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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들

정치 2019. 11. 18. 22:24 Posted by 해양장미

 브금은 이명박 선거송입니다.

 

https://youtu.be/TUw93udkreg

 

 

 

*) 이명박은 사실 박근혜와 묶여서 취급되기엔 성과를 낸 대통령입니다.



 그렇지만 곧잘 묶여서 취급되곤 하지요. 당이 같아서 그런 면도 있습니다만, 처음 이명박근혜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건 웃프게도 대선 당시의 이명박 캠프였습니다.


 

 2007년 초에 고건이 낙마하면서 이명박과 박근혜의 한나라당 경선은 실질적으로 대선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는데요. 둘 다 워낙 클린하지 못하다보니 서로 엄청나게 어택을 가했습니다. 추후 둘이 감옥가게 되는 근거의 단초가 당시에 거의 다 나왔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양측 지지층이 감정이 많이 상하기도 했었는데요. 이명박 캠프는 대선을 치르기 위해 이명박근혜라는 어휘를 사용해서 둘을 엮게 됩니다.

 

 그 후엔 떨어지고 싶어도 곧잘 엮이게 되었지요.

 

 

*) 2008년에 광우병 시위가 그렇게 커진 데는 조중동 등 메이저 신문사의 역할도 컸습니다.


 

 몇 년간 수입하지 않았었지만, 노무현 집권 후기인 2006년 들어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이 재개됩니다. 당시 노무현 정권에 적대적이었던 조중동 등 메이저 신문사는 광우병의 위험을 소리 높여 보도했고, 미국에 영 고분고분하지 않던 노무현 정권도 아주 샅샅이 검역하여 뼛조각 하나라도 발견되면 전량 되돌려 보내고 수입을 다시 중단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이명박 취임 이전에 광우병과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꽤 경계심이 생겨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명박이 미국 다녀오더니, 갑자기 완화된 광우병 수입 조건과 함께 정권이 미국산 쇠고기를 홍보/광고하기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불타오르기 좋은 상황이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시위는 노무현에 대한 공격적인 수사로 이어졌고, 이후 노무현이 자살하면서 현 문재인 정권 탄생의 발단이 되고 맙니다. 비극의 시작은 미국산 쇠고기였어요.

 

 

*) 요새 정부가 돈을 막 쓰다 보니 4대강에 대해 재평가가 나오기도 하는데요.


 

 4대강은 사실 현재 해놓은 것만 가지고는 그렇게까지 욕을 엄청나게 먹을 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처음부터 이렇게 4대강을 하려던 게 아니고, 정신이 나갔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한반도대운하를 하려다가 여론에 밀려서 4대강을 한 것입니다.


 

 광우병 시위의 최대 성과는 사실 대운하를 막은 거였지요. 제정신을 가지고 대운하 계획을 살펴본다면 그게 아예 말도 안 된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을 겁니다. 4대강도 좀 쓸데없고 이상하게 공사된 부분이 많은데, 대운하 계획을 고쳐서 4대강을 했기 때문에 영 이상하게 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박근혜 때도 감사원에서 꽤 많이 어택당했어요. 나는 당시의 감사원 판단도 좀 이상했다는 입장입니다만.

 

 이명박 정권은 나름대로 유능한 면이 있던 정권이었습니다만, 그 대운하와 리먼 인수 건 때문에 본격 정신 나간 정권으로 이미지가 깊숙이 박혀버렸습니다. 어지간한 비리는 넘어가주는 유권자라도 대운하같은 걸 밀어붙이는 인물을 좋게 판단하기는 무척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 당시 대운하를 포기한 이명박 정권이 유일하게 판 운하가 경인아라뱃길입니다.


 

 실제 운하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시피 하고, 자전거 도로 및 캠핑장 취급 받고 있습니다. 인천 서구 및 계양구 일부지역 시민들에게는 무척 좋은 공원이긴 합니다. 너무나도 공사비가 비쌌던 게 문제입니다만. 경인아라뱃길의 별명 중 하나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자전거도로입니다. 4대강 자전거길은 경인아라뱃길 정서진의 아라서해갑문에서 시작해 남한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바로 이어져 부산까지 갈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아라뱃길은 차라리 조금 더 폭을 넓게 팠다면 인천아시안게임 당시 조정 경기용으로 쓸 수 있었습니다만, 폭이 좀 부족해서 그 용도로도 못 썼습니다. 조정경기는 머나먼 충주에서 열렸다고 합니다. 인천아시안게임이었는데요.


 

*) 최규하는 본래 정치적 야심이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총을 맞아 죽고 김재규까지 제압된 시점에서, 사실 후계로 정해져 있다시피 한 건 당연하게도 김종필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종필은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시로 최규하가 대통령이 되었고, 김종필은 민주헌법으로 헌법을 고친 후 대통령이 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이 12.12를 일으켜서 대통령을 하게 되지요김종필은 대통령을 죽을 때까지 못 하게 되고요. 신군부 당시 마음이 상한 김종필을 그래도 챙겨주던 게 노태우였는데, 그래서 김종필은 노태우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줬고 노태우는 김종필의 조언을 따른 덕에 대통령이 됩니다. 김종필은 결국 자신은 대통령을 못 했지만 대통령을 셋 만들었어요. 박정희, 노태우, 김대중.


 

 시대가 흘러 김영삼 취임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판을 받게 되었고, 최규하는 증언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모두 거부합니다. 그리고 최규하는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하며 린드버그를 쓰는 모 대통령과는 대조적으로 무척이나 검소하게 살다가 2006년에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