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크라시에 대하여

정치 2020. 9. 11. 15:48 Posted by 해양장미

 브금

 

https://youtu.be/oaWQnK65VIw

 




 몇 년 전 미 대법원이 동성혼을 가능하게 했을 때, 나는 그 판결을 환영하면서도 그것이 민주적이지 않은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데모크라시와 법치주의, 그리고 데모크라시와 자유주의는 대체로 세트메뉴 취급이긴 합니다만 엄밀히 보면 서로 상충되는 면이 있긴 한데, 그게 다시 한 번 드러났던 것이지요.



 삼권 분립 체제에서 원칙적으로 제도는 의회가 결정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이건 헤븐조선이건 그렇게 되고 있지 않지요. 판례가 많은 것을 결정하기도 하고, 행정부가 많은 것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미국은 대법원의 동성혼 합헌 판결로 동성혼이 가능한 국가가 되었는데, 그것은 의회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해당 판결이 자유주의의 정의와 기본권의 정의에 부합함은 물론입니다만, 민주적으로 이루어지진 않았지요.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을 자유주의에 대한 강한 반동으로도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진보가 매끄럽지 않을 때는 곧잘 반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전 세계는 지난 4년 동안 세계 패권국의 수장이 우익 포퓰리스트인 것에 대한 대가를 꽤나 치렀지요.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정치학계 등에는 포퓰리즘과 데모크라시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는데, 나에게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견해를 참조하여 이야기하자면, 근래 세계 곳곳에서 데모크라시와 자유주의의 결합은 약해졌으며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 신성 네오 헤븐조선은 데모크라시와 자유주의가 극단적인 균열을 일으킨 곳입니다. 날 것 그대로의 데모크라시는 표출된 민의와 인민주권 그 자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프로파간다로 인해 형성된 중우건 폭민이건, 표출된 민의가 인민주권을 가지고 국가를 움직인다면, 그것은 민주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엄(燇㛪)하신 천룡들은 헌법에서 자유라는 문구를 빼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계시지요.



 고전이자 표준이 된 고 로버트 달을 비롯한 다수의 정치학자들은, 그리고 그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리버럴 데모크라시만을 진정한 데모크라시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근래의 현상들은 기존의 관념에 대한 재고를 요구합니다.


 

 내가 보기에 민중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 어떤 철학자들보다 괴벨스가, 김어준이, 그리고 우리 더불어민주당과 헤븐조선, 촛불혁명의 최고령도자, K아이돌 중 단 하나의 정점이었던 분, 시장님 죽기 전까진 성인지감수성과 래디컬 페미니즘의 든든한 수호자였던 분, 누구보다 달과 같은(Lunatic), 화성(火星)보다 붉은 분, 그믐보다 더 깊은 분, 드루이드의 왕이 모시는 대군주, 노틀담의 예언 속 대왕 앙골모아, 소스가드(SouceGuard)와 라텔기사단의 숭배와 수호를 받는 분, 평등(抨蹬)과 공정(恐怔)과 정의(怔偯) 그 자체,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행한 모세보다 더한 기적을 행하시는, 대지를 가르고, 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가르고, 원하는 모든 것을 가르시는 분, 북쪽을 바라볼 때는 그냥 천사, 남쪽을 바라볼 때는 나팔과 금대접을 든 천사, 모든 존엄 중 최고존엄(膗辜燇㛪), 위대(僞大)한 수령(囚囹) 문재인(紊災人) 동지(哃謘)께서 민중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데모크라시는 그 자체로는 효용이나 효율이 매우 낮은 편입니다. 공화정 엘리트 관료의 개입과 자유주의가 배제된 주민자치가 난항을 겪기 쉽다는 걸 염두에 두면 됩니다. 민중의 다수결은 많은 경우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며, 진리에서 먼 민의는 대단히 포퓰리스틱합니다.


 

 근래 두드러지는 포퓰리즘은 최적의 엘리트를 배제합니다. 진리에 가까운 것이 아닌, 민중이 솔깃하기 쉬운 권력자의 아집이라거나 일종의 마이너리티가 각광받고, 그에 따라 정책이 추진됩니다. 그 과정은 열린 의사결정도, 합리적 의사결정도 아니고 프로파간다에 의해 민의를 얻은 권력자의 자의와 독단이기에 독재입니다. 민주적인 독재, 포퓰리즘 독재라 할 수 있지요.


 

 데모크라시는 정치체제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오역 때문에 쉬이 오인되지만, ~ism이 아닙니다. ‘민주정또는 민주정체가 올바른 번역이지요. 흔히 이야기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라거나 민주적이다같은 개념에는 자유주의, 공화주의, 법치주의 같은 이념이 다분히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권력과 기득권과 정열과 도취를 추구하지요.



 마땅히 비유할 대상이 별로 없어 그나마 많은 분들이 알 만한 것에 빗대 볼까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민주적인 것같은 게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순진한(뚱보) 부우라면, 순수한 데모크라시는 키드(순수) 부우입니다. 드래곤볼을 보셨으면 이 비유가 직관적으로 와 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근래 일어나는 현상은, 비교적 성격이 좋은 뚱보 부우에서 자꾸 키드 부우가 분리되고, 그 키드 부우가 온갖 것들을 다 부수고 다니는 것에 가깝습니다. 자유/공화/법치주의가 결합되지 않은 데모크라시는 프로파간다와 포퓰리즘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정하고 우려하던 그 중우/폭민정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민주 시민은 자유주의 또는 공동체주의의 영역에서 따르거나 발전시키거나 가치를 부여하는 언행을 해야 합니다. 데모크라시 자체는 선하지도 않고, 추종할 만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데모크라시는 정치체제라는 수단이며 정체 중 나은 정체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조리 도구나 공구 같은 건데, 어떤 좋은 도구라도 정신줄 놓고 마구 휘두르면 흉기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과 함께 보면 좋은 영상

 

https://youtu.be/kY20wLISPgI

https://youtu.be/hFX3wf7Da7M

 


 

 그러고 보니까 나는 본 블로그에서 거의 공동체주의 비판만 해 왔는데, 지난 글에서 공동체주의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아예 공동체주의가 뭔지 잘 이해를 못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요지부터 이야기하고 시작하자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관계와 공동체주의와 집단주의의 관계는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이기주의 이듯, 공동체주의집단주의 입니다.


 

 현대정치철학에서 공동체주의가 주요담론이 된 건 최근의 일이고요. 단어의 어감만으로는 별로 그렇게 생각이 안 되겠지만, 공동체주의는 메이저 정치철학 중 가장 새로운 것입니다. 근현대 정치철학 발달 및 등장 계보를 보면 대략 공화주의 - 고전적 자유주의 - (아나키즘 등이 난립하는 혼세) - 현대적 자유주의 - 공동체주의 순으로 등장합니다. 결국 이 시대의 메이저 정치철학 담론은 현대적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만 남았다고 정리해도 됩니다. 나는 자유주의자라서 그 동안 현대적 담론의 관점에서 공동체주의를 비판해온 건데, 어쩌다보니 본문에서는 내가 공동체주의를 앞장서서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나는 자유주의자이다 보니 공동체주의자의 입장에서 공동체주의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한나 아렌트. 출처 https://brunch.co.kr/@kibokk/14

 

 계보로 볼 때 공동체주의는 공화주의의 후예이자 유사 관념(공동체주의공화주의)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동시에 서구 기독교 민주정체(기민주의)의 현대적 버전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 공동체주의는 이미 현대적 자유주의가 등장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논의된 만큼, 자유화된 세계관을 기반에 두고 있으며 집단주의적인 것, 특히 전체화에는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적 자유주의가 이기주의나 방종, 더 나아가 고전적 자유주의에까지 비판적인 것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뭉뚱그려보자면 현대적 자유주의와 현대적 공동체주의는 많은 부분 목표나 결과가 아주 크게 다르지는 않고요. 합의 가능한 개념들이 많은데, 현실적으로는 주로 각론에서 이견을 보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마치 주류경제학이라는 범주를 볼 때, 적어도 외부에서 (비주류경제학의 관점 등으로) 보기에는 이견이 그리 심하지 않은 것과 다소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근래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을 두고 이야기를 해 보지요. 1인가구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지요. 각자가 1인가구로 살면 장점도 있지만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것에는 개인의 문제도 있고, 사회적 문제들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개선과 해결이 필요합니다.


  

 현대적 자유주의자로서의 나는, 해당 문제의 본질을 각자의 자유를 충분히 존중하지 못하는데서 일차적으로 비롯되었다고 가정합니다. 즉 사람들끼리 어울려 살려면 각자의 개성을 충분히 존중하고, 간섭을 과도하게 하지 마는 등의 배려가 필요한 것인데 서로의 개인성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하고, 불편하게들 굴면서 정의로운(일상어휘로는 평등한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는 게 좀 더 이해가 쉽겠습니다.) 관념적 교집합을 이끌어내지 못하다 보니 (어떤 집단이 형성되면 자체적인 집단문화가 형성되기 마련이라 생각합니다. 2~4명이 모인 친구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각자가 충분히 교감할 수 집단문화가 형성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성원 각자가 쉽게 파편화된다는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는 자유와 다원성의 증진으로 개선이 가능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우리 각자는 숙명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외로움이 있다고도 생각하지요.



 그런데 공동체주의의 렌즈로 이 상황을 보면 조금 다른 방향부터 접근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파편화되고 외로운 건 공동체의 유대감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유대감은 구성원에 대한 개방성, 따스함, 존중 등으로 유지될 수 있는데 그런 게 불충분하니까 공동체가 파괴되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자를 서로 존중하고, 따스한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봐주면서 공동체의 회복을 도모해야 한다 할 수 있지요. 특정인(대체로 윗사람)의 이익을 위해 각각의 권익이 침해된다거나, 공동체 내의 특정인에게 냉혹하게 군다거나, 누군가가 권력으로 찍어 누르면 당연히 공동체는 부서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위에 말했듯 약간 차이입니다. 각자의 개인성을 존중한다는 결과는 같지만, 존중하게 되는 접근방식은 조금 다른 정도랄까요. 우리나라는 집단주의적인 나라긴 해도, 현대적 공동체주의가 있는 나라는 아닙니다. 권위에 대한 추종, 공격적 오지랖, 이기심은 있지만 (이 모든 걸 다 높은 수준으로 갖춘 집단도 있지요.) 공동체도 자유도 영 모자란 나라라고 할 수 있지요.


 

 두 이념의 차이는 주로 각론에서 나타납니다. 일단 도덕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느냐의 차이가 생기는데, 쉽게 설명해 자유주의는 개개인의 느슨한 동의와 교집합에 의해 도덕이 생긴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 반면, 공동체주의는 도덕을 보다 관습적이거나 전통적인 것, 또는 어떠한 진리에 의한 것 - 서구에서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 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가 공공선을 파괴하고 개인의 파편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합니다. 대조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공동체주의는 개인을 희생시키기 쉽다고 주장하지요. 나는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에 공동체주의자들을 현대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다원주의에 따른 타협의 대상으로 본다는 이야기고, 올바른 공동체주의적 덕성을 유지할 경우 몇몇 각론이 아니면 크게 부딪칠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다만 나는 자유의 증진을 공공선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그렇지는 않지요.


 

 정치철학의 범주를 벗어날 때 공동체주의는 공공선을 규정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생기기 쉬워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즉 공공선을 규정하기 쉬운 영역일수록 공동체주의적 관점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공동체주의는 공동체의 미덕을 규정하는 데 있어 약점을 드러내는데, 나는 그럴 때 결국 포괄적 교설을 이끌어내는 가운데 최대한 개개인을 존중하는 게 답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시각에서 공동체주의는 관습에 대한 존중을 반드시 동반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공동체주의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입니다. 바람직한 공동체주의는 공동체의 관습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다듬어가야만 현실에 구현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각각 공동체의 존중받는 전통적 관습이 거의 상실되었고, 바람직한 형태라 할 만한 것이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공동체주의자들은 해야 할 게 정말 많습니다.


 

 한편으로 공동체주의는 공공선을 강조하고 샌델 같은 우파 공동체주의자의 경우 (샌델은 많이 심하게 우파입니다.) 공동체가 정의를 대체하거나 어떤 경우 공동체가 정의의 근원이라 주장할 뿐, - 사견으로 관습적이지 않은 사회 공동체는 정의를 규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 그 구체적 해결책으로 집단주의적인 방법론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무신경하게 공리(최대다수의 최대행복)를 들이밀 때, 공리가 반드시 공공선은 아니라고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겠습니다만, 사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누구나 공공선과 공리를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공리보다 나은 공공선을 찾기 어려워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통상의 유권자가 아닌 통치자의 경우, 반드시 공동체주의적인 덕성을 함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순수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이 존립하기 어려운 딜레마라 할 수 있는데, 아나키한 상태가 아닌 이상 대의제의 대표자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이 대표자가 공적 개념과 덕성이 없는 경우 이런저런 문제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통치자의 윤리로 공화/공동체주의는 언제나 탐구되어야만 하며, 시민들은 각자의 자유를 추구하는 가운데 좋은 공동체 의식이 있는 대표자를 찾아 뽑아야만 합니다. 권력이라는 게 존재하는 한, 권력을 쥔 사람이 가져야 할 공적 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국가/시민공동체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이, 사적 이익만을 추구한 자가 권력을 가질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똑똑히 보지 않았습니까.

 브금은 계절에 맞춰

 

https://youtu.be/2i1T2L2BJpo

 

 



 여러 번 말했던 이야기를 다시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은데, 결국 철학이 문제입니다. 자유한국당은 (김병준 비대위 시절을 제외하면) 정치철학이 부재한 정당입니다. 상대적으로 민주당은 아주 잘못된 정치철학을 가진 정당이고요. 그래서 더 해로운 건 민주당입니다만, 더 헤매는 건 자한당입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강조하고 있는데요. 보수주의는 태도(attitude) 또는 정서(emotion)일 뿐 철학(philosophy)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특정 정치세력 또는 사회운동 및 사회적 트렌드 등이 급진성을 보일 때, 그에 대한 의심이나 반감 등이 보수주의적인 움직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보수주의는 능동적이기 어렵고, 수구화되기 쉽고, 극우화 및 포퓰리즘으로 치닫기도 쉽습니다. 괜히 최근에 세계 전반적으로 전통적 보수세력이 망한 게 아닌데요. 21세기 들어 엄청나게 빠른 사회/기술변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말 그대로의 보수적 태도를 가지고서는 국가가 생존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철학적으로만 - 그리고 원리만 - 보자면, 보수주의는 공동체주의와 친하고 진보주의는 자유주의와 친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 없는 자유한국당소리를 듣는 근본 이유인데요. 보수적 정서와 태도를 가질 경우 관습과 가까워지는 반면 자유주의와는 멀어지게 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꽤 많은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사회적/문화적 면에서 다소 수구적인 공동체주의를 앞세우는 가운데, 오로지 경제적인 면에서만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모습은 자칭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대중적 - 특히 중도적인 사람들의 -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특히 이런 유형의 전형인 것 같습니다. 대조적으로 유승민의 경우 그의 정치적 행보가 최악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으로 공동체주의적 태도를 제법 일관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지층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보수주의적인 사람들은 각자의 보수성이 본질적으로 정서적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하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철학적 일관성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포퓰리스틱해지고 파시스틱해지기 쉽습니다. 파시즘은 철학의 일관성이 없고 열광적으로 권력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우선시하는 게 본질입니다.


 

 한편으로 대한민국에서는 민족주의와 해당 이미지를 NL계열이 선점하고 있으며, 인종/민족갈등이 매우 약한 편이기 때문에 보수파가 극우화되면서 세력을 확장할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극우적 열광의 많은 지분을 민주당과 범여권이 가지고 있고, 보수당은 반공 매카시즘에 집착해 왔던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공동체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자유한국당이 보수적 공동체주의를 적극 도입하기엔 우리나라의 보수적 전통이라 할 만한 게 별로 없습니다. 만일 자유한국당의 뿌리를 박정희에서 찾는다면, 박정희 정권은 좋게 표현해 혁신적인 정권이었습니다. 권위주의적이긴 하였으나 보수적인 정권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심지어 전두환도 혁신적이었습니다. 김영삼도 그러합니다. 이명박도 보수적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보수파는 이름만 보수지, 실제로는 보수적인 적이 없었습니다. 박정희를 숭상하면서 그걸 보수라 부르니까 논리가 사라지고, 맹종이 남기 쉬워지는 것입니다.


 

 나의 견해로 자유한국당은 전반적인 시민이 그럭저럭 동의할 수 있는 철학을 먼저 정립하고, 그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중도적인 시민들은 결코 민주당의 아집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한국당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면 적어도 한 번은 투표를 해 줄 겁니다.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자유한국당은 공동체주의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연구하고 사상을 정립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자유한국당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주의를 챙기는 건 대단히 어렵고요. 바람직한 공동체주의라도 챙기는 게 현실적으로 나을 겁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보편적인 한국인들이 현재 원하는 건 제대로 된 공동체주의입니다. 표 가진 유권자들의 니즈가 그쪽입니다.



 나는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여러 번 밝혀왔습니다만, 만일 내가 현재 자유한국당에서 당론과 정책을 결정하는 입장이었다면 나는 공동체주의적 요소를 많이 이야기할 것입니다. 민족주의적인 이야기도 할 거고요. 이 연장선상에서 이야기하자면, 아무래도 민부론은 정치공학적으로는 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만일 자유한국당이 현재 국민들이 가진 국가공동체에 대한 불안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듬직한 청사진을 제시하여 안도감을 줄 수 있다면, 내년 총선에서 질래야 지기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유주의라는 대안

정치 2018. 8. 31. 22:03 Posted by 해양장미

 추천 브금

 

https://youtu.be/UBQUeVPdYvo

 


 

 이 곳을 자주 찾아주시는 분들은 다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나는 자유주의자입니다.

 

 나는 동성애, 낙태, 안락사 같은 논제에 있어 모두 진보적인 입장입니다. 나는 정치적 자유주의자이기에 다원주의자이며 가능한 타인끼리의 간섭은 줄여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남이사 뭘 하건, 그게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신경 쓰지 않는다는 입장이지요.



 다원주의에 대한 - 특히 사회문화적인 면에 대한 - 나의 지향은 아주 강합니다. 진짜로 남한테 피해만 안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만큼 나는 꼰대를 많이 싫어합니다. 특히 좌파 꼰대들은 북핵보다 더 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는 방어적 민주주의자이기도 합니다. 다원주의가 하나의 사회적 단위 내에서 상대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언더도그마에 빠져 타인에게 피해를 강요하는 순간 극단주의자가 대세가 되고, 좌파 포퓰리즘이나 극우파가 날뛴다는 걸 잘 알고 있기도 합니다. 다원주의의 한계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느냐 아니냐, 공격성이 어떠한가에 있습니다.


 

 자유주의는 문화적인 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자유도 중요합니다. 이것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 정부는 자유 시민들의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또한 동시에 정부는 자유시장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매 순간 조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시장을 무조건 자유방임해야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어차피 닉슨 쇼크 이후의 현대 금융시장은 자유방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갈등 관계입니다.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건 엄밀히 말하면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는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조세저항을 초래합니다. 그것은 정치권력 또는 무력에 의한 일종의 폭력이며, 결코 동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유재산침해에 대한 불만을 가진 자들의 저항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사회주의적인 국가는 진취적이고 성공을 추구하는 인적 자원을 빠르게 잃습니다. 권력자에 의한 사유재산침해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된 것이기도 합니다. 사회주의와 좌파 포퓰리즘은 사유재산침해를 인민의 이름으로 어찌 잘 합리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고전적이지 않은, 또는 리버테리어니즘이 아닌 현대적인 자유주의는 꼭 필요한 복지나 꼭 필요한 부분의 정부 간섭을 결코 배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는 노동능력이 없는 자를 위한 복지를 딱히 부정하지 않습니다. 축조물이나 제조 과정, 교통수단 등의 안전 관리 같은 것도 정부가 간섭을 해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1970년대에서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공공, 환경 관리조차 시장주의적으로 접근하던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4년에 보팔 가스 누출 사고가 터지면서 극단적인 시장주의는 그 설득력을 잃었지요. 자유주의는 원리주의가 아니고, 고집스럽지 않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양극단의 정치적 갈등을 최대한 배제한 균형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는 후기 롤즈의 철학으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그 주장을 요약하자면, 본문의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다원성입니다. 서로 다른 포괄적 교설들이 중첩되는 지점에서의 중첩적 합의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정치와 도덕의 분리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특정한 도덕을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주의 또는 공화주의의 특성인데, 자유주의는 보다 다양한 도덕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방어적 민주주의 범주 안의 옳음의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워마드나 이슬람 원리주의 같은 건 포용할 수 없지요.


 

 대조적으로 보수적인 공동체주의를 주장하는 철학자로 역제 정의란 무엇인가를 집필한 마이클 샌델을 꼽을 수 있는데, 나는 그의 주장을 여러 모로 비판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본문은 대략적인 자유주의 소개이며, 자유주의라는 대안을 제시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요새 문재인 정권에 실망하면서, ‘내가 보수 편을 들어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보수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보수 정치세력 편을 들라고 하는 건 처음부터 어려운 이야기지요.

 

 자유주의는 보수주의가 아닙니다. 철학적으로는 공동체주의 또는 공화주의와 대립하는 개념이며,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와 보수주의 모두에 대립할 수 있는 개념이지요.

 

 그러나 자유주의는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더럽혀져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익들이 주로 자유주의의 이름을 망쳐왔지만, 글로벌 기준에서는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이름을 많이 더럽혔습니다. 미국의 리버럴들은 결코 더 이상 리버럴하지 않습니다. 사사건건 간섭하기 좋아하고 교조적이며 너무나도 사회주의적인 자들이 자유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진짜 자유주의는 그런 게 아닙니다.

 

 한편으로 나는 리버테리언들은 다소 극단적이며 현실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왜 현대적인 자유주의가 변화하였는지를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리버테리언이나 고전적 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만, 그런 쪽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견을 밝혀둡니다.

보수의 몰락

정치 2017. 7. 4. 03:12 Posted by 해양장미

 여러 번 하던 이야기입니다만, 한국에 엄밀한 의미에서 보수주의 정치세력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건국 이후의 한국엔 왕당파도, 전통을 지키려는 정치세력도 의미 있는 규모로는 없었으니까요. 한국에서 보수주의의 유일한 가치로 통하는 건 반공이었고, 그 외엔 보수주의라 할 만 한 건 없었습니다. 세력, 소속감, 지역감정, 기득권, 권위주의 같은 게 보수파를 구성하였으나 그 응집력은 세에 비해 매우 약했습니다. 그들은 언제고 세가 잦아들면 분열되고 몰락할 것이었고, 한심하게 붕괴하였습니다.

 

 만일 한나라-새누리당 세력이 충분한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권위적이고 일방적이지 않았다면, 보다 더 보편적인 설득력과 올바름을 지녔고 강자의 여유를 보였다면, 자유라는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그들이 진짜 자유주의를 기초적으로라도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면 지금과 같은 파시즘 시대는 결코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시대의 과제에 무한한 책임이 있고, 다수의 시민들은 그 책임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쇠퇴하였고 현재진행형으로 몰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도금이 벗겨진 그들에게 남은 지지세는 소속감이 남아있는 자들이 보내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명분도 정통성도 설득력도 잃어버렸고, 어느 때보다도 잘 해야 함에도 그들이 보이는 모습은 여전히 한심하고 많이 모자랍니다.

 

 여기 오시는 분들 중 바른정당에 기대를 가졌던 분들이 많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나 역시 그들이 가능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랐지만, 진심으로 기대를 건 적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유승민이 말하는 그 어떤 말에도 마음이 움직인 적이 없고, 그의 주장에 동의한 적 또한 없습니다. 또한 바른정당 구성원 중엔 함량미달이 많았습니다. 결국 극단적인 보수개신교도 이혜훈이 대표가 되었지요. 제대로 된 정치철학을 가지고, 자유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혜훈처럼 어이없는 주장을 펼치지 않습니다. 이혜훈이 뭘 어쨌는지 궁금하신 분은 다음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iraorCoL3to

https://www.youtube.com/watch?v=egocIVbJdYw

 

 한편 이름값을 전혀 못하는 자유한국당은 홍준표가 대표가 되었습니다. 홍준표가 흠집투성이 정치인이란 건 굳이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싶고, 무엇보다도 그는 2개월 전 대선에서 패배한 정치인입니다. 그런데 2개월 만에 당대표가 되었지요.

 

 아무리 그래도 자유한국당은 107석을 가진 거대야당입니다. 그 의석만큼 역할을 해 줘야 하는 정당이고요. 그런데 그런 정당에서 불과 2개월 전에 패한 대선후보가 대표가 되는 건 정말 실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이는 자유한국당이 현재 그만큼 상황이 좋지 못하며, 거의 몰락단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만일 자유한국당이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이고, 고인 물이 아니라면 이런 사태는 없을 겁니다. 군소정당도 이런 추태를 보이진 않습니다.

 

 물론 이 보수 소리 듣는 정당들만 상태가 나쁜 건 아닙니다. 국민의당도 정의당도 끔찍한 상황에 있지요. 이 쪽들도 언젠가 이야기할 일이 있겠습니다만, 본문에서는 두 보수정당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보수정당이 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유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기본적인 철학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입니다. 이들은 명분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철학적 담화를 하지 못하며, 국가를 꾸려나갈 청사진에 있어 민주당보다 더 왼쪽인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 주장합니다. 또한 이들은 권위주의적이고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심하게 부족하며, 유기체적 국가관을 최소한의 문제의식조차 없이 내세우고,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 같은 건 별나라 일인데다 자유시장경제는 말로만 옹호하지 제대로 지켜본 적이 없는 대상이며, 더 나아가 아예 헌법의 정신과 너무 동떨어진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구성원 중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잘 되는 건 요원한 일이며 지금까지 운이 좋아서, 3당 합당 덕에, 상대가 약해서 잘 풀렸던 겁니다.

 

 실제로는 보수주의와도 자유주의와도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던 한국의 보수세력 이념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유기체적 국가론자이자 권위주의자이자 근대화, 산업화를 앞세우는 개혁주의자였습니다. 자유와 보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가져다 썼고, 심지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구분도 못 하면서 서구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개념을 완전 자기 멋대로 가져다가 마음에 드는 부분만 가져다 쓴 세월이 길어서, 흔한 표현으로 끔찍한 혼종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주제는 품위 있게 꼬아서 학술적으로도 제법 자주 다뤄집니다.

 

 내가 좀 신랄하게 말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자한당쪽에서도 윗글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긴 합니다. 자한당 지지자들이나 구성원들 중에 멍청이가 많긴 하지만, 절대 다 멍청이는 아니니까요. 기사 하나 보셔도 되는데.

 

http://www.mediapen.com/news/view/279941

 

 기대는 하지 마세요. 원래 새누리당엔 보기보단 나름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이 있긴 있었습니다. 그래봐야 전혀 소용이 없었어요. 문빠들에게 당내에서 무슨 바른 말을 해도 소용이 없듯, 저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권을 포함하여 많은 걸 가졌음에도 무력하게 허물어진 집단입니다. 수십 년 간 이념도 지성도 없이 자유주의 말만 가져다 붙인 집단에 갑자기 뭐가 생기겠습니까. 폐광에 곡괭이질 해봐야 황금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보수정당들은 많은 의석을 가지고 있고, 시스템 상 여당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들이 남은 의무라도 다하길 바랍니다. 그 이상의 기대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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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태동

경제 2013. 2. 14. 19:07 Posted by 해양장미


 과거 조선의 상업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현대 한국인의 입장에서 꽤나 심각한 불운이다. 상업은 기본적으로 도전정신과 창의성이 필요하다. 누군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확천금을 꿈꾸며 허풍을 치고, 가족의 품에서 떠나 상선을 몰고 출항을 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당시만 해도 악덕으로 취급받던 - 지금도 많은 좌파들은 악덕으로 취급하는 - 금융업종에 뛰어들던 유태인들의 후원 하에서 르네상스가 탄생했고, 근대가 태어났다.


 근현대적 자유의 탄생은 그야말로 근현대적인 사건이었다. 자연적인, 사람 대 사람의 유대관계가 강한 소규모 공동체에서 개개인이 누리는 ‘자유’는 근현대적인 자유라 하기는 어렵다. 자연 상태에서의 자유는, 그 집단이 가진 원시적 능력과 관습 안에 종속된다. 누구나 ‘원시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열대 지역 주민들이 가진 것과 같은 자유다.


 그러나 도시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다. 그러기 위해선 도시의 역사적인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아시아에서 도시는 자치권을 가진 적이 딱히 없지만, 유럽의 경우엔 이야기가 달랐다. 도시의 전통을 이해하려면 엘라다(그리스)의 고대 민주주의 시대부터 봐야 하지만, 중세부터 이야기해도 본문의 맥락에서는 충분할 거라 생각한다.


 서로마의 멸망과 게르만 족의 이동 이후, 중세의 도시는 10세기경부터 봉건 세력에 대항하는 동맹체의 기능을 수행했다. 또한 도시는 상공업자와 장인들의 집합소였으며, 시민들은 기본적으로 각 영주의 장원에 속하지 않는 자유인들이었다. 돈을 모은 상인들은 영주에게 토지를 구매해 자치도시를 세우곤 하였다. 이런 자치권을 행사하는 도시는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도시로 도망 온 농노들은 1년 1일 동안 잡히지 않으면 농노의 신분에서 해방되는 것이 그것이었다. 농노들에게 당연히 도시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민’이라는 단어에는 복잡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중국의 경우 정치적인 통일 세력이 되는 것을 오랜 기간 강하게 추구했던 반면, 유럽은 보다 느슨한 종교적 연대로 묶여 있었다. 크리스트교와 교황의 존재는 이슬람 세력을 타자로 하여, 정치적인 통일 없이도 그들을 연대하고 경쟁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동아시아인들이 혈통의 정통성을 보는 동안 유럽인들은 개인적인 능력과 신의 뜻을 보았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게 유럽은 결코 동아시아보다 우월했던 곳이 아니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동아시아는 유럽보다 잘살았었다. 일례로 초기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민중이 살기 좋은’ 나라에 가까웠다. 초기 조선같이 노비도 거의 굶지 않을 수 있는 지역은 지극히 드물었다. 세율도 파격적으로 낮았다. 같은 시대 평균적인 유럽인들의 생활 수준은 조선인들에 비하면 정말 참담하였다.


 근본적으로 유럽인들이 끊임없이 무언가에 도전해야 했던 이유는 그들이 가난했고 먹을 게 없어서였다. 태평성대와 덕치를 추구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유교식 전통은 상당히 오랜 세월동안 동아시아를 잘 먹고 잘 사는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물론 기후와 토지라는 식생의 차이와 기술적 차이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중세 이후 근 500년간 아시아는 유럽보다 따뜻했는데, 이 기간은 동아시아가 가장 번영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또한 동아시아는 유럽에 비해 오랜 기간 더 뛰어난 농업과 의학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제공하는 조직과 체제는 유럽이 우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유럽인에게는 해방의 출구가 있었다. 시민이 가질 수 있는 자유를 위해 농노들은 목숨을 걸고 장원을 탈출할 수 있었고, 시민들은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해 먼 바다로 나가는 위험한 배를 탈 수 있었다. 항해자들에게 안전은 없었지만, 꿈은 있었다. 그런 가능성은 동아시아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근대적인 자유가 싹텄다. 개개인에게 자유는 결코 편한 것만은 아니다. 민중들은 적당한 지배와 안락함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한국만 봐도 더 많은 자유를 민중이 스스로 거부하곤 한다. 특히 타인의 자유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유럽인들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필요했다. 미지를 향해 나아가면서 그들은 신의 이름을 빌어 용기를 얻었다. 유럽인들이 지구에 있는 세 대양을 건널 때, 동아시아인들은 나라의 문을 굳게 닫고 그 안에서만 싸우고 있었다. ‘안에서만’싸우려 드는 성향은 지금 한국인들도 거의 똑같다. 그러나 현재 한국이 그럭저럭 잘 나가는 이유는 결국 바깥으로 진출하는 도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일수록 더 밖으로 나가려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편으로 역사 속에서 ‘왕’은 꽤나 절대적인 이미지를 가지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특히 유럽사에서 절대적인 왕권의 등장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었다. 이는 동아시아 등의 타 지역보다 훨씬 늦은 등장이라 할 수 있다. 16~17세기에 들어서야 유럽에는 전제 왕권이 등장한다. 강력한 왕의 등장은 근대적 국가의 기틀을 만들었고, 교황청의 개입에서 국가를 독립시켰다. 중세가 끝난 것이다. 이 시대 이전 유럽에서 국가의 개념은 근현대의 그것과는 꽤 달랐다.


 그리고 이와 함께 중상주의가 시작되었다. 이 중상주의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대한민국이 대표적인 현대적 중상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시민들은 이 중상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 이것은 소위 민주화 세력의 무능함과 소위 보수세력의 사악함이 합쳐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어쨌든 현재의 한국은 ‘자유주의 국가로의 첫 발을 내딛는데 무진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상주의 국가’쯤 되겠다. 그렇다면 중상주의란 뭘까?


 ‘중상주의자는 국가의 안보를 지키고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라고 간주한다.’[각주:1]


 어디서 굉장히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사실 한국의 소위 ‘보수세력’은 정확히 저 아이덴티티다. 한국의 보수세력을 신자유주의 세력이니, 수꼴이니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정확하지 못하다. 소위 진보좌파세력이 좀 더 똑똑했더라면, 그들은 중상주의를 먼저 떠올렸어야 한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그저 먼 옛날 유럽에 많았던 중상주의자일 뿐이다. 당연히 이들은 자유주의자라 스스로를 칭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


 역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전제 왕권과 함께하던 중상주의 시대에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들은 개혁세력으로의 절대군주에 기대를 걸곤 했다. 그러나 중상주의로 인해 축적된 부는 대체로 자유주의의 발달을 촉진한다. 더 많은 부는 더 많은 권리이고, 더 많은 권리를 지닌 사람이 많아질수록 군주에 대한 각종 압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자유민주주의 혁명’은 발달한 자유주의가 공화정의 부활을 이끌어내는 주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규범과 법, 그리고 기존의 세계관을 뒤엎을 수 있는 의식적 자유의 성장 없이는 시민들 스스로 군주에게 자치권을 빼앗을 수 없다.


 한편으로 한국의 민주화는 워낙 전통이 없었기에 모든 것이 꽤 압축되어 일어났다. 제도는 시작부터 이식되었지만,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진 건 1987년이었다. 군사정권의 중상주의가 성공적이었고, 그로 인해 부가 축적되면서 사회의 각종 요구가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유럽의 민주화가 ‘기존의 규범을 파괴하고, 새로운 규범을 세우는’ 일이었던 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식받은 것이었기에 그것 자체가 새로운 규범이었다.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자유를 달라!’고 외치면서 민주화를 이룩했다기보다는 민주주의를 규범으로 각인시켜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그러다보니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아직도 선거 때마다 윤리성을 소리 높여 외친다. ‘저쪽은 나쁜 년놈입니다!’ 그리고는 자주 진다.


 그러나 민주화 세력은 두 번의 정권, 10년 동안 집권을 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실제로 많은 자유를 늘렸다. 그 시기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근현대적 자유가 태동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어린 자유는 그 탄생 과정이 워낙에 비극적이었기에 매우 위험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로 인한 비극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는 소중하다.


 시민들은 이제 윤리성보다는 나에게 뭔가 해줄 것 같은 사람들을 뽑기 시작했다. 전근대적 공동체는 빠르게 붕괴되어가는 중이고, 제도로 정착된 민주주의가 새로운 자유를 창출하고 있다. 다만 아직 민주화 세력은 그들이 불러온 민주주의 제도를 이해하지는 데 실패 중인 것 같고, 이에 많은 시민들은 그들을 대표할 만한 진정한 지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당선은 늘어난 자유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자유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자들 또한 늘어나고 있다.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할 때, 여기엔 좌우의 구분이 없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사실 이름만 그렇게 붙이지 않을 뿐 이념적으로는 중상주의, 그것도 근대적인 군사주의를 접목한 근대적 중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들은 가능한 한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자 시도하며, 자유가 불러오는 무질서함을 두려워한다. 이 연장선상에서 이들에게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과, 과거의 질서로 회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혼재되어 있다.


 대조적으로 민주화 세력은 사분오열 상태이지만, 그 중 가장 긍정적인 가능성을 지닌 세력은 근래 들어 규범적이고도 느슨한 공동체의 부활을 꿈꾸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유가 내포하는 필연적인 ‘힘’, 즉 고삐가 풀린 자본이 만들어내는 폭력의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다만 문제는 한국에 자유주의의 역사가 지나치게 없었다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주의적인 발상들은 자유주의의 부정적인 면이 극단화된 상황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후 사회주의 중 가장 큰 세력을 지녔던 공산주의는 멸종했고, 기존 자유주의에 사회주의적인 발상을 일부 섞은 것만이 긍정적인 결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엔 애초에 자유주의적인 전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소위 사회자유주의[각주:2]를 바로 만들려 하는 시도는 실패하기 쉽다. 제도는 이식할 수 있지만, 정신은 이식할 수 없다. 사회자유주의 같은 건 제도보다는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자유가 더 억압받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으로 비춰지거나, 실제의 정치적 행위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자칭 진보주의자가 도덕과 공동체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는 것은 사실 비극적 넌센스다. 그런 것을 보수주의자의 몫이다. 참여정부 및 깨시민의 개혁이 실패한 근본적인 주된 원인은 그들의 지적 빈곤함이었다. 그들은 진보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 아직도 자칭 깨시민들은 넷우익 못지않게 보수적이다. 오히려 보통 시민들이 그들보다 진보적 자유의 성장이 빠르다.


 자유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더 많은 자유가 언제나 항상 더 많은 부유함을 만들어냈다. 자유로운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발전하고, 더 건강한 심신을 지니며 더 많은 창의성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1. 참조 링크.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04&contents_id=5110 [본문으로]
  2. 참조 링크. http://ko.wikipedia.org/wiki/%EC%82%AC%ED%9A%8C%EC%9E%90%EC%9C%A0%EC%A3%BC%EC%9D%9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