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핏하면 민주주의를 외치는 깨시민들이 실제로는 반민주주의자라는 이야기는 지난 포스트, ‘마지막 남은 샛노란 맹신자들의 횡포에 대하여’등의 포스트에서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던 적은 없는 것 같아서, 이번 포스트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려 한다.
우선 역시나 지난 포스트, ‘흔한 오해 중 하나 - 민주주의는 정의인가?’ 에서 이야기했듯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없이 민주주의를 아무 데나 가져다붙이는 게 깨시민들의 첫 번째 문제다.
이런 오해가 나오는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주권과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대체로 깨시민들은 시민이 좀 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SNS를 통한 소통을 강조하고 모바일 투표와 여론조사를 통해 당내 후보자를 선출하는 등의 행동도 이런 발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가, 이렇게 되면 될수록 1인 1표제를 중심으로 하는 보통선거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데 있다. 즉 행동을 하는 시민들이 정치에 깊이 개입하려 하면 할수록 목소리 큰 일부 사람들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된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대체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정말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그 정도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게 불가능하다. 또한 보다 온건하고 덜 과격한 사람들은 더 과격한 사람들에 밀리기 쉽다. 깨시민들이 전투적이고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비아냥거리는 경향이 강해진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또 문제가 많은 게, 보통 시민들이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시간적/인지적 한계가 분명하다는 데 있다. 즉 시민들이 더 개입하면 개입하려 할수록, 보다 심도 있고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여지는 낮아진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당 내에서 한 번 거르는 시스템이 사라지고, 깨시민이 개입해 깨시민에게 인기를 끄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기 쉽다. 민주주의 자체가 중우정치화될 위험성이 있는데, 소위 깨시민들에 의해 보다 급격한 중우정치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를 일으키는 이런 깨시민들의 의식 또한 사실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않다. 그들의 성향을 보면 유교적 도덕주의 및 철인정치론을 내세울 때가 많다. 실제 예를 들면, 그들은 ‘각자의 이익’의 집합으로 나타나는 민주주의의 성향과, 이익과 인기를 위해 애쓰는 정치인들을 비난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사실 플라톤 등 민주주의에 대한 각종 비판자들의 관점과 거의 일치한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플라톤이 주장했던 철인정치는 당시 민주정의 단점을 극복해보고자 나온 것이었다. 민주정의 탄생부터 문제제기까지 플라톤의 주장은 분명 옳다. 다만 그의 문제 해결을 위한 주장은 현실과 크게 어긋난 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1
플라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이상 현실 속에서 실행되었던 국가는 서구보다는 동아시아에 많았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초기 조선을 본다면, 일정 이상 이상사회에 가깝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실제 역사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대체로 민주정을 고수한 쪽이었다. 한반도만 봐도 플라톤의 방식에 더 가까운 국가는 이쪽보다는 북조선이라 볼 수도 있다.
깨시민들은 역사적 사실들에 무지하지는 않다. 그렇다보니 그들은 곧잘 모순되는 주장을 한다. 민주주의를 찬양하고, 더 민주주의를 늘려야겠다고 말하면서도 생각하는 방식은 철인정치 및 유교식 도덕주의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신한국-한나라-새누리당이 무언가를 하는 데 대해 반대를 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기엔 그들의 정치철학적 기반이 사상누각이기 때문이다. 친노 정치인에 대해 맹신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또한 다 이유가 있다. 철인정치론에선 본래 통치계급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고, 깨시민들이 인정하는 통치계급이 친노세력인 거다. 물론 더 이성적인 이야기를 하기엔 그들은 너무 어리석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민주주의는 단점도 많고 부작용도 항상 있는 체제다. 결코 절대선이 아니고, 윤리적인 체제도 아니다. 태생부터 민주주의라는 것은 기존 질서를 전복하면서 등장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기존 도덕/윤리/질서를 뒤엎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현실적으로 민주주의는 시민의 선택을 받아야 하기에 정치인들은 시민의 인기를 얻어야 하고, 달콤한 거짓말을 해야 하며 잘 작동하지 않을 경우 매번 근시안적인 정책이 발생하기 쉽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각종 태생적인 문제점들을 충분히 스스로 잘 해결할 수 있는 제도라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철인정치를 주장한다면 민주주의라는 말을 앞세우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옳다. 이미 1987년부터 민주주의 제대로 하고 있는 데 26년째 자꾸 아직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공감을 얻기 어렵기도 하고.
민주주의에서 ‘도덕’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이익과 이미지가 민주주의의 양대 힘이고 도덕은 이 중 이미지를 구성하는 한 요인일 뿐이다. 실제 시민들은 누군가가 도덕적인지 판단하기가 어렵고, 정치인의 도덕성이 각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너무나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현대 사회의 특징 상 일반도덕은 정치적 일면에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깨시민들의 배타적이고도 광신적인 자세는 도덕주의의 본질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신하는 이들은 지극히 위험하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무시하고 집단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치닫기 쉬우며, 대단히 폭력적인 모습을 취하곤 한다.
한국에 윤리와 신뢰가 부족한 것은 도덕주의가 없어서가 아니다. 도덕주의의 과잉은 대체로 역설적인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배려, 열린 마음, 온정, 관용, 내가 틀렸을지 모른다는 여유가 실제로 사회를 더 윤리적이고 믿을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도덕주의자들에게는 저런 게 심히 부족하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깨시민들은 나이 어린 꼰대이자 타자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배타적 괴물이 되어 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도덕은 스스로에 대한 것이고, 도덕주의는 남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나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게 좋은 것이다. 도덕적인 깨시민들이 반민주적인 것은 당연하며, 선거에서 매번 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은 매번 공분을 일으키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깨시민보다 훨씬 성격이 좋기 때문에 그런 공분에 동감하지 않는다. 나와 같이 화내! 화내지 않으면 너는 악이야! 라고 말하는 그들을 보통 사람들은 ‘뭐 그렇게까지 화를 내야하냐?’, ‘미쳤구먼.’ 정도로 생각한다. 원래 사람들은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에 화를 잘 내고, 남 일에는 화를 잘 안 내는 게 정상이다. 물론 실제 동정심과 공분 심리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히려 동정심이 부족한 건 깨시민 쪽이다.
- 플라톤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 또한 민주주의와 관련이 깊다. 소크라테스 또한 플라톤처럼 반민주주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 선고된 것은 그가 민주주의를 비판했기 때문이었고, 사실 사형판결 또한 그에게 겁을 주고 쫓아내기 위함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거기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는 식으로 (이걸 직접 말하진 않았다) 죽음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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