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퇴임을 앞두고

정치 2013. 2. 22. 14:12 Posted by 해양장미


 이명박 대통령의 퇴임도 이제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집권기간은 체감 상 참 길게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도저히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고, 그의 정책에 의한 개인적인 손해도 여러 번 입었다. 그러나 그 역시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진보시킨 면이 있다. 문득 그 점을 느껴서 놀랍다고 느끼고 있다.


 퇴임을 4일 앞둔 오늘, 이명박 대통령은 아직도 새누리당 당적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부덕하여 많은 욕을 먹은 대통령이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박근혜가 당의 패권을 쥐면서 당 이름도 바꾸고, 로고 색깔도 바꿨지만 그 과정에서도 이명박은 당적을 유지하였다. 이는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에 충분히 기여했으리라 생각하며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 또 한 번의 발전이 이루어진 거라 볼 수 있다.


 이걸 보면서 친노 노빠 깨시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도저히 안 할 수가 없다. 노무현 정권은 임기 중 여당을 두 번이나 깨먹었다.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으로, 그리고 열린우리당을 깨고 통합민주당으로. 그것도 모자라 노무현의 후계자(취급을 받았던) 유시민은 이명박 당선 이후 통합민주당에서도 탈당하더니, 지역도 옮기고 국민참여당도 만들고는 민주당에 몽니를 부리다가 유력 대선 후보에서 낙마하고는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으로 옮겨가는 희대의 철새짓을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해 무지하고 자기반성능력이 없는 소아적 행태를 보이는 깨시민들은 그런 유시민에 대해 바른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시민의 낙마 이후 정치할 생각도 없던 문재인을 소환하여 지난 4년간 민주당을 지키던 사람들을 물리치고, 부활의 조짐이 보였던 민주당의 생명줄을 끊어놓고 말았다.


 민주당은 지금도 친노 문희상이 비대위원장을 맡고 있고, 친노가 문제가 아니라는 둥, 친노는 실체가 없다는 둥의 물타기를 넘어선 은폐조작까지 저지르고 있다. 새누리당 세력이 법치와 공화를 파괴한다면, 노빠 깨시민들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주범인 동시에 새누리당이 저지르는 모든 범죄적 행위의 공범이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시대 내내 깨시민들은 반MB만 외쳐댔다. 딱하나 자기 목소리 낸 게, 무상급식이다. 그 어줍잖은 이슈가 나름 잘나가던 오세훈을 반영구적으로 정계에서 퇴출시켰고, 박원순을 시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거기에 도취해서 깨시민들은 총선과 대선을 모두 박근혜 여왕폐하께 헌납했다.


 퇴임을 앞둔 현재, 이명박은 거의 지지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지만 5년 전의 노무현에 대한 지지보다는 통계 조사 결과 낫다. 이명박이 잘한 게 있다면 정책이 꽤 일관적이었다는 데 있다. 일관성이 있다는 건 예측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명박은 작정하고 나라 곳간 한번 털어먹자는 식으로 정치한 면이 있지만, 그 착취가 대한민국의 기둥뿌리를 뽑아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정책이 갈팡질팡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살아남기 쉬웠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 때와 비교하면 비록 그지같더라도 질서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민중은 혼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명박은 남탓을 하지도, 자기연민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 시대의 나쁜 남자, MB. 그는 털어먹어도 일관성 있게 당당하게 털어먹으면 사람들이 그나마 덜 싫어한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인 대통령이었다.

 

 이제 들어설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와 얼마나 다를지, 더 나을지는 잘 모르겠다. 인수위를 보면 물론 기대가 별로 안 되긴 한다. 그런데 박근혜건 친박이건 원래 그런 사람들이고, 정권교체를 위한 열망이 가득했던 작년 분위기를 감안해볼 때 이런 결과를 초래한 건 누가 뭐래도 노빠 깨시민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노무현 정권을 넘어, 이명박 정권 내내 노빠 깨시민들은 한국 사회의 진보적인 열망을 잠식하고, 새로운 개혁세력의 등장을 찍어 눌렀다. MB를 방패삼아 새로운 수구세력이 자라난 것이다.

박근혜 정부, 정부 이름 붙이기의 문제

정치 2013. 2. 7. 17:15 Posted by 해양장미


 박근혜 인수위가 출범하는 정부의 공식 이름을 ‘박근혜 정부’로 하겠다는 발표를 내 놓았다. 나는 이 이름에 대해 아무 불만이 없지만, 역시나 트위터 깨시민들은 불만이 많은 것 같다. 박근혜라는 이름을 정부에 붙이는 게 마음에 안 드는가 보다.


 그러나 특별한 정부 이름을 붙이는 건 사실 그다지 오래 된 일이 아니다. 김영삼이 ‘문민정부’라는 이름을 건 게 그 시초다. 이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의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초기의 ‘실용정부’까지 정부 이름 붙이기가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곧 그 이름을 폐기하고 ‘이명박 정부’로 돌아갔다.


 공화정 체제가 안정된 이상, 대통령제에서 대표자가 바뀌는 건 일반적인 일이다. 국가의 헌법이나 아이덴티티가 바뀌지 않는 이상 굳이 하나하나의 정부에 차별화된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단지 김영삼은 87체제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군인인 노태우가 가져갔던 정권을, 군인이 아닌 ‘문민’이 되찾았음을 선언하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붙인 거였다. 이후엔 그게 이어져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건 일시적인 현상이 되어야 한다. 일단 저런 식으로 오래 가다보면 금방 쓸 말이 없어진다.


 또한 정부는 단일한 하나의 가치만을 내걸 수 없다. 복잡한 현실에 맞춰 정말 많은 일을 다양하게 해야 한다. 그렇기에 정권을 구분하여 지칭하려면, 대통령의 이름을 앞에 거는 쪽이 합리적이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이명박 정부 초기까지 붙여왔던 이름은 민주화 시기 초기의 구분 짓기라 보는 쪽이 더 옳을 것이다. ‘문민’, ‘국민의’, ‘참여’, ‘실용’. 사실 이런 건 모든 정부가 다 해야 하는 거다.


 박근혜를 비판하려거든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통할만한 방식으로 하는 게 좋겠다. 본인의 이름을 정부에 붙인다고 독재자인 것이 아니다. 결국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초기단계를 넘어 통상적인 네이밍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괜히 매사에 투덜투덜해봐야 절대 깨시민 이미지가 나아질 일이 없다. 항상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해야한다.


 어차피 박근혜 인수위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많다. 이름가지고 뭐라 하는 것보다는 행동가지고 뭐라 하는 게 훨씬 낫다. 그리고 그것보다는 사실 지금 민주당이 뭘 하고 있는지를 보는 게 더 생산적이다. 지금 민주당 돌아가는 꼴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근현대의 민주적인 정치 체계를 구성하는 기반 철학에는 크게 두 가지 축이 있다 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공화주의이며, 그 중 하나는 자유주의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이상적인 민주 국가는 ‘자유로운 민주 공화국’ 이라는 식의 표현이 적합하다 할 수 있다.


 이 중 공화주의를 쉽고 간결하게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실질적으로 이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공화주의는 거의 공동체주의나 다름없다. 이 사고 체계는 근본적으로 사적인 것보다는 공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공적인 것의 부활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것이다. (이는 공화주의의 역사를 볼 때, 과거의 공화주의와는 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제목에 적은 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는, 마이클 샌델이 주장하는 내용과 동일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런 사고방식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점차 늘어나고 있는 자유와 상충되는 면이 있다. 자유주의는 개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한다. 근현대의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공화와 자유라는 두 가지 이질적 요소가 접합된 형태일 수밖에 없고, 현실적으로는 두 가치가 충돌하고 타협하면서 사회를 형성해나간다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역사 자체와도 관련이 있다. 공화 없는 민주주의도, 자유 없는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 근현대의 민주주의는 이 두 가지 이념이 혼재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고, 약간 대조적인 두 사상 사이에서 현실의 민주주의는 줄타기를 하면서 각각의 이익을 취하고 균형을 잡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현실 정치 담론의 주된 문제점 중 하나로 민주당을 비롯한 통칭 범야권 세력이 공동체주의적 공공선 이미지를 선점하고, 그 공공선을 도덕적인 면에서 강요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많은 경우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선이고, 그 반대라 할 수 있는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것은 악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 선을 위한 정의의 사도로 나서 악당을 물리치고자 노력한다.


 물론 이런 시도가 잘 될 리가 없다. 민주당이 선거에서 이기는 빈도는 그리 높지가 않다. 평범한 사람을 악당으로 규정하려 드는 데 상대가 수긍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정의는 중요한 가치다. 그리고 충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국의 기득권이 충분히 정의롭지 못하고, 민주당이 많은 경우 그래도 새누리당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심정적으로라도 정의롭다는 쪽으로 느슨하고도 암묵적인 동의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정의를 규정하는 것은 항상 신중할 필요가 있으며, 정의를 아는 것과 정의를 실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정의에 의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어 왔다. 적잖은 경우 내가 정의라고 믿는 사람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지극히 잔인한 언행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박근혜와 그 주변은 악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박근혜를 지지하는 모두가 악당은 아니다.


 적잖은 한국 사람들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할 줄 모른다. 문화적으로 공동체 사회가 극히 최근까지 강하게 존속되어왔고, 각종 역사적 비극으로 인해 개인성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침해는 많은 경우 윤리적으로 규범화되어있기까지 하다. 오랜 기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자유와 개성은 악이었다.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자들은 규범의 틀을 깨고 더 많은 자유를 향해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한편으로 한국 사회의 진보적인 입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서글픔만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에 애초에 모자랐던 자유주의의 전통과 역사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일단 힘들더라도 문재인을 찍었던 사람들은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패배가 뼈아플지라도, 견딜 수 있다면 승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라. 그것이 민주주의다. 상대를 욕하고 몰아붙이고 비난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그들 또한 하나의 선택을 했을 뿐이고, 그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법률과 철학으로 보호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취득한 정보와 각자의 입장, 그리고 사고방식은 문재인을 찍은 사람들과 다르다. 그리고 자유로운 민주 공화국 시민들은 반드시 공동체를 우선해야 할 의무는 없다. 공익을 위해 사익을 희생하라 강요하는 것은 충분히 민주적인 태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공공선에 있어서는 그다지 로맨틱한 만족감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한편 실제로 대부분의 민주당 지지자들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평균적으로 의식이 더 많이 규범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경우 민주당 지지자들은 문화적으로 적잖게 보수적이다.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보수주의자고, 새누리당은 친일 매국 세력이라는 주장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논지로 국민의 51%를 친일 매국 세력으로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51%은 무지하고 사욕에 가득 찬 세력으로 - 즉 한 단계 낮은 수위의 악당으로 - 규정되곤 한다.


 이런 행태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이기고 싶다면 의식을 바꿔야한다. 저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지나치게 규범적이기에 사실 좀 반민주적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공화 정치는 플라톤식 철인정치도 아니고, 유교식 왕도정치도 아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에 찬성하지 않았다. 유학자들도 찬성할 사람이 없었을 거다. 당신이 민주주의를 존중할 수 없다면, 스스로 민주주의자가 아님을 받아들이라. 민주주의는 유일하게 정의롭고 훌륭한 정치 체계는 아니다. 잘만 실현된다면 철인정치나 왕도정치가 더 나은 방식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적으로 이기고 싶다면 힘들더라도 닫힌 마음을 열고 새누리당 지지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SNS를 언팔로우하는 식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가치를 중시하는지를 알아내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소통이다. 나만 정의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령 그게 진리의 기준에서는 맞다 해도 현실에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정치는 현실이다. 민주주의도 현실이다. 이걸 받아들이지 않는 도덕주의자들에게 승리는 찾아오지 않는다. 상대를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상대를 이길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현실에선 격언처럼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긴다. 그런데 민주당 지지자들은 새누리당 지지자들을 잘 모르지만,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민주당 지지자들을 제법 잘 안다. 그러니까 민주당은 이길 만한 싸움도 맨날 지는 거다.


 한편으로 공화와 공동체, 그리고 도덕 윤리를 강조하는 관점 자체는 항상 힘 있는 철학이긴 했다. 그러나 그런 태도 자체는 문화적으로 보수적이기 쉽다. 진보라는 제목을 달고 보수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는 모순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나는 한국 사람들은 항상 어떤 의미로든 한 발식이라도 전진하려는 진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의 국민들이다. 국민의 마음을 잡고자 한다면, 불안과 공포라는 대중 심리와 그로 인해 끊임없이 강요되는 진보성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노무현 정신, 탈권위의 역설

정치 2011. 6. 1. 22:50 Posted by 해양장미



 혹자는 노무현 정신 중 하나로 탈권위를 들 것이다. ‘탈권위는 주된 노무현 정신이다.’ 라는 명제는 이것이 실제로 참이냐 거짓이냐를 떠나서, 명제 자체의 추상적 이미지가 보편적으로 존재함에는 대부분 동의할 수 있을 거라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일단 이 명제를 참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이 탈권위라는 정신의 가치는 친노 진영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을까? 정리하자면 친노는 탈권위적이냐는 질의다.


 결론부터 말하면 완전히 No. 세상에 이렇게 표리부동하게 권위적인 집단도 드물겠다. 노무현교는 종교가 되어있고, 그 교주는 유시민이며, 근래 그의 권위가 흔들리는 바, 차기 교주 후보로는 문재인이나 김두관이 지명되고 있다.


 그들에 대한 옹호나 신앙은 무조건적이다. 정치는 행위와 결과로 나타나는 현실임에도, 이 신흥 종교의 신자들은 신앙과 심정적 윤리를 강조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유시민이야말로 깔끔하고, 진정성이 있고, 옳고, 윤리적이고...’


 사실 이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생각하면 정말 어이가 없는 현상에 불과하다. 아이돌에 대한 열광이야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건 그르건 그건 그러라고 만들어진 존재니 그럴 법하다고 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인을 우상으로 삼다니, 그야말로 ‘민주 정치의 타락’ 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현명한 시민이라면 정치인은 정치인으로 취급해야 한다. 정치는 아름답지 않을 때가 더 많은 현실이고 정치인은 감시와 견제가 없다면 언제든 변질될 수 있으며,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권력을 탐하는 존재이다. 또한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가는 항상 관료 집단과 타협해야하며 언제나 조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규모가 있는 정당은 현실적인 체계 및 체제임에도 이런 현실은 쉽게 무시당한다. 더 나은 정치인을 뽑는 건 민주주의라는 체제 내의 바람직한 가능성 실현이지, 혁명적 행위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를 이득을 위한 평화적 대립과 (권력 획득을 위한) 경쟁, 그리고 권력의 시간적 유한성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 측면에서 볼 때 현 정부는 그 윤리성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밖에 없지만, 자유민주주의라는 기본적인 틀에는 큰 손상을 주지 못한다. 이명박 정부는 가장 핵심적인 지지 세력에게는 이익을 보장하는 편이고, 그것은 실리적인 관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지지자는 대부분 이명박이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다 줄 거라 생각할 뿐이다. 어지간해서는 이명박을 메시아처럼 숭배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엔 그림 속의 예수처럼 꽃미남도 아니고 불상처럼 인자해 보이지도 않으니까.


 노무현의 사망과 이명박 정부의 실정은 과격한 분노를 종교화시켰다. 그 분노와 맹목성은 실제로 파시즘의 재현이며, 절대적인 권위를 갈망한다. 그리하여 작은 비석 하나만 세우고 아무도 원망하지 말라던 노무현의 유고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노무현은 노리스도가 된다. 민주주의적 열정은 허공에 흩어지고, 분노는 쉽게 가학성을 보인다. 그 결과 노무현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그 이름 세 글자만 남아 분열의 뿌리, 신종 파쇼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지금까지 네 번 선거에 나가면서 네 번 모두 정당이 달랐던 한 정치인이 있다. (무소속을 포함한다.)  그가 공식적으로 지지했던 정당은 더욱 많고, 출마지역까지도 다양하다. 그는 이명박 정권 이후 대외적인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지만, 얼마 전 자신이 속한 당대표 선거에서 단일 후보로 출마한 후 무려 97%의 득표로 당대표가 되었다. 이번에 다가오는 27일 재보선에서도 분란을 만들고 있는 그 정치인은 유시민이다.


 최근 재보선 사건의 요지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른 지역도 문제가 많지만, 선거 지역 중 경남 ‘김해 을’에서 여당 후보로 전 도지사였던 김태호가 나오게 되었다. 야권 연합을 하지 않으면 상대하기 어렵다 보니 역시나 이번에도 야권 연합은 시도되었고, 또 역시나 경선 협상안이 스무스하게 잘 진행되지는 않았다.


 유시민과 국민참여당의 주장은 100% 여론조사로 단일화를 하자는 것. 그리고 민주당과 곽진업 후보의 주장은 국민참여경선을 하자는 것. 국민참여당이 국민참여경선을 ‘돈과 조직의 선거로 소수당에게 불리하다.’ 라고 주장하면서 여론조사로 하자고 버텼다.


 야권 연대의 논의는 공식적으로 2월 22일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명목상 야권 연대를 주도한 것은 시민단체이며, 네 시민단체가 주축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3월 20일까지 7차례에 걸친 협상이 진행되었다. 3월 21일에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협상안을 수용했다.


 국민참여당은 3월 25일이 되어서야 시민단체의 중재안을 조건부 수용하기로 하였었다. 그러다가 지난 4월 1일, 유시민은 양 쪽 주장을 반씩 섞은 시민단체의 중재안이 민주당에게 유리하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비난이 빗발치자 그는 이것을 ‘우리가 저지른 죄는 강자에 대해 굴종하지 않은 것.’ 이라고 하더라.


 여기서 한 가지 포인트. 국민참여경선은 여론조사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선거는 4월 27일이고, 시간적 여유를 두고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사실 곽진업도 유시민도 선거에서 이길 확률이 적기 때문에 국민참여당은 일종의 치킨 런 게임을 한 셈. 시간이 촉박해지면 단일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여론조사밖에 없어진다. 이 때 내 심정은 이랬다. ‘그냥 연대하지 않으면 좋겠다.’


 결국 오늘 4월 6일, 민주당 곽진업 후보는 국민참여당이 끝까지 고집한 100%여론조사를 수용했다. 이 사건이 유시민의 승리일까? 개인적으로는 씁쓸함이 좀 남는다. 결과는 두고 봐야 알겠지.


 서로 다른 정당의 후보가 단일화를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각자 가진 지지율과 조직이라는 판돈을 걸고 배팅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연히 여기에는 수반되는 이익과 같이 할 수 있다는 신뢰, 그리고 공통된 지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번에 한 전문 딜러가 또 한 번 판의 신뢰를 파괴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돈 선거를 하지 말자.’ 라고 주장하면서 100% 여론조사로 서로 다른 정당 후보 간의 단일화를 실현하자는 유시민의 주장은 과연 좋은 방식일까?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하부 시스템으로 어느 정도의 정당성이 있을까? 이는 이번에 이슈가 되어서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된 것이지, 평소 당내 경선이나 서로 다른 정당 간의 단일화 등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논제이기에 언제고 한번쯤 이야기를 꺼낼 만 하였다.


 나는 사실 이런 경우의 여론조사는 ‘현 시점에서의 당선 가능성을 확인해서 그것으로 비교 우위를 점하는’ 의미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여론 조사라는 것은 선거를 미리 모의로 해보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선거에 수반되는 여러 행위와 과정들은 제약되며, 단순히 ‘명사’에게 유리한 방식이 된다.


 이런 방식은 민주주의의 맹점을 크게 만들기 쉽다. 좋지 못한 시스템이라는 이야기다. 민주주의에는 잘 조절된 시스템이 필요하다. 잘 조절된 시스템은 많은 반민주주의자들이 우려하는 민주주의의 단점 및 실패 - 중우정치 등의 - 를 보완하고 방지해준다.


 당 내에서 경쟁을 거쳐 후보가 선출되는 과정, 그리고 조직의 동원과 시민들에게 어필하려는 노력, 잘 조정된 선거 방식 등은 실제로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초래할 수도 있는 비극적인 결과를 미연에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 사람은 같은 조직 내의 타인을 속이는 것보다는 자신을 잘 모르는 타인을 속이는 게 훨씬 쉽고, 당 내 인사들은 같은 당 내 인사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또한 정치인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조직을 동원하고 유권자를 포섭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능력을 키우고, 유권자의 요구사항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서로 다른 정당 간의 통합 문제는 같은 당 내부만큼 이 장치가 잘 작동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더라도 기본적인 것은 유사하다. 여론조사에 가까운 것이 될 수록 안전장치는 사라진다. 상대적으로 국민참여경선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선거의 절차를 충족하는 요소가 있다.


 여론 조사 방식이 단점을 보이는 일례를 들어보자.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내부의 사람들은 박근혜의 편을 들었다. 그렇지만 여론조사를 비중 있게 도입함으로 후보는 이명박이 되었고, 이명박은 최대의 라이벌을 여론조사의 힘으로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긍정적이었을까? 


 비록 선거는 이미지와 인기에 좌우되기 쉽지만, 정치는 이미지나 인기로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치는 현실이고, 정치적 행위를 잘 해 나가기 위해서는 조직과 돈, 그리고 전문적 능력과 경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잘 조정할 수 있는 신뢰와 조율 능력이 필요하다. 이 모든 제반 조건은 후보로 결정된 시점에서 통과되어야 할 선결 과제인 것이다.



꼬리.


 김해 을에서 여론 조사에 응하게 될 분들이 현명하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였으면 좋겠다.


꼬리 2.


 누구라도 본문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막말 & 악플 엄금. 써놓고 악플러 무서워서 올릴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 올림. 악플로 판단되는 글은 경고 없이 삭제 및 차단조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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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반 MB를 넘어서

정치 2011. 1. 4. 19:31 Posted by 해양장미


 새해가 되었다. 근래의 정치사회적 움직임은 이명박의 통치시기를 넘어서는 기점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려하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어떠한 커다란 악이 있을 때, 어쩌면 그 악과 싸우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렇지만 악이 남긴 파괴를 딛고 그 다음을 기약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지금까지 해온 게 싸움밖에 없다면 더더욱.


 담론은 이미 옮겨지고 있지만 중앙 정부의 정치적 힘은 한나라당이 독점하고 있다. 다른 정치세력들은 반 MB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았으며, 지금도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다. 오히려 거대담론들은 민주주의의 확산에 좋지 않게 작용했고, 지난 2010년에 민주당계를 제외한 진보세력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 분위기가 지독하게 나빠진 것은 여러 정치사회 담론과 문화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거대담론과 네가티브에 휘말리기 쉬운 상황이 반복해 발생했고, 문화는 날이 갈수록 빠르게 천박해졌다. 심해진 배금주의는 더 심한 배금주의로의 악순환을 반복시켰고, 내 주변의 거의 모두가 몇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난해졌다.


 나쁜 쪽으로 가속화된 정치사회적 흐름은 대안으로 거론되는 여러 담론들을 포퓰리즘에 가까운 것으로 만든 것 같다. 물론 그런 조짐은 계속 있었지만, 이 시대의 정치적 퇴행은 무시하기 어려운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근래의 군사적인 갈등은 이념적 균열에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문제는 몇 년 내에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현재는 아주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렇더라도 이제 네가티브는 끝났다. 이명박 정권 다음을 논의할 때가 이미 다가왔으며 그렇다면 반 MB를 넘어 새로운 대안을 이야기해야 한다. 복지 이야기도 좋지만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어지간한 수준의 복지가 자신의 삶을 우선적으로 개선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복지가 세금을 늘릴 거라 생각한다. 정치는 윤리적 욕구뿐만 아니라 실질적 욕구도 충족시켜줘야 한다.


 MB의 비윤리적 권위주의식 통치 시기는 필연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끝을 맺게 되어있다. 막상 그 끝을 앞둔다면, 사람들은 결코 윤리적 욕구만을 고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더 나은 비전을 제시하고 더 포괄적인 시민들을 돌보고 포용할 것인가? 이 의문의 답은 아직 변수가 많다.


 한편 개인적으로는 근래 시민들의 이성적, 윤리적인 수준이나 욕구가 전반적으로 저하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부분이 많은데, 이는 결과적으로 앞으로의 정치사회문화적 양상에 일정 부분 이상 변수로 작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반적으로 사회의 여러 건강한 모습이 사라진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것이 파괴되었다. 많은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고, 사람들은 적어도 무언가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열망이 단순한 포퓰리즘으로 기울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 앞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은 포퓰리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이 어느 정도나 있을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또한 이것과 별개로 아직도 야권에서 주로 논의되는 이야기는 반MB연대이며, 안타깝게도 이런 연대는 박근혜의 좌향좌에 의해 이념적, 정책적 차별을 유의미하게 확보하지 못하게 된 게 현실이다. 올해는 나에게 보이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 및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천천히 해나가게 될 것 같다.


 내 생각에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이 자유민주주의의 틀을 일차적으로는 유지하는 가운데 문제점 하나하나를 충실하게 보완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은 절차적 민주주의 체제를 보완해가면서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노력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물론 반 MB담론은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현재의 추세로 정권을 교체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무엇이 나아질 것인가? 물론 MB정권에 비해 더 윤리적인 행정 절차를 밟을 수 있고, 언론은 좀 더 자유로워져 노무현 때 수준으로 수구언론의 권력은 내려갈 것이며, 새만금은 하더라도 4대강 같은 수준의 어이없는 공사는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 분위기는 현재보다는 나아질 것이며 서민이 구제받을 확률이 2%내지 5%는 더 생길 것이다. 북조선과는 지금처럼 냉전으로 달려가지 않을 것이며, 제국주의적인 군사주의의 망령도 덜 소환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나은 기회들이 생길 거다. 국민들끼리의 사회적인 신뢰도 아주 약간은 회복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는 근본적으로는 거의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성장 및 그 부수효과들 외엔 뚜렷한 업적 없이 정권을 빼앗기고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켰음에도 그런 실수는 반복될 가능성이 적지 않고, 노무현과 유시민의 신도들은 노무현 정부 및 관련 인사들에 대한 비판 자체를 불허하면서 매우 폭력적인 대응을 일삼고 있다. 국민참여당은 이제 민주당보다 정치학적으로 진보적인 특색이 없다고 판단됨에도 그들이 더 진보적인 것처럼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으며, 좌파 정당들은 호남의 민주당보다는 영남패권주의적인 국민참여당과 함께하려고 하고 있다.


 사실 내 생각엔 이제라도 가장 기초적인 것을 해야 한다. 정당이 좀 더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젊은 정치인을 성장시키며 이념적으로 포괄해야 할 계층에게 어필하고 요구를 수용하면서 세력을 늘려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렇게 하려면 현실적이고 시대의 변화에 어울리는 진보적 변화와 행동이 필요하다. 쉽게 말하면 이는 민주주의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정당이 시민의 요구사항을 수용하지 않으면, 절차적 민주주의 정치는 뼈대만 남은 통치에 불과하다.


 한편으로 현재의 복지 담론은 저도의 포퓰리즘성 시혜적 복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바람직하고 수준 높은 복지로 연결될 확률이 낮다. 박근혜도 오세훈도 유시민도 복지를 말하지만, 그것은 아주 낮은 단계의 - OECD 국가 중 형용할 수 없이 최저인 - 복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복지 레벨은 높아질 것이지만, 그 복지 양상은 각각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포퓰리즘 성향을 가질 확률이 높다. 보다 민주주의적인 변화가 필요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