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리즘과 유관순 코스프레에 대한 사견

사회 2011. 6. 13. 00:07 Posted by 해양장미

 

 평소 유관순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 나올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시대가 그랬으니까 그랬지. 요즘 시대에 유관순이 태어났다면 전설적인 운동권이 되었을 거야.’


 우리는 진실로 유관순을 추모해 왔는가? 그렇게 ‘저항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해 관용을 가질 수 있는가? 유관순의 경우 그 대상은 스스로 망해버린 조국이었다. 그녀가 단순한 내셔널리스트였는지 아니면 소셜한 억압에 대한 저항인이었는지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가혹한 억압 앞에서 더욱 강해지는 인간. - 소위 굽힐 줄 모르는 독종 - 이었음에는 분명하다. 어디에나 그런 사람은 있다.


 내셔널리즘은 유관순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헤로인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유사시 ‘너’‘우리’를 위해 처참하게 죽어갈 수도 있어야 한다.”


 사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애정과 인식에 도움이 되는 교육 방식이 아니다. 그보다는 ‘충성하라.’ 라는 국가주의적이고도 군사주의적인 억압에 가깝다. 그러나 조선이 민중의 충성심이 모자라기에 망했던 국가였던가. 그리고 한국은 어떻게 광복되어 건국되었던가.


 누군가 유관순을 그런 식으로 코스프레했을 때, 그것은 천상의 영웅을 웃기는 대지, 즉 희화화된 현실로 끌어내는 행위이다. 죽은 자는 할로윈 파티에서 죽은 자에 불과하다. 영웅적인 죽음을 경배한다면, 모든 사망자는 파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귀신은 원한에 맺혀 있어야 하고, 민족적인 문화병인 화병은 유지될 가치가 있다. 해학은 버려야 하지만 한은 숭고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영웅적인 죽음을 경배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안중근도 유관순도 영웅은 아니다.


노동 운동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가? 아니면 광주에서 억울하게 학살되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유관순보다 덜 숭고하게 죽어갔을까? 사실 나는 죽음에서 어떠한 숭고함도 발견하고 싶지가 않다. 숭고함은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자 행위이다. 살아 있는 나는 아무에게도 희생을 요구할 생각이 없다. 희생을 숭고해하는 감정이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 수 있다. 희생자는 나에겐 영웅이라기보다는 동정의 대상이다. 그리고 희생 없는 진보가 가장 이상적이다. 또한 안타까워하기에 더욱 적합한 대상은 조선의 망국적 행위들과 그 분위기이지, 독립 운동가들이 아니다. 독립 운동가들이 추모받기 위해, 영웅이 되기 위해 싸웠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시대에도 한국의 내셔널리즘은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셔널리즘이 한국을 보다 좋은 국가로 만들어주는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하기 어렵다. 모든 내셔널리즘은 파시즘과 맞닿아있고, 부덕함과 비윤리성과 인민에 대한 억압을 함께 가지고 있다.


 내가 원하는 국가는 영웅을 희화화했다고 철퇴를 내리치는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 내 민족들꽃이 아닌 칼을 들고 있지 않은가. 인식 속의 유관순은 소녀가 아닌, 소녀의 육체 속에 깃든 장군이자 [우리네] - (우리가 가진) - 처자가 처참하게 당했다! 라는 민족적 분노의 촉매, 동시에 선대의 할머니가 아닌 영원한 누나가 아닌가.