퍼 쓰는 한은 투자라 할 수 있다. 물론 석유를 지하에 잔뜩 묻어두고 풀어주지 않으면 그건 수요-공급을 교란하는 투기가 되겠지만.


 금고에서 잠자는 금괴의 금액만큼, 시장에서는 돈이 사라져버린다. 돈은 흘러 다녀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바람직하게 투자된 돈은 엄청나게 증식하며 시장을 활성화시킨다. 투기 소리를 듣긴 하지만 부동산을 사는 것도 바람직한 투자다. 부동산에서는 사람이 살면서 일을 하고, 농작물과 가축이 자라기에 결국 전체적인 사회의 부를 늘리기 마련이다. 아니면 나대지를 놀리더라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그린벨트도 가치가 있으니까. 그러나 금괴는 정말 아무 것도 안한다. 금고 속 금괴야말로 최악의 오리지널 투기다. 매도하기 전엔 절대 움직이지도 않는, 통화의 블랙홀이기도 하다. 특히 세계 금값이 하락추세에 있기 때문에, 만약 크게 하락할 경우 반등이 있기 전까진 금괴가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위에 말했듯 좌파적, 사회주의적 사회 분위기와 그로 인해 생긴 각종 법률이 최악의 투기를 조장하고 있다는 거다. 돈이 숨다 보면 불황이 오고, 불황이 오면 금리를 내리고 돈을 더 풀어야하고, 이러다 보면 물가가 오르고 바람직한 투자자나 서민이 결국 피해를 보기 마련이다.


 자칭 진보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왜 자본주의에서 그래도 사회주의보단 서민이 잘사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략 그 중 99%는 정말 몰라서 말을 못하는 거고, 1%는 자신의 밥줄을 위해 알아도 말하지 않는다.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변경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자칭좌파들은 그런 비난을 앞세울 것이다. 그러나 본래 민주주의의 출발은 ‘국가에 의한 사유재산 및 각종 권리에 대한 침해’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국가는 유사시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사유재산을 뜯어가려 하지만, 개인은 그걸 지키려 노력하기 마련이다. 물론 항상 이러한 갈등관계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은 사회적 비용의 지출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 한다. 그 결정권이 기부는 많이 하는 사람도 세금은 내기 싫어하는 이유다.


 신뢰의 문제도 있다. 내가 사회로부터 많은 걸 이미 얻었고, 내가 세금을 내더라도 사회가 그걸로 더 ‘우리가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조세저항은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이런 건 요원한 일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사실 복지 제도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문제를 일으킬 경우 얼마나 조절하기 어려운지 잘 체감하고 있다. 건강보험재정과 국민연금이 그것이다. 우리는 막대한 건강보험 적자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국민연금 문제도 어찌 손을 못 대고 있다. 그런데도 좌파적 담론들과 분노를 앞세우는 분노조절장애 환자들은 일단 복지부터 늘리자 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복지 재정 왕창 늘려봐야 그 효과를 보는 사람은 소수고, 체감이 잘 되는 경우도 드물다. 그러나 복지를 늘린다는 증세담론에 의해 피해를 입는 통화와 각종 자산, 그리고 기업의 문제는 결국 돌고 돌아 모두에게 적잖은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많은 양의 돈이 빨리, 잘 돌수록 결국 개개인의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돈도 많아진다. 그러나 돈이 어딘가로 계속 증발해버리면, 결국 못 사는 사람의 주머니가 먼저 말라버리기 마련이다. 얕은 개울이 먼저 말라버리듯.


 마지막으로 이 글은 복지 제도를 보다 양질의 것으로 만드는 데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복지의 퀄리티를 늘리는 데 있어 반드시 증세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증세를 하더라도 보다 조세저항이나 부작용이 적은 방향을 선택하는 게 필요하다. 섣부른 증세와 복지만큼 위험한 것도 드물다는 게 이 글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다.



자유의 태동

경제 2013. 2. 14. 19:07 Posted by 해양장미


 과거 조선의 상업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현대 한국인의 입장에서 꽤나 심각한 불운이다. 상업은 기본적으로 도전정신과 창의성이 필요하다. 누군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확천금을 꿈꾸며 허풍을 치고, 가족의 품에서 떠나 상선을 몰고 출항을 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당시만 해도 악덕으로 취급받던 - 지금도 많은 좌파들은 악덕으로 취급하는 - 금융업종에 뛰어들던 유태인들의 후원 하에서 르네상스가 탄생했고, 근대가 태어났다.


 근현대적 자유의 탄생은 그야말로 근현대적인 사건이었다. 자연적인, 사람 대 사람의 유대관계가 강한 소규모 공동체에서 개개인이 누리는 ‘자유’는 근현대적인 자유라 하기는 어렵다. 자연 상태에서의 자유는, 그 집단이 가진 원시적 능력과 관습 안에 종속된다. 누구나 ‘원시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열대 지역 주민들이 가진 것과 같은 자유다.


 그러나 도시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다. 그러기 위해선 도시의 역사적인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아시아에서 도시는 자치권을 가진 적이 딱히 없지만, 유럽의 경우엔 이야기가 달랐다. 도시의 전통을 이해하려면 엘라다(그리스)의 고대 민주주의 시대부터 봐야 하지만, 중세부터 이야기해도 본문의 맥락에서는 충분할 거라 생각한다.


 서로마의 멸망과 게르만 족의 이동 이후, 중세의 도시는 10세기경부터 봉건 세력에 대항하는 동맹체의 기능을 수행했다. 또한 도시는 상공업자와 장인들의 집합소였으며, 시민들은 기본적으로 각 영주의 장원에 속하지 않는 자유인들이었다. 돈을 모은 상인들은 영주에게 토지를 구매해 자치도시를 세우곤 하였다. 이런 자치권을 행사하는 도시는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도시로 도망 온 농노들은 1년 1일 동안 잡히지 않으면 농노의 신분에서 해방되는 것이 그것이었다. 농노들에게 당연히 도시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민’이라는 단어에는 복잡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중국의 경우 정치적인 통일 세력이 되는 것을 오랜 기간 강하게 추구했던 반면, 유럽은 보다 느슨한 종교적 연대로 묶여 있었다. 크리스트교와 교황의 존재는 이슬람 세력을 타자로 하여, 정치적인 통일 없이도 그들을 연대하고 경쟁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동아시아인들이 혈통의 정통성을 보는 동안 유럽인들은 개인적인 능력과 신의 뜻을 보았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게 유럽은 결코 동아시아보다 우월했던 곳이 아니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동아시아는 유럽보다 잘살았었다. 일례로 초기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민중이 살기 좋은’ 나라에 가까웠다. 초기 조선같이 노비도 거의 굶지 않을 수 있는 지역은 지극히 드물었다. 세율도 파격적으로 낮았다. 같은 시대 평균적인 유럽인들의 생활 수준은 조선인들에 비하면 정말 참담하였다.


 근본적으로 유럽인들이 끊임없이 무언가에 도전해야 했던 이유는 그들이 가난했고 먹을 게 없어서였다. 태평성대와 덕치를 추구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유교식 전통은 상당히 오랜 세월동안 동아시아를 잘 먹고 잘 사는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물론 기후와 토지라는 식생의 차이와 기술적 차이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중세 이후 근 500년간 아시아는 유럽보다 따뜻했는데, 이 기간은 동아시아가 가장 번영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또한 동아시아는 유럽에 비해 오랜 기간 더 뛰어난 농업과 의학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제공하는 조직과 체제는 유럽이 우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유럽인에게는 해방의 출구가 있었다. 시민이 가질 수 있는 자유를 위해 농노들은 목숨을 걸고 장원을 탈출할 수 있었고, 시민들은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해 먼 바다로 나가는 위험한 배를 탈 수 있었다. 항해자들에게 안전은 없었지만, 꿈은 있었다. 그런 가능성은 동아시아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근대적인 자유가 싹텄다. 개개인에게 자유는 결코 편한 것만은 아니다. 민중들은 적당한 지배와 안락함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한국만 봐도 더 많은 자유를 민중이 스스로 거부하곤 한다. 특히 타인의 자유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유럽인들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필요했다. 미지를 향해 나아가면서 그들은 신의 이름을 빌어 용기를 얻었다. 유럽인들이 지구에 있는 세 대양을 건널 때, 동아시아인들은 나라의 문을 굳게 닫고 그 안에서만 싸우고 있었다. ‘안에서만’싸우려 드는 성향은 지금 한국인들도 거의 똑같다. 그러나 현재 한국이 그럭저럭 잘 나가는 이유는 결국 바깥으로 진출하는 도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일수록 더 밖으로 나가려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편으로 역사 속에서 ‘왕’은 꽤나 절대적인 이미지를 가지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특히 유럽사에서 절대적인 왕권의 등장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었다. 이는 동아시아 등의 타 지역보다 훨씬 늦은 등장이라 할 수 있다. 16~17세기에 들어서야 유럽에는 전제 왕권이 등장한다. 강력한 왕의 등장은 근대적 국가의 기틀을 만들었고, 교황청의 개입에서 국가를 독립시켰다. 중세가 끝난 것이다. 이 시대 이전 유럽에서 국가의 개념은 근현대의 그것과는 꽤 달랐다.


 그리고 이와 함께 중상주의가 시작되었다. 이 중상주의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대한민국이 대표적인 현대적 중상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시민들은 이 중상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 이것은 소위 민주화 세력의 무능함과 소위 보수세력의 사악함이 합쳐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어쨌든 현재의 한국은 ‘자유주의 국가로의 첫 발을 내딛는데 무진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상주의 국가’쯤 되겠다. 그렇다면 중상주의란 뭘까?


 ‘중상주의자는 국가의 안보를 지키고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라고 간주한다.’[각주:1]


 어디서 굉장히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사실 한국의 소위 ‘보수세력’은 정확히 저 아이덴티티다. 한국의 보수세력을 신자유주의 세력이니, 수꼴이니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정확하지 못하다. 소위 진보좌파세력이 좀 더 똑똑했더라면, 그들은 중상주의를 먼저 떠올렸어야 한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그저 먼 옛날 유럽에 많았던 중상주의자일 뿐이다. 당연히 이들은 자유주의자라 스스로를 칭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


 역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전제 왕권과 함께하던 중상주의 시대에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들은 개혁세력으로의 절대군주에 기대를 걸곤 했다. 그러나 중상주의로 인해 축적된 부는 대체로 자유주의의 발달을 촉진한다. 더 많은 부는 더 많은 권리이고, 더 많은 권리를 지닌 사람이 많아질수록 군주에 대한 각종 압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자유민주주의 혁명’은 발달한 자유주의가 공화정의 부활을 이끌어내는 주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규범과 법, 그리고 기존의 세계관을 뒤엎을 수 있는 의식적 자유의 성장 없이는 시민들 스스로 군주에게 자치권을 빼앗을 수 없다.


 한편으로 한국의 민주화는 워낙 전통이 없었기에 모든 것이 꽤 압축되어 일어났다. 제도는 시작부터 이식되었지만,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진 건 1987년이었다. 군사정권의 중상주의가 성공적이었고, 그로 인해 부가 축적되면서 사회의 각종 요구가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유럽의 민주화가 ‘기존의 규범을 파괴하고, 새로운 규범을 세우는’ 일이었던 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식받은 것이었기에 그것 자체가 새로운 규범이었다.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자유를 달라!’고 외치면서 민주화를 이룩했다기보다는 민주주의를 규범으로 각인시켜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그러다보니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아직도 선거 때마다 윤리성을 소리 높여 외친다. ‘저쪽은 나쁜 년놈입니다!’ 그리고는 자주 진다.


 그러나 민주화 세력은 두 번의 정권, 10년 동안 집권을 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실제로 많은 자유를 늘렸다. 그 시기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근현대적 자유가 태동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어린 자유는 그 탄생 과정이 워낙에 비극적이었기에 매우 위험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로 인한 비극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는 소중하다.


 시민들은 이제 윤리성보다는 나에게 뭔가 해줄 것 같은 사람들을 뽑기 시작했다. 전근대적 공동체는 빠르게 붕괴되어가는 중이고, 제도로 정착된 민주주의가 새로운 자유를 창출하고 있다. 다만 아직 민주화 세력은 그들이 불러온 민주주의 제도를 이해하지는 데 실패 중인 것 같고, 이에 많은 시민들은 그들을 대표할 만한 진정한 지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당선은 늘어난 자유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자유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자들 또한 늘어나고 있다.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할 때, 여기엔 좌우의 구분이 없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사실 이름만 그렇게 붙이지 않을 뿐 이념적으로는 중상주의, 그것도 근대적인 군사주의를 접목한 근대적 중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들은 가능한 한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자 시도하며, 자유가 불러오는 무질서함을 두려워한다. 이 연장선상에서 이들에게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과, 과거의 질서로 회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혼재되어 있다.


 대조적으로 민주화 세력은 사분오열 상태이지만, 그 중 가장 긍정적인 가능성을 지닌 세력은 근래 들어 규범적이고도 느슨한 공동체의 부활을 꿈꾸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유가 내포하는 필연적인 ‘힘’, 즉 고삐가 풀린 자본이 만들어내는 폭력의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다만 문제는 한국에 자유주의의 역사가 지나치게 없었다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주의적인 발상들은 자유주의의 부정적인 면이 극단화된 상황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후 사회주의 중 가장 큰 세력을 지녔던 공산주의는 멸종했고, 기존 자유주의에 사회주의적인 발상을 일부 섞은 것만이 긍정적인 결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엔 애초에 자유주의적인 전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소위 사회자유주의[각주:2]를 바로 만들려 하는 시도는 실패하기 쉽다. 제도는 이식할 수 있지만, 정신은 이식할 수 없다. 사회자유주의 같은 건 제도보다는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자유가 더 억압받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으로 비춰지거나, 실제의 정치적 행위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자칭 진보주의자가 도덕과 공동체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는 것은 사실 비극적 넌센스다. 그런 것을 보수주의자의 몫이다. 참여정부 및 깨시민의 개혁이 실패한 근본적인 주된 원인은 그들의 지적 빈곤함이었다. 그들은 진보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 아직도 자칭 깨시민들은 넷우익 못지않게 보수적이다. 오히려 보통 시민들이 그들보다 진보적 자유의 성장이 빠르다.


 자유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더 많은 자유가 언제나 항상 더 많은 부유함을 만들어냈다. 자유로운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발전하고, 더 건강한 심신을 지니며 더 많은 창의성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1. 참조 링크.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04&contents_id=5110 [본문으로]
  2. 참조 링크. http://ko.wikipedia.org/wiki/%EC%82%AC%ED%9A%8C%EC%9E%90%EC%9C%A0%EC%A3%BC%EC%9D%98 [본문으로]

 근현대의 민주적인 정치 체계를 구성하는 기반 철학에는 크게 두 가지 축이 있다 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공화주의이며, 그 중 하나는 자유주의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이상적인 민주 국가는 ‘자유로운 민주 공화국’ 이라는 식의 표현이 적합하다 할 수 있다.


 이 중 공화주의를 쉽고 간결하게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실질적으로 이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공화주의는 거의 공동체주의나 다름없다. 이 사고 체계는 근본적으로 사적인 것보다는 공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공적인 것의 부활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것이다. (이는 공화주의의 역사를 볼 때, 과거의 공화주의와는 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제목에 적은 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는, 마이클 샌델이 주장하는 내용과 동일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런 사고방식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점차 늘어나고 있는 자유와 상충되는 면이 있다. 자유주의는 개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한다. 근현대의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공화와 자유라는 두 가지 이질적 요소가 접합된 형태일 수밖에 없고, 현실적으로는 두 가치가 충돌하고 타협하면서 사회를 형성해나간다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역사 자체와도 관련이 있다. 공화 없는 민주주의도, 자유 없는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 근현대의 민주주의는 이 두 가지 이념이 혼재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고, 약간 대조적인 두 사상 사이에서 현실의 민주주의는 줄타기를 하면서 각각의 이익을 취하고 균형을 잡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현실 정치 담론의 주된 문제점 중 하나로 민주당을 비롯한 통칭 범야권 세력이 공동체주의적 공공선 이미지를 선점하고, 그 공공선을 도덕적인 면에서 강요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많은 경우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선이고, 그 반대라 할 수 있는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것은 악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 선을 위한 정의의 사도로 나서 악당을 물리치고자 노력한다.


 물론 이런 시도가 잘 될 리가 없다. 민주당이 선거에서 이기는 빈도는 그리 높지가 않다. 평범한 사람을 악당으로 규정하려 드는 데 상대가 수긍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정의는 중요한 가치다. 그리고 충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국의 기득권이 충분히 정의롭지 못하고, 민주당이 많은 경우 그래도 새누리당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심정적으로라도 정의롭다는 쪽으로 느슨하고도 암묵적인 동의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정의를 규정하는 것은 항상 신중할 필요가 있으며, 정의를 아는 것과 정의를 실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정의에 의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어 왔다. 적잖은 경우 내가 정의라고 믿는 사람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지극히 잔인한 언행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박근혜와 그 주변은 악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박근혜를 지지하는 모두가 악당은 아니다.


 적잖은 한국 사람들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할 줄 모른다. 문화적으로 공동체 사회가 극히 최근까지 강하게 존속되어왔고, 각종 역사적 비극으로 인해 개인성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침해는 많은 경우 윤리적으로 규범화되어있기까지 하다. 오랜 기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자유와 개성은 악이었다.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자들은 규범의 틀을 깨고 더 많은 자유를 향해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한편으로 한국 사회의 진보적인 입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서글픔만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에 애초에 모자랐던 자유주의의 전통과 역사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일단 힘들더라도 문재인을 찍었던 사람들은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패배가 뼈아플지라도, 견딜 수 있다면 승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라. 그것이 민주주의다. 상대를 욕하고 몰아붙이고 비난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그들 또한 하나의 선택을 했을 뿐이고, 그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법률과 철학으로 보호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취득한 정보와 각자의 입장, 그리고 사고방식은 문재인을 찍은 사람들과 다르다. 그리고 자유로운 민주 공화국 시민들은 반드시 공동체를 우선해야 할 의무는 없다. 공익을 위해 사익을 희생하라 강요하는 것은 충분히 민주적인 태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공공선에 있어서는 그다지 로맨틱한 만족감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한편 실제로 대부분의 민주당 지지자들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평균적으로 의식이 더 많이 규범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경우 민주당 지지자들은 문화적으로 적잖게 보수적이다.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보수주의자고, 새누리당은 친일 매국 세력이라는 주장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논지로 국민의 51%를 친일 매국 세력으로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51%은 무지하고 사욕에 가득 찬 세력으로 - 즉 한 단계 낮은 수위의 악당으로 - 규정되곤 한다.


 이런 행태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이기고 싶다면 의식을 바꿔야한다. 저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지나치게 규범적이기에 사실 좀 반민주적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공화 정치는 플라톤식 철인정치도 아니고, 유교식 왕도정치도 아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에 찬성하지 않았다. 유학자들도 찬성할 사람이 없었을 거다. 당신이 민주주의를 존중할 수 없다면, 스스로 민주주의자가 아님을 받아들이라. 민주주의는 유일하게 정의롭고 훌륭한 정치 체계는 아니다. 잘만 실현된다면 철인정치나 왕도정치가 더 나은 방식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적으로 이기고 싶다면 힘들더라도 닫힌 마음을 열고 새누리당 지지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SNS를 언팔로우하는 식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가치를 중시하는지를 알아내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소통이다. 나만 정의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령 그게 진리의 기준에서는 맞다 해도 현실에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정치는 현실이다. 민주주의도 현실이다. 이걸 받아들이지 않는 도덕주의자들에게 승리는 찾아오지 않는다. 상대를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상대를 이길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현실에선 격언처럼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긴다. 그런데 민주당 지지자들은 새누리당 지지자들을 잘 모르지만,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민주당 지지자들을 제법 잘 안다. 그러니까 민주당은 이길 만한 싸움도 맨날 지는 거다.


 한편으로 공화와 공동체, 그리고 도덕 윤리를 강조하는 관점 자체는 항상 힘 있는 철학이긴 했다. 그러나 그런 태도 자체는 문화적으로 보수적이기 쉽다. 진보라는 제목을 달고 보수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는 모순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나는 한국 사람들은 항상 어떤 의미로든 한 발식이라도 전진하려는 진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의 국민들이다. 국민의 마음을 잡고자 한다면, 불안과 공포라는 대중 심리와 그로 인해 끊임없이 강요되는 진보성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