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

 

https://youtu.be/AoB9o49fl7I

 

 

 

 조선이 전쟁 한 번 없이 일본에 망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조선 최후의 전쟁은 있었습니다. 규모가 작은 전쟁이었고, 학계의 주목조차 못 받아서 문제입니다만, 엄연히 1894년에 경복궁에서 국가의 명운을 가른 최후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1885년에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을 맺어둔 상태였는데요. 그 내용은 조선으로부터 양국이 군대를 철수시키고, 조선의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한 교관도 보내지 않으며, 어느 한 쪽이 조선에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학 민란으로 고종이 청에 파병을 요청하면서 청군이 조선에 파병되었고, 일본은 톈진조약을 근거로 출병해 군대를 제물포에 상륙시킵니다. 그에 놀란 조선조정은 동학군을 진정시키고는 청군과 일본군을 물리려 하지만, 애초에 침략의욕이 있던 일본군은 물러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러시아와 청의 압박을 물리치기 위해 고종을 잡아 인질로 삼으려 하지요. 일본군은 먼저 4대문을 포위하고, 그 다음에는 경복궁 앞에서 무단으로 훈련을 합니다.

 

이 그림에서 남동쪽 광화문은 광희문(남소문)의 오기입니다.

 그리고 그레고리력 1894년 7월 23일 새벽 4시 20분, 약 1천명의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합니다. 경복궁 내에는 500명의 조선군이 있었고, 이들은 숫자는 적지만 독일제 총으로 무장한 정예였습니다. 500명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학농민군을 상대하기 위한 파병이 있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조선군은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교전하였으나, 일본군은 조선군을 뚫고 고종과 중전 민씨가 숨어있던 함화당까지 돌파하여 고종을 인질로 잡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협박을 받아도 굴복하지 않았고, 교전이 계속 이어집니다. 조선군은 매우 잘 싸웠기 때문에 교전은 오후 2시까지 이어졌고, 일본도 피해를 크게 보았으나 이미 고종의 신변은 일본군에 넘어간 후였고, 훗날 독립협회를 창설하는 일원인 김가진과 안경수가 고종 명의의 가짜 전투중단 명령서를 만들어 교전을 중단시킵니다. 그에 조선군은 통곡하며 무기를 버리고 해산하였고, 일본군은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모든 근현대식 무기를 압수하여 폐기합니다. 당시 일본군이 압수한 조선의 근현대식 무기는 양이 꽤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500년 국가 조선이 외적을 상대로 맞서 싸운 마지막 전투고, 여기서 왕이 잡히고 정예 군대가 무장해제됨으로 실질적으로 조선은 멸망하고 맙니다. 이후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괴뢰정부를 세웠고, 이 교전을 조선군이 일본군을 갑자기 공격하여 일어났던 우발적 교전으로,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을 지킨 것으로 언론 플레이를 합니다만 오랜 시간이 지나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최후의 전투에 대한 정식 명칭은 불분명합니다. 경복궁의 변이라고도 하고, 갑오사변, 갑오왜란 등으로도 불립니다.

 

 이후 일본은 청일전쟁을 벌이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실질적인 조선 땅의 지배자가 되는 듯하였으나... 동학군은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지 않고 들고일어났고, 고종ㆍ중전 민씨 부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저항합니다. 그에 다음 해인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중전 민씨를 시해합니다. 이 때는 이미 경복궁이 한 번 점령되고 무기를 모두 압수당한 후라서 조선군이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는데, 중전 민씨가 그토록이나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시해당한 것은 이미 조선이 패전해 점령당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그 해 11월,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다음 해인 1896년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에 성공하여(아관파천) 친일 김홍집 내각을 몰아내고 친러내각을 구성한 후, 다음 해 대한제국을 세우고 중전 민씨를 명성황후로 책봉하였습니다. (공식적으로 추존이 아니고 책봉. 대한제국 설립 시점에서 명성황후의 사망은 공인되지 않은 상태로, 행방불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에게 이길 수 있는 국력을 가진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아마 큰 변수가 없었다면 1904년부터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길 수 없었을 것이고, 대한제국은 잘 하면 러시아 제국의 속국으로나마 독립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후 대한제국은 입헌군주국으로 조선과는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진 국가가 되었을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게 변하고 맙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우리나라의 모든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사건입니다. 그 비극적인 사건 이후 러시아는 내부 상황이 막장화되어 전쟁을 지속 수행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패전에 가까운 종전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승전한 일본은 11월 17일,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을 껍데기만 남겨놓습니다.

 

 러일전쟁은 여러 모로 불행한 결과를 잉태했는데, 전혀 이길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러시아전에서의 승전으로 인해 일본 또한 이후 막장국가가 되고 맙니다. 실익이라고는 전혀 없다시피 했던 전쟁에서 이기면서 군대 교리는 엉망이 되었고, 군부는 너무 기고만장해졌으며, 국가적으로 자아도취가 끝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승전도 아니어서 소모와 손해밖에는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조선 병합을 해서 수탈을 시도해봤으나 그 역시 일본 입장에서는 전혀 이익이 아니었고 실질적으로 손해만 보았으며, 결국에는 완전히 막장 군사국가화되어 수많은 일본 민중이 징집되어 소모당하고 학살당하고 결국 패전에 이르게 되는 스노우볼의 단초가 됩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은 피의 일요일 사건을 발단으로 실질적인 패전의 굴욕을 당하고, 공산화의 스노우볼이 굴러 소련이 되고 맙니다. 이후 소련은 광복 이후에도 한반도 분단과 전쟁의 배후가 되었지요.

 

 조선은 싸워보지도 않고 일본에 망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동학 민란으로 인해 원래 부족한 병력마저 더 없는 상황이었고, 청을 개입시켜 민란을 해결하려는 고종의 오판이 있었고, 그에 조약을 빌미로 일본군이 막무가내로 한양에 밀고 들어와 왕궁을 기습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왕이 사로잡히고, 그 와중에도 고종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신하가 굴복하여 패전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전쟁이 규모가 작았다고 하여 조선군이 치열하게 싸우지 않은 것이 아니었고, 왕은 사로잡힌 후에도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점령당해 망한 후에도 고종은 망명까지 하여 그래도 나라를 재건국까지 해가며 2차전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은 무력했지만, 무기력하게 싸우지도 않고 망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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