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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4.18 조선 최후의 전투 - 1894년 경복궁의 변 (갑오왜란) (26)

 브금

 

https://youtu.be/AoB9o49fl7I

 

 

 

 조선이 전쟁 한 번 없이 일본에 망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조선 최후의 전쟁은 있었습니다. 규모가 작은 전쟁이었고, 학계의 주목조차 못 받아서 문제입니다만, 엄연히 1894년에 경복궁에서 국가의 명운을 가른 최후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1885년에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을 맺어둔 상태였는데요. 그 내용은 조선으로부터 양국이 군대를 철수시키고, 조선의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한 교관도 보내지 않으며, 어느 한 쪽이 조선에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학 민란으로 고종이 청에 파병을 요청하면서 청군이 조선에 파병되었고, 일본은 톈진조약을 근거로 출병해 군대를 제물포에 상륙시킵니다. 그에 놀란 조선조정은 동학군을 진정시키고는 청군과 일본군을 물리려 하지만, 애초에 침략의욕이 있던 일본군은 물러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러시아와 청의 압박을 물리치기 위해 고종을 잡아 인질로 삼으려 하지요. 일본군은 먼저 4대문을 포위하고, 그 다음에는 경복궁 앞에서 무단으로 훈련을 합니다.

 

이 그림에서 남동쪽 광화문은 광희문(남소문)의 오기입니다.

 그리고 그레고리력 1894년 7월 23일 새벽 4시 20분, 약 1천명의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합니다. 경복궁 내에는 500명의 조선군이 있었고, 이들은 숫자는 적지만 독일제 총으로 무장한 정예였습니다. 500명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학농민군을 상대하기 위한 파병이 있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조선군은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교전하였으나, 일본군은 조선군을 뚫고 고종과 중전 민씨가 숨어있던 함화당까지 돌파하여 고종을 인질로 잡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협박을 받아도 굴복하지 않았고, 교전이 계속 이어집니다. 조선군은 매우 잘 싸웠기 때문에 교전은 오후 2시까지 이어졌고, 일본도 피해를 크게 보았으나 이미 고종의 신변은 일본군에 넘어간 후였고, 훗날 독립협회를 창설하는 일원인 김가진과 안경수가 고종 명의의 가짜 전투중단 명령서를 만들어 교전을 중단시킵니다. 그에 조선군은 통곡하며 무기를 버리고 해산하였고, 일본군은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모든 근현대식 무기를 압수하여 폐기합니다. 당시 일본군이 압수한 조선의 근현대식 무기는 양이 꽤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500년 국가 조선이 외적을 상대로 맞서 싸운 마지막 전투고, 여기서 왕이 잡히고 정예 군대가 무장해제됨으로 실질적으로 조선은 멸망하고 맙니다. 이후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괴뢰정부를 세웠고, 이 교전을 조선군이 일본군을 갑자기 공격하여 일어났던 우발적 교전으로,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을 지킨 것으로 언론 플레이를 합니다만 오랜 시간이 지나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최후의 전투에 대한 정식 명칭은 불분명합니다. 경복궁의 변이라고도 하고, 갑오사변, 갑오왜란 등으로도 불립니다.

 

 이후 일본은 청일전쟁을 벌이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실질적인 조선 땅의 지배자가 되는 듯하였으나... 동학군은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지 않고 들고일어났고, 고종ㆍ중전 민씨 부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저항합니다. 그에 다음 해인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중전 민씨를 시해합니다. 이 때는 이미 경복궁이 한 번 점령되고 무기를 모두 압수당한 후라서 조선군이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는데, 중전 민씨가 그토록이나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시해당한 것은 이미 조선이 패전해 점령당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그 해 11월,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다음 해인 1896년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에 성공하여(아관파천) 친일 김홍집 내각을 몰아내고 친러내각을 구성한 후, 다음 해 대한제국을 세우고 중전 민씨를 명성황후로 책봉하였습니다. (공식적으로 추존이 아니고 책봉. 대한제국 설립 시점에서 명성황후의 사망은 공인되지 않은 상태로, 행방불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에게 이길 수 있는 국력을 가진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아마 큰 변수가 없었다면 1904년부터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길 수 없었을 것이고, 대한제국은 잘 하면 러시아 제국의 속국으로나마 독립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후 대한제국은 입헌군주국으로 조선과는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진 국가가 되었을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게 변하고 맙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우리나라의 모든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사건입니다. 그 비극적인 사건 이후 러시아는 내부 상황이 막장화되어 전쟁을 지속 수행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패전에 가까운 종전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승전한 일본은 11월 17일,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을 껍데기만 남겨놓습니다.

 

 러일전쟁은 여러 모로 불행한 결과를 잉태했는데, 전혀 이길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러시아전에서의 승전으로 인해 일본 또한 이후 막장국가가 되고 맙니다. 실익이라고는 전혀 없다시피 했던 전쟁에서 이기면서 군대 교리는 엉망이 되었고, 군부는 너무 기고만장해졌으며, 국가적으로 자아도취가 끝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승전도 아니어서 소모와 손해밖에는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조선 병합을 해서 수탈을 시도해봤으나 그 역시 일본 입장에서는 전혀 이익이 아니었고 실질적으로 손해만 보았으며, 결국에는 완전히 막장 군사국가화되어 수많은 일본 민중이 징집되어 소모당하고 학살당하고 결국 패전에 이르게 되는 스노우볼의 단초가 됩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은 피의 일요일 사건을 발단으로 실질적인 패전의 굴욕을 당하고, 공산화의 스노우볼이 굴러 소련이 되고 맙니다. 이후 소련은 광복 이후에도 한반도 분단과 전쟁의 배후가 되었지요.

 

 조선은 싸워보지도 않고 일본에 망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동학 민란으로 인해 원래 부족한 병력마저 더 없는 상황이었고, 청을 개입시켜 민란을 해결하려는 고종의 오판이 있었고, 그에 조약을 빌미로 일본군이 막무가내로 한양에 밀고 들어와 왕궁을 기습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왕이 사로잡히고, 그 와중에도 고종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신하가 굴복하여 패전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전쟁이 규모가 작았다고 하여 조선군이 치열하게 싸우지 않은 것이 아니었고, 왕은 사로잡힌 후에도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점령당해 망한 후에도 고종은 망명까지 하여 그래도 나라를 재건국까지 해가며 2차전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은 무력했지만, 무기력하게 싸우지도 않고 망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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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쿠루도 2021.04.18 15: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오래 관심을 가졌는데 이런 사건이 있는줄 몰랐습니다.

    고종을 매우 무능하고 답이 없는 인간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할 수 있는게 제한적인 편이었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해양장미 2021.04.18 16: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종은 능력이 모자랐고 단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사면초가인 상황에서 여러 번 용기를 내며 열심히는 싸웠습니다.

      갑오년 경복궁의 변은 기존 서술에서는 갑오개혁 이전에 단순하게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으로 묘사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과정에서 있었던 전투가 조선 최후의 전쟁이었습니다. 다음 해의 을미사변은 이미 실질적으로 망하고 점령당한 나라에서 망국의 부활을 꿈꾸던 왕비가 시해당한 사건이었지요. 그 과정에서도 교전이 있긴 하였으나, 그 때 경복궁에 있던 병력은 이미 무장수준도 낮고 살아있는 국가의 왕궁을 지키는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2. 만신전 2021.04.18 2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처절했었군요.

    제멋대로 전쟁 패배시킨 신하가 독립협회장이었군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 좋아하는 사람들 중 이런 사실 아는 사람 한명이라도 될까 싶습니다.

    • 해양장미 2021.04.19 0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안경수가 독립협회 초대 회장이었지요.

      본래 독립협회에는 친일파가 많았고 안경수도 친일파였습니다. (당시에는 친일 아니면 친청, 친러 중 하나였습니다.) 경복궁의 변 이후 김홍집 내각에서 한자리 하다가, 1895년에 친러파로 전향했고 이후 중전 민씨의 측근이 되었고,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미국대사관으로 도주하려다 실패한 춘생문 사건에 개입하여 형을 받습니다. 아관망명 이후 복권되고요.

      그런데 안경수는 1898년에 황제 양위 음모를 꾸미다가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실각시키려는 시도를 아주 많이 했습니다.) 발각되어 일본으로 도주하였고, 이후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귀국하지만 결국 고문 및 사형당하게 됩니다. 줄을 여러 번 갈아타다가 역모죄로 죽게 된 거고요.

      김가진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다가 좌천되고, 이후 3.1운동에 참여하거나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 시도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계속 활동합니다.

      훗날의 안경수는 몰라도 당시의 안경수와 김가진은 고종, 중전 민씨 부부와 사이가 틀어지지는 않았고, 정황상 날조를 용서받은 것으로 보아 결국 고종의 안위를 지키려는 시도였던 걸로 해석됩니다. 다만 그 행위는 훗날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겠지요.

  3. 이란코 2021.04.19 0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네이버에서 경복궁 쿠데타라는 제목으로 봤었는데 이런 내막이 있었군요.

  4. 구밀복검 2021.04.19 09: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조선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이 일본군의 질적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는 경우도 있었죠

    지형상의 한계로 중포를 운용하지는 못하였으나 동일 스펙의 속사포들은 일본도 러일전쟁~1차 세계대전 때에 가서야 쓰게 되는 물건들이었으니까요

    경복궁의 전등 덕분에 농성도 꽤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었다고 들었는데

    다른 곳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텼다고 해도 역사가 큰 틀에서는 바뀌지 않았겠습니다만은

    조선이 다른 시도를 해 볼 잠깐의 여유는 얻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 해양장미 2021.04.19 1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당시 조선은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서 좋은 무기 많이 샀었지요. 제대로 못 써보고 저렇게 져서 다 잃었지만요.

      당시 경복궁을 기습한 일본 병력은 1천 정도, 한양의 일본 총 병력은 4천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것만 어떻게 몰아냈으면 그래도 조선 또는 대한제국의 앞날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가더라도 한일합방보다 딱히 행복하고 평화로운 미래가 있기는 어려웠을 것 같긴 합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합방된 덕(?)에 한반도는 1950년 전쟁 전까지는 꽤 평화로웠지요.

  5. Connie749 2021.04.19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복궁 전투도 그렇고 그 이후에 조선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망조가 든 나라는 뭘 해도 안 되는 모양입니다.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던 세계최강 영국과 미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은 시점에서 대세는 기울었죠.

    한국인들 대다수는 인정하기 싫어하겠지만, 저도 한일합방보다 더 나은 시나리오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무기 이전에 근대국가로 도약할 인프라가 전무했고,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가 소련을 상대로 맞서싸운 것처림 중국(중공)과 러시아(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기 힘든 나라였죠. 그 이후의 미래는 잘해야 우크라이나나 몰도바였을 겁니다.

    • 해양장미 2021.04.19 1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친러반일을 했던 고종의 방향 자체는 옳았다고 봅니다. 러시아 제국이 유지되었다면, 대한제국은 독립을 지킬 수도 있었겠지요. 러시아는 대한제국을 합병할 생각은 별로 없었던 것 같고요.

      그런데 러시아가 소련이 되어버렸으니, 만약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고 쳐도 대한제국은 좋은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웠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잘못하면 진짜로 소련과 전쟁을 불사해야 했을겁니다.

  6. armalitear15 2021.04.19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복궁 쿠데타 이후엔 그냥 뭘 해보려고 해도 안되는 확실히 망국의 길을 확정한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그레이트 게임서 영일동맹이 이뤄진 상황서 말이죠.
    태국이나 에티오피아처럼 제대로 믿을만한 나라에 빌붙아서 성공적으로 외교를 했던것도 아니고
    근대화를 위한 노력도 저 둘에 비해선 빈약했으니요.

    • 해양장미 2021.04.19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조선은 경복궁의 변에서 패전하여 실질적으로 망한 거였고, 이후 청이나 동학군이 이겼으면 모르겠는데 패했고요.

      그 다음은 고종이 아관망명 이후 친러 대한제국 세워서 2차전 해본거였지요. 그건 러일전쟁의 결과로 패한 거고요.

  7. 묵嘿 2021.04.19 1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역사는 디테일을 파도파도 끝이 없고, 총체적인 안목이 없이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네요. 경복궁 앞에서 교전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을 파고드니 그 난세에서 고종이 얼마나 처절하게 국체를 보존하려고 버텼는지 실감이 납니다. 그리고 피의 일요일 사건이 러일전쟁의 판도를 바꾸면서 한반도의 을사조약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세계사와 한국사를 별개로 가르치는 교육 과정 하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겠지요. 기껏해야 부동항을 찾아 발칸반도, 한반도로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했던 영-미가 일본과 협약해서 간접 지원한 내용 정도가 간간이 시험 문제로 활용되긴 합니다만.

    아편전쟁이 있던 헌종 대에 이미 조선 앞바다에도 양선들이 오락가락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 시기에 시류의 변화에 제때 대응하지 못한 게 조선의 불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국은 효명세자의 요절로 헌종이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외척이 득세해 부패에 빠지고, 민간엔 콜레라가 기승하고 기해박해 등으로 어수선한 시점이었으니...

    하여튼 요새 한국사를 수능 필수 과목에까지 넣으면서 강조합니다만, 수업시간은 한정돼 있고 양은 방대한데 내용이 객관적인지도 의문이라 영 기대가 안 됩니다. 각자 직접 지적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도록 유도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 것 같기도 하고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역사는 인과 관계에 대한 의문 없이 암기만 해서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분야니까요.

    • 해양장미 2021.04.19 17: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쁜 이미지에 비해 고종은 망국을 막으려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실제 원교근공에 가까운 외교에 성공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고종/명성황후 부부였고, 러시아에 피의 일요일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는 데 성공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조적으로 미리 친일했던 독립협회나 급진개화파는 열강으로 가는 막차를 타기 위해 발악중인 일본이, 바로 인근에 있는 조선을 가만히 둘 수가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고종과 대립을 많이 했고요. 흥선대원군은 말년에는 완전히 트롤이었고요.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이 잘싸우긴 했는데, 피의 일요일만 아니었어도 결국 뒷심이 강한 러시아가 이겼을 겁니다. 대한제국은 피의 일요일 때문에 망했고, 광복 이후의 한반도는 소련과 김일성 때문에 분단되었고, 참혹한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1800년대에 조선은 급변하는 시대에 대응할 능력을 빠르게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왕조라도 멀쩡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훨씬 상태가 나은 청나라까지 기둥뿌리가 뽑혔는데 조선이 생존하기는 더 어려웠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안망하려고 끝까지 싸우고 노력은 했습니다. 후대의 눈에 차지 않을지는 몰라도 당시 사람들은 열심히 했지요.

      저는 역사를 교양 수준에서 기본적인 걸 알게끔 필수적으로 가르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세한 내용을 과도하게 외우도록 시키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그런 건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싫어하게 만듭니다. 그런 식으로 무언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요.

    • 0ㅇㅇ 2021.04.20 1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미가 일본의 빽이었기 때문에 결국 일본이 이기거나 유리하게 종결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러시아가 종합 국력에서는 앞섰지만 동아시아에 그 국력을 쏟을 시스템이 없었고 일본은 영미 빽 믿고 올인할 수 있었으니 러시아가 이겨서 조선이 속국이 되는 건 생각하기 힘드네요. 특히 영국이 거문도 점령에서 보듯 일본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을 것 같습니다.

    • 해양장미 2021.04.20 2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 러시아는 만주에 욕심이 있었고, 보급을 위한 철도를 부설중이었습니다. 영미야말로 일본을 적극적으로 도울 이유나 여력이 부족했고요.

      괜히 열강이 러시아의 우세를 예측했던 게 아니고, 심지어 싸우던 일본도 패배를 예측하고 싸웠던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겨서 일본이 이후 끝없이 기고만장해지게 되지요.

  8. 2021.04.19 18: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해양장미 2021.04.19 2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은 플라자합의와 버블경제를 거치면서 좀 더 현실적이 된 면도 있지요. 태도를 보면 현대의 일본은 일본제국을 타산지석으로 삼지, 별로 닮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좌익 세력야말로 일본제국의 정신적 후계자입니다. 근래의 중공도 옛 일본제국을 많이 닮아있는 것 같고요.

  9. Lastinches 2021.04.20 21: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러시아의 러일전쟁 패배와 피의 일요일이라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초대형 변수 때문에 고종의 플랜이 완전히 꼬여버린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한반도가 일본에게 병합당한 덕분에 한반도 인민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이후 경제발전의 기반을 얻은 반면, 그렇게 기를 쓰며 주권을 침탈한 일본 입장에선 치안유지와 인프라 투자 때문에 돈은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데 얻는 것은 없는 계륵같은 영토만 얻은 셈이고 결과적으로 한반도 인민은 일본으로부터 단물만 실컷 빤 셈이 되었으니, 참으로 역사는 돌고 도는 아이러니 같습니다.

    - 본문에서 말씀하신 대한제국 주권침탈의 계기를 제공한 것도 그렇고, 625도 그렇고 소련 공산당은 한국 쇼비니스트들의 관점대로라면 그야말로 증오할 수밖에 없는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쇼비니스트들이 그들에게 호의를 보낸다는 점이 참 우스운 일입니다.

    • 해양장미 2021.04.20 22: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지요. 아이러니 그 자체인데, 그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사람도 극소수고.

      우리나라 사람들 중 다수는 끊임없이 꿀을 공급한 일본은 미워하고, 미국은 경계하며, 우리를 못살게 군 중공과 소련 및 북조선을 무분별하게 좋게 봅니다.

      미국하고 일본 없었으면 현재의 발전한 대한민국은 없었습니다. 반대로 중공하고 소련이 없었다면 훨씬 순탄한 역사였을 겁니다.

  10. 프마수스 2021.04.21 0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의 '매국노 고종'이라는 책과 관련이 있는 포스팅일까요? 그 책을 읽은 적은 없는데, 책 소개에 항상 '전쟁 한 번 못 해보고 망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식의 문구가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조선군에 당시 굉장히 좋은 신식무기가 종류별로 다양하게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뒷 부분은 항상 '너무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모아놔서 실제 군대의 운용에는 호환성 문제가 심각했다'로 끝나곤 하는데, 이 역시 어떤 오류가 있는 통설인 걸까요, 아니면 이를 감안 하더라도 소규모 교전 정도는 가능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독일식 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이라는 표현을 보면 뭐가 됐건 간에 일단 교전에 문제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으로 읽긴 했습니다.

    • 해양장미 2021.04.21 0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책하고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대중적으로 조선이 전쟁 한 번 없이 나라를 일본에 넘겼다는 인식이 있어 쓴 포스트입니다.

      당시 조선은 신식무기에 대한 충분한 이해보다는 신식무기를 사는 것 자체에 우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운용을 익히고 교리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긴 했는데, 차츰차츰 익히고 체계를 만들고는 있었지요. 그런 상태에서 패전하여 뭘 해보기도 전에 실질적으로 나라가 망하고 무기를 잃었습니다. 처음부터 충분히 효율적인 무기구매라 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조선은 신식 무기체계를 이해하고 효율적으로 근현대적 군대를 양성할 역량이 없었습니다.

      경복궁의 변만 보면 조선군은 신식무기 가지고 잘 싸웠습니다. 수적열세를 이겨내고, 일본군을 밀어붙일 정도는 되었습니다. 기습에 고종 부부가 빨리 잡혀서 진 겁니다.

  11. 이응2 2021.04.23 15: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당 전투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본 적 있었는데, 관련 자료 찾기가 힘들더군요. 양측 사상자 같은건 나오지도 않고, 실록에도 한줄정도 짤막하게 나오구요. 나름 중요한 사건인데, 해당 사건을 지칭하는 통일된 명칭조차 없는건 신기합니다. 당해에 워낙 큰 사건들이 많아서 그런 걸까요...

    • 해양장미 2021.04.24 0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자료 자체가 적고, 본문에 상기한대로 오랫동안 일본의 언론 플레이대로 알려져 있었다가 시대가 오래 지나 관련문서가 발견되면서 사실이 알려진 사건입니다.

      일본이 이 경복궁의 변을 숨기고 조작한 게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이 전쟁한번 하지 않고 일본에 반쯤 자발적으로, 또는 무력하게 점령당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아직 그리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지요.

  12. 슈퍼너드 리보 2021.04.29 14: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학과 개화파들을 초창기 한국의 자유주의자로 본다는 논문도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